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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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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연재수 :
98 회
조회수 :
92,285
추천수 :
2,887
글자수 :
580,477

작성
21.08.18 23:00
조회
378
추천
16
글자
11쪽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1)

DUMMY

강렬한 붉은 빛이 눈앞을 어지럽힌다. 이어서 전두엽을 훑어내는 작열통(灼熱痛)이 그 빛을 뒤따랐다. 온몸이 불구덩이 속에 있는 듯하다.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봐도 소용 없다.


아아! 고통스럽다! 괴롭다! 어서 나를 이 괴로움에서 해방시켜줘!


계속되는 통증은 절망이 되었다. 점점 짙어지는 빛무리. 어느덧 사방을 에워싸는 붉은빛 한가운데에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그것은 차츰 눈의 형상을 이루어갔다.


그 눈조차도 붉었다. 이윽고 붉은 눈이 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눈은 웃고 있었다. 그에게 씌워진 고통의 굴레가 못 견디게 즐겁다는 듯이 가늘게 잠기며 희열했다.


"헉!"


진은 헛바람을 삼키며 일어났다. 흘러내린 식은땀에 온몸이 축축했다. 또 그 꿈이었다. 그날 이후, 매일 반복되는 악몽이었다. 되새김질 되는 패배의 기억. 진은 그날 졌고, 후에 매일 같이 패배를 경험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반복되면 익숙해진다지만 이것만은 예외였다. 그날의 충격은 시간이 흐를수록 덩치를 더해가며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휘이이이이잉-!


`패배자! 무능력한 건 용서할 수 있지만 도망친 건 용서가 안 돼. 비겁자! 네가 제를렉이라고? 차라리 죽어버려! 야힌의 수치 같은 놈!`


바람마저 그를 실컷 비웃는 것 같았다.


`아니야! 난 도망친 게 아니야!`


`도망친 게 아니라면 뭐지? 고작 인간에게 패해 쫓겨온 주제에 아직도 자존심이 남았다는 거냐? 변명도 제대로 못 하는 머저리!`


`으으으윽...`


진은 머리를 떨군 채 귀를 틀어막았다. 간헐적으로 울리던 바람 소리는 곧 사그라들었지만, 귓전에 매달린 조롱과 멸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언제쯤 그칠까. 괴로움만으로 버티기에 밤은 너무 길지 않은가.


"진! 일어났어?"


동굴로 누군가 들어섰다. 진의 오랜 친구인 타스였다. 본래 아르드투 계급인 타스가 베엘닥치 계급 중에서도 상위에 있는 진에게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야힌 사회의 통념에 비추어 봤을 때 용납될 수 없는 무례였지만 그들은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타스는 한쪽 구석에서 떨고 있는 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상태가 지속한 것은 두 달 전 그가 돌아오고 나서부터였다. 벌써 한참 전의 일이지만 그의 상태는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타스는 가지고 온 멧돼지를 옆에 내려놓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번의 그 녀석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실한 놈이야."


"..."


여전히 진은 말을 잃은 채 무릎을 끌어안고만 있었다. 타스는 그가 안쓰러웠다. 긍지 넘치던 전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곳엔 초라한 패배자만이 남았다. 그는 두 달 전에 돌아왔지만 몸뚱이만 왔을 뿐 영혼은 오지 않았다. 무엇이 진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퀴퀴한 냄새에 고개를 돌려보니 한쪽 구석에서 썩어가는 동물의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삼 일 전 가져온 토끼가 그대로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봐. 먹지 않으면 그놈에게 복수 할 수도 없잖아? 기운 차려서 혼내주러 가야지."


그래도 묵묵부답, 반응이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타스가 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시금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난 네가 잘 이겨낼 거라 믿어. 너는 누가 뭐라 해도 우리 토페익투족의 위대한 제를렉이니까 말이야. 그렇지?"


어깨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정신이 들었던가. 진이 고개를 들어 타스와 눈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보는 서로의 눈이었다.


"위대한 제를렉? 뭐가 위대하지?"


"어..?"


갑자기 터진 날카로운 말에 타스는 당황해버렸다. 방금의 말로 상태가 호전되길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런 식의 반응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진은 더욱 흥분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네가 가져다주는 먹이로 연명하는 건 물론 위대하지! 이렇게 구석에 쓰레기처럼 처박혀서 하루하루를 소모하는 것도 물론 위대해! 위대? 흥! 개소리 집어치워! 위대한 것 따위는 없어! 대체 뭐가! 뭐가 위대하다는 거야!"


그리곤 손을 거칠게 뿌리치는 거였다. 타스는 그만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진이 가쁜 숨을 뿜어내며 그런 타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그만해.. 난 위대하지 않아..."


한동안 넘어져 있던 타스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라긴 했어도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저 안쓰러운 마음이 더욱 짙어졌을 뿐이었다. 진이 받은 충격이란 상상했던 것 이상임이 분명했다. 이번엔 타스가 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진. 이건 너답지 않아. 우헬 텐게스를 버텨낸 너라면, 내가 예전부터 알아 온 너라면 이 정도 문제쯤은 아무것도 아닐 거야. 금방 이겨낼 거라 믿어. 아무튼 오늘은 이만 가볼게. 너에게 이래라저래라하긴 싫지만, 오늘 가져온 것은 꼭 먹어줬으면 좋겠어. 알겠지? 몸을 먼저 챙겨야 해. 다음의 일은 그 이후에 생각하면 되니까."


그리고 의연하게 뒤돌아 동굴을 나갔다. 멀어져가는 타스의 뒷모습을 진은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신경쇠약 때문인가. 또 못난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다. 매일같이 찾아와 보살펴준 타스에게 면목이 없었다. 그는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고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말은 사실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 날의 망령인 것을. 귀 끝에 매달려 끈질기게 그를 좀먹어가던 바람도 실은 마음에서 이는 망상인 것을.


죽을 듯한 괴로움의 실체가 다름 아닌 자신에게서 기인했다는 것을 깨닫고 진은 오열했다. 일그러진 얼굴을 타고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져 흘렀다. 어깨를 감싼 손톱이 피부를 파고들어 끝내 피를 내었다.


"크흐흑!"


의지와 상관없이 치솟아 오르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그는 흐느껴 울면서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 패배하는 것이 두려우냐고 묻는다면, 그래. 너무도 두렵다고 말할 수 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두려우냐고 묻는다면, 그것 역시 두렵노라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예전에는 아니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래. 그때의 빛이 두렵고, 패배하여 로이드에게 구원받을 수밖에 없던 그날이 두렵다.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망가질 미래의 내가 두렵다.`


인정할 수 없던 사실들이었다. 그는 계속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나온 과거를 부정하면 할수록 내면에 쌓여가는 오물과 같은 잔재들이 그를 중독시키고 병들게 했다. 진은 거부할 수 없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가슴이 북받쳐 오르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보았다.


눈물로 씻어낸 마음속엔 제를렉의 직무를 버거워하는 자신이 있었다. 임무에 실패할까 봐 매번 노심초사하는 자신이 있었다. 위기의 순간 좌절하여 괴로워하는 자신이 있었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짓눌리며 늘 그것을 의식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하는, 평범하지만 열정 가득한 자신이 있었다.


그 모든 모습이 진이었고, 모든 순간이 진실한 그 자신이었다. 생소했지만 더 이상 초라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빛나 보였다.


비록 그것의 본질이 어둠과 악으로 점철되었다 할지라도 그랬다. 그리하여 패배가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위대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것이 오롯한 본연의 모습이었으므로. 자신과 마주하는 사이 어느새 눈물은 그쳐 있었다.


그때 밖으로 나온 타스는 로이드와 만나고 있었다. 로이드 역시 진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다.


"라나트께서는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본래 베엘닥치인 로이드가 아르드투인 타스에게 공대(恭待)를 할 이유가 없으나, 그들의 관계는 조금 달랐다. 계급을 떠나서 직속상관의 절친한 친구를 홀대할 만큼 로이드는 어리석지 않았다. 타스가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야 뭐.. 아직 조금 더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타스 역시 베엘닥치인 로이드를 존중하여 공대를 사용했다. 타스가 느끼기에도 진의 상태는 심각한 것이었지만 그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물론 오늘은 특히나 더 심각했었다. 그래도 타스는 다른 말 없이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다.


"큰일이군요. 하루빨리 회복하셔야 할 텐데.."


"금방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진이 어쩌다 저런 초라한 몰골이 되었는지 상당히 궁금했기 때문에 로이드가 곤란해하리란 걸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나중에 라나트께 직접 듣는 게 좋겠습니다. 제게도 입장이란 게 있어서요."


큰 기대는 않았는지 타스는 금방 납득해버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 보세요. 오늘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네. 그럼 이만."


타스와 헤어진 로이드는 곧 동굴로 향했다.


"라나트여. 접니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지만, 그동안에도 몇 번이나 이런 상황을 겪은 탓에 로이드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에 들어선 그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예상과는 너무도 다른 진의 모습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짙은 청백광을 발하는 그의 눈동자가 정확히 로이드를 향하고 있었다. 그 눈에는 어떠한 슬픔도, 비탄도, 괴로움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이유 모를 충만감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그의 모습에 로이드는 당황하였으나 곧 크게 기뻐했다.


`라나트께서 이제 회복하셨구나!`


로이드는 자리에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감격에 겨워 외쳤다.


"회복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진은 눈동자만 움직여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줘."


워낙 낮고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라 영민한 로이드라도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들었다.


"고기를 줘."


다시 말하고 나서야 로이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옆에 널브러져 있는 멧돼지를 뜻하는 거였다. 로이드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진에게 고기를 건넸다. 진은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는 손으로 죽은 멧돼지의 다리를 잡아 뜯었다.


그리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일단은 기력을 회복해야 했으므로 그는 최선을 다해 먹었다. 타스의 말이 옳았다. 일단은 먹어야 한다. 앉은 자리에서 멧돼지 한 마리를 거의 먹어 치우고서야 진은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입가에 묻은 피와 기름을 손등으로 훔치는 모습이 한 마리 짐승을 연상케 했다. 뒷목을 훑는 섬뜩한 기운에 로이드는 괜히 눈치를 보다가 이곳에 온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로우이터님의 전갈입니다. 기력을 회복하였다면 내일까지 오라는 호출입니다."


두 달여 전, 로이드에게 업혀 올 당시만 해도 기식이 엄엄한 상태였으니 면담이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사정을 한번 들어보자는 뜻일 게다.


"내일 달이 뜨면 와. 같이 가도록 하지."


그토록 질색하던 로우이터와의 면담에도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이 성장했기 때문일까.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물러 나왔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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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18. 급전직하急轉直下(3) +2 21.09.26 292 13 16쪽
68 18. 급전직하急轉直下(2) +2 21.09.19 271 11 16쪽
67 18. 급전직하急轉直下(1) +2 21.09.12 283 13 14쪽
66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4) +6 21.09.05 404 12 14쪽
65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3) 21.08.29 343 11 14쪽
64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2) 21.08.22 348 15 12쪽
»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1) +2 21.08.18 379 16 11쪽
62 16. 미지未知를 찾아(5) +2 21.08.14 407 17 18쪽
61 16. 미지未知를 찾아(4) +2 21.08.08 420 19 12쪽
60 16. 미지未知를 찾아(3) +2 21.08.04 429 16 12쪽
59 16. 미지未知를 찾아(2) +4 21.07.30 522 15 14쪽
58 16. 미지未知를 찾아(1) +1 21.07.25 614 1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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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14. 새로운 안식처(4) +1 21.06.27 636 20 11쪽
53 14. 새로운 안식처(3) +3 21.06.25 628 21 11쪽
52 14. 새로운 안식처(2) +3 21.06.20 660 19 15쪽
51 14. 새로운 안식처(1) +1 21.06.18 722 18 15쪽
50 13. 눈 속에서 피는 꽃(5) +3 21.06.17 638 21 10쪽
49 13. 눈 속에서 피는 꽃(4) +1 21.06.16 620 24 10쪽
48 13. 눈 속에서 피는 꽃(3) +2 21.06.15 628 2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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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13. 눈 속에서 피는 꽃(1) +1 21.06.11 638 23 12쪽
45 12. 과거로부터(5) +1 21.06.10 654 2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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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12. 과거로부터(3) +1 21.06.09 688 23 13쪽
42 12. 과거로부터(2) +1 21.06.08 698 2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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