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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님의 서재입니다.

괴물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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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작품등록일 :
2021.01.15 13:48
최근연재일 :
2021.10.02 21:00
연재수 :
5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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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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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글자수 :
34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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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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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6화.

DUMMY

김현이 세면대를 붙잡은 채 푹 고개를 숙였다. 세면대를 가득 채운 물이 찰랑거리며 그의 얼굴을 비췄다. 뒤늦게 후회의 감정이 차올랐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시답지 않은 언쟁 끝에, 김현은 집으로 돌아왔다. 장노인, 그리고 그의 강아지와 함께.


그리고 장노인이 증거를 보여준다며 그를 세면대 앞에 세운 것이다.


벌컥, 화장실 문이 열리며 장노인이 들어왔다. 원룸에 딸린 화장실이 워낙 비좁아, 두 명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꽉 찬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장노인은 주변을 더듬거리지도 않고 용케 빈자리를 찾아 들어왔다. 그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두 눈이 보인다고 착각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이제 결계까지 마무리됐고··· 모든 준비가 끝났다네.”


예, 예. 김현이 속으로 비아냥대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마법을 쓴다는 사람인데, 결계 하나 못 칠까.


김현이 일렁이는 수면을 보며 심호흡했다. 방법은 미리 들어두어 알고 있다.


물속에 머리를 담가라,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분명 허황된 말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왠지 모를 긴장감이 차올랐다.


“어르신, 담가요?”

“그래, 담그게.”

“진짜 이거 아니면 각오하세요. 경찰 부릅니다.”

“어허, 그냥 담그래두.”


왜 이리 잔말이 많아, 작게 투덜거린 장노인이 김현의 머리를 내리눌렀다. 엉겁결에 잠수를 하게 된 김현이 꼬르륵, 공깃방울을 뱉어냈다.


꼬르륵, 김현이 눈알을 굴렸다. 누렇게 때 탄 세면대의 도기와 꽉 주둥이를 다물고 있는 팝업이 눈앞에 보인다.


뭐가 변한 건가?


김현은 알 수 없어 잠자코 기다렸다. 하지만 30초가 지나고, 1분이 지나도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슬슬 호흡이 달린다. 김현은 이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김현이 장노인에게 따져 묻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노인네의 힘이 얼마나 센지, 머리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꼬르륵, 김현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세면대를 붙잡아 밀고, 주저앉아 보기도 했다. 장노인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려고도 했다. 하지만 김현의 몸짓은 전부 부질없는 발버둥으로 그쳤다.


‘어르신! 이거 이상해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거 잘못됐다고! 씨발, 나 죽는다고!’


숨이 콱 막히고, 팔다리에서 힘이 빠진다.


‘미, 미친···! 믿는 게 아니였···.’


그리고 김현의 의식이 깊게 침잠했다.



***



가라앉고, 가라앉는다. 바닷속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바닥을 향해 끊임없이 침전한다.


그리고 영원할 것만 같던 부유감의 끝에서, 김현은 마침내 바닥에 도달했음을 느꼈다.


그곳엔, ‘그것’이 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방에 널린 어둠과 같았다. 하지만 다른 어둠과는 차원이 다른 질감을 가져 뚜렷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직은 아주 작고 연약했다. 어둠의 부재로 엮은 치렁치렁한 쇠사슬에 묶인 채 그르릉, 비참한 울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김현은 ‘그것’의 모습이 안타까워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쿠르릉-!


어둠이 끓어오르며, ‘그것’이 단숨에 몸집을 키웠다. 한계에 도달한 쇠사슬이 끼기긱, 비명을 지르다가 두두둑 끊어져 나갔다.


고오오오-!


‘그것’이 해방감을 만끽하며 포효를 질렀다. 아주 길고 긴 시간이었다. 구속은 끈질겼고, 결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 일부를 흡수하기까지 했다. 결코 용납할 수 있는 죄업이 아니었다.


감히, 감히!


나를 이렇게 비참한 꼴로 만든 놈을 용서할 수 없다. 증오와 살의가 한데로 엮여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른다. 참을 수 없는 복수심에, 온몸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아!’


번뜩 김현이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서 거대하게 몸을 일으키는 ‘그것’이 보인다. 검은 바다를 온통 증발시킬 기세로 끓어오르는 ‘그것’의 복수심이 절절히 전달된다.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그것’의 감정과 동화되었던 자신의 상태가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느껴진다.


김현이 깨달았다.


‘너는 나구나.’



***



치이익,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찬 화장실 안. 세면대의 물은 부글부글 끓어올라 지금도 계속해서 수증기를 배출하고 있었다.


“허억, 허억.”


김 현은 화장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진짜였네요.”


방금의 경험은 고작 파편화된 이미지 몇 개로 남았으나, 김현은 마법의 실존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이, 어제 절 살려줬어요. 그 이상한 마법으로.”


그도 그럴 것이, 어제의 기억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노란색 안광을 번뜩이며 이빨을 들이미는 여자와 그녀를 자살시킨 장노인의 모습은 여태껏 왜 기억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뭐가 말인가?”

“어제 살려주신 거요.”

“뭐 별것도 아니었는데, 감사는.”


장노인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감사 인사를 받는 게 내심 부끄러운 모양이다.


잠깐 숨을 몰아쉰 김현이 다음 질문을 골랐다. 장노인에게 묻고 싶은 것은 너무나 많았다. 내가 기억을 잃었던 이유가 뭐냐, 이렇게까지 해서 기억을 되찾아준 이유가 무엇이냐, 나에게 원하는 게 뭐냐, 내가 그곳에서 본 ‘나’는 도대체 무엇이냐 등등.


“어르신,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말하게.”


하지만 무수한 의문들은 머릿속에 맺힌 한 가지 상으로 전부 지워졌다.


마치 한순간에 정신을 놓아버린 듯, 공격성을 드러내던 어제의 여자. 그리고 아버지의 살점을 물어뜯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어머니. 그 둘은 명백히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고로, 지금 김현이 간절히 원하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그 여자가 왜 그렇게 된 건지, 알고 계십니까?”

“알 수밖에.”


김현의 예상대로 장노인은 그 증상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건, 우리의 죄업이나 다름없으니 말일세.”



***



“구도자란 본디 진리를 쫓는 자. 하지만 진리의 벽은 높디높았고, 감히 인간의 기술로는 넘을 수 없는 것이었지.”

“그래서 강구한 다른 수단이 재의 마법이다, 이 말씀입니까?”

“이해가 빠르구만, 자네의 말대로라네. 다만, 단순히 도구라 치부하기에 재의 마법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었지.”


김현의 머릿속에서 대충 얼개가 그려졌다. 구도를 위한 수단, 재의 마법. 그리고 마법의 위험성.


“그것에 심취한 자들이 생겨났겠군요.”

“그렇다네. 무리도 아니지. 평생 땅 위를 노니던 인간에게 날개가 달린 격이니, 절로 심취한 이들이 생겨났지. 그들은 구도를 내팽개치고 재의 마법에만 몰두했고, 마침내 어떤 존재들에게 닿고 말았다네.”

“존재들···?”


장노인이 짐짓 상체를 기울였다.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전하듯, 속닥속닥 입술을 달싹이며.


“섭리의 일부,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악, 위대한 존재들.”


장노인의 은밀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김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들에게 닿은 이들은, 모조리 그들의 열렬한 추종자로 변모하고 말지. 그리고 그 광신도, 참회자 놈들은 항상 자신의 믿음을 전도하지 못해 안달이 난 상태야. 계몽이든, 개심이든, 뭐 같잖은 이름을 붙여대며 말이네.”


김현은 장노인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 전도의 결과물이 어제의 그 여자란 말입니까?”

“역시 이해가 빨라서 좋구만. 우리는 그들을 감염자라 부르지.”

“감염자···.”


어머니는 미친 게 아니었다. 당신의 광증을 이기지 못해, 남편을 물어뜯어 죽인 게 아니었다. 그 모든 비극의 주체는 자식을 남겨둔 채 투신한 망자가 아닌, 지금 어디선가 살아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르는 저열한 광신도였다.


김현이 부르르, 떨려오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15년, 강산이 바뀌고도 반쯤 더 바뀔 시간이다. 이제는 어슴푸레 남은 기억처럼 감정조차 흐릿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가슴 깊이 차오르는 끈적한 감정이 스스로도 놀랍다.


김현은 최대한 떨림을 억누르며 물었다.


“참회자, 그 새끼들을 찾을 수 있습니까?”

“물론.”


장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네가 알아야 할 사실이 몇 가지 있다네. 이를테면, 자네의 정체.”



***



뚜벅뚜벅.


검은 사제복의 여성이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었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드문드문 내리쬐는 백열등을 순식간에 지나쳤다.


그 밑으로 드러난 안색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비지땀을 뻘뻘 흘리어 이미 목 뒤의 옷깃은 흠뻑 젖은 상태였다.


복도의 끝엔 전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대한 벽 위로 불길하게 음각된 한 폭의 지옥도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소용돌이치듯 타오르는 불길과 비명을 지르며 생을 갈구하는 인간들, 그리고 통일되지 않은 끔찍한 생김새를 한 아귀들이 그런 인간들을 쫓고, 붙잡고, 씹어먹고 있다.


흑발의 여성, 시트리(Sitri)라는 세례명을 지음 받은 그녀가 문 앞에서 꿀꺽 침을 삼켰다.


문과의 거리는 약 세 걸음을 남겨둔 상태. 막상 발을 떼려고 하니 안면근육이 파르르 떨려온다. 연구소의 개들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꼼짝않던 위기감이 심장 속에서 쿵쾅쿵쾅 경종을 울려댄다.


꿀꺽.


다시 한번 울대가 출렁이고, 마음을 다잡은 시트리가 공손히 자세를 낮췄다.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양 손바닥을 바닥에 붙인다. 이마 또한 마찬가지여서 바닥의 차가운 감촉이 냉정을 보탠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정수리와 닿지 않은 문 앞에서, 영영 떼어지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이 쩍하고 떨어졌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끼이익.


시트리의 청이 닿았는지, 지옥도가 좌우로 쩍 갈라져 그 거대한 입을 서서히 벌렸다.


쿵.


활짝 열린 문.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없었다. 오직 어둠만이 있었다. 되려 빛의 영역을 침습하는 까맣고 짙은 어둠만이 그녀를 반겼다.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넓이가 어느 정도인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하나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샛노란 짐승의 눈알만이 섬뜩하게 번뜩이며 저 끝에서 그녀를 응시했다.


시트리가 이를 악물었다. 그저 바라볼 뿐인데, 파랑을 맞이한 돛단배처럼 그녀의 성총이 뒤흔들린다.


뚝뚝.


분명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땀방울이 점점이 바닥을 물들이는데, 입안은 가뭄이 온 것처럼 바짝 마른다. 온몸의 수분이 착즙(搾汁)되어 땀으로 흘러내린다.


그때였다.


철푸덕.


그녀의 옆으로 ‘무언가’가 던져졌다. 빨갛게 뭉친 고기완자와 같은 그것의 정체를, 그녀는 몰라보지 않았다.


강철순, 그녀가 며칠 전에 그분께 인도한 제물이었다.


“내가 점지한 제물이 갈취당했다.”


그르릉,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와 같이, 그분의 목소리가 뼛속 깊이 저며 들었다. 그분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시트라는 더욱 바짝 자세를 낮췄다.


“찾아라.”


15년 전부터, 그 제물은 그의 것이었다. 제물을 네피림으로 각성시키기 위해서 ‘적절한’ 환경을 조성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엄한 놈이 공들인 제물을 가로챈다?


‘계약’이 있다 한들,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가 분노에 차 으르렁거렸다.


“찾아서, 그 구도자 나부랭이와 제물을 전부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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