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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님의 서재입니다.

괴물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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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작품등록일 :
2021.01.15 13:48
최근연재일 :
2021.10.0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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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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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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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51화.

DUMMY

뚝.


물방울이 머리를 간지럽혀 눈을 뜬다.


뽀그르르.


웬 중년 사내가 불투명한 연녹색 액체에 담겨 가만히 시선을 던져온다.


머리가 혼란스럽다. 여기는 어디지? 방금까지 분명, 3팀의 심문실에서···.


의문이 꼬리를 무는 사이, 중년 사내가 다가온다. 유리통의 곡률에 볼록하게 구부러진 얼굴을 들이밀며, 무어라 중얼거린다.


‘······.’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무언가를 살핀 그가 홱 몸을 돌린다. 성큼성큼, 시야의 끄트머리로 걸어가 무언가를 잡아끈다.


무언가 흰색 천으로 덮여있다. 시야에 가장자리에 위치해 잘 보이지 않는다.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려봤지만 역시 무리였다.


중년 사내가 그것을 끌고 온다.


드르륵, 바퀴가 구른다. 흰색 천 밑으로 드러난 스테인리스 다리가 차갑게 빛난다.


기묘한 기시감이 든다. 어쩌면, 데자뷰일 지도 몰랐다.


그만큼, 익숙한 장면이다.


분명, 언젠가 본 적 있는 장면이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어쩌면, 수십 번도.


중년 남자가 흰색 천을 젖혔다. 그 위에 올려진 창백한 몸뚱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진호는 그 몸뚱이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


뽀그르르.


기포가 구름처럼 일어난다. 이진호는 이제야 깨달았다. 연녹색 액체에 담긴 건 저 중년 사내가 아니라,


이진호 자신이었다.


중년 사내가 다시 다가온다.


이제 이진호는 그의 정체마저 깨닫는다.


‘아버지.’


뽀그르르.



***



“끄으으.”


모래알이라도 한 움큼 씹어 삼킨 듯 입안이 꺼끌꺼끌하다. 그것은 눈 또한 마찬가지여서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간단한 행위조차 따끔한 통증을 유발할 지경이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부림치던 이진호는, 문득 부유감을 느꼈다. 그리고 부유감을 느끼기 무섭게 그의 몸은 콘크리트 바닥과 장렬히 입맞춤하고 말았다.


쿵.


그 충격 때문일까, 전신을 갉아먹어 오던 통증이 한층 가신 기분이다.


이진호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회색빛 천장이 그를 반긴다. 미처 도색되지 않은 콘크리트 천장이 그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의 옆에는 초록색 간이침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세 평 남짓한 공간에 가구는 그것 달랑 하나. 그 외에는 회색빛으로 황량했다.


마치 그의 머릿속과 같다.


콘크리트 바닥의 서늘한 감촉과 함께 서서히 현실감이 되돌아온다.


악몽은 어느덧 꿈결조차 남기지 않고 휘발돼 흐릿한 기억조차 남기지 않았다. 대신, 명료히 되살아나는 적대함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구원상, 이 새끼···!”


그를 떠올리자 절로 이가 갈렸다. 구원상과 3팀이 회사를 배신했다는 사실보다, 이 망할 자백제의 후유증을 다시금 경험하게 했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적대감을 더더욱 불태우게 만들었다.


‘넌 기필코, 가만 안 둔다.’


고통으로 연신 끙끙대며 한 차례 다짐을 되새기는데, 갑자기 철문의 배식구가 열리며 무언가 빠르게 미끄러져 왔다.


“밥이다.”


경상도 사투리의 억센 억양이 그것의 정체를 알렸다.


이진호가 머리에 와닿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바스락거리는 포장지의 감촉이 왜인지 익숙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의 정체는 이진호에게 익숙하다 못해 정겨운 것이었다.


초고열량 완전보존식, 일명 초코바. 구원상이 부르기를 똥식.


‘밥? 이게 밥이라고?’


아무리 초코바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이진호라고는 하나,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건, 명백히 비인도적인 대우였다.


“이걸 밥이라고 줘? 이런 씨발!”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나 싶어, 이진호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그 우려는 금방 불식되었다. 옆방에서 재차 노호怒號가 터져 나온 탓이었다.


“담배라도 주던가! 이 개새···!”


엄청난 육두문자의 향연이 이어졌다. 이것 또한 익숙하다 못해 정겹다. 순간, 자신이 1팀에 복귀한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옆방에서 노발대발하는 여자의 정체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영 선배!’


그가 그토록 찾고자 한 이유영이었다.


이진호가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콘크리트 벽을 두드렸다.


짧게 한번, 길게 두 번, 짧게 세 번, 길게 한번···.


[ 진호입니다 선배님 거기 계십니··· ]


“야, 옆방. 새로 들어왔냐? 좆같이 벽 두드리지 말고 말로 해, 말로.”

“······.”

“야, 안 들리냐?”

“···선배님, 저 진홉니다.”

“오, 이진호! 구해주러 왔구나!”

“아뇨, 저도 잡혔는데요.”

“······.”

“······.”



***



분명 못다 한 회포를 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장소였으나, 이진호는 경악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예!? 부장님이 이곳에 있다는 말입니까?”

“어, 아주 잘 지내는 모양이던데? 독두꺼비가 살이 더 포동포동하게 올랐더라고.”

“아니, 도대체 왜···.”


쾅!


철문을 두드리는 강렬한 소음이 이진호의 말문을 막았다. 곧바로 짜증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거기! 아저씨들! 조용 좀 하라고! 당신들 지금 감금돼 있어요! 여기 아저씨들 안방 아니니까, 그만 좀 떠드세요!”


이런, 안타깝게도 이번 간수는 인수인계를 제대로 받지 못한 모양이다.


이유영이란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말이다.


“닥쳐! 이 고자 대머리 새끼야!”


역시.


간수고 나발이고, 아주 화끈하게 응수한다.


곧이어, 어린이들도 볼 수 있는 TV 드라마나 영화라면 온종일 묵음만 들어야 할 정도로 심한 단어들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이익! 이 아저씨야! 니가 아무리 선임 요원이라 케도, 봐주는 데 한계가 있다!”

“꼬우면 들어와 보든가, 아니면 ** 떼고 **에 총구멍이나 박아, 이 등* 새끼야. 아마 총도 역겨워서 헛구역질하다가 니 **에 총알을···.”

“이, 이, 이! 이 여자가 미쳤나, 진짜!”


와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신선한 욕설의 조합이다. 여기가 미국 디트로이트의 언더그라운드 공연장이었으면, 박수의 갈채와 함께 열혈한 환호가 쏟아져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말다툼이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진호는 그들에게 신경을 끄고 홀로 생각을 정리했다.


3팀을 움직여 물건을 탈취한 건, 박민상 부장이다. 그가 이곳에서 암약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로도 놀라웠지만, 이진호가 더 놀란 부분은 그가 이번 사건의 배후였다는 점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박민상은 이런 일을 저지를 깜냥이 되지 않았다. 박민상에게 감히 연구소에 반기를 들 배짱 따윈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박민상이 약을 먹고 정신줄을 놓은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배후가 있는 것인가?


아무래도, 후자에 무게가 실린다.


‘두꺼비 부장을 조종하는 배후라 하면, 적어도 회사의 부장급 인사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란 뜻인데···.’


그런 인물은 몇 되지 않는다.


간수와 수감자의 욕 배틀을 뒤로하고, 이진호가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젠장, 이거 아무래도 잘못 걸린 거 같은데.’



***



“그래, 그 친구는 잘 갔어?”

“예. 출발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왔습니다.”

“그래, 좋아 좋아.”


박민상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면, 권일환의 표정은 한눈에 봐도 어두웠다. 수심이 깊게 내려앉은 표정이다.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부장님.”

“응?”

“정말 죄송합니다만, 인원들에게 최소한의 설명이라도 필요할 거 같습니다. 지금까진 군말 없이 잘 따랐지만, 설명을 요구하는 인원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번 일의 목적 정도는 제대로 설명해야···.”


쾅!


박민상이 거칠게 책상을 내려쳤다.


“누가! 어떤 놈이 감히 그런 불만을 갖는다는 거야!”


권일환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실수였다. 그에게 이런 말을 꺼내서는 안 됐다.


“···죄송합니다.”

“상급자가 명령을 내리면, 군말 없이 따르면 되는 것을! 그런 의문이나 갖고 말이야! 대체 회사 꼴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쾅!


책상 위의 물건들이 균형을 잃고 와르르, 무너졌다. 권일환은 그의 노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더욱더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전부 제가 팀원들을 다독이지 못한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권 팀장, 자네 얼굴을 봐서 그냥 넘어가지, 평소였으면, 어림도 없었어!”


사과가 통한 건지, 박민상이 노기를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예, 다시 한번 이렇게 사과드립니다.”


여전히 과할 정도로 정중한 사과였다. 그에, 괜스레 멋쩍어진 박민상이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크흠! 이봐, 권 팀장.”

“예.”

“우리는 이미 한 배를 탄 몸이 아닌가? 응?”


박민상이 육중한 몸을 일으켜 권일환에게 다가왔다.


“손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고, 현장에서 험한 꼴 볼 필요도 없고, 국내의 모든 관할구역을 거느리는, 출세가 보장된 자리.”


박민상이 양어깨를 꽉 붙잡자 오자, 퀴퀴한 술 냄새가 훅, 밀려들어 왔다.


“명심해.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내 자리는 자네 거야.”


양어깨를 붙들고 있는 두꺼운 손. 무엇이 그리 필사적인지, 피부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하게 어깨를 움켜쥔다.


그게 단순히 자신을 놓고 싶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잘게 떨리는 손을 감추고 싶어서인지, 권일환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를 탓할 마음 따위는 이미 깡그리 증발해버렸다. 눈앞의 불쌍한 인간이, 자신과 그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기에.


권일환이 음울한 눈으로 답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



권일환을 내보내고, 홀로 남은 박민상이 풀썩, 의자에 앉았다. 그 육중한 무게에 의자가 끼익, 비명을 질러댄다.


“쯧, 팀장이란 놈이, 이렇게 대가 약해서야.”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박민상 또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손을 잘게 떨었다.


그의 손이 다시 애타게 술병을 찾아가는데, 때마침 휴대전화가 거친 진동음을 토했다. 전화가 온 것이었다.


습관적으로 스피커 모드로 돌리려던 박 부장이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황급히 휴대전화를 들었다.


- 박 부장님, 물건은요?


잘게 떨리는 손을 꽉 부여잡고, 박민상이 대답했다.


“예, 방금 인원 하나를 딸려서 보냈습니다.”


다행히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 하나, 하나로 되겠어요?

“이번에 물건을 회수한 게 그 친구입니다. 권 팀장이 능력 있는 친구라고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 흠, 우리 박 부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믿어보겠습니다. 그래서, 물건은 언제쯤 도착할 거 같습니까?

“제가 한 시를 다투는 일이라 강조하고 또 강조했으니, 늦어도 한 시간 안에 도착할 겁니다.”

- 역시 박 부장님입니다. 아주 믿음직스러워요.

“껄껄, 제 얼굴에 금칠을 다 하십니다.”


몇 번의 공치사가 오가고, 상대가 화제를 돌렸다.


- 그러고 보니, 참 운이 좋았습니다. 그날엔 정말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하필, 박 부장님이 자리 잡은 곳으로 물건이 굴러들어올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하, 그렇습니다···.”


박민상이 어색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등골이 아찔했기 때문이다.


‘부장님, 설마···!’

‘이봐, 도 팀장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내 말을 들어보래도!’

‘서울로 올라가는 즉시, 정식으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부장님이 뭐라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이건 엄연한 이적행위입니다.’

‘이익! 도 팀장! 당장 거기 서! 거기 안 서!?’


탕!


‘쿨럭, 부장님···.’

‘아니야, 나는, 나는 이럴 의도가···.’


털썩.


아직도 떨쳐내지 못한 악몽이자, 그가 매일을 술로 지새우는 이유.


박민상이 손수건으로 연신 식은땀을 닦아냈다.


- 이번 일로, 제가 확실히 느낀 바가 있습니다.

“무, 무얼 말이십니까?”.

- 천운이, 하늘의 뜻이 저희에게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천운天運.


그는 지금 운명을, 하늘의 뜻을 말하고 있었다.


지원팀장에게 이적행위를 발각당한 것도, 결국 그를 죽여버린 것도, 도망치듯 3팀으로 와 한 달 가까이 숨어지냈던 일도.


결과적으로 이렇게 잘됐으니, 전부 하늘의 뜻이었던 거라고.


운명이 지금의 결과를 위해 이 모든 일을 안배한 거라고.


그러니까, 사람이 죽은 일은, 네가 매일 밤 꾸는 악몽은 그저 단순한 헤프닝일 뿐이라고.


그가 속삭이듯, 은근한 어조로 물어온다.


- 그렇지 않습니까, 박 부장님?


박민상은 문득, 갈증을 느꼈다.


물로는 채워지지 않을 갈증이, 간절히 알코올을 필요로한다.


그리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국장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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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52화. 21.09.20 25 0 12쪽
» 51화. 21.09.18 12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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