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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님의 서재입니다.

괴물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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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작품등록일 :
2021.01.15 13:48
최근연재일 :
2021.10.02 21:00
연재수 :
5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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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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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4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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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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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54화.

DUMMY

구원상이 가파른 산길을 달렸다. 조금 전까지, 무사히 임무를 마쳤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내려왔던 산길은, 어느덧 완연한 밤이 찾아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불길함의 근원지는 명백했다.


“미친···!”


밤하늘에서 내리쬐는 창백한 달빛이 분지의 전경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건, 삼면이 가로막힌 분지에 자리 잡은 전망대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용트림을 하며 주변의 모든 것을 박살 내는 거대한 촉수 다발, 괴물이란 단어로밖에 치환할 수 없는 기괴한 존재들, 사방에 흩뿌려진 인간의 껍데기, 그 주변을 날고 있는 정체 모를 날벌레들,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재난을 피하고 있는 구도자들.


“아아아악!”

“살려주세요 제발!!”


그리고 괴물들과 날벌레들에게 생살을 뜯기는 사람들까지.


구원상이 거칠게 턱을 닫았다. 비릿한 피의 맛이 입안에서 차오른다.


탕!


하지만 그의 손은 무엇보다 기민하게 움직였다. 괴물을 죽인다, 그것이 자신에게 당면한 과제임을 모르지 않았다.


탕탕!


총구가 불을 뿜고, 괴물들이 쓰러진다.


“키에엑!”


괴물 하나가 총소리에 이끌려, 구원상에게 달려들었다.


탕!


초탄은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스쳤다. 저걸 ‘머리’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걸 보니, 최소 중요한 급소임은 틀림없었다.


방어는 굳건했다.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을 틈을 주지 않는다.


“키에에엑!”


괴물의 몸뚱이에 연달아 세 발의 총알을 꽂아 넣고, 구원상이 괴물을 맞이했다. 그의 다리가 하단을 쓸었다.


퍽!


로우킥이 제대로 들어갔다. 대강 무릎으로 추정되는 부위였다.


괴물이 비틀대는 사이, 구원상이 달려들었다. 권총을 쥐지 않은 왼 주먹을 맹렬히 휘두른다.


괴물이 팔을 들었다. 주먹을 막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머리를 빈틈없이 가리고 있던 가드가 한 꺼풀 풀렸다.


탕탕탕!


구원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괴물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었다. 괴물의 머리에 박힌 총알은 정확히 세 발이었다.


초근접 거리에서 빈틈을 유도해, 머리에 총알을 꽂아 넣는다. 구원상이 감염자들과의 전투에서 즐겨 쓰는 방식이었다.


풀썩.


괴물이 쓰러졌다.


그제야, 구원상은 괴물의 외형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었다.


몸 곳곳이 부풀어 오른,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삼아 찰흙을 아무렇게 뭉친 듯한 모습이다. 그 원형은 아마도···.


괴물이 옅게 숨을 헐떡였다.


“어, 엄마···.”


그리고 짧은 단말마를 남기고, 숨이 멎었다.


괴물의 머리에서, 도저히 핏물로 보이지 않는 투명한 액체가 반짝인다.


구원상이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표정이 나올 것 같을 때마다 하게 되는 습관.


그가 분노를 깊숙이 눌러 담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본분은 괴물을 죽이는 것. 아직도 그가 죽여야 할 괴물은 차고 넘쳤다.


그때였다.


바스락.


낯선 기척이 그의 감각을 자극했다. 구원상이 망설임 없이 총구를 돌렸다.


구원상이 돌아왔던 길에서 일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총과 헬멧, 특수부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익숙한 복장이었다.


그들의 총구는 모조리 구원상을 겨냥하고 있었다.


언제 방아쇠를 당겨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 그 긴박한 대치 속에서 구원상이 작게 투덜거렸다.


‘나도 장비 좀 더 챙겨올걸.’


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긴장감이 고조된다 싶을 때, 무리의 뒤편에서부터 한 사내가 걸어와 선두에 섰다.


“누구냐?”

“그쪽은 누구세요?”


구원상이 지지 않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구원상을 쓱 훑어보더니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대응국의 요원인가?”


회사를 알고 있어?


그러고보니, 촉수 다발이 너울거리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다. 나름 베테랑이라 자부하는 구원상이 경악한 그 광경을 보고도 말이다.


‘동종 업계? 아니, 동종 업계라고 해봐야···.’


“총 내려. 우리는 안보실에서 나왔다.”


안보실? 대응국의 그 안보실?


“연구소 경호 담당하는 곳이요?”

“맞다. 그러니까 총 내려. 우리끼리 싸울 필요는 없어.”


연구소의 프로젝트, 물건, 국장, 정부, 새로운 연구시설, 안보실.


조각조각 났던 단서들이 하나둘 맞춰진다.


“이런 미친! 당신들 설마!”


원래의 말투도 잊은 채 험악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선두의 사내가 힐끔 시계를 봤다.


“시간 없다. 그냥 제압해.”


그의 명령에 따라, 수십의 그림자가 구원상에게 달려들었다.



***



“으엑, 진짜 무식하게도 움직였네. 자의식이 남아있었나? 아니면 그냥 생존본능? 어차피 남은 수명은 몰랐을 텐데? 신기하네. 차 수석님은 도대체 요놈한테 뭘 하신 거야?”


흰 가운의 사내, 윤홍신이 서류 가방 안의 살덩이를 쿡쿡 찌르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성총으로 만들어진 촉수 다발은 모두 힘을 잃은 채 바닥에 널브러졌고, 간신히 목숨을 유지 중인 살덩이는 서류 가방 안에서 옅게 맥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죽기 전의 마지막 헐떡거림 같다며 윤홍신은 그걸 괴롭히고 있었다.


“윤 선임, 일은 끝난 건가?”


그 뒤편의 사내가 그를 불렀다. 구원상의 제압 명령을 내린 안보실장이었다.


“아, 실장님. 요놈 수명은 이제 30초도 안 남았어요. 원래는 딱 한 시간 정도 날뛸 수 있게 목숨을 붙여놨는데, 요게, 요놈이, 워낙 거칠게 움직이는 바람에 더 짧아졌네요. 에잇, 한 시간밖에 남지 않은 생명을 30분 만에 태워?”


나뭇가지로 살덩이를 맹렬히 찔러대는 그를 뒤로하고, 안보실장이 시계를 힐끔 확인했다. 넉넉하게 시간을 맞췄다.


그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차 수석, 안보실장입니다.”



***



잠시 자리를 비웠던 차진성이 연구소장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했다.


그에, 정의신은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끼며 그들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들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끝나고, 연구소장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뒷정리까지 마쳤다는군.”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의신은 모르지 않았다.


그가 딱딱하게 굳은 안색을 풀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니, 도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자그마치 몇 년 동안 공들였던 시설이었다. 구도자를 모으고, 비밀리에 건물을 세우고, 운용하는 데까지,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곳에 투입된 물적·인적 자원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하여, 정의신은 도저히 묻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언제 알았든, 어떻게 알았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연구소장이 커피를 홀짝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엉터리 누명을 벗어야 할 때가 왔군.”


그 말에, 이 이상 경직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었다.


정의신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시, 전화 좀, 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연구소장의 침묵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그가, 건성으로 인사를 남기고는 황급히 소장실을 빠져나갔다.


벌컥.


문을 닫을 생각도 않고 멀어지는 그를 보며, 차진성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소장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자칫하면, 아드님이 위험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그놈들의 성정이라면, 반드시 아드님께 위해를 가할···.”


탁.


가볍게 커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연구소장의 시선은 이미 서류 뭉치에 고정된 채였다.


차진성에게는, 지독히도 익숙한 침묵이었다.


그는 무언의 축객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



- 박 부장!

“예, 예!”


평소의 정의신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다급한 목소리에, 박민상이 허둥지둥 대답했다.


- 어디서 정보가 샌 지는 몰라도, 계획이 들통났어! 제기랄, 얼마나 공들였던 시설인데···.

“설마, 지리산의 그 시설이 들킨 겁니까?”

- 들킨 정도가 아니야! 그 미친놈들이 아예 박살을 내버렸다고!


평소의 가면을 던져버리고, 그는 숫제 울부짖고 있었다.


박민상이 하얗게 질려 물었다.


“그, 그, 그럼 어, 어떻게?”


윗분들에게 연구소의 초법적 권력은 항상 눈엣가시였다. 정확히는, 그 권력을 꽉 쥐고 연구소장이.


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연구소장을 건들 수 없었다.


연구소 내에서 연구소장의 위상은 그야말로 압도적, 차라리 광신에 가까웠다. 애초에 연구소의 정체성이 연구소장 밑으로 똘똘 뭉친 구도자 집단이었으니 말이다.


애국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주제에, 소장을 향한 충성심만큼은 어디에도 지지 않는 미친 작자들이다.


극단적으로, 연구소장이 타국으로 본거지를 옮긴다면,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쪼르르 따라갈 자들이었다. 한둘도 아니고, 연구소의 구도자 전원이.


고로, 연구소장의 팔다리를 잘라내기 위해서는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하지만 그런 작업이 계속 난항을 겪자, 윗분들은 결국 최후의 대책을 꺼내기에 이른다.


연구소를 대체할 만한 시설을 먼저 만들고, 하나둘 연구소의 팔다리를 잘라낸다. 처음은 대응국, 그다음은 예산,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연구소의, 연구소장의 완전한 축출을 목표 삼는다.


그래서, 지리산의 시설은 이번 계획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절대로 들켜선 안 될 시설인 것이다.


그런데, 들키다 못해 시설 자체가 통째로 박살 났다고 한다.


- 박 부장, 잘 들어.


얼굴에 핏기란 핏기가 모조리 걷힌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정의신이 목소리를 깔았다.


“예, 예. 드, 듣고 있습니다.”

- 지리산 시설뿐만의 문제가 아니야. 밀반출 건에 대해서도 분명 찔러 올 거야.


국자의 자산을 해외로 밀반출한다. 되도 않는 명분이었으나, 처음엔 문제 될 게 없었다.


지리산에서 비밀리에 운용 중이던 시설은 훌륭하게 연구소의 대체재로 자리잡고 있었고, 그 든든한 대체재 덕에 연구소의 눈치 따윈 볼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역전됐다.


“그, 그럼, 제, 제가 어, 어떻게?”

- 어르신들은 분명 이번 일을 ‘모르는 일’로 처리하실 거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겠지?


윗분들이 꼬리를 자른 거란 뜻이었다. 그리고 이번의 꼬리는, 정의신과 박민상 자신이었다.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박민상에게, 정의신이 말했다.


- 박 부장, 아니 박민상! 그 자리, 당신 목줄이라도 간수하고 싶다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똑똑히 새겨들어.

“예, 예!”

- 우리는 이번 일을, 없던 일로 만들어야 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없던 일로 만든다.


그 말에 박민상은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 그 망할 물건은 이미 사라졌으니까, 당신은 관계자를 처리해.


증거인멸.


정의신은 지금 박민상에게 이번 일과 관련된 이들을 죽이라, 말하고 있었다. 이진호와 이유영···


- 이번 일과 관련된 놈들 모두.


그리고 권일환과 관련된 3팀의 요원들까지 전부.


- 어때? 한번 해봤던 일이니까, 할 수 있겠지?


그는 이미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잊을 수가 없었다.


지원팀장 도경진.


매일 밤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 그게 우리 둘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뚝, 통화가 끊겼다.


박민상이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마른세수를 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의 감촉이 얼굴 위로 와닿는다.


그의 시야 끝에, 문득 와인병 하나가 걸렸다.


그가 와인병을 집어 들어 병째로 들이켰다.


꿀꺽꿀꺽.


입안을 가득 채우고, 입가로 흘러넘칠 때까지.


“크으···.”


그가 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화끈한 감각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위장에서 벌벌 끓는다.


어느새 떨림은 멎어, 흔들림 없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었다.


“권 팀장. 믿을 만한 애들로, 몇 명 추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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