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17 잠행(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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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잠행(19)
토렌의 요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외진 농가가 있었다. 버려진 농가였지만 누가 안에 있는지 그 헛간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말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왔습니까.”
헛간 안에 있던 작은 탁자 위에 앉아 기사 아게드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키히스는 자세를 앞으로 했다.
“고작 그 정도 협박에.”
“어쩔 수가 없었소.”
눈살을 찌푸리며 아게드가 대꾸했다. 엘리어트의 협박에 산에서 빠져 나와 말을 탄 자들을 쫓았으나 흔적을 놓쳤다. 그리고 반나절 뒤 이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아게드는 지금 키히스와 만나고 있었다.
“나한테 결정권이 있는 게 아니니까.”
이번 일에 있어 그는 어디까지나 보좌인이었다. 그의 임무는 이 일렌 키히스라는 자를 도우는 것뿐이다. 주제넘게 나설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일이 틀어지지 않게 행동을 조심할 필요는 더 있는 애매한 위치였다.
“이상한 자가 거기 끼어 있었소.”
키히스가 자신을 무능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거기로 분위기를 더 끌고 가지 않고 아게드는 다시 말했다.
“도둑치고는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더군.”
설마 도둑놈들이 그 사실을 적반하장으로 이용해 들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리고 그 말을 꺼낸 자는, 다시 생각해 봐도 이상했다. 검실력도 그렇고 말투나 행동도 그렇고 잠깐이었지만 여느 도둑과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누군지 제대로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 점만은 그냥 돌아온 게 후회가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은 봐뒀어야 했다.
“그럴 거 없습니다.”
턱 언저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키히스는 말했다.
“누군지 알 것 같으니까.”
무심한 말에 아게드는 의아해졌다.
“알다니, 도둑들 중에 아는 자가 있소?”
“그럴 리가요.”
키히스는 짧게 흘러 내린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겼다.
“우연이 두 번이면 더 이상 우연이 아니란 걸 안다는 거지.”
알 수 없는 말에 의아해하는 아게드를 내버려둔 채 키히스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옆으로 걷어냈다.
“어떻게, 그럼 다시 그 산으로 가볼까?”
일단 돌아왔지만 다시 못 갈것도 아니다. 단지 그러려면 지시가 있어야 했기에, 보고를 겸해 여기서 키히스를 만난 것은 그런 이유에서 였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길잡이를 통해 갈 수 있는 길은 지금쯤이면 아마 없어졌을테니.”
그의 생각대로 아게드가 말한 자가 엘리어트라면, 그 자라면 이미 그 정도 대비는 해두었을 것이다.
“돌아갈 준비를 하죠.”
뜻모를 소리에 의아해진 아게드의 의문을 속시원히 해결해 줄 마음은 없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고 키히스는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에르디스 님이 이쪽으로 오고 계시니.”
카뷔에 에르디스란 이름이 나오자 지금까지와 달리 아게드는 긴장하는 기색이 되었다. 그가 여기 온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언제쯤 도착하시는 건가?”
먼저 밖으로 나서는 키히스를 향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묻고는 아게드 역시 헛간을 나섰다.
기사와 병사들이 산에서 사라진 뒤, 그들이 완전히 물러갔음을 확인한 산채 사람들의 움직임은 더 분주해졌다. 슬로런의 지시로 그들은 제일 먼저 길을 지우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이어진 길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언제 또 마음이 변해 그들이 다시 이곳으로 올지 모르니 최대한 흔적을 지워야했다.
“길을 지운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건 아닙니다.”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슬로런의 옆에서 엘리어트가 말했다.
“그렇겠지.”
언제 또 마음이 변해 여길 쳐들어올지 모른다. 그리고 그 때는 길 따위는 소용없게 만들 정도의 병력이 이곳으로 향할지도 모른다는 걸 슬로런도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대비는 해두어야 했다.
“신세를 졌소.”
이 정도로 아무 일 없이 일단락 된 건 전적으로 엘리어트 덕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기에 그가 뭐든 이쯤되면 인사는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슬로런은 말했다.
“고맙소.”
“그래봤자 한 고비 넘긴 것 뿐입니다.”
그녀의 말에 엘리어트가 대꾸했다.
산채에 형성되어 있던 긴장을 덜기 위해 조금 전 슬로런에게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돌아갔다고 해서 그들이 다시 오지 않는 게 아니었으니 위험은 아직 남아 있었다.
물론 이제부터는 슬로런이나 산채 사람들도 조금 전처럼 갑자기 당할 상황으로부터는 대비를 할테니 그것만 해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부하들 쪽으로 가는 슬로런을 보며 엘리어트는 아까 대면한 기사를 생각했다. 그를 상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몇 개 있다.
첫번째는 그 정도 협박에 겁을 먹고 후퇴한 것으로 보아 두올린 영주에게 토렌의 성에서부터 시작된 이 모든 일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은 자는(지시를 내린 건 두올린 영주겠지만 영주가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지는 않을테니)여기 오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파비앙에 관한 것.
토렌과 파비앙. 그 둘을 입에 올렸을 때 그 중 기사는 파비앙이란 말에 더 경계하는 빛을 띄었다. 인장에 대한 것만 봐도 파비앙에게 안좋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토렌에서 만난 키히스는 두올린이 아닌 파비앙의 행렬에 섞여 있었다. 기사와 키히스, 그 둘이 대립관계에 있었을까. 겉보기엔 그러했지만 왠지 석연치 않다. 그것은 평소 선하고 정의롭다고 알려진 파비앙이 키히스 같은 자와 같이 있는 것에 대한 이질감 때문일까. 아니면..
“엘리어트!”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루카를 비롯해 엔지프 일행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새벽부터 아침 사이에 산채에서 있었던 일로 다들 슬로런 일행을 돕기 위해 집에서 나왔다.
한 쪽에 서 있는 엘리어트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루카는 그의 앞으로 뛰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여기 있는 게 반갑기도 하고 동시에 엔지프들에게 들은 소리가 있었기 때문에 좀 혼란스러운 얼굴로 루카는 엘리어트를 올려다 봤다.
“산을 내려간 거 아니었어?”
“사정이 생겨서 다시 왔어.”
엘리어트는 루카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말도 없이 가서, 루카..”
“아, 아니야.”
그의 말을 서둘러 막으며 루카는 멋쩍은 얼굴을 했다.
“그럴 겨를이 없었잖아.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머뭇거리다가 루카가 말을 이었다.
“저기 엘리어트..”
“야, 루카!”
좀 떨어진 곳에서 세이지가 날카롭게 그를 불렀다.
“혼자 놀러 왔냐?”
오자마자 그들은 다들 분주해 보였다.
“가봐야 겠다.”
세된 음성에 서둘러 루카가 몸을 틀었다.
“좀 있다 봐.”
“그래.”
엘리어트가 끄덕였다.
“쟤에요?”
루카가 세이지 앞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며 옆에서 시즈가 엘리어트에게 걸어왔다.
“아비크가 말한 대장 친구라는?”
양 팔을 머리 뒤로 괴며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친구 삼기엔 너무 어린 거 아니에요?”
“루카 너랑 비슷해.”
정확히는 시즈가 한 살 위였지만.
“그러니까요.”
그러니 하는 소리라는 듯 시즈가 중얼거렸다.
“대충 상황은 끝난 것 같은데..”
이제 산채 주변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며 가슈를 비롯한 나머지 세 사람이 시즈와 같이 엘리어트 앞으로 걸어왔다.
“이제 어쩔 거에요?”
레이가 물었다.
“계속 여기 있을 건 아니죠?”
하루 동안 아무 것도 한 거 없이 아비크와 길더에게 매를 한 번 보낸 것 뿐이었는데다 이 산채에서 벌어진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레이는 슬슬 아스드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
“돌아가야지 이제.”
그 대답에는 레이 뿐 아니라 나머지 네 사람도 안심했다.
“그 전에..”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한 마디에 레이를 비롯한 아비크와 가슈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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