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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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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연재수 :
98 회
조회수 :
92,297
추천수 :
2,887
글자수 :
580,477

작성
21.06.10 16:09
조회
654
추천
23
글자
12쪽

12. 과거로부터(5)

DUMMY

사물을 입체적으로 느끼는 감각은 이용이 하늘에게서 받은 선물이나 다름없는 거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감각 덕분에 생전 처음 겪는 지독한 두려움을 맛보고 있었다.


온몸을 통해서 전해져 왔다. 너울거리는 물결과 같이 사방에서 밀려드는 괴물들의 존재감이 번개처럼 그를 관통하여 울리고 있었다.


"모두 피해! 어서 도망가!"


억지로 힘을 쥐어짜며 소리 질렀다. 산이 떠나갈 듯 고래고래 목청을 높이는 그를 향해 사람들이 뛰어왔다.


아니야! 이쪽이 아니야!


그는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숨이 콱 막히고 목이 잠긴 듯 말이 이어지지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사람들과 같이 구덩이를 파던 주훈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놀란 얼굴의 이용은 주훈의 눈에 매우 생경스러운 것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평소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이용이 그렇다는 게 더 이상했다.


"형.. 빨리.. 도망가야 돼.. 놈들이 오고 있어."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내뱉은 말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괴물! 괴물들! 빨리 피하지 않으면 다 죽고 말 거야!"


"젠장. 괴물이라니? 조금 알아듣게 말해볼 순 없겠냐? 언제 온다는 거야?"


괴물이라는 말에 주훈이 다급히 되물었다.


"지금... 당장 피해야 돼."


주훈은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만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직은 어려도 이 녀석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괜히 창현과 친한 게 아니라, 주훈도 이용의 재능을 들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모이세요!"


다급해진 주훈이 몸을 돌려 모두에게 소리쳤다.


"뭔데 그래요?"


지켜보고 있던 진천과 몇몇 사람들이 이어서 도착했다.


"용이가 괴물들이 오고 있다고 했다. 지금 당장 모두 피해야겠어."


주훈은 말을 마치고 바로 움직였다. 더 볼 것도 없다는 확고한 태도. 사람들의 안색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그때 진천이 막 돌아서는 그를 붙잡았다.


"형. 이놈은 이제 필요 없지 않겠수?"


쓰러진 쟈힘을 보며 묻는 말이었다. 그는 여전히 간헐적인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진천은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알아서 해. 그것보다 빨리 움직여라! 지금은 밤이야."


밤은 위험하다. 괴물이 득시글거리는 산중의 밤이라면 더욱 그렇다. 주훈은 진천에게 쟈힘의 처리를 떠넘기고 서둘러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벌어지는 상황에 둔감한 몇몇 아낙들이 아직까지도 일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주훈은 그들을 채근해 풀어놓았던 짐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얼결에 쟈힘의 신병을 떠맡아버린 진천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부산스러운 사람들 쪽을 돌아보았다. 그도 눈치가 있으니 이제 곧 떠날 것이고, 잘못하면 오늘 밤 살벌할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진천은 마음을 정한 듯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허리춤에서 칼을 빼 들었다. 괴물의 얼굴을 보자 진한 불쾌감이 피어올랐다. 아끼는 칼에 이놈의 피를 묻힌다면 그 불쾌함이 배는 더 커질 거였다. 그러나 자신이 틔운 싹은 자신이 끊어내야 함이 옳다. 애초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며 진천은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형. 하지 마."


힘을 주어 막 내리치려던 찰나, 이용이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말리고 나섰다. 진천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이용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지금은 안돼."


진천이 이용의 눈을 사납게 노려보았으나 그는 담담히 그것을 받아넘겼다. 진천은 이를 꽉 한번 물더니 힘없이 칼을 늘어뜨렸다. 그도 바보가 아닌지라 괴물들의 예민한 후각을 모르는 게 아니다. 괜시리 피를 내어 놈들을 자극할 때가 아님을 인정했다. 진천은 칼끝으로 괴물을 겨눴다.


"일어나라."


말에 모양이 있다면, 진천의 말은 아마도 칼의 형태를 띠고 있을 게다. 하지만 쟈힘은 그 말에 반응하지 못했다. 이미 혼절해버린 까닭이다.


진천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용은 할 수 없다는 듯 괴물을 안아 들더니 어깨에 걸쳐 메었다. 어쨌든 두고 가기는 더욱 께름칙했던 것이다.


어느새 준비가 끝난 이가촌 사람들은 주훈과 준우를 필두로 적막하고 어두운 숲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낮 동안 하늘이 맑더니 오늘은 달도 더욱 크게 보였다.


대열 앞에서 일행을 인도하는 주훈은 앞서 간 청년들이 남긴 표식을 찾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옆에 선 이용은 신경을 집중하며 괴물의 기척을 탐색하는데 열을 올렸다. 놈들이 언제 튀어나올지 몰랐으니 지금은 이용의 감각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청년들이 남긴 표식을 따라 천천히 전진해 나갔다. 대부분 오르막길이었고 그에 따라 산의 고도도 점점 높아져 갔다. 숨 막힐듯한 긴장감이 어둠과 함께 일행들 사이에 내려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격하게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억누르며 혹여 소리가 새어 나갈까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낮게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만이 적막한 산속을 떠다녔다.


다시 한참을 가고 있는데, 옆에 있던 이용이 주훈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이용의 손끝에서 생생한 공포가 전해져 왔다. 주훈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이용이 손가락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엔 주훈이 뒷사람의 어깨를 툭 쳤다. 그 뒷사람도 똑같이 그랬다. 그리고 차례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게 일행 모두가 멈춰서는 데에는 말없이도 금방이었다. 주훈은 직감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이용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데에는 한가지 이유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곳은 어디일까? 얼마나 왔을까? 혹시 바로 앞에 창현이 있는 곳은 아닐까? 표식을 남기며 이번에 같이 떠나간 경표와 구성 녀석들은 어디쯤에 있을까? 궁금한 점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제 소용이 없을 궁금증이다.


"형, 저 앞 능선에 굴이 하나 있어."


이용이 그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한 말이었다. 주훈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쩌면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어깨를 잡았던 이용의 손은 공포 때문이 아니라 희망 때문이었던가.


그렇다. 아직 절망하기엔 이르다.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자신이 먼저 절망한다면, 그 뒤에 사람들은 무엇에 기대야 한단 말인가. 주훈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괴물들은 어디쯤 있는 것 같으냐?"


주훈도 똑같이 이용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작게 물었다.


"사방에."


기대했던 희망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능선 하나만 넘으면 살 방도가 있을지 모르지만 당장 포위당해있으니 그것마저도 불가능하다.


"과연 불가능한가?"


주훈은 혼자 중얼거렸다. 불가능한가? 시도해보지도 않고 먼저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럴 수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희망을 버리지 말자고 하지 않았나.


주훈은 천천히 칼을 뽑아들었다. 이용처럼 예민한 이목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그의 말을 들으니 괴물의 숨결이 지척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힘없이 늘어진 목에 이빨을 박아 넣는 건 맹수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여지없이 몰살, 이가촌의 역사는 오늘로써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어차피 포위까지 당한 마당이니 그는 아예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로 했다.


`최대한 도망쳐 주마. 최대한 발버둥 쳐 주마. 기필코 얌전히 목을 내밀고 죽음을 기다리지는 않겠다!`


주훈은 진천을 불렀다. 준우도 불렀다. 나머지는 제 몸 하나만 건사해도 감사할 실정이니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주훈이 계획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꼭 필요했다. 주훈은 이용과 진천, 준우, 그리고 명모를 앞에 두고 말했다.


"용이가 가능성을 하나 알려줬습니다. 요 앞 능선에 굴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용이가 그렇다고 하니 확실할 겁니다."


다른 이들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주훈이 말을 하다말고 이용을 바라보았다. 같은 마을 사람이라지만 평생을 데면데면하게 살아온 그였다.


그러나 생사기로에 처한 지금, 모두들 이용의 감각을 인정해주고 있었다. 이용은 어둠 속에서도 용케 주훈의 뜻을 읽었는지 고개를 한번 크게 끄덕거렸다.


"별로 안 멀어... 요. 굴속으로만 가면 그래도 버티기 쉬워지니까."


사람들은 이용의 말을 듣고 더욱 숨죽였다. 포위당했다지만, 어쨌든 작으나마 희망의 불씨가 남았다는 게 더욱 중요한 거였다. 청년들은 다들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괴물들이 주변에 많다고 합니다. 그놈들을 뚫으며 길을 내야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인데.. 뚫읍시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가야 할 길을 눈으로 훑었다. 저 멀리로 밤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밑에 밤하늘과 대비되는 음침한 어둠으로 휩싸인 산줄기가 보였다. 저곳이었다.


"위치와 거리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용이 뿐이니, 너가 앞에서 일행을 인도해라. 우리가 엄호하겠다. 후미는 내가 맡고 왼쪽은 명모, 네가 맡아라. 오른쪽은 진천 네가 서고. 형님이 가운데서 고생해 주셔야겠습니다. 용이 너는 방향에만 신경 써서 최대한 빠르게 도착할 수 있도록 해줘. 너에게 우리 목숨이 달렸어."


특별히 위험한 곳이란 없을 터였다. 모두가 같은 상황일 테니 말이다. 주훈은 오늘 밤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창현이 남긴 새벽의 표식을 보고 한동안 들떠 있었는데, 역시 사람의 앞날이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칠흑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다른 말은 딱히 할 게 없군."


"형이 그렇게 무뚝뚝하니까 아직 혼자인 거요."


진천이 씩 웃었다. 주훈도 픽하고 웃어버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준우도 웃었다. 그것은 만족의 미소였다.


"이제는 내 자릴 대신해도 되겠구만."


그 역시도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에서 이렇게나 많은 괴물들이 나타났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니 그런 것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 자리 앉아서 뭐합니까? 형님이나 오래오래 앉아 계시구려."


"이미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엉덩이가 다 물렀다 인마."


주훈의 농담에 준우는 더욱 짙은 미소를 띠었다. 그는 조약돌을 손안에서 굴리며 예전 이가촌을 생각했다. 그때도 죽음을 각오했었다. 그러나 그는 살고, 다른 생명들이 참 많이도 떠나갔더랬다. 빚을 졌다. 마음속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죄책감. 죽어야 벗겨질 그 천형의 굴레를 오늘에야말로 비로소 벗길 수 있으리라.


`그래도 녀석들이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군.`


경표를 포함하여 앞서간 청년들에게 차라리 잘된 일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 녀석들이라도 목숨을 부지하는 게 그래도 어디인가. 이곳에 있다면 오히려 다 죽고 말았을 것이다.


"놈들, 이 앞에 있겠지?"


주훈이 크게 말했다. 이젠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용은 대답 대신 고개만 까딱거렸다.


"네가 잘해줘야 한다 용아. 너도 그렇겠지만, 우리는 정신없어서 방향 같은 거 잘 신경 못쓰거든."


"거참. 굼뱅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저놈도 아주 쓸모없지는 않았네?"


진천이 팔을 걷어붙이며 억센 소리를 했다. 이번에도 이용은 고개만 까딱였다. 하지만 어느새 이용의 얼굴에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명모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칼만 만지작거렸다. 자주 하던 농담도 하지 않았다. 준우가 주훈을 쳐다보았다. 주훈도 준우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제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설령 어둠 속이라 해도 그랬다. 주훈이 외쳤다.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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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18. 급전직하急轉直下(1) +2 21.09.12 283 1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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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2) 21.08.22 348 15 12쪽
63 17.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1) +2 21.08.18 379 1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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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16. 미지未知를 찾아(4) +2 21.08.08 421 19 12쪽
60 16. 미지未知를 찾아(3) +2 21.08.04 430 1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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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14. 새로운 안식처(1) +1 21.06.18 722 1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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