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X 스페이스 도크 오케아노스. 뉴 에덴. (3)
함교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오로지 탁 트인 넓은 전면 창 너머로 비치는 지구의 모습만이 은은한 푸른빛을 내며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데커드와 수경, 그리고 지구 사이에는 등을 돌리고 뒷짐을 진 채 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한 남자가 서 있을 뿐이었다. 데커드는 총을 겨눈 채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외쳤다.
“조나단 사일러스! 당신을 테러 모의와 살인 등의 혐의로 체포합니다! 무기를 버리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십시오!”
조나단 사일러스는 데커드의 외침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창밖을 응시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스티코프는...... 당신이 죽였소?”
그의 어조는 담담했다. 수경이 답했다.
“데커드씨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그는 이미 증후군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어요.”
“......안 됐군. 모두를 내보낸 순간까지도 끝까지 내 옆을 지킨 친구였는데. 안타깝게 되었구려.”
그때였다. 실내에 합성된 음성이 무미건조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테라포밍 프로시저 작동 시작. 시스템 안정성 테스트...... 완료. 카탈리스트 활성화 프로시저 시작. 전자기장 필드 스탠바이......”
“시작되었군......”
조나단 사일러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데커드는 권총을 겨눈 채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만 하시죠, 사일러스씨. 이제 다 끝났습니다. 당신과 말장난을 하기 전에 빨리 이 미친 짓을 끝내야겠습니다.”
“너무 늦었소, 데커드씨.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소. 이제 몇 분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될 것이오.”
“당신은 맹목적인 복수심과 증오에 사로잡혀 저 아래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당신 하나 때문에 사라져간 저 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사일러스씨, 당장 시스템을 중지시켜요. 그렇지 않으면......”
“쏠 테면 쏘시오. 데커드씨. 여기서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분하고 담담했다. 문득 데커드의 눈에 그의 허리춤에 꽂혀있는 플라즈마 권총이 눈에 들어왔다. 쏘아야 하나. 데커드가 망설이는 순간 조나단 사일러스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의 한 손에는 작은 열쇠가 들려 있었다. 여전히 총을 겨누고 있는 데커드를 향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위대한 진보와 발전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소. 물론 그렇게 믿을 수 있지요. 지난 수 세기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의 역사는, 우리가 거대한 우주 속 위대한 존재라는 믿음을 흔들림 없이 지탱해 줄 만큼의 경이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위대한 개척자들의 희생, 용기. 그 모든 것들이 신화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데커드씨. 당신도 보았겠지요. 사람들은 빛이 드리우는 어둠에 대해 너무 쉽게 잊어버렸소. 한 때, 위대한 개척자들로 찬양받던 이들은 허울 좋은 포장에 싸인 채 박물관의 박제가 되어버렸고, 그 후손들은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소. 사람들은 위대한 신화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만, 현실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소. 별의 아이들은 그렇게 어둠 속에, 망각 속에 버려져 있었소. 그리고 이제 모두가 그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위대함 속에 포장되었던 추악한 역사를 다시금 일깨우면서 말이오.”
“궤변은 그만두시죠, 사일러스씨. 저 사람들이 별의 아이들에 대해서 망각해버린 채 만들어진 신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 하더라도, 당신은 무고한 수십억의 사람들의 삶을 걸고 도박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당신이 생각하는 코흐 효과와 프락시스의 변형에 대한 것도 결국은 믿음의 영역일 뿐입니다. 사일러스씨 당신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어리석고 무모한 게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상관없소. 설혹 프락시스와 오네시무스 증후군이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저 불쌍한 라이언 회장은 잘못된 진실을 지키려다 개죽음을 당한 꼴이 되는 것이겠지. 데커드씨, 처음으로 <에덴>의 B-8 모듈의 텅 빈 잔해 앞에 섰을 때, 나는 깨달았소. 지난 수 세기 동안 인류가 만들어낸 우주 개척의 신화 아래에서, 나는 다른 신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만들어지고 포장된 신화가 마치 인류가 별을 향해 나아가는 동력을 주듯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받고 있는 비참한 사람들에게도 무언가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오늘 우리는 전 인류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 신화를 새로이 쓸 거요. 우리의 피와 눈물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그때 갑자기 침묵을 지키던 수경이 말했다.
“하지만...... 제이콥이라면...... 그 아이는 순수한 마음으로 증후군 보유자들의 구원을 바랬어요. 하지만 이런 끔찍한 짓은 결코 원하지 않았을 거에요. 당신이 만들어낸 허상, 당신이 만들어낸 잘못된 믿음이 그 아이를 비참한 죽음으로 몰고 간 거에요.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잘못된 믿음 아래서 피를 흘릴지 생각해 봤어요? 사일러스씨! 제이콥, 그리고 당신의 부인......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게 진정 이런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그저 피에 굶주린 복수귀일 뿐이에요! 제발, 제이콥이 기억하던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는 없는 건가요?”
수경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격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조나단 사일러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것은 피와 투쟁이오. 수천만의 별의 아이들은 이미 끊을 수 없는 굴레 속에 갇혀 있소. 이미 당신들은 무관심이라는 칼로 별의 아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었소. 나는 오늘 그 굴레를 끊어낼 것이오. 별의 아이들이 침묵 속에서 죽어갈 날 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와 삶을 위해 투쟁과 피의 역사를 써내려 갈 수 있도록, 내가, 우리가 그 첫 페이지를 완성해낼 것이오. 슬프지만 지금 저 아래에 펼쳐져 있는 거짓 신화의 세계에서 제이콥이 바랬던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거요. 제이콥도 마지막 순간에는 그것을 깨달았겠지......”
말을 마친 조나단 사일러스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그리고 혼잣말하듯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이것이 우리가 이룬 것이오.”
방금 전, 함교에 들어오기 전에 보였던 검은 우주선 한 대가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천천히 선회하고 있었다. 중무장한 보안국의 구축함이었다. 순간 우주선의 기수에서 푸른 섬광이 번뜩였다. 섬광이 향한 곳에 있던 작은 우주선 한 대가 순식간에 빛과 화염에 휩싸이더니 수많은 잔해를 먼지처럼 흩뿌리며 사라졌다. 우주선이 있던 곳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잔해의 구름만이 남아 있었다.
구축함이 향하는 곳에는 수많은 소형 우주선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 중 단 하나도 초계함의 공격에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망칠 의사조차 없는 듯 했다. 작은 우주선들은 다가오는 무자비한 검은 도살자 앞에서 대형을 이룬 채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곳곳에서 섬광이 번뜩이며,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지고 있었다.
데커드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순간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곧 그는 지금 펼쳐지고 있는 저 피의 향연, 그리고 조나단 사일러스의 마지막 말이 지니는 의미를 깨달았다. 별의 아이들은 스스로를 구축함의 포화에 노출시킴으로써 프락시스의 구름을 지구 상공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이제 곧 있으면 카탈리스트가 이제 저 구름 속으로 파고들어 프락시스를 지구 대기 전역으로 실어 나를 것이었다. 라이언 회장이나 조나단 사일러스, 두 사람의 말 어디에 진실이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뉴 에덴>은 자신의 일을 할 것이었다. 그때 실내에 다시 한 번 무미건조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전자기장 필드 준비 완료. 카탈리스트 발사 준비 완료. 발사 카운트 스탠바이......”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데커드는 조나단을 향해 재빨리 몸을 돌렸다. 이미 권총의 방아쇠를 쥔 손가락에도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함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데커드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균형을 잡으려 애쓰면서 데커드는 조나단 사일러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조나단 사일러스 역시 애써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조나단 사일러스의 손에 역시 권총이 들려있었다. 그는 균형을 잡으려 애쓰면서도 팔을 들어 권총으로 데커드를 조준했다.
섬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진동이 잦아들었다. 다음 순간, 조나단 사일러스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너무나도 힘없이 쓰러지는 그를 바라보던 데커드는 갑자기 허리에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피에 젖은 자신의 복부가 들어왔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는 그대로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데커드씨! 데커드씨! 안돼요. 여기서 쓰러지면 안돼요. 오, 제발......”
수경이 그에게 달려와 다급하게 그의 손을 잡으며 울부짖었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온 몸에 타오르는 듯한 통증이 전해져 왔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데커드는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쓰러져있는 조나단 사일러스를 바라보았다. 조나단 사일러스는 쓰러지면서도 여전히 한 손에 열쇠를 꼭 쥐고 있었다.
데커드는 말 없이 그녀가 조나단 사일러스에게 달려가 그의 손에 쥐어진 열쇠를 빼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쓰러진 조나단 사일러스가 힘겹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수경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데커드는 온 힘을 기울여 간신히 몇 단어만을 들을 수 있었다.
“......별의 아이들에게...... 희망...... 프락시스...... 잊혀질...... 치료를......”
힘겹게 몇 마디를 하고 조나단 사일러스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의 낡은 코트 주머니 사이로 낡은 사진 하나가 반 쯤 빠져나와 있었다. 사진의 얼굴은 옷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가 짧은 금발머리였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데커드의 눈에 문득 열쇠를 들고 함교의 콘솔로 다가가는 수경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열쇠를 손에 꼭 쥔 채 콘솔 앞에 섰다. 데커드는 그녀가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데커드는 문득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우주 공간에서 빛나고 있는 수많은 별들이 보였다. 문득 그의 눈에 꿈에서 본 것 같은 흰 빛의 줄기가 내려왔다. 빛줄기는 검은 우주를 가르며 그 주위로 부드럽게 빛나는 안개를 흩뿌리고 있었다. 데커드의 마음이 한순간 평온해졌다. 어느새 랜스 데커드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남아있었다.
빛이 참 아름답다.
- 작가의말
근래 장인어른이 편찮으셔서 연재가 많이 지연되었네요.
다음회를 마지막으로 저의 처녀작을 마무리지으려 합니다.
끝까지 기다려주신 독자분들께 많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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