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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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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연재수 :
9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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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80,477

작성
21.08.1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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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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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글자
18쪽

16. 미지未知를 찾아(5)

DUMMY

커다란 소나무 그늘 아래 몸을 숨긴 창현은 배를 바짝 붙이고 엎드려 있었다.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물결치듯 달려 나가는 산맥이 두 눈에 가득 들어찼다.


거기에 있었다. 쭉쭉 뻗은 산등성이의 윗부분, 온갖 기암괴석을 성채 삼아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도시가.


이야기로만 듣던 인간들의 도시, 대양은 창현에게 말 못 할 위압감을 선사했다. 높은 고도와 천혜의 지형은 확실히 괴물들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삼면이 급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입구처럼 보이는 능선을 따라 나오면 널따란 분지로 이어졌다.


"저곳이 신지(神地)라네."


오랜만에 보는 고향이 마음을 자극한 모양인지, 덕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나왔다. 창현은 그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씨를 뿌리면 두 배, 세 배의 소출을 보장하는 신이 내린 땅 이랬던가. 확실히 검은 토질에 자르르한 윤기가 흐르는 것이 멀리서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대양의 생명줄인 그곳으로 많은 사람이 마치 개미 떼처럼 부지런하게 오가며 일하고 있었다. 창현의 옆에서는 덕문과 정택, 명모와 함께 같이 따라나선 몇몇 군인들이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정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햐. 대단하네. 아니 어떻게 저런 높은 산 위에 살 생각을 다 했을까? 저 건물 좀 봐. 돌을 깎은 건가?"


명모가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대양을 향해 작은 탄성을 질렀다. 억지로 과장하는 게 아니었다. 접근하기도 힘든 산 위에 커다란 석조 건물들이 연달아 늘어서 있는 풍경을 본다면 누구나가 그럴 만 할 터였다.


"우리 선조들이 만든 작품이라네. 이 위치에서 보는 건 나도 처음인데 대단하긴 하군."


덕문의 나지막한 말투에서 은은한 자부심이 배어 나왔다. 그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지 않고 계속 대양을 살폈다. 정택이 제시한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해서는 현재 대양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대단한 건 대단한 건데, 뭐가 보여야 말이지."


한참을 노려보던 명모가 눈가를 비비며 혼자 투덜거렸다. 확실히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점이 많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정택이 웃으며 그런 명모의 말을 받아주었다.


"대양의 속담 중에 `모르면 보이지 않고, 알면 보인다`라는 말이 있지. 저기 보게. 신지의 외곽을 따라 드문드문 사람들이 서 있지? 저들이 경계를 맡은 군인들이야. 원래는 쉰 명이 한 조가 되어 파수를 서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훨씬 적군."


명모가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저게 보인단 말요? 이제 보니 노인장 눈 하나는 끝내주는군요! 난 무슨 개미 새끼들인가 했지."


"이 녀석! 노인장 아니라니까! 아무튼 파수를 서는 군인들의 수가 적다는 건 몇 가지 사실을 말해주지. 일단 군인들의 수가 줄었다는 점이야. 그날 순직한 군인들과 덕문 저 친구를 따라 탈출한 군인들, 그리고 나를 따라나선 군인들을 합치면 꽤 되지. 이건 뭐 다 아는 거니까 그렇다 치고."


말을 꺼내고 정택은 조용히 덕문의 눈치를 살폈다. 그를 따라나섰던 군인들이 하나도 돌아오지 못한 사실을 굳이 캐내어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흠! 어쨌든 대양 내 순찰 임무에 투입된 인원도 그만큼 적을 거야. 수가 줄어들었으니 근무 강도는 당연히 올라갈 테고, 피로는 또 피로대로 쌓일 테지. 봐봐. 저기 저놈들 지금 뭐 하고 있는 것 같나?"


정택이 손가락으로 어느 한군데를 가리켰다. 명모가 눈살을 찌푸리며 집중했지만 워낙 먼 탓에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한동안 애쓰던 그는 결국 포기해 버렸다.


"뭐 하고 있는데요?"


"저기 두 놈이 망루에 기대서 자고 있잖냐.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야. 군기가 빠져도 한참 빠졌구만. 그런데 저놈들만 저럴까? 아마 우리가 못 보는 곳에서 다른 놈들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야. 그 빈틈을 잘 이용하면 우리에게 기회가 올 거고."


"무슨 말인지 알겠수다. 근데 겨우 저놈들 자는 거 확인하러 여기까지 올라온 거요?"


"이놈, 겨우라니? 우리가 예상하던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해야지. 이런 작은 차이가 목숨이 달린 일에는 큰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걸 명심하게. 아주 중요한 거야."


그래도 명모가 수긍하는 기색이 별로 없자 정택이 말을 덧붙였다. 딱히 겁을 주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왠지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저기 있는 놈들이 우습게 보이나 본데, 지금이라도 생각을 고쳐먹는 게 좋을걸세.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릴걸? 자네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상대는 군인이야. 게다가 아무리 줄었다고 해도 이백 명은 족히 될 텐데, 자네 자신 있나?"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던 덕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일대일의 싸움과 다수끼리 맞붙는 싸움은 전혀 다르지. 그런 싸움을 위해 체계적인 훈련을 쌓아온 집단이니까. 아무리 자네 실력이 좋아도 쉽게 당해내긴 힘들 거야."


하나하나 틀린 점이 없었다. 할 말이 궁색해진 명모가 괜스레 뒷머리만 벅벅 긁었다.


"에이. 그래도 아무렴 군인이란 것들을 다 상대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그 나쁜 놈만 얼른 쓱싹 하면 되는 일 아뇨."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 같으니 간단하게 말해주겠네. 맞아. 그놈들을 다 상대할 필요는 없어. 그러려면 빠르게 치고 빠지는 게 중요하겠지? 자네 말대로 쓱싹 하러 들어가는 길과 쓱싹 하고 빠져나오는 길이 바로 저곳이니까 잘 보라구. 오른쪽에 절벽이 보이지? 저곳으로 침투하고 다시 반대편 절벽으로 빠져나갈 거야. 저쪽이 제일 경계가 허술하거든."


정택의 계획은 단순했다. 뒤쪽 절벽을 넘어 대양으로 침투. 이후 군인들의 경계를 뚫고 목표인 전재학을 암살. 그리고 다시 절벽을 통해 빠져나온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그는 같이 온 군인들에게도 주의를 주었다.


"절벽 위에도 파수가 있으니 절벽까지 가는 길에도 유의해야 하네. 하긴 자네들도 잘 알테지만.. 삐끗 잘못하면 일도 그르치고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으니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해. 어이. 이만들 내려가지. 덕문, 자네는 잠깐 나 좀 보세나."


정택이 덕문을 불렀다. 일행을 먼저 내려보내고 그들은 앞서가는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진 채 천천히 뒤따라 걸었다.


"하와르 공주님은 무사하신가?"


"자네가 왜 그걸 안 물어보나 했지. 다행스럽게도 안전한 곳에 잘 계신다네. 이번 여행길엔 너무 위험해서 일부러 동행하진 않았어."


정택은 대답을 듣자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잘된 일이군. 어디에 계시는가?"


"이곳에서 두 달도 넘게 걸리는 먼 곳이네. 말해줘도 자네는 모를 거야."


"그렇군. 그럼 태령검은?"


"당연히 태령검도 무사하지."


왕의 집이 무너지던 날 공주와 함께 사라진 태령검. 부족 생활을 하던 예전부터 족장에서 족장에게로, 그리고 대양의 왕에게로 전승된 태령검은 대양 사람이라면 누구도 무시 못 할 상징성을 띠고 있었다. 정택의 염려는 당연한 거였다. 그는 감격한 얼굴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비로소 걱정거리가 사라졌네. 공주님과 태령검이 무사하다면 이제 내 목숨 따위 어찌 되어도 좋아."


"자네 같은 사람이 있어야 대양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겠나. 부디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말게."


"물론 목숨이 다할 때까지 대양을 위해 일해야지. 거사를 앞당겨야겠네. 자네까지 온 이상 더 시간을 끌어 봐야 좋을 게 없겠어. 고맙네. 자네가 돌아오지 못했으면 난 아직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머리만 싸매고 있었을 거야."


덕문이 흐뭇한 표정으로 정택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에게 있어서도 정택을 만남은 실로 천운이라 할 만했다.


"나야말로 자네를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네. 사실 그동안 너무.. 막막했거든."


에첵을 모시고 떠돌길 몇 달. 그간의 고생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어 그는 다만 작은 한숨으로 대신했다.


"아. 생각난 김에 말인데. 혹시 그.. 창현이란 친구는 어떤가? 그렇게 대단하다며? 혹시 같이 갈 수 있을까?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수없이 많은 괴물을 처리하며 덕문과 에첵을 구했다는 소문은 이미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거사를 앞두고 그런 무력이 탐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거였다. 그래서 이번 정탐에도 일부러 포함시킨 것 아니겠는가. 은근히 속내를 내비쳤으나 덕문의 반응은 의외로 냉정했다.


"그건 따로 의사를 확인할 것 없이 내가 허락하지 않겠네. 그들은 나 뿐 아니라 공주님과 에첵의 은인이기도 하고 그들 부족의 명운을 짊어지고 있는 청년들이야. 관계없는 일에 끌어들여 목숨을 위협받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럴 순 없어."


너무도 단호한 말에 정택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명분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그들은 예상 밖의 전력이었던 것이다.


"그럼 처음 계획대로 진행해야겠군. 매와 표범은 어떤가? 도와주겠지?"


"물론이지. 그들은 함께 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 거기에 나까지 덤으로 얹어주겠네. 방해는 안 될 거야."


"하하! 반가운 소리지만 자네 뱃살을 보니 예전만 못할 것 같은데?"


"내가 괜히 호장이 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지. 어서 가세. 준비할 게 많을 거야."


그들이 다시 속도를 높여 걷는데, 앞서가던 명모가 돌연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응? 무슨 일인가?"


"이번 일에 한자리 끼워주쇼. 나도 도울 테니까. 오면서 약속한 것도 있고."


다짜고짜 꺼낸 말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덕문은 침착했다.


"그럴 수 없어. 그 약속은 잊게. 자네와 창현 그 친구는 이번 일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정했네."


"왜요!"


덕문이 크게 고개를 저었다.


"목숨이 달린 일이네. 이건 도리가 아니야. 대양의 일은 대양 사람들이 처리하는 게 옳아. 자네는 다른 책임이 있지 않나?"


"쳇!"


아무리 명모라도 그의 말에는 반박하기 힘들었는지 이번엔 덕문 대신 정택을 쳐다봤다.


"나도 포함시켜 줘요. 내 몫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정택은 깊은 눈으로 명모를 쓸어보다가, 공허하게 흔들리는 그의 왼팔 소매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안돼. 덕문과 한 약속이 있어. 이번 일에 자네들을 끌어들이지 않기로 말이야."


"아니 누가 죽으러 간다는 것도 아니고, 도와주겠다는데 이러기요? 나 싸움 잘해요!"


명모가 버럭 화를 내듯 말하다가 아직도 자신의 왼팔에 머물러 있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 때문이 아니야. 계획을 알고 있겠지? 우린 절벽을 타고 움직여야 해."


"..."


"자네 마음만은 고맙게 받겠네. 다음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내 부탁하지."


완강한 거부의 뜻이었다. 이번에도 명모는 입을 다물었다. 실망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실 그보다는 절망감이 더욱 컸다. 아무리 칼을 날리며 싸우는 일에 이골이 난 그라고 해도, 역시 한 팔로 절벽을 오르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이게 현실이었던 것이다.


`병신은 어쩔 수 없다는 거구만.`


* * *


나흘이나 걸린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뒤 다시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동굴에 있던 사람들은 매우 바쁘게 움직이며 시간을 보냈다. 이십여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매일 밖으로 나가 식량을 모으고, 체력을 단련하며 각자의 무기를 점검했다.


일상을 보내는 군인들의 표정이란 자못 진지한 거였다. 행동거지에 절도가 있고 각각의 기세 또한 삼엄하여 군인이란 이름에 능히 걸맞은 모습들이었다.


그들을 보며 창현은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처음 에첵과 덕문 일행을 만나던 날, 괴물에 대항해 싸우고 또 처절하게 죽어가던 이들이 바로 대양의 군인들이었음을.


무겁게 변한 공기를 눈치 못 챌 정도로 창현은 둔하지 않았다. 따로 들은 것은 없지만 때가 도래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처음 오던 날 정택이 말한 암살, 누군가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뜻일 거였다.


그래서 창현은 번민에 시달렸다. 살인 계획이라 했다. 우연치 않게 대양 사람들을 만난 것은 좋은 징조였으나 그들의 계획이란 게 마음에 걸렸다.


피 흘림에 소원하며 다소곳하게 살아온 삶은 물론 아니다. 허나 지금껏 자행한 살육은 오로지 괴물이었기에 가능한 거였다. 사람과 괴물이 본질적으로 다르므로, 그들이 가지는 죽음의 의미 역시 다를 것이 분명했다.


`얼마나 악한지가 중요한가?`


창현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저 사람임이 중요할 뿐이지 않은가. 사람이 사람을 죽여도 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답했다. 친인을 배신하고, 노예를 부리며, 강간과 살인을 일삼는 이가 존귀할 까닭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그 이유로써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게다. 선과 악. 옳고 그름. 삶과 죽음에 어떠한 잣대를 드리워야 한다는 사실이 창현으로서는 더없이 두려웠다.


"자식아! 무게 잡고 있지 말고 이거나 좀 도와줘."


명모가 삼을 꼬아 만든 기다란 밧줄 뭉치를 낑낑거리면서 옮기다가 창현을 본 모양이었다. 한쪽 팔로는 어지간히도 힘이 드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일을 거들다가 문득 창현이 말을 꺼냈다.


"넌 아무렇지도 않냐?"


"뭐가?"


"지금 하는 거 말이야."


명모는 짜증이 나는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아니 그러니까 요점이 뭐냐고. 지금 하는 게 왜. 대양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으며 살고 있다잖아. 재학인지 재헉인지 그 나쁜 놈 하나 죽이는 거 때문에 그래? 그놈 하나 죽으면 여러 사람 편해진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런 놈은 죽어도 싸."


명모의 말은 분명했다. 창현으로서도 섣불리 반박하지 못할 만큼 사리에 닿아 있는 구석도 있었다. 한 명의 죽음보다 다수의 행복이라.


창현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무슨 대단한 선각자(先覺者)라도 된다고 거만을 떨어대는가. 힘이 생겼다고 정의까지 생겼단 말인가. 나의 가치와 타인의 가치를 비교하고 우위를 나누는 일은 얼마나 위험한가.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연관된 대양 사람들이 결의한 일이다.


`그래. 나는 나의 일을 하자.`


속으로 뇌까렸다. 그게 옳은 것일 게다. 창현은 명모를 도와 작업을 마무리했다. 명모는 그런 창현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다시 이틀이 지나고 이른 아침, 새벽이슬도 미처 마르지 않은 시간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굴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스무 명이 넘는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포함해 쉰 명에 달하는 적지 않은 인원이었다.


그 사이에 덕문과 에첵이 섞여 있었다. 하르착과 이르웨스가 언제나처럼 에첵 옆에 붙어 있었고, 그들 뒤로 창현과 명모도 함께 서 있었다. 명모는 괜히 불편해서 인상이 좋지 않았지만 에첵까지 나오는 마당에 차마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택이 모두 모였는지 둘러보다가 곧 가운데로 나섰다.


"모두들 이미 알겠지만 다시 한번 말하겠소. 이번 일은 매우 위험하고 또 위험한 일이오. 먼저 우리를 믿고 따라준 여러분에게 감사를 전하는 바요."


정택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때마침 해가 떠오르며 공터에 늘어선 사람들의 얼굴을 비췄다. 그들의 남편과 아들과 형제가 죽음일지도 모르는 길을 떠나려 함에도 슬퍼하는 기색은 없었다. 군인의 출정에 그런 감상은 사치였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허리를 편 정택이 입을 열었다.


"우선 군인들을 네 개 조로 나눈다! 일조부터 삼조까지 침투, 사조는 후방에서 경계 및 탈출을 지원한다!"


목소리가 박력 있게 터져 나왔다. 후덕한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도 어느새 변해 있었다. 그는 본래 군인도 아니고 관직을 지낸 것도 아니지만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임시로나마 사령관직을 맡은 것이다. 사전에 이야기가 됐는지 군인들이 조별로 모여 그의 앞에 정렬했다.


특이한 것은 일조에는 단 한 명의 군인만 있을 뿐 다른 조원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때 정택이 덕문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것을 본 덕문이 에첵에게 다가갔다.


"에첵. 말씀드린 때가 되었습니다. 매와 표범을 옳은 일에 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에첵은 진물이 흐르는 눈을 들어 자신의 옆에선 하르착과 이르웨스를 돌아보았다. 오랫동안 자신의 손과 발이 되어 충성을 바쳐온 자들이었다. 이제는 보내 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에첵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착. 이르웨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오게. 큰일이 될 게야. 덕문이 필요한 곳으로 자네들을 인도할 테니 그를 따라가게. 부디 몸조심하고."


"에첵!"


"에첵!"


큰 거구를 숙이며 하르착과 이르웨스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잠시 뒤 약조한 대로 덕문은 하르착과 이르웨스를 이끌고 가서 일조의 자리에 섰다.


떠나기 전 덕문이 다가와 창현과 명모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계획이지만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 덕문은 그 이치를 잘 알고 있으므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말은 필요 없었다. 때로는 눈빛으로 더 많은 뜻을 전할 수 있는 법이니까.


군인들 모두 대양에서 잔뼈가 굵은 만큼, 대양 내 지리에 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전재학의 집이 이전 왕의 집과 그리 멀지 않은 번화가 쪽에 있었기에 각 조마다 침투경로를 조정할 필요는 있었다. 마지막 이야기가 끝나고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출발!"


정택의 목소리가 드높이 퍼지고 군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현은 복잡한 눈빛으로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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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2) 21.08.22 348 15 12쪽
63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1) +2 21.08.18 379 16 11쪽
» 16. 미지未知를 찾아(5) +2 21.08.14 408 17 18쪽
61 16. 미지未知를 찾아(4) +2 21.08.08 421 19 12쪽
60 16. 미지未知를 찾아(3) +2 21.08.04 430 1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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