린든빌 마을-8
“인간···. 흡!”
크랄트는 단우가 조용히 하라는 동작을 취하자 반사적으로 소리내는 것을 멈추었다. 잡화점에서 끊임없이 독 발린 천을 물렸던 것이 학습되었던 까닭이었다.
“대답만 잘해주면 중독은 치료해 주마. 이대로 오크들에게 치료받는 걸 원하지는 않지?”
단우는 크랄트가 오크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뒤따라왔기 때문에 그가 치료받는 걸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처가 아프다는 오크의 팔을 잘라내었다는 것으로 보아 봉와직염에 대한 치료가 어려울 정도로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끄덕끄덕
“벨라, 그러니까 너를 지키던 여자는 어떻게 되었지?”
“여자! 멍청하게 불을 끄지 않았다. 엉뚱한 곳에 불이 밝혀진 걸 보고 순찰조가 들어왔다. 그 여자 너가 나간 곳으로 도망갔다.”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 같지는 않았고?”
“묶여 있어서 모른다. 내가 본건 도망가는 게 마지막이다. 정말이다.”
단우는 크랄트의 표정을 살폈다. 칼리그의 위치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하던 오크였다. 그가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표정을 보아 정말 모르는 듯 했다.
“해독”
“오오··· 크랄트 이제 안 아프다. 인간 약속 지킨다. 착한 인간이다.”
단우는 크랄트를 해독해주고 다시 벨라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크랄트가 생각보다 자신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반응을 보였다.
생각해보면 크랄트를 중독시킨 것은 단우인데 그걸 치료해 줬다는 것만으로 그를 착한 인간으로 표현하는 걸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저기 크랄트. 생각을 해보자. 잡화점에서 불의의 사고로 네가 중독되었지?”
“불의? 불의가 뭐냐. 크랄트 중독됐다. 인간이 입에물린 천 때문에 중독됐다.”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는 거지. 우리는 너를 중독시키려는 생각이 없었어. 더구나 중독시킨 건 나고 벨라는 너에게 맛있는 물을 주기만 했잖아?”
“맞다 인간 여자. 나를 풀어주지 않았지만 맛있는 물 계속 먹여줬다. 착한 여자다.”
“거기다 이제는 내가 돌아와서 네가 오크들에게 치료받지 않을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고”
“그렇다. 인간 남자가 크랄트 구했다. 생명의 은인이다.”
단우는 그저 자신들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설득하려던 것인데 갑자기 자신을 생명의 은인이라 말하는 크랄트 때문에 오히려 잠깐 당황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의 단순한 사고방식이 자신을 도울 수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네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크악··· 싫다. 칼리그의 위치는 말할 수 없다. 크랄트는 배신 안 한다.”
도움을 청하는 단우의 말에 크랄트는 잡화점에서 단우가 칼리그의 위치를 물었던 것이 생각 났는지 돌연 적대감을 드러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단우에게 칼리그의 위치를 알려주었지만 깨닫지는 못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칼리그의 위치를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오크들을 배신하라는 게 아냐. 벨라가 무사한지만 확인하려는 거야. 너도 벨라가 죽는걸 바라는건 아니잖아.”
“벨라 죽냐? 안 된다. 벨라 크랄트한테 맛있는 물 줬다. 벨라 구할거다.”
단우는 크랄트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하기 전에 갑자기 벨라를 구하고 싶어 불타오르는 크랄트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이쪽은 이미 내가 몇바퀴나 돌고 있다. 여기서 부턴 우리가 계속 찾아볼 테니 너희들도 왔던 방향을 다시 찾아봐라.”
“크랄트? 아프다던데 벌써 나았냐?”
“내가 누구냐! 높은나무부족의 위대한 전사 크랄트다. 독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
“하긴 너처럼 멍청하면 독도 이겨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부럽다. 어떡하면 너만큼 멍청할 수 있는지”
“이런 건 타고나는 거다. 위대하신 어머니의 뜻인거다.”
단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화가 오고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멍청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쓰는 모양이었다.
조선과 율도는 학문을 익히고 정신을 수양하는 것을 큰 덕목으로 여겼고 무관이라 하더라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에 단우가 오크를 이해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학문을 익히면 몸이 약해진다는 미신은 로디니아 전역에 꽤나 깊게 퍼졌던 것이었다. 몇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사들조차 학문을 익히는 것을 꺼려했다.
물론 전쟁이 잦아들고 많은 기사들이 각자의 영지를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미신은 많이 사라져서 지금은 문무를 겸비한 자들이 많아졌지만 아직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오크들은 그걸 떨쳐내지 못했다.
“후우··· 이쪽으로 오는 오크들은 모두 돌려 보냈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되냐?”
“지금까지 순찰조를 돌려보낸 곳들 기억할 수 있겠어?”
“쿠헤헤 나를 뭘로 보는거냐”
단우의 계획은 어찌보면 단순했다. 오크들의 수색이 제대로 된 구획을 나누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용해 벨라가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은 잡화점 주변의 순찰조를 모두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벨라의 활동구역만 넓혀준다면 벨라가 마을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힐 수 있었다. 단우는 크랄트에게 주변의 순찰조를 계속해서 돌려보내게 한 뒤 자신은 계속해서 벨라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다행히 크랄트는 단우가 설정한 범위를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크랄트를 두고 이동하려는 단우에게 들려온 뒷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당연히 모른다. 그런걸 어떻게 기억하냐. 원래 이런 건 일주일은 봐야 기억하는거다. 크랄트는 그런 똑똑해빠진 놈들이랑은 다르다. 한달은 봐야한다.”
“휴우···”
단우는 눈 앞의 멍청한 오크 때문에 머리가 아파왔지만 당연히 크랄트의 멍청함을 상정하고 계획을 짰기 때문에 적절한 대책을 바로 제시할 수 있었다.
“잘 봐. 저기 저 동그란 굴뚝 보이지. 맛있는 물이 있는 곳은 어딘지 알잖아. 거기서 보면 저런 모양의 굴뚝이 딱 4개 보일 거야. 길을 모르겠으면 맛있는 물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동그란 굴뚝을 향해 움직이는 거야. 이건 할 수 있겠지?”
“동그란 굴뚝 기억한다. 동그란 굴뚝만 찾으면 된다.”
“그래 그거야. 너는 수색이 멈출 때까지 동그란 굴뚝으로 다가오는 오크들을 돌려보내줘. 그래야 벨라가 살 수 있어.”
“알겠다. 크랄트 오크들 모두 돌려보내주겠다. 걱정하지마라”
단우는 당연히 크랄트가 못 미더웠지만 지금 그에게 부탁 할 수 있는 것은 이게 최선이었다. 단우는 크랄트에게 다시한번 둥근 굴뚝에 대해 당부하고는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이제 혹시 마을 어딘가에 숨어있을 지도 모를 벨라를 찾아내는 것만 남았다. 가장 최선은 이미 벨라가 마을을 빠져나갔을 확률이었지만 브란이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고 있어 벨라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둥근 굴뚝. 보인다. 크랄트 둥근 굴뚝으로 오는 순찰조를 돌려보낸다.”
단우가 사라지자 크랄트는 곧바로 둥근 굴뚝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랄트가 찾은 둥근 굴뚝은 단우가 말한 굴뚝이 아니엇다. 크랄트가 단우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면 잡화점으로 돌아가 둥근굴뚝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크랄트는 이미 둥근굴뚝 집에 도착한 상태에서 또다른 둥근굴뚝을 찾고 있었다. 다행히 크랄트가 찾아낸 방향은 단우가 계획한 구역에 속하는 곳이었지만 어쩐지 크랄트의 순찰조 돌려보내기 작전은 처음부터 이상한 방향을 향해가고 있었다.
“후우··· 이미 마을을 빠져나간건가?”
상황이 수월하지 않은 것은 단우 쪽도 마찬가지였다. 소리내어 벨라를 부를수도 없는데다 주변에 은신술을 사용하면 벨라도 자신을 발견할 수 없을 테니 오크들이 보이기 전까지는 무방비상태로 벨라를 찾아다녀야했다.
그러다 미처 오크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면 안되기 때문에 한껏 긴장한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아야 했다.
더구나 벨라와 길이 어긋났을 가능성 때문에 한번 확인했던 곳까지도 다시 한번 돌아보는 통에 전투 한 번 없었는데도 조금씩 기진맥진해져가고 있었다.
“한바퀴만 더 돌아보자”
단우는 어느새 마을 중심부에 가까워진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잡화점 방향으로 돌아서려 했다. 마을 어디에나 벨라가 숨어있을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벨라가 일부러 마을 안쪽이나 성쪽을 향했을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단우의 예상과는 달리 마을 중심부가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잡화점과는 정 반대 방향이엇다.
“아악!”
오크들은 오랜시간 수색끝에 발견한 인간을 무릎 꿇렸다. 팔다리가 묶여 오크들 앞에 끌려온 이는 벨라였다. 벨라는 잡화점으론 오크들을 피해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단우의 예상처럼 마을을 빠져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 오크들이 단체로 그녀를 찾고 있지도 않았고 날은 어두웠으며 이미 빠져나갈 루트도 계획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을을 빠져나가는 것을 택하지 않았다.
그녀가 마을을 빠져나가기로 한 것은 자정이 되어도 단우가 돌아오지 않을 때였다.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단우는 자신이 오크에게 발각되어 오크들이 인간을 찾아다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단우가 강하다고는 하나 예상치 못한 오크들의 집단행동을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 것은 자신이 잡화점을 밝혀놓은 불씨하나 때문이었다. 벨라는 단우가 성으로 향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단우에게 조금이라도 상황을 알리기 위해 오크들을 피해가며 조금씩 성을 향해 갔지만 이렇게 많은 오크들의 수색을 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크들이 수색이 불규칙적인 것은 빈틈이 많이 생기는 방식이었지만 그만큼 예측이 어렵다는 말이기도 했다. 벨라가 어찌어찌 마을 중심부를 지나 성 방향의 골목에 몸을 숨겼을 때 그녀는 양쪽에서 자신을 향해 오는 순찰조를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러면 눈치를 채겠지.”
벨라도 자신이 많은 오크들의 눈을 온전히 피해가며 단우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적은 오히려 더 많은 오크들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오크들이 이정도의 움직임을 보인다면 단우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어차피 단우를 따라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한번 정도 죽는 것은 각오한 상태였다. 그녀는 별다른 반항없이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크들은 그녀를 데려온 이후로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채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간 여자가 크랄트를 병걸리게 했다.”
“마녀다. 마녀가 따라온거다. 이제 산맥도 모자라서 여기서까지 우리를 죽이려 하는거다”
“하지만 마녀는 정령들을 끌고 다닌다. 마녀가 이렇게 쉽게 잡힐리 없다.”
벨라는 오크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크랄트가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오크들은 분명 산맥에서 마녀라는 존재에게 쫓겨 마을로 내려온 거라고 했다. 순간 벨라의 머리속에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못할 짓이 없었다.
“아하하하하하··· 네 녀석들이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정령들이 두렵지 않은가 봐? 길을 비켜라. 내 앞을 막아서는 오크들은 병에 걸려 죽어갈 것이야.”
벨라는 자신이 상상하는 마녀를 떠올리며 오크들을 협박했다. 인간들이 봤다면 어색하기 짝이없는 연기였지만 미친 것 같은 웃음소리에 저주를 내리는 그녀의 모습은 오크들을 두렵게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벨라는 조심스레 일어나 오크들을 향해 한걸음을 내딛었다. 오크들은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진 그녀를 저지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조금씩 물러나거라.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특별히 너희들은 살려주마. 너희들도 정령들에게 죽어나가는 오크들을 봤겠지? 너희들도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아악!”
딱
벨라는 점점 더 오크들의 공포심을 자극하며 마을 바깥쪽으로 빠저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뒷통수에 가해진 충격 때문에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벨라에게 돌을 던진 것은 인간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을 나왔던 어린 오크였다. 물론 오크들의 성장력은 인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어리다고 해도 돌을 던지는 힘은 굉장했다.
“이··· 마녀야 네 맘대로 해봐라. 너 때문에 친구들이 모두 죽었다. 나도 한 번 죽여봐라”
딱
“그··· 그래! 이 못된 마녀야. 어디 한번 해봐라. 높은 나무 부족은 친구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오크들의 공포를 상기시켜 마을을 빠져나가려는 벨라의 계획은 꽤 괜찮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크들이 마녀에게 공포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오크들은 마녀가 두려운 만큼 마녀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런 오크들에게 죽어간 동족을 떠올리게 하는 것만큼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마녀를 죽여라. 저주 따위 마녀만 죽이면 이겨낼 수 있다. 불도 지펴라 마녀는 태워죽여야 한다.”
딱 딱···
벨라는 점점 더 많이 날아오는 돌덩이에 생명력이 깎여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벨라를 더 무너지게 하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오크들의 눈빛이었다. 로디니아는 게임이었고 자신은 진짜 마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온갖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돌을 던저대는 오크들을 마주하는 것은 벨라가 견딜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벨라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찾아온 원초적인 공포에 대한 반응이었다.
“단우 씨··· 흐윽···”
벨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단우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통한 것일까. 벨라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을 느꼈다.
모두가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두려운 상황속에 차디찬 자신의 볼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두려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켰다.
“왜 울고 있어요. 걱정말아요. 저 왔어요”
벨라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감싸주고 있는 이를 확인했다. 자신의 눈물을 닦으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돌을 대신 맞아주고 있는 것은 단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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