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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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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연재수 :
98 회
조회수 :
92,315
추천수 :
2,887
글자수 :
580,477

작성
21.06.11 23:53
조회
638
추천
23
글자
12쪽

13. 눈 속에서 피는 꽃(1)

DUMMY

"....!"


누군가의 욕설과 큰 고함소리, 살과 살이 맞부딪히며 나오는 파육음과 거기에서 유발된 고통에 찬 비명. 온갖 시끄러운 소리들이 오히려 귀를 틀어막았다. 그 사이에서 누군가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한데 역시 잘 들리지가 않는다.


`뭐라고 하는 거지?`


명모는 앞을 바라보았지만 뿌옇게 변한 시선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 마치 타인의 감각처럼 모든 면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뭐 하고 있는 거야?`


모든 실망과 좌절을 지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죽음이 아닌 삶의 의미를 매일같이 쓰게 곱씹으며 길을 헤쳐 오지 않았나.


`너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사실 그건 질책과 다르지 않았다. 명모는 눈을 깜빡거렸다. 완전하진 않아도 조금씩 시야가 회복되고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증오했다. 이러려고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둘러온 게 아니다. 이런 꼴을 당하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가슴 속에 타다 남은 재를 그러모아 억지로 불을 지핀 게 아니란 말이다.


아무리 대비하였다고 하나, 세 자릿수에 가까운 괴물들을 그들만으로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괴물이 있으리라고 누가 감히 생각이나 했으랴. 그 점만은 정녕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위하는 것에도 지쳤다. 명모는 팔을 꿈지럭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얼마나 쓰러져 있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다행히 긴 시간은 아닌듯했다. 옆에 떨어진 칼도 다시 주워들었다.


"명모 이 새끼야! 앞을 봐!"


때마침 그를 부르는 긴 외침이 명확히 들려왔다. 뒤에서 누군가 그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앞을 보라고. 명모는 무의식적으로 정면을 쳐다보았다. 몇몇 괴물이 그를 향해 팔을 흔들며 쇄도해 오고 있었다. 피에 굶주린 얼굴을 한 괴물들은 명모를 먹이로 인식했음이 분명했다. 피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워어어..!"


반사적으로 무릎관절이 굽혀지며 동시에 허리가 내려갔다. 체중은 앞굽에 칠할. 자세를 낮춤과 동시에 그의 하나 남은 오른팔이 치켜 올라간다. 그 궤적의 끝엔 아직 빛을 잃지 않은 칼이 쥐어져 있었다.


"아악!"


스칵!


누군가의 비명이 터진 그 순간 그를 향해 달려든 괴물의 무리가 명모를 집어삼켰다. 섬뜩한 파찰음은 날카로운 비명에 가려 잘 들리지도 않았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누군가 상상했던 것처럼 명모는 죽지 않았다. 일단의 괴물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도 그는 당당히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었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물처럼 공간을 흐르는 칼. 견심수류도(見心水流刀)!


파앗!


명모는 스스로가 마치 진짜 물이 된 것처럼 괴물들의 육탄공격을 모조리 흘려낸 것이다. 그가 지나친 뒤편으로 자욱한 피 분수가 솟구쳐 올랐다. 괴물들의 피였다. 괴물들은 어디가 어떻게 베였는지도 모르고 땅바닥을 나뒹굴며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헉.. 헉.."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발휘된 신기(神技)였다. 그 기적 같은 칼 놀림에 지켜보던 이들도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한 번의 위기를 넘겼다고 두 번, 세 번째까지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명모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일행을 찾았다. 사람들과 다시 합류를 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일행이 보였다. 이가촌 사람들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둥근 방진을 형성해 괴물들과 맞서고 있었다. 연약한 여인들과 노인들이 진 가운데 서고 그 주위를 나머지 사람들이 보호하는 형태였다.


진을 이루고 있는 주훈과 준우 역시 분투를 이어갔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장내의 상황을 주도하려 애쓰는 한편, 쉴 틈 없이 손을 놀려 괴물들과 싸웠다. 명모가 혼몽한 와중에 들은 고함의 정체가 바로 이것인 모양이었다.


"미친놈아! 얼른 안 와?!"


준우가 거의 쉬어버린 목소리로 다시금 소리를 질렀다. 방진을 형성한 이들의 상황 역시 농담으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명모가 이성을 잃고 뛰쳐나간 뒤 몰려드는 괴물의 파도에 급히 진을 정비해 대응했지만, 몇 사람이 그 파도에 휩쓸리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던 것이다.


"왼쪽! 왼쪽을 막아!"


준우가 다시 한 번 악을 썼다. 제대로 싸울 줄 아는 사람은 몇 없는데 이곳은 숲 한복판이다. 막으라고 소리는 질렀지만 누가, 어떻게 막을 것인가?


준우는 익숙한 동작으로 줄팔매에 돌을 먹였다. 왼쪽 가장 앞에는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뛰쳐나간 명모 대신 자리를 채운 사람이었다. 그는 싸움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서 있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마을의 장인 중 한 명이었고, 지금 가장 위태로운 자리가 바로 거기였다.


"으윽!"


중년의 사내는 나무를 깎아 만든 조악한 창을 들이밀며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투박한 창만큼 그의 솜씨 역시 투박한 거였지만 그래도 그는 악착같았다. 계속되는 야지 생활로 그나마 단련이 되었는지, 물러설지언정 쓰러지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휘익!


귀밑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강력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피 냄새를 동반한 바람이었다. 바람이 한번 스치면 꼭 하나씩 괴물이 쓰러져 나갔다. 뒤에서 준우가 지원사격을 재개한 것이다.


때마침 명모가 일행에 합류했다. 매우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천만다행으로 특별히 다친 곳은 없는듯했다. 준우는 줄팔매에 돌을 재우고 던지고를 반복하다가 명모의 모습을 보고는 기어이 한마디 내뱉었다.


"미친놈! 뒈지고 싶냐!"


그때 괴물의 파상공세를 못 이긴 중년의 사내가 쓰러지고 말았다. 창을 부수고 들어온 괴물의 손이 그의 가슴을 강타한 까닭이었다.


슬퍼할 시간이란 없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명모는 오자마자 그가 맡았던 왼쪽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 역시 매우 지친 상태였지만 명모는 칼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기어나가지 말고 제대로 해라!"


"미안한데 지금 대답할 힘도 없으니까 말 좀 걸지 마시우!"


"나도 미안한데 좀 닥쳐라!"


"먼저 말 걸어놓구선."


준우는 이 상황이 되어서도 입씨름할 힘이 남아있는 명모를 보고 기가 막혔다. 계속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그냥 끙 소리를 내며 다시금 줄팔매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명모도 그 나름대로 상황을 살폈다.


방진의 오른쪽엔 진천이, 정면은 주훈이 맡고 있었다. 그쪽은 조금 형편이 나은지 물러섬 없이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믿을만한 사람들이니 걱정하는 것도 웃기다. 자신부터가 이미 만신창이 아닌가. 명모는 자신만 잘하면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잠깐 한눈을 판 것이 실수라면 실수일까. 아니면 그저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었던 탓일까. 명모가 잠깐 일행에게 눈길을 준 짧은 사이, 그 간극을 뚫고 괴물 한 마리가 일행 가운데로 난입해 들어갔다.


"꺄악!!"


공포와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진 건 순식간이었다. 여인 한 명이 쓰러지고 있었다. 언제나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내던 장부인이었다. 가운데서 줄팔매를 휘둘러 괴물을 제압한 준우가 당장 소리쳤다.


"이 씨팔! 뭐 하는 거야! 이 새끼 정신 안 차려!"


명모는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목을 움켜쥐고 쓰러진 장부인이 보였다. 양손으로 포개어 잡은 틈에서 샘솟듯이 피가 벌컥벌컥 솟구쳐 오른다. 이미 눈은 풀려있고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각인되듯 눈에 박혀 들었다. 명모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실수다. 그래 자신의 실수가 명백하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그 실수로 인해 죽은 거다. 무릎 꿇고 사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핫!"


명모가 매섭게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는 괴물을 베어버렸다. 이미 체력은 바닥을 기고 있었지만 이때부터 기묘한 힘이 칼끝에 고이기 시작했다. 체력 이상의 힘. 그것은 아마도 근육이 아닌 정신에서 기인한 힘일 거였다.


고오오오..!!


소리는 명모가 기이한 힘으로 괴물을 베어 넘기던 바로 그 시점에 터져 나왔다.


"이건?"


소리가 사방을 휩쓴 직후, 악귀처럼 달려들던 괴물들이 모두 손을 놓았다. 심지어 어떤 놈은 몸을 사리며 물러나기까지 했다. 적은 인원으로 분투하던 사람들은 숨을 헐떡이며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사방이 공명하며 머릿속에서 바로 울려 퍼지는 듯한 그 소리. 사실 그것은 처음 듣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이가촌이 멸망하던 그 날, 통로를 막아섰던 청년들은 모두 그 소리를 들어 알고 있었다. 준우를 비롯한 진천과 명모는 그 사실을 깨닫고 저마다 소리 없는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정면의 괴물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이 생겼다.


"크르르륵..."


그 사이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어둠 속이지만 미명 아래 드러난 윤곽은 다른 괴물들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더 커 보였다. 이가촌 사람들 가운데 불안감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저.. 저놈!"


그 장면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이는 명모였다.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이가촌의 마지막 날, 그의 팔과 동생을 함께 가져가 버린 괴물의 모습을.


"씨발 거! 왜 안 보이나 했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명모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대신에 손안에 있는 칼을 다시금 고쳐 쥐었다. 으스러져라 움켜쥔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도록 자세도 낮추었다. 이날, 이 순간을 위해 칼을 연마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전한 지체를 가지고도 이기지 못했던 상대였지만,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명모는 이제 어느정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괴물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나타난 괴물은 별다른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밤공기를 관통하는듯한 서늘한 눈빛만이 별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방진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쓸어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음.. 이거 참."


로이드는 고민에 빠졌다. 이미 한참 전에 쓰러졌어야할 인간들이 아직도 버티고 있는 이유에 관해서였다. 결론은 쉽게 내려졌다.


진과 싸웠던 인간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수많은 페이트 사이에서 저런 보잘것없이 열등한 인간들이 이토록 오래 견뎌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로이드가 알고 있는 상식에 기반했을 때 그것은 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추론이었다. 그래서 로이드는 나타나 가장 먼저 `그 인간`을 찾았다.


그때 왼쪽에 서 있는 인간이 로이드의 눈에 띄었다. 모두가 그렇지만 유난히 마른 몸매를 하고 있었으며, 다른 놈들과 달리 한쪽 팔이 없는 장애 개체였다. 더욱이 인상적인 것은 그의 눈이 피부로 느껴질 만큼 강렬한 살기를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너희들 중 우리의 제를렉께 상처를 입힌 놈이 누구냐?"


로이드의 입이 열렸다. 낮고 탁한 음성. 그러나 좌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한 음성이었다.


"말을 하는 괴물이라..."


주훈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말을 하는 괴물이 처음은 아니다. 얼마 전 진천과 경표가 잡아온 괴물이 바로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분위기 자체가 확연히 달랐다. 주훈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둠 속에서 빛나는 괴물의 눈을 마주 쳐다보며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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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2) 21.08.22 349 15 12쪽
63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1) +2 21.08.18 379 16 11쪽
62 16. 미지未知를 찾아(5) +2 21.08.14 408 17 18쪽
61 16. 미지未知를 찾아(4) +2 21.08.08 421 19 12쪽
60 16. 미지未知를 찾아(3) +2 21.08.04 430 1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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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14. 새로운 안식처(1) +1 21.06.18 723 1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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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13. 눈 속에서 피는 꽃(4) +1 21.06.16 621 2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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