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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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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연재수 :
9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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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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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80,477

작성
21.06.0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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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
추천
22
글자
10쪽

12. 과거로부터(4)

DUMMY

한낮의 태양 때문에 쟈힘은 창현이 잡아 온 곰의 가죽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머리부터 발목까지 내려오는 두꺼운 가죽을 뒤집어쓰고, 나무 덩굴에 결박당한 채 앞에서 이끌면 이끄는 대로 짐승처럼 끌려갔다. 간간이 가죽 속에서 괴로운 신음성이 들려오기도 했다.


저녁이 되어 해가 지고 나서야 쟈힘은 드디어 가죽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지난날 그가 입었던 상처는 대부분 회복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썩 좋아 보이는 몰골은 결코 아니었다.


얼굴에서 생기라곤 찾으려야 찾아볼 수 없었고, 나무 덩굴로 칭칭 결박당한 몸 사이사이로 거무죽죽하게 죽어버린 피부가 유독 눈에 띄었다. 몸도 야위어 애초에 크지 않은 덩치가 더욱 왜소해 보였다.


넋이 나간 얼굴로 쟈힘은 힘없이 걷기만 했다. 마치 걸어 다니는 시체와 같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렇게 가다가 툭 쓰러져 죽는다 해도 아무 상관 없다는 태도였다.


괴물이라는 사실은 둘째치고, 그들이 궁금해하는 그 어떤 것에도 답을 주지 않았으니, 쟈힘에게 냉대가 돌아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혐오하고 증오해 마지않는 괴물이지만, 그중 유난히 정도가 심한 사람을 뽑으라면 단연 경표였다. 쟈힘이 붙잡히던 날 그의 몸에 난 상처 대부분이 경표가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아직도 쟈힘을 죽이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놀랄만하다.


경표는 맡은 바 일을 마치고 돌아와 쉴 때마다 쟈힘을 향해 침을 한 번씩 뱉어내곤 했다. 태무의 엄명에 의해 감히 손을 댈 수는 없었으나 그렇게라도 분풀이를 하지 않으면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쟈힘의 관리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여 청년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보기로 되어 있었는데 오늘은 마침 이용의 차례였다. 주훈과 진천이 일행의 선두에서 사람들을 인도할 때, 이용은 쟈힘과 함께 무리의 후미에서 천천히 따라가고 있었다.


체력이 바닥을 기고 있는 쟈힘은 인간들보다 오히려 걸음이 느렸고, 그런 쟈힘의 속도에 맞추어 걷다 보니 이용마저 자연스럽게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속도가 너무 떨어졌다 싶으면 이용은 뒤에서 창의 파단으로 쟈힘의 등허리를 쿡쿡 쑤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잠깐은 빨라졌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확연히 느려진 걸음에 이용은 또다시 창질을 했다.


"크으윽.."


쟈힘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성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용은 무표정한 얼굴로 같은 행동을 반복할 따름이었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소년으로 보기엔 어쩌면 몹시도 냉혹하고 잔인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날 풀어줘.."


또다시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고 생각했는지, 이용이 막 창을 들어 올리려던 참이었다. 모기가 앵앵거리는 것처럼 작고 희미한 소리가 그의 신경을 건들었다. 이용의 창끝이 멈칫하며 흔들렸다.


"날 풀어줘. 부탁이야."


감각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이용은 그 소리가 바로 자신의 앞에서 걷고 있는 괴물, 쟈힘이 낸 `말`이란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뭐?"


무슨 말인지 몰라서 물은 것은 당연히 아닐 터였다. 숨소리와 거의 흡사한 형태로 튀어나온 것은 사실 말이 아니라 놀람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과 다른 이색적인 음색은 민감한 이용의 귀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앞서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리 담이 두꺼운 이용이라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닐 텐데? 다시 한번 부탁할게. 날 풀어줘. 어차피 난 너희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 그렇다고 날 먹지도 않을 거면서 이렇게 무의미하게 끌고 다니는 건 너희에게도 불편한 일일 거야."


이번에 이용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그렇겐 안돼. 그냥 조용히 걷기나 해."


같은 사람에게도 말을 잘 하지 않는 이용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 괴물에게는 말이 술술 잘 나왔다. 처음 멈칫했던 것은 생전 처음 보는 현상에 대한 놀람 때문이었지, 다른 감정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면 아무리 괴물이라도, 생명으로서 죽어가는 것에 대한 어떤 연민일 수도 있을까?


이용 역시 괴물을 싫어하지만 왜인지 쟈힘에게는 증오의 감정이 들지 않았다. 자기 자신도 신기할 만큼 무덤덤하고, 어찌 보면 불쌍하기까지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이용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 힘들면 말해. 고통 없이 죽여 줄 수는 있으니."


그것이 그가 괴물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용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 났다. 쟈힘은 이용의 말을 듣더니 한참을 잠자코 걷기만 했다.


먼저 갔던 이가촌 청년들의 흔적만이 드문드문 남아 있을 뿐, 목적지는 끝끝내 나타나 주지 않았다. 혹시 태양이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던 주훈의 바람도 한참 전에 태양과 함께 저물어 버렸다.


결국 이가촌 사람들은 굴곡진 이곳 능선 사이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춥고 어두운 산속을 밤새도록 헤쳐 나갈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내일은 또다시 내일의 태양이 뜰 테고, 창현이 인도하는 생존으로의 길이 뚜렷이 보일 테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맘을 다잡았다. 그들은 부지런히 밤을 날 준비를 했다.


땅을 파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쟈힘은 우두커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날 풀어준다면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겠다."


이용에게 그가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달은 이미 떠올라 그들의 머리 위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작업에 참여하지 못하고 옆에서 지키고 있던 이용은 슬슬 짜증이 났다.


"길게 말하지 않겠어. 그러나 네가 잘못 판단한다면,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죽을 거다. 오늘 밤 안에. 선택해. 날 풀어주고 살겠는가, 날 묶어놓고 다 같이 죽겠는가?"


연속해서 내뱉은 쟈힘의 말에 이용은 순간 멍청해지고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너무도 이상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용이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의 어조는 마치 위협하듯 바짝 날이 서 있었다. 실제로 이용은 창날이 보이도록 창대를 고쳐잡으며 한걸음 그의 곁으로 비켜섰다. 그의 창이 가장 힘을 받는 거리였다.


하지만 쟈힘은 코웃음 치며 그의 위협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항할 힘을 잃어버린 그는 마치 죽일 테면 죽여보란 듯 몸을 돌려세우기까지 했다. 창날을 향해서였다. 자신감인지, 아니면 단순한 도발인지 이용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말하지 않으면 너희는 다 죽을 거야. 아아.. 아니야. 늦었어. 그냥 죽어라. 너희도 나를 죽이려고 했지? 내가 너희의 죽음을 바란들, 누가 나를 욕할 수 있을까?"


바위와 바위가 부딪히는 목소리로 쟈힘은 킬킬거렸다. 혹시 그가 미친것인가? 어둠이 내려앉으며 빛을 내뿜기 시작하는 쟈힘의 눈에서 이용은 어떤 광기를 엿보았다. 그것은 소름 끼치는 경험이었다. 결국 이용은 창을 치켜들었다.


"무슨 말인지 자세히 얘기해! 그렇지 않으면 넌 큰 고통을 겪게 될 거야. 그리고 결국 죽겠지. 말을 하고 고통을 피할래? 아니면 입 다물고 고통스럽게 죽을래? 이번엔 네가 선택해봐."


이용은 쟈힘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단 생각에 내심 통쾌했지만 마치 볼일을 보고 뒤를 안 닦은 듯한 찜찜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다 죽어가는 시체와 같은 녀석이 무슨 배짱으로 죽이네 마네 하는 것일까? 이용은 두려움보단 궁금증이 먼저 치밀었다.


"크큭.. 아니야.. 너희에겐 선택할 권한이 없어. 이미 늦었다고 했잖아.. 그러게 진작 날 풀어줬어야지. 클클클.. 이렇게나 강한 존재감이라니!"


낄낄거리던 쟈힘은 곧 미친 듯이 웃으며 알 수 없는 말을 소리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한창 작업 중이던 사람들도 큰소리가 나오자 무슨 일인가 하며 쳐다보기도 하고 얼쩡거렸지만 일이 먼저라 억지로 신경을 끄는 모습들이었다.


"다 죽을 거야..!"


쟈힘의 광기는 더해만 갔고, 그것을 지켜보는 이용은 스스로도 모를 이상한 불안감과 싸워야 했다. 이젠 궁금증도 생기지 않았다. 그는 제발 쟈힘이 미쳐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늦었어! 늦었어! 늦었다고!"


"대체 무슨 소리야! 조용히 안 해!"


"크크큭.. 늦었다고! 너흰 다 죽을 거야!"


쟈힘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며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그의 눈빛 속에 깃들어 있던 광기가 이젠 그를 온전히 잠식하고 있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몇몇 사람들이 다가오는 그 순간, 쟈힘을 제지하던 이용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드디어 느낀 것이다. 수많은 괴물이 파도처럼 덮쳐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민감한 이목보다 더욱 민감한 쟈힘이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걸 이용은 그 순간 깨달은 것이다.


"아..!"


그는 탄식했다. 쟈힘의 말대로 너무 늦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다. 이용의 부릅떠진 눈으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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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18. 급전직하急轉直下(4) 21.10.03 241 14 14쪽
69 18. 급전직하急轉直下(3) +2 21.09.26 293 13 16쪽
68 18. 급전직하急轉直下(2) +2 21.09.19 272 11 16쪽
67 18. 급전직하急轉直下(1) +2 21.09.12 284 13 14쪽
66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4) +6 21.09.05 405 12 14쪽
65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3) 21.08.29 344 11 14쪽
64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2) 21.08.22 349 15 12쪽
63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1) +2 21.08.18 379 16 11쪽
62 16. 미지未知를 찾아(5) +2 21.08.14 408 17 18쪽
61 16. 미지未知를 찾아(4) +2 21.08.08 421 19 12쪽
60 16. 미지未知를 찾아(3) +2 21.08.04 430 16 12쪽
59 16. 미지未知를 찾아(2) +4 21.07.30 523 15 14쪽
58 16. 미지未知를 찾아(1) +1 21.07.25 615 17 16쪽
57 15. 사무치는 마음(2) +1 21.07.18 641 20 13쪽
56 15. 사무치는 마음(1) +5 21.07.11 650 23 14쪽
55 14. 새로운 안식처(5) +3 21.07.04 653 22 14쪽
54 14. 새로운 안식처(4) +1 21.06.27 636 20 11쪽
53 14. 새로운 안식처(3) +3 21.06.25 629 21 11쪽
52 14. 새로운 안식처(2) +3 21.06.20 660 19 15쪽
51 14. 새로운 안식처(1) +1 21.06.18 723 18 15쪽
50 13. 눈 속에서 피는 꽃(5) +3 21.06.17 639 21 10쪽
49 13. 눈 속에서 피는 꽃(4) +1 21.06.16 621 24 10쪽
48 13. 눈 속에서 피는 꽃(3) +2 21.06.15 629 25 13쪽
47 13. 눈 속에서 피는 꽃(2) +1 21.06.14 628 24 13쪽
46 13. 눈 속에서 피는 꽃(1) +1 21.06.11 638 23 12쪽
45 12. 과거로부터(5) +1 21.06.10 655 23 12쪽
» 12. 과거로부터(4) +1 21.06.09 655 22 10쪽
43 12. 과거로부터(3) +1 21.06.09 689 2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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