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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님의 서재입니다.

괴물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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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작품등록일 :
2021.01.15 13:48
최근연재일 :
2021.10.0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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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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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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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DUMMY

“커피?”


정종석이 설핏 고개를 들었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데도, 짙은 음영이 얼굴에 드리운다. 그에, 슬슬 휴게실의 전등을 갈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구원상은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마침내 커피를 받아들자, 구원상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힘들지?”


정종석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는 커피를 입에 대지도 않고 가만히 든 채 부정도, 긍정도 않았다.


“네가 여기 온 지 한 2년 정도 됐나?”

“···2년 조금 안 됐습니다.”

“음, 힘들 때지.”

“예에···.”


그 말을 끝으로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다. 구원상은 괜스레 커피를 홀짝여 어색한 공백을 채웠다.


커피를 한두 모금 홀짝이는 것으로도 어색함의 무게가 덜어지지 않자, 구원상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걔가 부조리 많이 치냐?”

“누구···?”

“걔, 아까 김머시기.”

“예? 아··· 김성규 선배님 말씀이십니까?”

“암튼, 그 머시기.”


꿋꿋하게 머시기를 고집하는 그를 보며, 정종석이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선배님은 왜 김성규 선배님을 항상 김머시기라고 부르십니까?”


구원상이 선글라스를 추어올리며 짐짓 슬픈 표정을 지었다.


“거기엔 슬픈 사연이 있어···.”

“예? 어떤···?”

“때는 바야흐로, 초등학생 시절.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셨어. 게다가 두분 다 바쁘시기까지 해서 매일같이 밤늦게 퇴근하시곤 했었지···.”


구원상의 이야기를 대충 요약하자면 이랬다.


맞벌이로 어린 그를 보살피기 힘들었던 부모님은 대책을 강구하다가, 결국 태권도 도장에 맡기기에 이른다. 그것도 밤늦게까지 맡길 수 있는 선수 반을 골라서.


그곳에서 어린 구원상은 많은 일을 겪게 되었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2천 번의 줄넘기, 늦은 밤 불꺼진 운동장에서의 구보, 격렬한 체력 단련에 급기야 구토까지 하는 친구들, 피를 토해야 체력이 는다며 어린 그들을 더더욱 몰아세우는 관장님, 그 와중에 싹트는 우정과 신뢰.


그리고 비극.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었지···.”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을 보며, 어린 구원상이 불길한 감정을 떨쳐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딴 곳에 신경을 돌릴 시간은 없었다. 오직, 눈앞에 경기에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


거대한 체육관, 모두의 시선이 경기장으로 집중된다. 구원상이 경기장의 맞은편을 보았다. 상대는, 같은 도장에서 수학하는 그의 절친한 친구다.


지금의 경기는 플라이급 마지막 시합, 결승이었다.


심판의 수신호에 맞춰 서로가 악수를 나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맹렬히 부딪친다. 손을 떼어내고,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진다. 이 정도가 적당하다. 달아오른 긴장감을 스텝을 밟아가며 툭툭, 털어낸다.


삐익! 요란한 호각의 신호와 함께, 경기가 시작된다.


시합은 격렬했다. 그리고 경기의 승자는 구원상이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메달은 구원상의 차지였고, 그의 친구는 한층 어두운 빛깔의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친구는··· 차마 은메달로 만족하지 못했던 거야···.”


시상대 위에서, 친구는 은메달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깜짝 놀란 구원상은 그를 뒤쫓았다. 어디 가는 거야! 멈춰!


하지만 친구는 하염없이 밖으로 내달렸다. 경기장 밖으로, 체육관 밖으로.


“그리고 그때···.”


빠앙-! 경적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울렸다. 공포로 바짝 굳어버린 친구의 모습이 보인다. 친구를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거대한 트럭이 보인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정신을 차린 순간, 구원상은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달려오는 트럭 앞에서 바짝 굳은 친구를 힘껏 밀어냈다.


그리고 쾅!



“다행히 나는 살아남았지만, 그 사고의 후유증으로 머리를 다치고 말았다. 그날부터 나는, 종종 무언가를 잊어버려. 후유증인 거지. 그래서 그 선배의 이름 김···, 그 두 글자조차 기억 못 하고 마는, 그런···.”


구원상이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애수 어린 눈을 드러냈다. 그런 그를 보는 정종석의 표정은 한마디로 정리되었다. 어이없음.


“나도 안타깝다. 고작, 그런 이유 하나로, 선배의 이름마저 잊을 수밖에 없다니.”


정종석이 헛웃음을 쳤다. 이야기에 빈틈이 너무 많아 굳이 일일이 따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선배님 지금 설마, 김성규 선배님의 이름을 기억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그 이야기를 전부 지어내신 겁니까?”

“의심부터 하는 거야? 좀 마음이 아픈데?”

“아니, 그런 이야기를 누가 믿겠습니까?”

“그래도 선배가 하는 말인데, 믿어야지!”

“말도 안 되는 얘기이지 않습니까.”


정종석이 연신 ‘말이 안 된다’면서 투덜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구원상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휴게실의 전등은 굳이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



시간이 지나 분위기가 다시 진정되자, 정종석이 가만히 고개를 떨어트린 채 종이컵을 만지작거렸다.


종이컵에 담긴 커피가 얕게 찰랑거렸다. 커피는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느릿하게 질문을 던져왔다.


“선배님은, 왜 회사에 들어오신 겁니까?”


공교로웠다.


비록 상대는 달랐지만, 채 몇 시간 전, 구원상은 이와 같이 커피를 마시며 이와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눴었다. 그래서 그는 그때와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국가의 부름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그 어조까지 같은지는, 그조차 알 수 없었다.


“···선배님은 애국자셨군요.”

“글쎄, 여기에 애국자 아닌 사람이 있을까?”

“그건,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


구원상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커피를 홀짝였다. 반쯤 남은 커피는 미적지근하게 식어있었다.


“다들, 겉으로 티는 안내지만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신 다음부터··· 그렇지 않습니까? 이건, 뭔가···.”


정종석의 종이컵이 거세게 흔들렸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가 종이컵 안에서 넘칠 듯이 찰랑거렸다.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이게 잘하고 있는 건지···.”


그때였다.


지잉.


구원상의 휴대전화가 거친 진동음을 토했다.


“팀장님 호출이네.”

“···빨리,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야지.”


구원상이 남은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옛말에, 기호지세(騎虎之勢)라 하더라고.”


그가 종이컵을 구기고 쓰레기통으로 걸어갔다. 쓰레기통을 몇 걸음 안 남겨둔 지점에서, 그가 종이컵을 던졌다. 구겨진 종이컵이 단번에 쓰레기통으로 빨려 들어갔다. 골인이었다.


“그러니까,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예?”

“이왕 이렇게 된 거, 최선을 다하다 보면, 다 잘될 거라고.”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구원상이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간다~”


구원상이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종석의 표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구원상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그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엉터리 속담이 어디 있습니까···.”



***



구원상이 뚜벅뚜벅,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의 얼굴은 방금까지 정종석과 웃고 떠들었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매캐한 담배 냄새와 함께 저 끝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문 앞을 서성이며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 그 또한 인기척을 느꼈는지, 이쪽을 보며 아는 체한다.


“왔냐?”


이곳이 실내, 그것도 지하임을 고려한다면, 그의 흡연행위가 매우 무례하고 매우 몰상식한 것임이 틀림없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건물 안에서 그 사실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었다.


이 사내가 바로 이곳의 총책임자이자, 대구·경북지역을 관할하는 3팀의 팀장이었으니까.


3팀장, 권일환이 꽁초를 튕기고 사뿐히 지르밟았다.


“기다리신다, 빨리 들어가자.”

“예.”


그리고 이 방의 주인이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권일환이 몸가짐을 바로 하고 정중하게 노크했다.


똑똑.


“3팀장입니다. 부르신 인원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들어와.”


권일환의 공손한 몸짓으로 문이 열리고, 방안의 전경이 드러났다.


과거, 구원상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방이었다. 본래라면, 익숙했던 장소. 하지만 그것조차 이미 과거가 돼 지금은 낯선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방 곳곳, 이런 곳에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방의 용도가 사무실인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고급스럽게 포장된 와인병들과 고급 커피 그라인더, 그 외 용도를 알 수 없는 사치품들.


“오! 우리의 영웅, 구원상이가 왔구먼!”


그리고 그중 가장 이질적인 존재가 두 팔을 벌려 그들을 맞이했다.


좋게 말하면 풍채가 좋고, 사심을 담아 말하면 뒤룩뒤룩 살찐 두꺼비와 같은 중년 사내, 그를 향해 구원상이 허리를 숙였다.


“부장님.”


1팀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내이자, 한 달 가까이 종적이 묘연했던 이. 국내 대응부의 부장, 박민상이었다.


“이야~ 구원상이! 내가 네 덕분에 살았어! 진작에 이렇게 불렀어야 했는데, 한잔할래?”


박민상이 와인병을 들어 권하는 시늉을 했다. 와인병은 아직 코르크로 단단히 밀봉돼 있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 하기야, 우리 구원상이 같은 성실한 인재가 대낮에 술을 마실 리 없지.”


그가 와인병을 내려놓았다.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몸짓이었다.


“근데 말이야, 구원상이.”

“예.”

“그 선글라스는 언제까지 쓰고 있으려고?”


그리고 만면에 띄웠던 미소를 지우고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구원상이 선글라스를 벗어 안주머니에 넣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딱딱하게 굳은 눈매가 드러나는 일이 없게.


“그래그래, 내가 그렇게 딱딱한 사람은 아니니까, 편하게 해, 응?”

“예, 감사합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육중한 무게에 의자가 끼익,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지른다. 박민상이 앞으로 몸을 기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온다.


“구원상이, 한 번만 더 고생 좀 해야겠어.”



***



“받아.”


구원상은 권일환이 건네온 은색 서류 가방을 받아들고 몸을 돌렸다. 어떤 이유도 묻지 않겠다는 담담한 태도이다.


그에, 되려 답답함을 느끼는 건 권일환이었다. 가슴팍에 묵직한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만 같아, 그가 담배를 꼬나물었다.


“원상아.”


구원상이 발걸음을 멈췄다.


“후, 넌 궁금하지도 않냐? 네가 그 물건을 왜, 어디로 운반하는지?”


구원상이 습관적으로 선글라스를 고쳐 쓰려다가 그만두었다. 딱딱하게 굳은 눈매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그럼,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어.”

“왜 이런 일을 벌인 겁니까?”


사투리가 섞이지 않은 담백한 어조가 정확히 핵심을 찔러왔다.


“그건 이미 말했잖아, 연구소에서 그 물건을 구외로 밀반출하려고 해서···.”

“팀장님, 그거 아십니까?”


구원상의 그의 설명을 싹둑 잘랐다.


“박 부장이 오고 나서부터, 팀장님, 많이 변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용건이 없다는 듯 검은 세단에 올라탔다.


홀로 남은 권일환이 피우던 담배를 힐끔 들어보고는 바닥에 내팽개쳤다.


“씁···.”


뒷맛이 썼다.



***



차에 올라탄 구원상이 시동을 걸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차체가 부드럽게 진동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라고 생각해보면, 그날의 일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비오는 날 밤, 갑자기 연락이 온 박 부장, 그리고 시체.


그날, 권일환과 그들은 도와선 안 되는 일을 도왔고, 결국 이런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 일의 핵심인 ‘물건’.


구원상이 저도 모르게 물건을 꽉 쥐고 말았다.


두근, 미약한 고동소리가 손바닥을 타고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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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53화. 21.09.20 14 0 13쪽
52 52화. 21.09.20 24 0 12쪽
51 51화. 21.09.18 11 1 13쪽
» 50화. 21.09.12 20 0 12쪽
49 49화. 21.09.12 2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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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47화. 21.09.05 23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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