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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님의 서재입니다.

괴물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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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작품등록일 :
2021.01.15 13:48
최근연재일 :
2021.10.0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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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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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0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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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DUMMY

산의 해는 빨리 떨어졌다.


분명 늦은 저녁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건만, 어느덧 사위가 어둑어둑하게 내려앉는다.


구원상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지리산의 끝자락, 지명도 모를 이곳은 전파조차 잘 잡히지 않아 GPS 기능이 줄곧 먹통이었다. 그러나, 독도법을 숙지하고 있는 그에게 길을 찾는 일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도저히 ‘길’이라 할 것이 없었다는 정도였다.


구원상이 경사를 올랐다.


걸음걸음마다 발이 푹푹 빠진다. 근래가 비가 왔었는지, 바닥이 온통 진흙투성이다.


“후우, 후우.”


구원상은 슬슬 호흡이 가빠옴을 느꼈다. 단순히 진흙투성이의 바닥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흑복의 보조를 받고 있다곤 하나, 그의 산행은 근 1시간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짐덩이가 상당히 무거웠다. 심지어 버릴 수도 없는 짐이다.


‘물건’이 담겼다는 은색 서류 가방.


도대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무게가 상당하다. 30kg은 족히 나갈듯싶었다. 사람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 있다고 해도 믿을 만한 무게였다.


‘에이, 설마.’


구원상은 자신이 진실에 매우 근접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끈덕지게 걷다 보니, 어느덧 평평한 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산맥의 줄기가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널따란 분지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전망대??”


웬 전망대 하나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전망대는 높은 곳에 자리하는 게 정상이 아닌가?


구원상이 옆머리를 벅벅 긁었다.


요리보고 저리 봐도 도저히 전망대가 있을 법한 장소는 아니었다.


“잘못 왔나?”


그가 지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여전히 GPS 기능은 먹통이었지만, 지도상에서 가리키는 목적지는 이곳이 맞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맞는데···.”


그가 무언가 놓친 게 있나 싶어 하릴없이 주변을 거닐고 있는데, 문득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엄습했다.


“어?”


마치 투명한 비누 막을 통과하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 하지만 그 감각에 놀랄 새도 없이, 그의 눈앞에 새로운 전경이 펼쳐졌다.


분명, 웬 전망대 하나만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던 분지에, 마치 대규모 공업단지에나 있을 법한 커다란 건물이 옆으로 길게 몸을 누이고 있다.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마찬가지였다.


전망대는 사라졌고, 웬 공장건물 같은 게 하나 보인다.


그가 알기로 이러한 현상을 가능케 하는 수단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마법.’


그리고 재의 마법을 구사하는 이들은 단 두 부류로 압축된다. 구도자, 혹은 참회자···


“이게 그 살아있다는 참회자인가?”


낯선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적?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구원상은 본능적으로 권총을 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총구는 원하는 표적을 겨냥하지 못했다. 총구가 상대의 목전에 달하는 순간, 총신이 왜곡돼 휘어지는가 싶더니, 우당탕! 구원상이 바닥을 뒹굴었다.


‘무슨!’


구원상이 경악으로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이건, 흥미롭군. 이걸 이가 놈 그 자식도 아닌 그 아랫것이 만들었다고? 확실히··· 과거 장가 녀석의 수준을 뛰어넘었을 수도 있겠어···.”


흰 가운을 두른 반백의 노인이 은색 서류 가방을 들고 흥미롭다는 듯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다.


손이 허전했다. 방금까지 물건을 단단히 쥐고 있던 손이.


저 노인이 눈치채지도 못할 틈에, 그의 손에서 물건을 뺏어간 것이었다.


“그쪽은 누구십니까.”


구원상은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물었다.


“정부에서 보낸 배달꾼이 아니었느냐?”


정부에서?


초면부터 ‘놈놈’거리는 무례한 태도 보다, 노인의 단어 선택이 마음에 걸린다.


회사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부에서 보냈냐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연구소에서 보냈냐고 하면 모를까.


“박 부장님께서 절 이곳으로 보내셨···.”


바쁘게 휴대전화를 조작하던 노인이 검지를 가볍게 세웠다.


쉿.


마치 침묵을 강요하듯.


뻐끔뻐끔.


구원상이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헛기침이나, 콧방귀 같은 아주 작은 소리조차 소거돼 입술만 뻐끔거린다.


그러는 사이, 노인의 통화가 연결되었다.


“어, 정 국장. 물건은 잘 받았어.”


구원상이 두 눈을 치켜떴다.


정 국장? 설마, 우리 회사의 그 대응국장?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보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이 더욱더 구원상을 당혹게 했다.


- 하하, 때마침 저도 도착한 참입니다. 타이밍이 잘 맞았습니다, 고 박사님.

“몸이 어지간히 단 모양이구만. 아니, 몸이 단 건, 정 국장이 아니라 그 노괴들인가?”

- 어르신들께서는 하루빨리 대한민국이 정상화되길 바라는 염원일 뿐이십니다.

“개뿔, 퍽이나.”


노인, 고 박사의 냉소가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는지, 정 국장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 박사님, 추적에 대한 염려는 확실히 놓아도 되겠습니까?

“흥, 이가놈이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이곳은 내 영지야. 밖에서는 이 안쪽을 절대 관측할 수 없다.”


고 박사가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정 국장은 내심 걱정이 남아있는지, 조심스레 재차 물어왔다.


- 참회자들의 추적 또한 불가능한 게 확실하겠습니까?

“애송이들이 말했다던, 정신 공유망?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는 70년 전에도 들어본 적이 없어.”

- 혹시나, 지금은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내 장담컨대, 그런 일은 없어.”


70년이면 강산도 일곱 번이나 바뀔 시간이었다. 당장의 최신 기술도 고작 몇 년이 지나면 뒷방 늙은이 취급받는 시대에, 마법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진 않았지만, 정 국장은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 하하! 제가 감히 고 박사님의 고견을 무시하겠습니까?

“됐고, 이만 끊지. 당장이라도 이놈을 뜯어보고 싶으니까.”

- 저 또한,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뚝, 통화를 마친 고 박사가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문득 구원상을 돌아봤다.


“뭐야? 아직도 있었어?”


‘아니, 당신이···!’


하지만 그는 무어라 항변할 기회도 주지 않고, 손을 내둘렀다.


“됐다. 어서, 내 영지에서 썩 꺼져라.”


‘어?’


몸이 어디론가 훅, 밀려나는가 싶더니, 시야가 암전된다.


그리고 구원상이 정신을 차렸을 땐, 노인과 거대한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분지에는 다시금 전망대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시팔···, 이게 다 무슨 일이래···?”


그는 선글라스를 고쳐 쓸 생각조차 하지 못 하고 멀거니 중얼거렸다.



***



초자연현상대책마련 연구소.


대게, 연구소라고 불리는 이 기관은 엄연히 따지면 정부소속 기관이 아니었다. 오히려, 협력 기관의 탈을 쓴 구도자들만의 사조직에 가까웠다.


그것도, 한 인물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그리고 그 인물이 바로, 초대 연구소장이자 현재의 연구소장이었다.


[ 소장실 ]


그를 만나기에 앞서, 정 국장이 잠시 복장을 점검했다.


체형에 딱 맞는 코발트블루 정장은 몸태를 과하지 않게 드러냈고, 정장보다는 밝은 채도의 푸른색 스트라이프 넥타이로 세련된 느낌을 더했다.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가로지른 금빛 넥타이핀이 무게감을 잡아주었다.


전체적으로 젊고 세련된, 그리고 프로다운 모습이다. 꽤 만족스러웠다.


옷매무새를 마저 가다듬은 그가 노크하려는데, 한발 먼저 벌컥 문이 열린다.


“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차진성 수석연구원, 연구소의 이인자. 별로 달갑지 않은 자이다.


허나, 그런 기색이 얼굴에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정 국장이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들어가시죠.”



***



소장실은 단출했다.


흡사, 국립대학 교수의 연구실과 비슷한 구조였으나, 이 방의 주인은 그런 이들과 비교 자체를 불허하는 인물이었다.


백사병 사태를 종식시킨 자, 대한민국 제일의 구도자, 혹은 대한민국의 흑막이라고 까지 불리는 자.


연구소장은 정 국장을 반기지도, 그렇다고 냉대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는 손에 쥔 서류 뭉치를 찬찬히 훑어볼 뿐이었다. 정 국장이 방 안에 들어온 이래로,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대놓고 투명인간 취급이었다.


그에 모멸감을 느낄 법도 하건만, 정 국장은 불쾌한 기색조차 없이 태연하게 운을 뗐다.


“그간 격조하셨습니까? 한번 찾아뵀어야 했는데,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비추게 돼 정말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워낙 공사가 다망했던 지라, 하하!”


호쾌한 웃음에 돌아오는 건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용건은?”


용건을 물으면서도, 연구소장의 시선은 여전히 서류에 고정돼 있다.


하지만 정 국장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가 커피를 홀짝이고는 그 맛을 평했다.


“이런, 차 수석님. 물을 좀 많이 넣으셨군요. 커피 맛이 영 밍밍한 거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소장님?”


면전에 대고 연구소장의 말을 무시한 격이었다. 연구소가 대응국의 상급 기관이고, 상대가 그 상급 기관의 장임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무례였다.


“정 국장!”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차 수석이 볼을 부들부들 떨면서 씩씩댔다. 그리고 그 분노가 단순히 커피 맛을 악평한 탓이 아님을 정 국장은 알고 있었다.


“네깟 주제에 감히 소장님을 무시해!”


정 국장은 마치 제 일인 양 분통을 터트리는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 한 차례 커피를 홀짝였다.


“이이···!”


그리고 재차 노성이 터져 나오기 직전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한 충견을 두셨습니다, 소장님. 저도 한 마리 기르고 싶을 정도입니다. 비록, 휘하에 부하 하나 없는 신세지만요.”


그제야, 소장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다.


희끗희끗 새치가 돋은 머리, 전체적으로 평범한 인상의 중년 사내였다. 외관상 50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는 정 국장과 동년배였지만,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가 8년 전이었나요? 그때와 비교해서 전혀 늙지 않으셨습니다? 어째 저 혼자만 세월의 풍파를 다 겪은 거 같군요, 하하! 혹시, 비결이 있으시면 알려주시겠습니까?”

“용건은?”


정 국장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용건이라고 해봐야, 저희 회사, 대응국에 대한 일밖에 더 있겠습니까?”



***



정 국장이 말하는 요지는 간단했다.


우리 큰일 났다!


“국정원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대응국 내에서, 아주 중대한 이적 행위를 포착했다더군요. 그것도 국가의 중요한 자산을 해외로 밀반출하려는 움직임을요.”


“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측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사실대로 모든 프로젝트의 내용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국정원에서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두고 보자더군요. 회사부터 시작해서 탈탈 털리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쾅!


정 국장이 거칠게 책상을 내려쳤다.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이건 폭압입니다! 저희 대응국과 귀소에 대한! 게다가, 방금 연락이 와서는 물건을 운반하던 중요한 참고인까지 구류 중이라며, 어찌나 윽박지르던지···.”

“그래서.”


연구소장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그를 지긋이 응시하며 말했다.


“원하는 게 뭐지?”


정 국장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나름대로 열연했다고는 생각했는데 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 똑똑한 사람은 말이 잘 통해서 좋았다.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권고했다.


“부국장의 임명권을 포기하시지요.”


그리고 그건, 권고의 탈을 쓴 통보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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