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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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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연재수 :
98 회
조회수 :
92,300
추천수 :
2,887
글자수 :
580,477

작성
21.08.22 16:39
조회
348
추천
15
글자
12쪽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2)

DUMMY

다음날 해가 지자 로이드는 다시 진을 찾아갔다.


"가시지요."


미리 기다리고 있던 진과 그는 곧 같이 밖으로 나왔다. 하늘엔 어느새 떠오른 달이 밝은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달빛을 맞으며 걷는 동안 그들은 내내 침묵을 유지했다. 로우이터가 기거하는 터스겅의 지하까지는 가까운 편이지만, 오늘따라 로이드에게는 이상하리만치 멀게 느껴졌다.


베엘닥치로서의 경험이 더 많은 로이드는 이럴 때 자신이 뭔가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해주고 싶었으나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진에게서 풍겨나오는 기묘한 분위기가 그의 말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으신 거겠지...`


어느 정도 회복이 된 듯하지만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남아있을 거였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리라. 로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걱정되는 마음을 눌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터스겅의 지하로 향하는 입구가 나타났다. 오늘 밤 로우이터를 만날 자격은 진에게만 주어졌으므로 여기서부터는 진 혼자 들어가야 했다.


"걱정 마십시오. 잘 해결될 겁니다."


나이가 들면 드는 것은 노파심 뿐인지라, 한발 앞서나가는 진을 향해 로이드가 결국 한마디 던졌다. 진은 별말 없이 고개만 돌려서 작게 웃어 보였다.


진이 들어갔고, 로이드는 남았다. 걸어 들어가는 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로이드는 왠지 모를 불길함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 *


"허... 호되게 당했다더니 사실이었군."


턱을 괸 채로 진을 찬찬히 살펴보던 로우이터가 한참 만에야 꺼낸 말이었다. `빛`에 당한 진의 외모는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녹아내린 듯한 얼굴 가죽과 그 위로 흐르는 진물. 터럭 하나 없는 머리 가죽도 거무죽죽하게 죽어있었다. 괴사해버린 세포가 남긴 처참한 흔적이었다. 그러나 정작 진은 조롱하는 그의 말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으니 다행일세. 처음엔 송장 치우는 줄 알았지 뭔가."


혀를 끌끌 차다가 이내 낮게 깔리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비웃는 것임이 분명했다. 진의 대답은 그 웃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튀어나왔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한 것 같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로우이터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야. 자네가 고생이 많았지, 나야 뭐 심려랄게 있겠는가? 아직 몸이 완전한 상태가 아닌듯하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 더고르인 로이드에게 대략 듣긴 했지만 아무래도 자네에게 듣고 싶어서 말이야."


여기까지 말하고 로우이터는 잠시 말을 끊었다. 진의 신색을 관찰하려는지 유심히 그를 바라보다가, 여전히 별 반응이 없자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괜히 불쾌해졌다.


"인간들은 얼마나 살아남았나? 그리고 또 페이트는 얼마나 잃었나? 기억나는 게 없진 않겠지?"


야힌이 관리하는 지역 내 페이트의 비율은 중요했으므로 로우이터는 모든 감정을 배제하더라도 이것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진을 이 자리로 부른 것도 정확한 페이트의 숫자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잘나가는 후배를 맘껏 조롱하고 싶다는 마음도 아예 없다면 거짓일 테지만,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정신을 잃었으니 제약이 풀렸을 거고, 아마 놈들은 제멋대로 날뛰다가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또 원래 영역에서 벗어난 놈들이라 아무렇게나 흩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제가 확인하지 못한 이상 다 잃었다고 봐야 옳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생각보다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말을 하는 내내 진의 태도는 시종 담담한 거였다. 이번 작전의 완벽한 실패를 이야기하는데도 그랬다. 로우이터는 말이 전하는 내용보다도 그의 태도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마치 자신이 아니라 저기 볼품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그가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보게, 진! 자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가?"


"로우이터여. 당신은 물었고 저는 사실을 답한 것입니다. 그뿐 입니다."


진은 대답하기에 거침이 없었다. 물러섬도 없었다. 로우이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상식으로는 지금 상황에서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용납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비어져 나온 그의 송곳니가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네가 한낱 인간에게 패하여 짐짝처럼 실려 온 것을 기억한다! 어찌 그리 당당한가! 자랑스런 토페익투족의 제를렉이자 라나트라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진! 네 불경과 무례는 추후 내가 단단히 따져볼 것이다!"


공간이 로우이터의 노성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늙고 쇠약해졌다지만 그가 뿜어내는 기백이란 젊은 전사에 비견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거였다. 그래도 다만 진은 그저 묵묵할 뿐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분노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어서 분노한 로우이터가 판결을 내리듯이 외쳤다.


"오늘부로 네게서 `제를렉의 피` 호칭을 박탈한다. 그리고 베엘닥치로서의 자격도 박탈하겠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너는 이미 제를렉의 권능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걷는 자와 보는 자, 그리고 먹는 자 모두가 확인했고 동의한 결과다. 너에겐 이제 아르드투로서의 책임만이 남을 것이다."


베엘닥치에서 아르드투로의 강등. 토페익투족의 전사라면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임무 실패의 대가 치고는 사실 너무도 과한 처분이었다. 로우이터가 말을 마치고 득의양양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건방진 한 야힌의 파멸을 지켜볼 일만 남았다.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은 로우이터의 생각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웃었다. 자조 섞인 쓴웃음도 아니고 누구에게 보내는 비웃음도 아니었다. 다만 작은 미소일 뿐이었다. 내면의 진실한 자신을 되찾은 그에게, 로우이터의 악의 섞인 조롱과 제재 따위는 이렇듯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로우이터는 그의 웃음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이번엔 정말로 분노했다. 차라리 욕을 하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지독히 모욕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가! 이 자리가 어떤 자린지 모르는가! 아니면 충격으로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로우이터여. 지금 당신의 그 모습이 우습소. 무엇이 그리 두렵소?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쫓기게 만드는 거요?"


어느새 진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말투도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로우이터는 급변한 진의 기세에 미처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발악하듯 더욱 크게 외쳤다.


"무슨 개소리냐! 네놈이 진짜 미쳐버렸구나!"


"그래, 로우이터여. 말 그대로 난 인간에게 패한 뒤 상처를 입고 돌아왔지. 하지만 이 상처는 날 파괴하지 못했다. 이 상처로 인해 나는 진실한 나를 되찾았으며, 내 흐린 이목으로부터 감춰져 있던 나의 본질, 내 생의 이유를 확인했다. 당신은 이 큰 깨달음을 이해할 수 있는가?"


진은 눈을 감고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차갑지만 더없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망설이지도 않았다. 이미 두려움조차 그의 일부가 되었으므로.


걸음을 옮겨 로우이터에게 다가갔다. 뚜벅뚜벅 한 걸음씩 다가가는 걸음이 빠르지는 않았다. 로우이터는 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냉혹하리만치 섬뜩한 기운에 몸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숨이 막혀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끝을 떨고 있었다. 그도 한때 토페익투족의 내로라하는 전사였건만 이건 숫제 뱀 앞에 선 개구리 신세였다.


위험을 알리는 경종이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려댔다. 로우이터는 몸을 부들거리면서 진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옭아매는 무형의 힘에 겨우 대항하고 있었다.


"진!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어서 힘을 풀지 못하겠는가!"


"로우이터. 늙고 노쇠한 전사여. 명예를 원하는가? 아니면 우리 토페익투족의 번영을 원하는가? 설마 그 늙은 육신의 안락함을 원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제 진은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한 거리에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손을 내뻗고 있었다.


"이런 제길! 그게 무슨 개소리냐!"


"네가 당대의 로우이터가 된 것을 나는 존중하는 바이지만, 너의 오만과 아집까지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겐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권리가 있다. 나의 본질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말을 마친 진이 기습적으로 로우이터의 목줄기를 잡아챘다. 더욱 힘을 가하자 로우이터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컥!!"


"나의 본질은 어둠이요, 파괴며, 살육이다.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의지가 나의 무기다. 이것을 깨달은 나에겐 그럴 권리가 있다. 제를렉은 그러지 못했지만, 진정한 나는 이제 그럴 수 있다! 로우이터여, 너에게 감사한다. 이제 난 너를 죽이고 나의 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제를렉이 아닌 나, 순수한 진으로서!"


"으으... 크윽..."


목울대와 경동맥을 동시에 압박하는 손아귀 힘에 로우이터는 괴로워했다.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그는 거세게 몸부림치며 저항했으나 강철같은 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머릿속엔 온통 죽음만이 가득했다. 말 못 할 공포에 로우이터의 아랫도리가 축축해지고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진은 손에 힘을 더했다.


우드득!


섬뜩한 소리가 퍼졌다. 노쇠한 뼈와 근육으로는 결국 진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로우이터는 혀를 길게 빼물고 늘어져 버렸다. 수많은 명예와 존경을 받아온 로우이터는 그렇게 허무한 생을 마쳤다.


진은 아직도 손에 들린 로우이터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슬픔이나 동정 같은 감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분노조차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로우이터의 도발에 분노하여 그를 살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나의 본질, 살아가는 동인(動因)이 되리라."


반대 손으로 로우이터의 머리를 후려쳤다. 간단히 머리가 박살 나며 피와 뇌수가 질펀히 흩어졌다. 진은 쓰레기처럼 시신을 던져버리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라나트여, 이게 무슨...?"


밖에서 기다리던 로이드는 대경실색했다. 진이 모습을 드러낸 뒤로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온몸에 뒤집어쓴 피와 허여멀건 뇌수가 그의 감각을 강렬하게 자극했던 것이다.


노회한 그답게 로이드는 사정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로우이터의 말이야 원체 뻔한 것이라 거기에서 뭔가 사달이 났을 게다. 진 역시 완전한 상태가 아닌 바에야 어떤 전개 과정을 거쳤는지 충분히 상상할 만했다. 물론 진의 뒷모습에서 느꼈던 불길함의 결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일단 몸을 피해야 합니다."


로이드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 진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인식되었다. 한시가 급했다. 로우이터가 그의 거처에서 살해당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둘 모두 무사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잠깐, 타스를 데려가야 해."


"그건..."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 그냥 가자고 하려던 로이드는 먼저 움직이는 진을 보고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저 한숨만 쉴 뿐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라나트는 확실히 여러 의미로 대단한 인물이긴 했다. 그는 급히 진을 따라 움직였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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