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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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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연재수 :
98 회
조회수 :
92,296
추천수 :
2,887
글자수 :
580,477

작성
21.09.19 14:48
조회
271
추천
11
글자
16쪽

18. 급전직하急轉直下(2)

DUMMY

창현은 뒤를 쫓는 자들의 존재를 느끼고 전력을 다해 뛰고 있었다. 입에서 단내가 뿜어져 나왔다. 터질 듯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단지 육체의 고단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배반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중압감이 지금 창현을 숨도 못 쉬게 할 만큼 강하게 짓누르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헉... 헉...!"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명모가 수련하던 그 장소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명모는 눈앞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그를 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엉거주춤 칼을 뻗고 선 모습이 저으기 당황한 것 같았다.


"너... 뭐하냐?"


원래부터가 매끄럽게 말하는 법을 모르는 그였지만 지금은 더욱 그랬다. 불안한 모습으로 자꾸만 뒤를 돌아보던 창현이 다급하게 명모의 어깨를 붙잡았다. 움찔움찔 떨리는 긴장감이 손바닥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네 말대로 내가 나대길 좋아하는 개새끼여도, 그래도 말이야... 넌 나를 믿어주겠지?"


"어... 어?"


"따라와.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


"야!"


그 말만 내뱉고 창현은 숨도 제대로 돌리지 못한 채 다시 뛰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그를 따라 뛰긴 했지만 명모는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어 찌푸린 인상을 펴지 못했다. 그들은 땅거미가 깔릴 무렵까지 계속해서 뛰었다.


마침내 하늘이 남보랏빛으로 물들고, 어두컴컴하게 우거진 어느 수풀 사이에서 창현과 명모는 멈춰 섰다. 명모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외쳤다.


"이제 진짜 더는 못가!"


창현은 더 움직이고 싶었지만 명모의 상태를 보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언뜻 봐도 탈진한 모습이 완연했던 거였다. 그는 한마디 외친 후로 계속 숨만 헐떡거렸다.


물론 창현도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뒤통수를 간질이며 따라붙던 정체불명의 인물들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결국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와서야 맘 편히 자리에 앉았는데, 다행스럽게도 반나절 넘게 이어지던 추격의 낌새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평생을 산에서 살아왔으니 누구라 하라더라도 그들의 뒤를 쫓기란 만만치 않았을 테다.


"헉... 헉... 야... 이제 됐냐? 대체 무슨 일인데?"


아직까지 진정되지 않은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종아리를 주물럭거리는 폼이 어지간히도 힘든 모양이었다. 창현도 그와 비슷하게 숨을 고르면서 대답했다.


"정택... 아저씨가 돌아왔어."


"뭐? 근데 그게 어쨌다고 이 지랄을 하는 거야. 좀 빨리 끝났겠지! 힘들어 죽겠네."


"그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 건데?"


창현은 크게 한숨 들이쉬고 낮에 그들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정택이 보였던 태도와, 무기를 들고 압박해오던 정체불명의 사람들. 그들의 추격과 도망에까지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때는 이미 명모의 표정도 바뀌어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그.. 사람들이 뭣 때문에 널 쫓았다는 거야? 너 무슨 죄지은 거 있냐?"


"그럴 리가 있겠냐. 나도 몰라. 근데 너 같으면 칼 들고 덤비는 데 좋게 볼 수 있겠어?"


"당연히 아니지! 이런 씨발.. 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구만. 대체 정택 그 새끼는 정체가 뭐야. 처음부터 맘에 안 들긴 했어."


"그리고 떠난 지 나흘밖에 안 됐잖아. 같이 갔던 사람들도 안 보였어.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야."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당면한 상황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다. 물론 그런다고 당장 뾰족한 수가 튀어나와 줄 리 만무했지만 넋 놓고 있을 수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 수 없음과 모름. 고심 끝에 겨우 도출한 결론은 그 두 가지 단어뿐이었다. 마침내 명모가 인상을 구기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어댔다. 간만에 머리를 쓰자니 없던 두통마저 밀려드는 것 같았다.


"아 젠장. 뭐가 뭔지 원..."


그때 옆에서 같이 인상을 쓰던 창현이 무언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덩달아 명모도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아씨 깜짝이야. 뭐야? 왜 그래?"


"야... 아무래도 지금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거 같아."


"그럼 뭘 해야 하는데?"


"대양사람들 말이야! 그때 내가 만났던 위치가..."


창현이 멍청하게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숲을 배회하다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돌아가던 오늘 오후, 정택과 마주쳤던 장면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곳은 대양 사람들이 기거하는 동굴의 뒤편으로 이어진 길이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정택이 올라왔던 방향이 바로 그 길과 일치했다. 동굴과 이어진 길. 그곳에서의 만남. 그 사실은 창현으로 하여금 한 가지 무서운 상상을 하게끔 만들었다. 그는 왜 하필 그곳으로 왔을까. 단지 우연일 뿐이었을까.


"이걸 이제야 생각하다니! 일단 가자.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가다가 그놈들 마주치면 어쩌려고?"


"한번 도망쳤는데 두 번은 못 치겠냐? 그렇게 무서워?"


"그건 그렇지만... 에라 모르겠다. 네 말대로 하자. 근데 생각하니까 열받네. 누가 무섭대? 야! 그리고 도망은 니가 먼저 친 거잖아!"


벌써 저만치 움직이고 있는 창현의 뒤를 따라가면서 명모가 다시금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날 밤, 창현과 명모는 하얗게 밤을 새워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혹시 몰라 일부러 빙 둘러 가지 않았다면 진즉에 도착했을 터였으나 어쨌든 새벽빛이 어슴푸레 밝아올 즈음, 그들은 대양사람들이 기거하는 동굴에 다다를 수 있게 되었다.


* * *


창현과 명모는 동굴 입구에 굳은 듯 멈춰 서 있었다. 지난밤 창현의 머릿속을 어렴풋이 스쳐 갔던 불길한 예감. 그것이 현실이 되어 지금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던 탓이다.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참상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오직 피와 시체뿐.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경악에서 깨어난 명모가 입을 뻐끔거렸다. 파랗게 질린 얼굴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이게 대체.."


그리곤 다시 말을 잃었다. 딱히 친분이 있지는 않았지만 우화산 이가촌의 불행이 기억났기 때문일까. 그는 기어이 눈물을 흘려내고 말았다.


"크흑.. 씨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냐고!"


정신병자처럼 소리치는 명모의 옆에서 창현 역시 넋을 놓았다. 단지 염려에서 끝나길 바랐다. 정말로 이런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뒤늦게서야 떠올랐던 생각. 왜 좀 더 빨리하지 못했을까? 지금보다 일찍 찾아왔다면 이런 참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명모처럼 당장에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 창현은 눈을 깜빡거렸다.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한 그의 시선이 옆에 쓰러져 있는 어떤 중년 여인에게 닿았다.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였을 그 여인은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어 있었다. 부릅뜬 눈에 맺힌 고통과 절망이 생전의 상황을 말해주는 듯했다. 창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 여인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녀의 가슴은 대접으로 부어놓은 것처럼 피가 흥건했다. 날카로운 자상에서 뿜어져 오른 피였다. 당연히 괴물의 소행은 아닐 거였다. 이러한 상처는 오직 병기를 사용하는 인간만이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 설마 이게 네가 말한 그거냐?"


명모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맞는 거 같아.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아. 우리가 늦은거야... 더 빨리 왔어야 했어."


그들은 다시 강요된 침묵에 빠져들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죽음. 왜 그들은 이토록 참혹히 죽어야 했는가. 무슨 이유로 그래야 했는가.


무슨 이유였든 자신을 믿고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함께 야지를 뒹굴며 고생하던 사람들이었다. 정택은 다름 아닌 그들 모두를 죽인 것이다. 도저히 인간으로 생각되지가 않았다.


`어쩌자고 이런 짓을 벌인 거야?`


도망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정택의 얼굴은 분명 웃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피와 죽음을 깔고 앉은 주제에 그는 잘도 웃었더랬다. 뱃속이 근질근질해졌다. 괴물에게 쏟았던 분노와 증오가 무색할 만큼, 정택을 향한 그의 감정은 지금 이 순간 크게 불타올랐다.


"이 개새끼가!"


결국 배 속에 있는 것을 뱉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씨발 새끼! 꼭 내 손으로...!"


창현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뒤엣말을 속으로 삼켰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좋았다. 어차피 마주치면, 그때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엔 못 볼 텐데? 네 손으로 뭐 어쩐다는 말이야?"


창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굴 안쪽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산짐승 같은 행색의 창현과 명모를 한 번씩 쓸어보더니 시시껄렁하게 웃어댔다.


분명히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검은 직물을 몸에 걸친 모습은 어제 그를 향해 달려들던 정체불명의 인물들과 정확히 똑같았다. 창현은 끓어 올랐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너희들은...!"


정체불명의 사람들. 그토록 열심히 도망쳤건만 결국 여기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도 지난밤 치가 떨리게 후회했던 안일함의 결과라 생각하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조용히 입술만 깨무는 창현에 반해 명모는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창현에게 말을 걸었다.


"야. 맞지?"


어제의 그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참극을 만들어낸 장본인들이 맞느냐는 물음이었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런 거 같아."


"근데 왜 이것뿐이야? 엄청 많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럼 물어보자."


창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명모가 먼저 목소리를 키웠다.


"어이! 니들 뭐냐? 뭔데 떼거리로 모여서 지랄들이야? 응?"


명모가 말을 거는 그 짧은 틈에, 정체불명의 인물들은 이미 포위하듯 빙 둘러서 자리를 잡아 버렸다. 애써 대범한척 한마디 던지긴 했으나 긴장되는 것은 명모도 마찬가지, 그래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특유의 쭉 찢어진 눈을 치켜뜨며 때마침 정면에 선 사내를 향해 명모가 사나운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 녀석 말하는 게 아주 재밌는데. 그런데 내가 먼저 물었잖아. 다음에 보면 저놈이 뭘 어쩐다고?"


하지만 이를 악문 명모의 위협이 그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어주지 못하는 듯했다. 정면에 선 검은 옷의 인물은 아무렇지도 않게 피식 웃으며 팔짱까지 끼는 거였다. 조롱 섞인 그의 말에 아까보다 더욱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웃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도망쳤다는 놈이 너야? 참 진짜... 어디 모자란 놈인가?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돌아와? 운 좋게 도망쳤으면 그냥 멀리 달아났어야지. 혹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말이 정말이었어. 여러 가지로 대단하네. 뭐 어쨌든 덕분에 우리야 편하게 됐지만. 허- 참."


그는 감탄하다가, 혀를 차다가, 나중엔 그 두 개를 같이했다.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에게 명모는 뭐라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탓이었다. 몰래 혓바닥을 한번 깨무니 그제야 턱이 움직여 주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어! 여기! 네놈들 짓이지?"


"당연하지. 뭘 그런 걸 물어. 그럼 누구겠어?"


비장하게 꺼내놓은 명모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즉각적인 대답이었다. 외려 당당한 그의 태도에 명모는 다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사내는 지루한지 팔짱을 풀고 기지개를 켰다.


"아무튼 어제는 어떻게 도망쳤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그런 행운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버려."


말이 끝나자마자 기지개를 켜던 손으로 가볍게 손짓했다. 주변에 포진해있던 인물들이 그 손짓을 보고 저마다 병장기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걸음씩 다가서는데, 한량과 같이 가벼운 표정과는 반대로 행동엔 절도가 넘쳤다.


"잠깐! 나머지 놈들은 어디 있나!"


그들이 더 접근하기 전에 명모가 다급히 외쳤다. 이 와중에도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기만 했다.


"내가 왜 너희들에게 그런 걸 말해줘야 해? 어차피 그냥 죽이면 그만인데. 이제 대화는 끝났어. 재미없군. 얼른 끝내버려."


대화를 나눴던 인물을 제외한 나머지 사내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 * *


명모가 호기롭게 나설 때부터 창현은 줄곧 괴로워했다. 각기 칼과 창을 꼬나쥔 채 슬금슬금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눈은 지난날 보았던 정택의 눈처럼 짙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저들은 왜 우리를 죽이지 못해 안달일까.`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믿음. 그것은 지금 저들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언제 보았다고,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처럼 죽이려 드는 것인가.


어제처럼 혼자였다면 길게 고민하지 않고 몸을 피했을 거였다. 밤새 길을 찾아오느라 지쳤지만 제 한 몸 피할 체력은 남아 있으니 그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명모는 그 정도의 기력을 남겨놓지 못했을 게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태도뿐이었다.


창현은 어찌해야 하는지 마음속으로부터 느끼고 있었다. 선택하기가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이미 정답은 정해져 있음을. 자신의 고상한 도덕관념을 관철하려면 친구의 목숨을 담보로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건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나 역겨운 위선이었다.


인간을 위해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괴물은 괜찮지만 인간은 안된다?


여태까지 지녔던 믿음과 지금의 현실이 겹쳐 보였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창현은 새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모든 것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깨달았다. 모든 것은 다만 관계의 문제일 뿐이었다.


나와 누군가. 나와 또 다른 누군가. 그런 관점에선 좋은 인간도, 나쁜 인간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관계였다.


사람들은 모두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나에겐 친구인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원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원수가 나에겐 은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반대로 생각하면 타인도 자신을 그런 관계의 선상에 놓고 똑같이 바라볼 수도 있는 노릇이다. 틀림없이 그럴 거였다. 그렇다면 사람을 섣불리 속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과 나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앞으로의 일을 과연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고 관계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주체로서의 자신만 지키면 된다. 영향은 서로가 서로에게 끼치되, 받아드리는 것은 오로지 자기의 책임인 것이다. 좋은 것도 나쁘게. 혹은 나쁜 것도 좋게. 모든 것은 수용하는 사람의 뜻에 달렸다.


때문에 명모와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역시 창현 스스로의 몫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아무리 패악을 부리고 욕을 지껄여도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 명모는 그에게 소중한 친구이니까.


정택과 저 정체불명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창현은 미소를 지었다. 저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만큼 자신과의 관계가 보잘것없다는 사실이 새삼 인식되었다.


저기 뒷모습만 보이는 명모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있어서 그들의 존재는 미약한 것이다. 자신과의 관계. 거기에서 그들이 인간임은 중요치 않은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이제 더는 괴롭지 않았다. 돌아보니 별로 중요치도 않은 문제로 머리를 싸맸던 자신이 한심해 보였지만, 그래도 물로 씻은 듯 가슴이 후련해지는 게 너무도 기분 좋았다.


개운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적들이 어느덧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비록 칼을 빼 들고 있었으나 그들의 앞에 우뚝 선 명모는 바람 앞에 휘날리는 가랑잎처럼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창현이 명모의 어깨를 뒤에서부터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스스로 앞에 나섰다.


"지금은 나대도 괜찮지? 오늘 하루만 봐줘라."


말을 마친 그의 손에서 강렬한 은빛 섬광이 피어올랐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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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18. 급전직하急轉直下(1) +2 21.09.12 283 13 14쪽
66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4) +6 21.09.05 404 12 14쪽
65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3) 21.08.29 344 11 14쪽
64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2) 21.08.22 348 15 12쪽
63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1) +2 21.08.18 379 16 11쪽
62 16. 미지未知를 찾아(5) +2 21.08.14 407 17 18쪽
61 16. 미지未知를 찾아(4) +2 21.08.08 421 1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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