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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님의 서재입니다.

괴물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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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작품등록일 :
2021.01.15 13:48
최근연재일 :
2021.10.0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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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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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8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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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31화.

DUMMY

이진호에게 몇 시간의 짧은 휴식이 주어졌다. 대우는 썩 나쁘지 않았다. 푹신한 침대와 포근한 이불. 이진호는 침대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다. 베개는 존재조차 몰랐다.


그리고 김우혁이 정한 시각에, 이진호는 다시 호출되었다. 수면 시간은 채 4시간도 채우지 못했다. 낮은 수면 시간과 기물의 후유증으로 이진호의 몸 상태는 최악을 달렸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의 사정까지 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이진호도 그에 섭섭함을 표현하진 않았다.


이진호는 11층의 한 회의실로 인도되었다. 회의실에 당도하자, 그를 인도했던 사내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이진호 홀로 문 앞에 덩그러니 남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회의실 안쪽에서 김우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머뭇머뭇 문을 열고 들어가자, 희뿌연 담배 연기가 이진호를 반겼다. 콜록, 비흡연자인 그로서는 도저히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앉아.”


장 테이블 상석에 앉은 김우혁이 손짓했다. 대충 아무 데나 앉으라는 눈치다. 그는 다리를 비비 꼰 채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서류 뭉치를 보고 있었는데, 반쯤 풀어헤친 넥타이와 어제에 비해 한층 퀭해진 눈가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본판이 워낙 잘나서인지 썩 그림이 됐다.


이진호가 멀찍이 떨어져 자리를 잡으니, 김우혁이 물어왔다.


“잠은 잘 잤고?”

“······.”


이진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얼굴에 짙게 내려앉은 음영이 그간의 마음고생을 대변했다. 그 원흉인 김우혁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기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얼굴 풀어.”

“······.”

“말 안 하려고?”

“······.”

“뭔, 애도 아니고.”


후우, 한숨과 같은 담배 연기를 뱉고 김우혁이 보고 있던 서류 뭉치를 들었다.


“이게 뭔지 알아?”

“······.”

“봐.”


김우혁이 서류 뭉치를 던졌다. 서류 뭉치가 책상 위를 미끄러지며 이진호 앞에 당도했다. 서류는 작은 글자로 빽빽하게 도배돼 있었다. 대강 맨 위 페이지를 훑어본 이진호가 경악해서 서류 뭉치를 쥐었다.


“후, 한 감염자의 기억을 모조리 긁어다가 만든 파일이다.”


떨리는 손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엔, 한 사람의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출생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자라왔는지, 당시엔 어떻게 생각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전부.


말 그대로, 모든 기억과 치부가, 활자로 화(化)한 것이다.


다만, 감정의 서술은 상당히 들쭉날쭉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개심의 은총을 받고 첫 살인이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엄마, 슬펐다, 고기는 맛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픽 사정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아빠와 동생도 먹었다, 행복해서 눈알을 오도독오도독 씹어 삼켰다.


활자를 읽을 뿐인데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보다시피, 우리에겐 능력이 있어. 네 머릿속에 있는 걸, 전부 뽑아낼 능력이.”


이진호는 잇새를 굳게 잠갔다. 김우혁의 의도는 명확하다. 그는 지금 이진호를 타이르고 있었다. 너도 이 감염자처럼 기억만 뽑아내고 버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그러니까 순순히 협조하라고.


그 말에 안도해야 할까? 아니면 분노해야 할까? 무엇이든 이진호가 느끼는 감정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지금, 이진호의 온 신경은 한 사람의 일생이 담긴 서류에 집중돼 있었다. 그의 생각, 그의 두려움, 그의 집념, 그 모든 걸 기록한 서류에.


잠시 후, 굳게 잠겼던 잇새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됐습니까?”


후, 김우혁이 길게 담배 연기를 뽑아냈다. 연기 너머로 이진호를 응시하는 눈은, 언뜻 흥미로워 보이기도 하였으며, 혹은 애잔해 보이기도 했다.


치익,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김우혁이 말했다.


“한 번 감염된 사람은, 결코 돌아올 수 없어.”

“······.”


에둘러 말했지만, 좋은 꼴은 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이진호가 눈을 감았다. 한 가정에서 벌어진 비극이 가슴 한 켠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김우혁이 새 담배를 입에 물고 이진호를 보았다. 활자 위의 비극을 애도하며 분노한다. 저처럼 타인의 비극을 제 일처럼 여기며 분노하는 사람을 보통 정의롭다고 한다. 정의, 정말 요즘 같은 세상에 보기 힘든 부류였다. 이진호답다고 할까,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일이 잘 풀렸다고, 김우혁은 생각했다.


“이진호.”


눈꺼풀이 열리고, 옅은 붉은 기가 돌아 갈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김우혁을 직시했다. 그 눈동자는 어떤 열망을 강렬히 내비치고 있었다.


“이 회사는 최전선이다. 사람 하나쯤은 가뿐히 찢어버리는 식인괴물과 매일 밤 뒹굴고, 작전 중 요원이 죽어 나가는 건 예삿일이야.”


후, 희게 뿜어진 담배 연기 뒤로, 김우혁이 담담히 고충을 토로했다.


“워라벨? 그런 건 꿈도 꾸지 못해. 감염자 놈들이 주로 밤에 활동해서 허구한 날 새벽에 외근 나가고, 쪽잠 자다가 또 감염자 죽이러 가는 게 일상이지.

명예는 또 쥐뿔도 없어. 회사의 존재 자체가 극비라서 우리가 무슨 일하는지 말도 못 하거든.

심지어 은퇴 후의 대우가 좋은 것도 아니야. 정보 유출 문제 때문에, 회사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싹 지우고 나서야 비로소 퇴사가 허락돼.

힘들고, 위험하고, 돈도 얼마 안 주고, 그렇다고 명예도 없고, 더더군다나 은퇴는 죽거나 기억을 잃거나 둘 중 하나. 이 일은 정상인이 할 게 못 돼, 여기 남아있는 건 전부, 미친놈이거나 자살지망자뿐이야. 그러니까······”


김우혁이 이진호를 마주 보았다. 그 눈동자는 아직 빛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해진 것 같았다. 그래, 처음부터 저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은 변치 않으리라고 확신하는 듯한 눈동자. 저 열의는 얼마나 이어질까, 정말 변치 않을까, 아니면 현실의 벽에 좌절해 금방 꺾여버릴까, 그 결과가 자못 궁금했다.


하여, 김우혁은 기꺼이 이진호가 원하는 바를 말해주었다.


“우리와 함께하자. 이진호.”



***



‘···잘 부탁드립니다.’


이진호의 대답이었다. 그 이후의 과정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이 친구는, 뭡니까?”


곰과 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듬직한 정도를 넘어 압도적인 체격은 마주 서는 즉시, 기가 질릴 정도였다.


“어, 네 부사수. 오종후, 이진호.같은 ‘ㅇㅈㅎ’끼리 잘 해봐.”


두 ㅇㅈㅎ은 순간 말문이 막혔으나, 김우혁은 의문을 제기할 틈을 주지 않았다.


“시간 없으니까, 둘 다 나가봐. 아, 임무와 목적지는 진호가 알 테니까, 안내 잘하고.”


그렇게 둘은 회의실에서 내쫓겼다.


“······.”

“······.”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먼저 입을 뗀 건, 이름 초성이 같다는 이유로 이진호의 사수가 된 오종후였다.


“임무가 뭐지?”


자기소개나 신상정보를 물어보는 것도 없이 바로 돌직구다. 그 성격이 외모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진호가 기억을 떠올렸다.


임무라고 직접 언질 받은 건 없었다. 하지만 짐작가는 바는 있었다. 어제 김우혁이 내걸었던 조건. 아니, 조건이라 하기에도 민망하다. 김우혁은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고, 자신은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 이제 그걸 이행할 때가 온 것뿐이었다.


새삼스레 죄책감이 가슴 한 켠을 짓누른다. 이진호가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한 사람의 생포입니다.”



***



김현이 슬며시 눈을 떴다. 아침을 알리던 새소리는 어디 갔는지 들리지 않고, 몸은 개운하기보다 찌뿌둥했다. 잠을 많이 자면 오히려 몸이 안 좋다더니, 과연 그런 모양이다.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된 기분이었다.


“끄응.”


자리에서 대강 몸을 풀고 있자니, 담배가 당겨왔다. 김현은 주섬주섬 외출복을 입고 밖으로 향했다. 비록 흡연자지만, 집안은 금연구역으로 설정한 그였다.


철컥,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려는데, 문득 장생농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웬만하면 외출을 자제하게. 이 집은 내가 결계를 쳐둬서 안전하겠지만, 밖은 그렇지 않다네. 자네는 지금 그 참회자에게 노려지고 있을 확률이 높아. 조심하고 또 조심하게나.’


김현이 멈칫했다. 감염자와 마주치고 싸우기까지 한 게 바로 어제이다. 아직 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설마 그런 우연이 한 번 더 일어날 리가···.


“후우.”


철컥, 김현이 문을 닫았다. 결국 장생농의 말을 듣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김현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머리 하나가 겨우 들어갈 법한 조그마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담배를 꼬나물었다. 칙, 불이 켜지고 매캐한 담배 연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응?”


어찌 된 일인지, 독한 담배 연기가 조금은 약하게 느껴진다. 분명 원래 피던 것이 맞다. 하지만 이 느낌은 2밀리나 3밀리 담배를 피우는 것만 같았다.


김현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다시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는데, 누군가 현관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쿵쿵쿵!


소리가 얼마나 큰지, 흡사 현관문을 부술 기세다. 윗집에서 담배 연기 때문에 따지러 왔나?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며, 김현이 외쳤다.


“네! 나가요!”


그는 창문의 문틀에 담배를 대강 올려놓고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쿵!쿵!


현관문을 본 순간, 김현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쿵!


드문드문 녹이 슬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굳건했던 현관문이 움푹움푹 파이고 있었다.


끼이익! 이리저리 찌그러진 현관문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벌렸다. 구불구불한 문 틈새로, 노란색 눈동자가 김현을 응시했다.


“찾았다.”


삐쭉, 온몸의 솜털이 솟구쳐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는데, 누군가 김현을 잡아 세웠다.


맞서 싸워! 싸워 죽여!


그를 잡아세운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었다. 정확히는 내면의 네피림.


싸우라고? 저거랑?


우직우직, 감염자가 알루미늄 현관문을 종잇장처럼 구기며 몸을 들이밀었다. 절로 턱 근육이 파르르, 떨려온다. 감염자가 진정 괴물임이 피부 위로 실감된다. 어제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것과 몸을 부대꼈는지, 스스로가 경이로울 지경이다.


김현이 공포심을 느끼자, 네피림의 힘이 속에서 꿈틀거렸다. 당장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난리를 쳐댔다.


점진적인 자아의 상실과 신속한 죽음.


둘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김현이 머뭇거리며 선택하지 못하고 있을 때, 감염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이제 반쯤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너 찾는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냄새는 이 근처에서 뚝 끊겨버리고,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고!”


감염자가 킬킬 웃고는 말을 이었다.


“너는 정말 미안해 해야 돼! 너 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인데!”

“뭐?”


김현이 비로소 감염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붉고 끈적이는 액체로 범벅이 된 감염자의 입가, 왜 이제 봤나 싶을 정도로 선명하기 그지없다.


감염자가 피 범벅이 된 입매를 좌우로 길게 찢었다.


“내가 이리로 오는 동안, 몇 집이나 들린 거 같아?”


아-.


정신을 차린 순간, 김현은 감염자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있었다.


뻐억!


감염자의 광대가 움푹 꺼지며, 비릿한 피 냄새가 훅 밀려 들어왔다. 감염자의 것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희생자들의 것임을 깨닫는다.


으아아! 김현이 다시 고함과 함께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오른손에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았다. 첫 충돌에 주먹 뼈가 두어 개 엇나간 모양이다. 어설프게 주먹을 쥔 탓이었다. 다행히 고통은 없었다. 네피림의 힘은 김현을 고통으로부터 유리시켰다.


감염자가 마구잡이로 왼팔을 휘둘렀다. 김현은 그 팔을 억지로 밀어내며 왼 주먹을 내질렀다. 문틈에 낀 감염자는 지금 샌드백에 불과했다.


퍽!


감염자의 얼굴이 다시 한번 처참하게 뭉개졌다. 끼긱, 끼긱! 현관문이 출렁이며 비명을 질렀다.


퍽퍽퍽!


감염자의 턱을 짓뭉개고, 콧대를 으스러트린다. 김현이 감염자를 샌드백 삼아 맹렬히 두들기고 있는데, 결국 감염자보다 먼저 현관문이 한계를 맞이했다.


쾅!


아슬아슬하게 잠겨있던 현관문이 거칠게 몸을 벌리고, 처참히 뭉개진 얼굴 중 유일하게 좌우로 찢어지는 초승달만 선명하다. 김현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돋았다.


콱, 억센 손아귀가 김현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빙글, 세상이 뒤집혔다.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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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52화. 21.09.20 24 0 12쪽
51 51화. 21.09.18 11 1 13쪽
50 50화. 21.09.12 1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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