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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럼블 님의 서재입니다.

마왕 살해자가 될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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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럼블
작품등록일 :
2020.04.04 01:43
최근연재일 :
2020.05.08 20:52
연재수 :
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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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4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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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1,467

작성
20.04.0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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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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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1.공녀, 리메르-(1)

DUMMY

(1)


“리리, 내 말 듣고 있어?”


시르가 리메르 앞에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눈에 힘을 줬다. 어제 새벽에 발작하듯 일어나 한 숨도 못 잤던 리메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하품을 했다. 시르가 퀭한 눈을 연신 꾹꾹 누르는 리메르를 걱정스레 응시했다.


“괜찮아?”

“미안. 어제 잠을 좀 못 자서.”

“왜 하필 오늘? 아, 혹시 너무 긴장해서 못 잔거야?”


나도 그랬어! 시르가 씩 웃으며 옆구리를 쿡 찔렀다. 시르 말대로 어제 잠들기 전까지 긴장으로 잠을 못 이뤘던 리메르가 긍정의 뜻으로 하하, 웃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


아직 하루도 안 된 일이었지만 실제로 그랬다.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절대 같은 행동을 할 수도,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푸르기만 한 하늘을 쏘아보며 주신 욕을 한 바가지 하던 리메르가 제 손에 들린 장난감용 검을 내려다보았다.


“네이디르 델리상트···.”

“맞아. 넌 오늘 네이디르 델리상트 공작님이야. 프러포즈 멋지게 해야한다구.”


저와 같이 멋드러진 아카데미 정복을 차려 입고 붉은 가발을 쓴 시르가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저건 만국 공통이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던 리메르가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이전 팀의 연극이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리메르는 마지막으로 무대 앞쪽을 바라보았다가 걱정 어린 황금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얼굴과 머리카락을 다 가리는 모자를 쓰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옷을 입었음에도 엄마, 시아는 누구보다 빛났다.


쨍그랑-


‘엄마, 괜찮아?’

‘어? 아니··· 응. 괜찮아. 근데 리리, 무슨··· 뭘 한다고 그랬니?’

‘이번 축제 때 연극 대회를 한다 길래 애들이랑 ‘델리상트의 연인’ 연극하기로 했는데······ 왜? 하지 말까?’

‘하필 그걸······. 리리, 혹시 다른 이야기로 하면 안 돼?’

‘어어? 이미 준비 들어가서 조금 힘든데······ 이제라도 그만 한다고 할까?’

‘응? 아냐, 아냐.’


지금부터 한 달 전, 리메르는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게ㅡ라고 말하면서도 온 몸으로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엄마는 그때 리메르를 말리는 대신 꽉 안아주며, ‘얼굴을 많이 가릴 수 있는 모자 착용과 무대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지 말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에드쉬를 주워 오던 날 얼핏 느꼈던 기시감을 느낀 리메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 시장에 혼자 갔다고 했던 날도, 다른 지역으로 놀러갔다 왔다고 했을 때도 엄마는 항상 불안해했다. 다른 지역으로 갔다 온 다음날부터 한동안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을 정도로. 이는 어린 여자아이를 자식으로 두고 있는 부모의 걱정이라고 하기에는 과한 감이 있었다.


‘우리 딸은 누굴 닮아서 이렇게 활발한지 모르겠네. 어릴 때 많은 것을 경험해보렴. 대신에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녀야 해.’


비록 며칠 사이에 생기를 잃은 자신을 보고 외출 금지를 풀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힘들어 보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제 머리 위에 모자를 씌워주던 그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꾸욱. 남들보다 선천적으로 눈이 좋았던 리메르는 헤르시아가 두 손을 강하게 마주잡는 것을 보고 보란듯이 모자를 꾹 눌러썼다. 아마 지금쯤 한결 편안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겠지.


리메르는 마지막으로 관객석 쪽을 훑고는 미련 없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


**


델리상트의 연인은 델리상트 공작가의 사라진 부부에 대한 실제 이야기라고 했다. 델리상트 공작부인과 레디알 후작 부인은 옆 제국에서 제국의 아카데미로 교환학생을 왔던 백작 영애, 후작 영애로, 이 둘은 아카데미 내에서 델리상트 소공작과 2공자를 선,후배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먼저 결혼한 것은 델리상트 소공작과 볼테르 백작 영애였다. 하지만 둘의 결혼생활은 1년을 채 가지 못하고 ‘실종’이라는 비극으로 끝을 맺게 된다.


세간에 전해지기로는 마탑주인 전 델리상트 공작 부인과 부 마탑주인 전 델리상트 공작은 아직도 이 부부를 찾기 위해 세상을 떠돌고 있다고 한다. 사교계에서는 10년째 공작자리를 공석으로 지키는 델리상트 2공자, 레디알 후작을 멍청하다고 욕하지만, 레디알 후작은 단 한번도 이를 언급한 적이 없다. 그와 후작 부인은 그저, 공작가를 지키며 두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직도 많은 이들 입에서 오르내리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아직 현재진행형이며 발 없는 말이 대륙을 오간다는 말을 믿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델리상트 공작의 사랑이 매우 지극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제 4막이 올라가기 전, 무대 앞에서 천천히 심호흡을 하던 리메르가 제 손에 들려 있는 꽃다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와 씨···! 내가 할 수 있을까.”


곁에 서 있던 리나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생긋 웃었다.


“리리. 예쁜 말 써야지.”

“그치만, 리나아아······.”


리메르가 눈꼬리를 쭉 끌어내렸다. 잔뜩 울상인 그 얼굴이 강아지같다고 생각하며 리나가 제복을 근사하게 차려 입은 리메르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어제처럼만 하면 돼. 완전 멋진 공작님이었는걸?”


귀엽기도 했고. 꺄르르 웃는 리나 옆에 다가와 있던 디안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리메르는 대충 셔츠를 걸치기만 했는데도 빛이 나는 디안을 위아래로 쭉 훑고 어깨를 꾸욱 눌러 잡았다.


“디안 오빠······! 이제라도 늦지 않은 것 같아. 오빠가 하는 게 어떨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역시 그냥 지나가는 행인1,2로 리나와 디안 오빠를 썩히기에는 아까운 것 같아서 그래! 아니 가면이 웬 말이냐고.”


갑자기 매달려오는 힘에 놀란 디안이 잠시 굳어있다가, 침착한 얼굴로 작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신나서 했잖아. 그리고 우리 둘은 얼굴을 드러내고 무대에 올라가면 안 돼.”

“아, 어느 가문인지 말도 안해주면서 이럴 때만 쏙 빠져나가지?”

“리리.”

“알았어. 근데 나 진짜 못하겠어. 무슨 대사가 이래.”


‘그 대사 제일 신나서 한 것이 너였어.’


남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웃음을 꾹 눌러참았다. 리메르는 슬쩍 디안을 쳐다봤다가 씨알도 먹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체념한 듯 모자를 꾸욱 눌러썼다.


“리리! 잘 하고 와!”

“하던대로만 해.”


누가 맞추기라도 한 듯 막이 올라가고, 리메르는 맞은 편 계단에서 세실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갈색 가발을 쓴 세실이 무대 가운데로 걸어오다 말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럼에도 새어나오는 웃음은 티가 나는 법이라, 리메르는 거의 눈동자가 없어지기 직전인 세실의 꼴을 보고 입가를 잘게 떨었다.


‘분명 어제까지는 누가 비웃던지 잘만 했던 대사인데.’


그런데 지금은 정말 버거웠다.


두 사람이 점점 가까워지고, 이미 대사를 칠 타이밍은 옛적에 지났다. 세실은 웃다 말고 뭐하냐는 뜻을 담아 리메르에게 눈짓을 했다. 리메르는 울며 겨자먹기로 눈을 꼭 감고 뒤에 숨겨놓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시아, 이것 봐봐···! 내가 직접 만든 꽃다발이야······!”

“큭.”


여기저기서 억눌린 웃음이 세어나왔다. 역시 차원이 달라도 사람이 오글거림을 느끼는 요소는 비슷한 모양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 세실이 꽃다발을 건네 받을 때까지 방긋 웃음짓고 있던 리메르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예쁜 꽃받침을 한 리메르가 해탈한 얼굴로 대사를 읊었다.


“······누가 꽃이게?”


세실은 이미 새빨개진 리메르의 귓볼을 보고 한계인 상태였다.


크흠, 온 힘을 다해 웃음을 참은 세실이 리메르의 볼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당연히 당신이지요.”


그렇게 막이 내려갔다.


박수갈채 소리를 뒤로하고 무대에서 비틀거리며 내려온 리메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소매를 걷어 팔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닭살이 오돌토돌 올라와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팔을 살살 문지르고 있자니 세실과 시르, 리나, 에드쉬, 디안이 다가왔다.


세실과 시르는 혼이 빠진 듯한 리메르의 얼굴과 걷어올린 소매를 보자마자 배를 부여잡고 웃기 시작했고 리나와 디안은 그런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그 사이에서 레디알 후작 역할을 맡았던 에드쉬가 유유히 다가왔다.


“고생했어요, 리리. 아주 멋있었어요.”

“으응? 그래······? 너가 행복했으면 됐어.”


짙은 녹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이내 눈을 반달로 곱게 접어 웃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는 항상 행복해요.”

“···.”


리리와 친구들과 함께 있었던 모든 순간이요.


작게 속삭인 목소리가 귀에 콕 박혀왔다. 갑자기 소름이 모두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가끔씩 떠오르는 상처투성이 모습이 지금도 눈 앞에 아른거렸다. 리메르는 애써 쓴 웃음을 감추고 에드쉬의 결 좋은 남색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나도 그래.”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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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3.볼테르 백작(3) 20.05.08 27 0 9쪽
27 3.볼테르 백작(2) 20.05.07 24 0 9쪽
26 3.볼테르 백작(1) 20.05.06 25 0 9쪽
25 2.에드쉬-(9) 20.05.04 36 0 9쪽
24 2.에드쉬-(8) 20.05.03 26 0 8쪽
23 2.에드쉬-(7) 20.05.02 28 0 9쪽
22 2.에드쉬-(6) 20.05.02 29 0 9쪽
21 2.에드쉬-(5) 20.05.02 34 0 11쪽
20 2.에드쉬-(4) 20.04.27 26 0 10쪽
19 2.에드쉬-(3) 20.04.26 24 0 10쪽
18 2.에드쉬-(2) 20.04.24 32 0 10쪽
17 2.에드쉬-(1) 20.04.23 21 0 11쪽
16 1.5.트레비안 레디알-(2) 20.04.22 21 0 10쪽
15 1.5.트레비안 레디알-(1) 20.04.21 38 0 11쪽
14 1.5.황족이었습니다. 20.04.20 43 0 12쪽
13 1.5.사실 대마법사 제자였습니다-(2) 20.04.19 26 0 9쪽
12 1.5.사실 대마법사 제자였습니다-(1) 20.04.17 32 0 9쪽
11 1.공녀, 리메르-(10) 20.04.16 39 0 12쪽
10 1.공녀, 리메르-(9) 20.04.16 35 0 10쪽
9 1.공녀, 리메르-(8) 20.04.14 49 0 9쪽
8 1.공녀, 리메르-(7) 20.04.11 31 0 8쪽
7 1.공녀, 리메르-(6) 20.04.10 33 0 9쪽
6 1.공녀, 리메르-(5) 20.04.08 39 0 9쪽
5 1.공녀, 리메르-(4) 20.04.07 41 0 9쪽
4 1.공녀, 리메르-(3) 20.04.07 39 0 9쪽
3 1.공녀, 리메르-(2) 20.04.06 49 0 13쪽
» 1.공녀, 리메르-(1) 20.04.04 81 0 9쪽
1 0.프롤로그 20.04.04 157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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