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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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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연재수 :
98 회
조회수 :
92,304
추천수 :
2,887
글자수 :
580,477

작성
21.06.25 19:42
조회
628
추천
21
글자
11쪽

14. 새로운 안식처(3)

DUMMY

구름이 짙어지고 있었다. 잦아드는가 싶던 눈발도 점점 굵어지더니 때마침 날카로운 찬 바람까지 불어와 피부를 할퀴어 댔다. 눈이 뻑뻑하게 시렸다.


눈물마저 얼어붙는 모양이었다. 땅바닥에 드러누운 명모는 시린 바람을 맞으며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것뿐이기 때문이었다.


문득 인생이 부질없다고 생각되었다. 세월에 말라가는 죽은 나무처럼 그 역시도 눈 속에서 그저 조용히 퇴락해가고 있을 따름이었지만, 그것은 절대 나쁘다고 말할 기분은 아니었다.


"아악!!"


누군가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이상하게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는군. 그래, 너는 죽는구나. 나도 곧 그렇게 될 테지. 동물에게 보시하듯 저 괴물들에게 육신을 나누어주는 일이 되겠지만 죽은 뒤의 일을 알게 뭔가?


불현듯 웃음이 났다. 굳이 비유하자면 인생은 마치 번쩍이는 번개와 같았다. 찰나에 피어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화려하고 밝으며 그렇기에 더욱 허무한 빛. 누군가 만족스럽게 살았느냐 묻는다면, 글쎄 하며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마을 사람들, 형제들,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렇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은 않았지만 현정이 있었다. 가슴 한편에 꼭꼭 숨겨 아무에게도 내비치지 않은 감정을 늘 지닌 채 살아왔었다.


`그래, 허무하진 않아!`


사그라든 빛은 허무할지라도 자신의 지나온 생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현정이 자신이 아닌 창현을 좋아했다는 것을 안다. 아마 이가촌에서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창현 말곤 없을 게다.


`멍청한 자식!`


이 와중에도 속으로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욕을 퍼붓고는 피식 웃었다. 그냥 웃음이 났다.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서 서글프기는 했다. 그래서 결국 말을 하지 못했나? 그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옆에서 지켜만 보는 걸로 만족했기에 굳이 다가가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물론 후회는 없었다. 평화롭던 과거로 되돌아간대도, 그는 똑같이 했을 터였다.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죽고, 그들과 같이 죽어가니 더는 바랄 게 없다. 뇌전만큼 밝지는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생을 함께했기에 자신은 빛났다. 그러니 허무할 것이 무엇인가?


그는 더욱 크게 입을 벌려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 맑은 눈물 한줄기가 얼굴을 가로지른다. 오한이 밀려들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의식마저 흐려지는 듯했다. 사신의 발걸음 소리가 점차 또렷하게 들려왔다. 죽음의 요람이자 무덤이 될 바로 이곳에서 그는 커다랗게 미소 짓고 있었다.


* * *


명모가 쓰러져 죽음을 생각하는 그때에, 사람들은 계속 바쁘게 움직였다. 겁에 질려 몸을 떨면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리의 앞쪽에서 인도하는 대로 죽을 둥 살 둥 따라갔다. 가능성이 희박하다 할지라도, 심지어 아예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살기 위한 몸부림을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이다.


혹여 뒤에 누군가가 낙오하더라도, 설령 그것이 아끼는 동생이자 친구인 명모라도. 하나밖에 없는 핏줄인 현정이라도. 그래도..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오로지 앞으로만 가야 한다.


일행의 가장 후미에서 괴물을 상대하던 주훈은 멀어져 가는 명모와, 이제 시체마저 보이지 않는 현정을 생각하며 꼭 이곳을 벗어나 목표한 곳으로 가리라 재삼재사 되뇌고 곱씹었다. 범람하는 강물처럼 괴물들이 몰아닥쳐 명모의 모습도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주훈은 천근처럼 무거운 팔을 들어 다시 괴물을 막아나갔다.


`현정아...`


말을 하는 괴물, 로이드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무기력하게 나뒹굴고, 결국은 사랑하는 동생을 내주고야 말았다. 하필 왜 그녀가 바로 그때, 그 자리에 있었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는데 왜 하필 그녀여야 했는지! 사실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가장 미웠다.


그는 바로 옆에서 현정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지켜보았다. 로이드에게 목이 잡힌 순간, 악력만으로 가볍게 경추가 부러져 나가는 모습. 척추전근이 파열되어 목이 한 뼘이나 더 늘어난 장면은 차라리 비현실적이었다. 돌아간 흰자위 속에 그 자신이 비춰 보이는 것 같았다.


괴물 놈들은 이상하리만치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숲의 나무들과 그들이 가고 있는 능선의 지형이 굴곡져 있어 한 번의 많은 수가 달려들기 불가능하다는 건 둘째 문제였다. 폭발하는 흉성(凶性)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밤의 살육과 피에 취해 서로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무언갈 두려워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놈들은 접근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눈치였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라 아직 진과 로이드가 이러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이가촌 사람들에게는 목숨을 살린 천만다행의 쾌거였고, 진에게는 천려일실의 아픔을 남길 한이었다.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이곳이 어디쯤인지, 어느 정도나 이동했는지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단지 이용이 앞에서 잘해주고 있겠거니 믿을 뿐이었다. 격한 소란이 사방에서 피어나며 사람들을 다시 혼란 속으로 빠뜨리고 있었다.


바로 앞에서 괴물 하나가 다른 괴물의 팔을 잡아 뜯어 입어 넣고 으적으적 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혼탁한 타액이 피와 함께 뒤섞여 턱밑으로 걸쭉하게 흘러 떨어졌다. 더럽고 지저분한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괴물은 아주 맛있게 그것을 먹었다.


처음 보는 장면이 아니다. 놈들의 게걸스러운 먹성은 꿈에도 나타날 정도로 많이 보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먹이로 삼는 게 어떤 것인지도 아주 잘 안다. 주훈에겐 모든 게 익숙했다. 뱃속을 훑고 지나오는 생리적 혐오감도 익숙했고 모든 증오와 분노와 죽음도 이제는 익숙했다.


사람은 과연 학습의 동물인가? 익숙하다 해서 이 모든 것들을 여상스럽게 넘겨버릴 수 있는 존재인가? 하지만.. 혈육의 죽음마저 익숙해질는지는 미지수다. 그때 전방에서 거칠고 투박한 욕설이 연속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와 말투였다. 표식을 찾으러 떠났던 경표와 다른 청년들이 마침내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이로써 한가지 걱정을 덜게 되었다.


무섭게 휘날리는 눈바람을 맞아가며 고투하기를 얼마간일까. 어둠이 농밀해지고 그에 따라 공기 또한 더욱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드디어 새벽이 도래한 것이다.


"걱정하지 마. 네 죽음은 내가 되갚아 줄게, 현정아."


주훈은 젖은 발을 들어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 하얗게 탈색된 그의 얼굴 못지않게, 그가 내뱉은 말도 살기로 하얗게 변해 안개처럼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그는 지쳐버린 다리를 끌며 다시 싸움에 임했다.


* * *


진이 창현과 대치하던 사이, 인간들 사이로 파고든 로이드는 현정이라는 이름의 인간 여자 한 명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성과는 내지 못한 채 몸을 뺄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인간들 사이로 파고들어 간 것이었기에 스스로 적에게 포위된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발톱 사이의 때보다도 하찮게 여긴 인간들이었으나 그가 현정을 죽일 때 주변에서 느껴지던 끔찍한 살기, 그리고 원한의 기운은 도저히 무시하고 넘길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베엘닥치라지만 `앰드라흐`를 발산한 후엔 체력의 저하가 심각하였으므로 만약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였다. 앰드라흐는 베엘닥치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파의 발산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임이 곧 밝혀졌다. 주변의 인간들은 이미 체력의 한계에 도달했는지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냥 이대로 쓸어버리면 될 일인 것이다. 짧은 순간이나마 위축된 자신이 스스로 부끄러웠다. 아마 그도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일 테고, 잘 풀리지 않는 이번 임무 때문에 고심이 너무 깊었던 탓일 거였다.


숲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수많은 페이트들이 사람들을 포위하듯 감싸고 흉악한 괴성을 흘려대고 있었지만 정작 쓰러지는 것은 괴물들뿐이었다. 인간들은 지쳤으나 꽤나 잘 버텨내고 있었다. 이것은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로이드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직접 나서서 모두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기력이 충분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이 많은 페이트 놈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답답했다.


포악하기만 할 뿐 지능이 떨어지는 이 녀석들은 말 그대로 괴물밖에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본능에 충실한 녀석들이 인간들을 코앞에 두고도 대뜸 달려들 생각을 안 한다니 경험 많은 그로서는 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로이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동안 장내를 지켜보다가 이내 코를 찡긋거리기 시작했다. 한가지 잊고 있는 듯한 찜찜한 기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가, 코로 맡아지는 한줄기 냄새를 인식하자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수행자!"


그렇다. 지금 저 인간들 사이에는 어느 족속인지 몰라도 지난밤 느꼈던 정체불명의 야힌이 한 명 끼어있는 게 분명했다. 우헬 텐게스의 수행자로 추정되는 그놈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들을 돕고 있었다. 그놈은 인간들과 같이 움직인다! 로이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페이트들은 미약하나마 풍겨오는 포식자의 체향에 본능적으로 인간들에게 다가가기를 거부하고 있던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엔 죽이라 하였던가?`


로이드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속으로 뇌까렸다. 야힌씩이나 되는 주제에 인간들과 동행을 하다니. 무슨 이유에서건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로이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차피 제를렉의 명도 있고 하니 그가 염려해야 할 일은 없지만, 어쨌든 일을 복잡하게 만든 벌은 톡톡하게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라는 문제가 남았다. 그놈만 제거한다면 남은 임무가 수월해지리라는 것은 너무도 간단하고 단순한 계산 아닌가. 그러나 진은 다른 인간과 함께 벌써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고, 페이트들은 하등 도움이 안 되니 영락없이 모든 일을 자신이 진행해야 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로이드가 다시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앞에 몇몇 인간들에게 가려서인지 문제의 야힌은 육안으로 확인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인간들이 모여있는 안쪽에서 야힌의 존재감이 미약하게나마 풍겨져 나온다고 계속 말하고 있었다.


괴물의 파도를 뚫고 힘겹게 앞으로 나가는 인간들에게 로이드가 조용히 걸어갔다. 아무리 지쳤다지만 고작 인간상대로 겁먹을 그가 아니다. 포위되지만 않게 조심하면 될 것 같았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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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99 참좋은아침
    작성일
    21.07.31 18:24
    No. 1
  • 작성자
    Lv.99 칼과그림자
    작성일
    21.09.19 23:39
    No. 2

    잘 보고 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지금보다 20~30% 빠른 진행을 하면 조금은 더 나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찬성: 2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9 브랜드킴
    작성일
    21.09.20 00:23
    No. 3

    칼과 그림자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배운거 없이 마구 쓰다보니 못된 버릇만 들었나봅니다 ㅜㅜ 느리고 지루한 진행이 저도 큰 단점이라 생각합니다. 한번 속도를 내보려 노력해보겠습니다. 재미없는글 보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찬성: 1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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