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농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최근연재일 :
2024.06.30 23:56
연재수 :
164 회
조회수 :
10,874
추천수 :
573
글자수 :
1,070,375

작성
23.08.07 06:45
조회
78
추천
4
글자
16쪽

착석 (14)

DUMMY

스니블의 개인 집무실 안에서, 스칼은 세상을 향해 분노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세 명? 고작 세 명이라고!"


스칼은 주먹을 꽉 쥔 채로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작은 방이었고, 그리 볼 것도 없었지만 스칼은 계속해서 방의 끝부터 끝까지 왕복했다.

기어이 분에 못이긴 스칼이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을 때, 결국 스니블에게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책상에 앉은 채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스니블은 서류를 내려 놓았다. 그러고선 한심한 눈으로 스칼을 바라보았다.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 진정하고 자리에 앉아 스칼. 여긴 내 집무실이야."


스니블은 차분하게 타일렀지만 스칼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스니블, 처음 열린 시노드는 첫 번째 만이 떠오를 시점이었다고. 그리고 지금은 벌써 네 번째 만이 떠오르고 있어! 지금까지 그 늙은이들에게 쓴 돈은... 빌어먹을! 북부 사람들 전체가 몇 달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야. 젠장할. 그런데도 그 놈들은 고작 세 명 밖에 우리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단 말이야!"


스칼은 눈에 띄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부숴버릴 듯한 기세였다. 다행히 그곳에 부술만한 것은 별로 없었고, 그래서 스니블은 조금 안도했다.

스니블은 의자를 돌려 스니블을 바라보고 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던 스니블은 의자 깊숙이 몸을 파 묻었다. 스니블은 그 자세로 나직하게 말했다.


"세 명은 많은 숫자야 스칼. 오히려 나는 세 명이나 되는 추기경이 우리에게 표를 던진 사실이 걱정스러울 정도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애초에 우리가 매수하려 했던 추기경들은 수십 명이라고. 그중 단 세 명만이 네가 대주교가 되는 일에 찬성했는데, 그게 많은 숫자라고?"


"많은 숫자야 스칼. 아마 어제 시노드가 끝난 후에 파스토르는 상당한 위협을 느꼈을 거야. 아마 지금도 느끼고 있겠지. 물론 네가 말한 것처럼 세 명이라는 숫자는 겉보기엔 적어. 그야 시노드에 참석한 추기경의 수나 우리가 매수한 인원을 생각해보면 그렇겠지. 하지만 스칼, 우린 그 늙은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그들의 입장? 그 놈들은 그냥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잖아. 그래서 우리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거고."


"아니, 그들은 추기경까지 오른 사람들이야. 내가 재미 삼아 매도하곤 하지만, 그 자리는 사실 운이나 인맥 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자리야. 한마디로 똑똑한 놈들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 대주교를 갈아 치우는 일은 파스토르를 적으로 돌린다는 말과 같아. 눈치 빠른 그 늙은이들은 그런 정치적 위험을 수반하고 싶어하지 않지. 그러니 아무리 많은 돈을 쥐어줘도 움직이지 않는 거야."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스칼이 이내 깨달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에게 돈을 받고서도 표를 주지 않은 놈들은, 주인을 무는 카니쿨라 꼴이 될까봐 겁 먹었다는 말이군!"


"그래. 주인을 무는 카니쿨라들의 최후는 뻔하지.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지금 파스토르는 의아함을 느끼고 있을 거야. 파스토르는, 우리가 어떻게 세 명이나 되는 추기경에게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일 걸."


스칼은 대주교가 곤란해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잠시 후 스칼의 얼굴에 희미한 만족감이 드러났다. 스니블은 속마음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게다가 세 명의 추기경과 두 명의 주교란, 파벌을 이루기에는 차고도 남는 숫자야. 시노드는 비밀 회합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공식적인 자리지. 그곳은 수도원의 가장 유력한 자들이 전부 모이는 곳이니까. 그런 자리에서 세 명이나 우리를 지지했어. 그 추기경 셋은 우리 파벌에 있다고 공표한 것과 다름없지. 이제 곧 저속한 정치적 압박이 시작될 거야. 그 세 명과 우리에게 말이야."


스칼이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젠장, 스니블. 내 생각엔 말야, 이런 방법은 너무 복잡하다고. 그냥 군대를 이끌고 중앙 신전을 장악하는 쪽이 훨씬 더 빠를 것 같은데. 우리가 당장이라도 그럴 수 있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지. 다만 그건 최후의 방법이야. 무력으로 대주교 자리를 찬탈하는 순간 정당성은 영영 확보할 수 없게 돼. 물론 그렇게 대주교가 되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순종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내가 통치하고 싶은 것은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야. 먹이와 매로 다스릴 수 있는 카니쿨라들이 아니라."


"혹시 그게 네가 말하는 사기꾼들의 방식이야?"


"아니 스칼."


스니블은 빙긋 웃으며 마저 말했다.


"이건 일류 사기꾼의 방식이야."


스칼이 알듯 말듯한 표정을 지었다. 스니블은 더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스니블은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의자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서류를 집어들었다.

스니블은 서류를 검토했다. 헤르바지로 만들어진 그 서류에는 수 많은 수치들과, 여러 도시들의 이름, 그리고 누구나 알만한 저명인사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빠른 눈으로 서류를 훑던 스니블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스니블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무벤."


아주 오래전 가 본 적이 있는 도시였다. 스니블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스칼이 곧장 물어왔다.


"무벤? 갑자기 그 잡종 도시는 왜?"


스니블은 잡종이라는 그 가감없는 수식에 작게 웃었다.

과격하고 거친 수식이었지만 스니블은 그럼에도 그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무벤은 잡종 도시다.

대륙의 거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고, 더불어 완전한 신성불가침 영역인 덕에 그곳에는 남부와 북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몰려든다. 그리고 그 탓에 무벤은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다.

종교와, 인종과, 화폐와, 언어와, 문화 같은 것들이 그렇다.

사는 곳이나 문화가 다르다는 점은 보통 분쟁의 씨앗이 되곤 하지만 무벤에서 그런 종류의 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곳이 피오 교단의 총본산이기 때문이다.


"파스토르는 사업을 이곳에서 시작하려나 봐. 하긴, 이곳 밖에 없겠지. 다른 도시로 유통하자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 테니까."


"음. 그런데 듣자 하니 자드는 다른 영지에서 유통하길 원하던데? 이름이 뭐였더라... 음 그러니까."


"그 카니쿨라 같은 놈은 패트릭 영지에서 유통하길 원했지. 속셈이 뻔히 보이는군. 무벤에선 그 유명한 자드의 손을 내키는 대로 휘젓지 못할 테니까, 다른 곳을 원한 거겠지."


"알겠다. 피오 교단 때문이지?"


"그래. 그곳은 중립 도시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인 걸. 그 놈들은 매일같이 조화니 균형이니 하는 것들을 부르짖는 주제에 왜 하필 무벤 같은 잡종 도시를 총본산으로 삼은 거야?"


스니블은 그 의문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했다.

스칼의 말처럼 피오 교단의 섭리는 조화와 균형이며, 그래서 얼핏 보기에 모든 것이 뒤섞인 그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보통 문화와 생활 양식이 다르다는 것은 분란의 요소가 되기 마련이다.

예컨대 북부에서는 2쿠퍼에 살 수 있었던 빵이 무벤에서는 5쿠퍼에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또 북부인들의 태도는 일반적으로 쌀쌀맞으며, 그 태도는 남부인들에게 지극히 공격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분란의 여지는 차고 넘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무벤에서 이렇다 할 큰 분란이 일어나는 경우는 없다.


무벤이 평화로운 이유는 상인들과 교단 사이의 미묘한 관계에 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상인이 득세하는 법이다.

무벤 역시 종교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상인들의 도시였다. 그리고 약삭빠른 무벤의 상인들은, 도시가 번성하기도 전에 교단에 기부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것은 서로에게 득이 되는 거래였다.

얼마 되지 않는 기부금으로 상인들은 가끔 나타나 행패를 부리는 무뢰배들을 처단할 수 있었고, 교단은 얼마 되지 않는 치안 수도사들의 활동으로 다량의 기부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순환이 몇 바퀴도 채 돌지 않아서 무벤은 자연스럽게 피오의 총본산 같은 곳이 되었다.


스니블은 스칼에게 무벤의 역사를 설파하는 일에 대해 잠깐 고민했다.

물론 고민에서 그쳤다.

스니블은 과거 스콜라리움의 교양 수업 시간을 떠올렸다. 당시 스칼은 수업이 이루어지는 날에 단 한번도 깨어있던 적이 없었다. 이제와서 교양을 주입한다고 해서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스니블은 복잡한 설명 대신 둘만의 좌우명을 따르기로 했다.

언제나 똑같다. 생각은 자신이. 행동은 스칼이.


"어떤 이유가 있겠지. 그보다 여장을 준비해야겠어. 우린 무벤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


"거긴 왜?"


"오피디아 잎이 사라지고 있어. 아무래도 무벤의 누군가 손을 대고 있는 모양이야."


"설마 컨트 그 자식이?"


스니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닐 거야. 컨트 시장은 소심한 데다가 자기 자신의 분수를 지나치리만큼 잘 파악하고 있는 인간이지. 물론 그곳에서 움직이는 막대한 부의 이동을 지켜보고 있자면 욕심이야 날 테지만... 그 인간이 이렇게 티 나는 방식으로 우리 물건을 가로챌 리는 없어. 양심의 문제라기보다는 배짱의 문제지. 컨트 시장은 그럴 만한 배짱이 없거든."


스니블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스니블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쳐 입었다. 그대로 방을 나가기 전 스니블은 명령하는 투로 말했다.


"내일 바로 출발할 테니 준비해."


"우리들만 가는 거야?"


"더글라스를 데리고 갈 거야. 대주교가 그를 추천하더군. 둘이 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뭐 썰매꾼 한 명은 있어야겠지."


스칼은 의아한 얼굴로 스니블을 바라보았다. 스칼은 스니블이 사안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잠시 후 스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은 자신이 질문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디스토니아 중앙 수도원이 북부의 머리라면, 스니블은 스칼의 머리였다. 스니블은 여태 한 번도 틀린 판단을 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스칼은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둘만의 원칙을 고수하기로 했다. 생각은 스니블이. 행동은 자신이.


"좋아 스니블. 그럼 내가 가장 빠른 카니쿨라들을 선별해 놓겠어."


스니블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스니블은 탁자 위에 있던 서류 중 몇 가지를 챙겼다. 그것들을 품 속에 마구잡이로 우겨 넣은 후 스니블은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북부에서 가장 은밀한 방을 향해 걸었다.



*



스니블은 자신의 대국 상대를 바라보았다.

바둑판 너머의 파스토르는 일견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그 미소에는 대주교라는 직책이나, 혹은 나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난스러움 같은 것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그리고 스니블은 그것이 다음 수가 막막한 사람의 표정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내내 장고하던 파스토르가 착수 대신 질문을 던져왔다.


"이번 시노드에서 세 명이나 너희에게 표를 던졌더군.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기가 막힌 수완이야. 칭찬하지."


"칭찬하실 필요 없습니다. 칭찬이라는 것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것이잖습니까. 부랑자가 지주를 칭찬하는 것은 우스운 꼴입니다."


바둑판에 집중하고 있던 파스토르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스니블은 이번에는 분명 그가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 예측은 빗나갔다. 파스토르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싱긋 웃으며 물었다.


"스니블. 기어코 대주교의 자리에 앉고 싶은 건가?"


"앉을 겁니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그 지루한 시노드를 네 번이나 개최하지 않았을 겁니다."


돌연 파스토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아이 같았던 노인은 갑자기 제 나이에 맞게 분위기가 변해버린 것 같았다. 파스토르의 얼굴에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그만 두는 것이 좋아. 그 계획은 너무 무모한 짓이다."


"무모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당신은 혼자서 너무 많은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사업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나면 더 확고한 권력을 쥐게 되겠지요. 그리고 사실, 그 사업은 실패할 수가 없는 종류의 사업이잖습니까. 그때가 되면 늦습니다."


파스토르는 대꾸하지 않았다. 파스토르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없이 바둑판을 바라보다가, 이내 한 지점에 착수했다. 두 사람은 얼마간 바둑을 두는 일에 집중했다.

두 사람의 바둑은 전체적으로 무난한 흐름이었다. 돌이 엉킨 곳이 없는, 한마디로 전형적인 집바둑이었다.

파스토르는 대세점을 잘 골랐고, 대세점이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는 언제나 집을 지키는 착실한 곳만 두어갔다. 대세를 살피던 파스토르가 다시 나직하게 권고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만두라고 말하고 있는 게다. 그 길었던 계획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려는 참이다. 지금 북부의 권력이 물갈이되는 것은 혼란만 야기할 뿐이라는 점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네가 대주교가 되고 싶다면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되어도 늦지 않아. 그 때가 되면 시노드를 열 필요도 없겠지. 너는 내가 물러난 자리에 그저 앉으면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한 다음 파스토르는 착수했다. 이어서 스니블이 곧바로 백돌을 놓았다. 매 수마다 장고하는 파스토르와 달리 스니블은 거의 즉각적으로 백돌을 두고 있었다.

스니블의 착수에 파스토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스니블이 놓은 백돌은 아무리 생각해도 흑의 진영에 너무 깊게 침투해 있었다. 파스토르는 미심쩍은 얼굴로 스니블을 바라보았다.


"서두르는 이유라도 있는 게냐?"


"스라바의 보고를 듣자 하니, 두 번째 성물 역시 남부인이 차지했더군요."


"그런 이유였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타 일들이야 예상과 추측이 가능하지만, 그것들은 제 스스로 주인을 고르기에 종잡을 수가 없지. 하지만 스니블, 어째서 그런 이유로 초조해 하는 거냐? 그것이 신의 뜻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네가 잘 알 텐데."


"신의 뜻이기에 초조한 겁니다. 대륙의 우매한 사람들이 저희의 뜻을 곡해하고서 등을 돌려버리는 것이야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이 저희를 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언제나 두려운 것 아니겠습니까."


"으음..."


침묵 속에서 다시 몇 차례 돌이 오갔다. 그리고 차분하게 바둑판을 들여다보던 파스토르는 어느 시점에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 파스토르는 조금 전 스니블이 착수한 수가 무리수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더라도 그 수는 흑 진영에서 살아남기 힘들어 보였고, 따라서 흑집에 백 한 점을 보태준 꼴이 분명했다.

하지만 무리수라고 생각했던 그 백돌은 어느새 활로를 만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원래 두터웠을 흑 진영을 반대로 압박하고 있었다.

한참 수읽기를 하고 나서 파스토르는 마침내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눈치챘다. 더 이상 공격하다간 자칫 역으로 내몰릴 위기였다.

어쩔 수 없이 파스토르는 중앙 부분에 지어질 예정이었던 흑집을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반대편에서 집을 짓기 위해 다시 두터운 수로 받아쳤다.

파스토르는 착수했다. 다음 순간, 스니블이 대주교가 착수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착수했다.

스니블이 놓은 수의 의미를 파악하던 대주교는 이내 둥그래진 눈으로 고개를 들고 스니블을 바라보았다. 스니블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니블은 외투를 챙기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대주교님의 지시대로 내일 아침 일찍 스칼과 함께 무벤으로 떠나겠습니다."


스니블이 정말 그대로 나갈 기세여서 대주교는 황망한 기분으로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 스니블, 복기는..."


"대마가 잡힌 바둑이니 굳이 복기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십쇼."


그 말을 끝으로 스니블은 대주교의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파스토르는 멍한 얼굴로 스니블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종내에는 다시 바둑판에 집중했다. 하지만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파스토르는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실수했는지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인간농장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6 다면기 (9) 23.10.03 19 3 14쪽
75 다면기 (8) 23.09.28 31 3 13쪽
74 다면기 (7) +1 23.09.28 28 2 17쪽
73 다면기 (6) 23.09.24 55 3 13쪽
72 다면기 (5) 23.09.23 32 2 12쪽
71 다면기 (4) 23.09.21 37 3 12쪽
70 다면기 (3) 23.09.18 35 3 16쪽
69 다면기 (2) 23.09.17 37 3 18쪽
68 다면기 23.09.16 34 3 13쪽
67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3) 23.09.16 37 3 17쪽
66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2) 23.09.15 38 4 12쪽
65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1) 23.09.09 39 3 16쪽
64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0) 23.09.09 35 3 17쪽
63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9) 23.09.05 43 4 17쪽
62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8) 23.09.03 45 4 16쪽
61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7) 23.08.31 45 4 15쪽
60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6) 23.08.30 45 4 15쪽
59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5) 23.08.29 40 4 16쪽
58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4) 23.08.28 46 4 21쪽
57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3) 23.08.27 41 3 21쪽
56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 +1 23.08.10 63 6 19쪽
55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3.08.10 53 5 17쪽
54 착석 (15) +2 23.08.08 66 5 16쪽
» 착석 (14) 23.08.07 79 4 16쪽
52 착석 (13) +2 23.08.03 138 6 19쪽
51 착석 (12) 23.08.03 63 6 17쪽
50 착석 (11) 23.08.01 61 8 15쪽
49 착석 (10) +1 23.07.31 70 7 17쪽
48 착석 (9) +1 23.07.30 70 6 20쪽
47 착석 (8) +1 23.07.27 65 8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