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7 레스니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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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레스니악(3)
네바렌 성 서쪽에 있는 탑 꼭대기에 네바렌 성 전체에서 가장 높이 위치한 방이 하나 있었다. 성의 다른 화려한 곳과 달리 장식 하나 없이 벽면 한 쪽을 크게 채우는 창과 창 바로 앞에 딱 붙어 놓인 나무로 된 탁자 하나뿐 의자도 놓여 있지 않은 곳이었다.
“준비는 다 되었니?”
탁자 앞에 서서 창밖으로 성 전체를 내려다 보고 있다가 이윽고 공작이 물었다.
“네.”
방 한 쪽에 서서 출정 보고를 하러 온 엘리어트가 대답했다.
대답을 듣고 나서도 공작은 말이 없었다. 이 탑은 수십 년 전 가메인 공작이 처음 네바렌의 영주가 되었을 때 지어진 탑이었다. 공작은 생각이 깊어질 일이 있을 때면 이 방에 찾아 오곤 했고 또한 전장에 나가는 지휘관을 불러 조용히 격려의 말을 전할 때도 이 방을 이용하곤 했다. 물론 엘리어트로서는 오늘 처음 이 방에 들어와 보는 것이다.
출정 준비를 끝내고 엘리어트는 곧 레스니악으로 떠난다. 병사들은 이미 준비를 마치고 그가 돌아와 출발을 명하길 기다리고 있다.
“너를 높이 산다 엘리어트.”
조용히 밖을 내다보며 말하고 가메인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엘리어트를 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 네바렌 병대 모두의 목숨에 동등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엘리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가메인 공작은 거느리고 있는 누구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고 공정했다. 그렇기에 이곳의 모든 병사들이 공작을 믿고 따른다는 걸 엘리어트 역시 알고 있었다.
“위험한 싸움이 될 거다.”
나직히 공작은 다시 말했다.
“그래서 너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진심을 다해 그에게 전하는 말에 잠시 있다 엘리어트가 곧 대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작님.”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다녀오거라.”
마지막 말에 엘리어트가 그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새벽은 추웠다.
한겨울 같은 추위는 아니어도 장시간 기온이 낮은 곳을 걷고 있자니 몸은 이미 얼어 있었다. 지금 네바렌의 오천여 병사들은 레스니악의 입구에 해당하는 좁고 길다란 통로를 지나고 있다.
단층으로 형성된 곳이었는지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새 양쪽으로 절리가 길게 이어졌다. 높다란 절리를 사이에 두고 병사들은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길을 따라 움직였다.
앞으로 나가면서 시즈는 길 양쪽으로 높게 솟아 있는 절리를 올려다 보았다. 단순한 절벽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절리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늘을 찌를 듯 높게 뻗어 있었다. 그 높이를 보고 있자니 자신들이 마치 지옥 입구처럼 쩍하고 갈라진 땅의 밑바닥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늘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좁은 주변으로 아까부터 우르릉 거리며 천둥 같은 낮은 울림이 어딘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 전조일지도 모르지만 더 구름이 끼건 말건 이곳은 이미 햇빛 한줌 없이 어두웠다.
“날 한 번 스산하네요.”
선두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는 엘리어트의 바로 뒤에서 가고 있던 아비크가 중얼거렸다. 꽃이 만개한 봄에 초겨울 같은 분위기를 내는 이런 곳에 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레스니악은 지형 자체가 불안정한 곳이야. 지진도 자주 있는데다가..”
아비크의 옆에서 가던 가슈가 말했다.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여간해선 쉽지 않지.”
그 역시 아비크들과 함께 왔다. 그도 왔으니 결국 레이만 빼고 다 온 셈이다.
“굳이 이런 곳에서 싸울 이유는 뭐야 그럼.”
“적에게 불리할 거 같아서?”
생각을 떠올리듯 중얼거리며 가슈는 그를 향해 으쓱했다.
“정확히는 모르지. 높으신 분들 생각은.”
“나머지 부대는 그럼 어디로 들어 와요?”
아비크의 뒤에서 말을 움직이던 길더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며 물었다.
“한두 개는 우리랑 같은 길로 올거고 나머지는 반대 방향에서 오지 않을까 싶은데.”
여러 영주국에서 출발할테니 그들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이곳으로 들어올 것이다.
지옥 입구같은 절리 벽사이를 빠져 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풀밭이 나왔다. 사방에 안개가 발 아래 낮게 깔려 있다. 거무스름하거나 회색이 감도는 나무들이 몸통 중간만을 드러낸 채 드문드문 서 있었다.
여기서는 그나마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슈는 이 와중에 혹시나 나무 사이에서 뭔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어 주의 깊게 주변을 살폈다.
“병사 수가 얼마라고 했죠?”
“일 만 정도일거야.”
대꾸하며 엘리어트는 풀밭 위로 말을 움직였다.
“그거 알아요?”
그를 따라 풀밭 위로 말을 걷게 하며 가슈는 말했다.
“랭더발 기사단이 어떻게 싸우는지 그걸 본 사람이 거의 없대요.”
대부분 후속 부대가 오기 전 전멸했고 전장에서도 랭더발이 흔적을 남기지 않아 얘길 들어보니 실제로 랭더발의 전투를 눈으로 본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키실라에서 소식을 듣고 재빨리 움직여 갔던 자신들만이 랭더발과 고펜의 전투를 본 거의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검은 기사단이라..”
풀이 억새고 두꺼워 그냥 걸었다간 발이 베일 것처럼 느껴졌다. 풀밭 위인데도 말이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실력이 좋은 놈들이긴 했는데..”
그는 지난 번 고펜에서 본 그들을 떠올렸다.
“일 만이니, 랭더발이 지금까지처럼 움직인다면 괜찮겠죠?”
“그건 맞닥뜨려 봐야 알겠지.”
앞에서 대꾸하며 엘리어트 역시 고펜에서 봤던 기사들을 떠올렸다. 멀리서 봐서 정확한 싸움의 형태를 확인하긴 어려웠지만 전투 시간이 상당히 짧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단순히 훈련이 잘 되어 있다거나 실력이 좋다는 수준을 뛰어 넘었다.
“그 아가씨하고는 얘기 잘 했어요?”
더 이상 말 안하고 가슈가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아비크가 입을 떼며 뜬금없이 물었다. 엘리어트의 시선이 힐끔 뒤를 향하자 고개를 좌우로 좀 까딱거리며 그는 말했다.
“그런 거 굳이 궁금해 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이 꽤 신경을 쓰길래..”
여기 오기 전까지도 디에나는 두 사람 사이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럴 거면 차라리 셰릴이라는 여자한테 물어보면 되겠구만 그건 또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대놓고 물어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럴 땐 또 예의를 차린 단 말이야.’
떠나기 전 그녀와 인사는 나누었다. 전장으로 가게 되었단 말에 혹시나 걱정한다던지 말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좀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웬 일인지 그녀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가만 있을 뿐 별 호들갑은 떨지 않았다. 그 점이 그로서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나도 궁금했는데..”
마침 말 나온 게 다행이라는 얼굴로 길더가 엘리어트를 향해 말을 던졌다.
“두 사람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어릴 때 같은 고향에 살았어.”
“아, 맞다. 대장 오스티아 출신이죠.”
그제야 알겠다는 듯 길더가 끄덕였다.
“그럼 엄청 오래 알던 사이네요.”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떠나기 전에.”
뒤에서 중얼거리는 길더를 내버려 둔 채 아비크는 다시 물었다.
“별 말 안했어.”
그렇게 대꾸하며 엘리어트는 앞을 보았다.
그 날 별채 앞에서 얘길 나눈 후 그 뒤에는 데비와 더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
시즈에게 끌려 준비를 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가 그는 병사들의 장비와 무기의 점검을 도왔다. 그는 기사가 아니다. 출정에 지휘관으로 나서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를 믿을 수 있을 지 하루 만에 신뢰를 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지휘관으로서 최소한 병사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모습은 보여야 적어도 그들을 통솔할 수 있었다.
하루 동안 밤을 새서 거의 모든 병사들의 출정 준비를 확인한 뒤 그러고나서 곧 네바렌을 떠나왔다.
떠나기 전 잠깐 짬을 내 얼굴을 봤을 때,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과 함께 짧은 미소를 보여줬을 뿐 그녀는 더 말이 없었다. 그 역시 이 상황에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잘 해보지 왜요.”
별 말 안했다는 소리에 의아한 듯 길더가 다시 말하자 가슈는 그를 쳐다보았다.
“왜, 들이대 본다더니?”
“에이~ 그거야 대장하고 어떤 사인지 잘 몰랐을 때 얘기고요.”
피식 웃으며 길더가 그 말에 응수했다. 그리고는 옆을 잠깐 쳐다봤다.
여기 와서는 굳이 할 말이 없었는지, 아니면 전장에는 처음 나서서 긴장했는지 출발전에는 평소처럼 떠들다 지금은 대화에는 별로 끼지도 않고 길더의 옆에서 말만 몰고 가던 시즈가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왜?”
그 모습에 길더가 물었다.
“... 아냐.”
저기 멀리 보이는 뿌연 하늘을 보다가 보다가 시즈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시즈는 이내 말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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