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17 잠행(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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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잠행(15)
새벽녘, 슬로런의 지시대로 엘리어트들이 산에서 완전히 빠져 나가는 걸 확인하기 위해 엔지프는 그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슬로런의 앞에서 엘리어트가 너무 거침없이 말을 했기 때문에 버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순순히 그는 산을 내려가라는 말에 따랐다. 집으로 돌아오니 몇 사람이 그새 또 와 있어 낯선 자들을 끌어 들인 걸 슬로런이 눈치챌까 긴장했던 엔지프로서는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산속의 새벽은 다른 곳보다 어둡다. 이제 거의 아침이 다 될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컴컴한 산속을 엘리어트를 비롯한 여섯이 줄지어 내려갔다.
“쫓아내면서 너무 쉽게 내보내 주는 거 아냐?”
엔지프의 뒤를 따라 아비크는 발 아래 울퉁불퉁하게 튀어 올라와 있는 자갈들을 피해 걸었다.
“다시 찾아오면 어쩌려고.”
“못 그럴 거야. 이 길은 이제 없어질 거니까.”
산채로 통하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지금 엘리어트들이 걷고 있는 이 길은 그들이 산 아래로 빠져 나가면 이제 없앨 것이다.
“찾기 힘들테니까 힘 빼지마.”
“준비 철저하네.”
그럴 줄은 몰랐는지 아비크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중얼거렸다.
새벽이 아침으로 이어질 즈음, 엘리어트들은 산을 다 빠져 나왔다. 엘리어트도 이 길을 통해 들어왔고 아비크나 가슈, 레이들도 마찬가지였으니 여기만 숨겨 놓으면 이제 다시 산채를 찾내지는 못할 것이다.
“하루새 두 번이나..”
밤 새 두 번씩 왕복하기는 쉬운 길이 아니어서 아래 도착하자 이게 왠 고생이냐는 듯 레이가 찡그렸다.
“의이구.”
그의 옆에서 길더와 시즈 역시 발 아래 들어간 모래를 빼내려고 신발을 벗어 털어내고 있다.
엔지프는 엘리어트와 함께 있는 다섯을 잠깐씩 응시했다. 기사를 가까이 본 것도 처음이지만 기사와 같이 움직이는 자들을 보는 것도 사실 처음이다.
연령대가 그리 높지 않았는데 다들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지 태연하다. 하긴 이들이 자신처럼 긴장할 일은 아니겠지.
“산을 끼고 돌아가면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어.”
굳이 마을까지 말해줄 필요가 있는 건 아닌데 우직한 성격답게 엔지프는 마을의 위치를 엘리어트들에게 설명했다.
“정오가 되기 전엔 도착할 거야.”
입을 다물며 그는 엘리어트를 잠깐 봤다. 더 할 말이 있었지만 해야할 지 좀 망설여졌다.
“엔지프.”
그런 엔지프를 엘리어트가 먼저 불렀다.
"가기 전에 한 가지.."
엔지프가 쳐다보자 엘리어트는 말했다.
"앞으로 슬로런이나 다른 누가 시키는데로 하는 건 관둬."
지크나 보든을 상대했을 때도 그리고 요새로 데리고 들어갔을 때도 느꼈지만 훈련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것치고 엔지프는 체력이나 반사신경이 아주 좋았다.
"너도 뛰어난 녀석이야."
이런 곳에서 도둑질이나 하며 살기엔 능력도 아깝고 또 어리다. 루카나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가 조금 더 앞으로 나오길 바라며 엘리어트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꼭 슬로런이 무서워서 그런 것만은 아냐.”
엘리어트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알고 엔지프는 말했다.
“산채에서도 버려지면 루카나 다른 애들이 위험하니까.”
슬로런에 대해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겁먹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리라.
"다들 갈 데가 없는 녀석들이라."
슬로런 눈밖에 나는 건 물론 좋을 게 없었지만 이만큼 눈치를 보는 건 루카를 비롯한 오두막 식구들 때문이다. 자신 혼자면 여기서 떨어져 나온다고 해도 어떻게든 살아 남겠지만 다른 녀석들은 달랐다.
붉은 눈인 쿈은 혼자서는 갈 데가 없다. 매일 투덜거리긴 하지만 세이지 역시 이올라 씨를 비롯한 다른 녀석들과 함께 있으면 안정감을 느낀다. 루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자신이 아는 건 그들 모두를 지키기 위해 이런 곳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하는 건 다른 녀석들 위해서 매번 네가 도망칠 필요는 없단 거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오해하는 엔지프를 향해 엘리어트는 다시 했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네가 원하는 걸 이룰테니."
말하다가 엘리어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도둑질도 이왕이면 관두면 좋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대해서까지 누군가가 함부로 참견할 건 아니니 섣부른 충고로 들리지 않길 바라며 엘리어트는 덧붙였다.
"생각해 볼께."
그러나 의외로 무시하지 않고 망설이는 기색이 되어 엔지프는 대꾸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그렇게 말하며 엔지프는 이제 헤어져야 하는 엘리어트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을 다시 쳐다보았다.
“개 흉내 내는 꼬맹이한테 인사 못하고 간다고 전해 줘라.”
시선이 마주치자 아비크가 말했다.
엘리어트와 엔지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며칠 잠을 설치던 루카는 어제 밤 겨우 잠들더니 지금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엘리어트들이 돌아온 것도 이렇게 돼서 산 밖으로 내몰린 것도 아직 모르고 있다.
아비크를 향해 끄덕이고는 엔지프는 다시 엘리어트를 보았다.
"고마웠어."
망설였지만 역시 말해야 할 것 같아 그가 입을 뗐다.
"여러모로."
요새에서도 그렇고 슬로런 앞에서도 그렇고, 엘리어트 덕에 자칫 안 좋은 선택을 할 뻔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다들 조심히 돌아가길 바랄께."
왠지 모르게 가슴 깊은 곳이 뜨거워지는 것을 억누르며 마지막으로 그렇게 덧붙이고는 서둘러 엔지프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방금 전 빠져 나왔던 수풀 사이로 그가 성큼 걸어들어갔다.
엘리어트는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엔지프의 뒷모습을 잠시 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입을 뗐다.
“가슈. 길더.”
부르는 소리에 가슈와 길더가 앞으로 나왔다. 서로 눈빛을 주고 받고는 두 사람이 방금 전 엔지프가 걸어 들어간 수풀 쪽으로 사라졌다.
자신들이 산을 빠져 나갔다는 걸 보고해야 할 테니 엔지프는 슬로런에게 간다. 그를 따라가 슬로런을 감시하다가 만약 그녀가 누군가와 접촉한다면 가슈와 길더가 들키지 않고 확인할 것이다.
“말은?”
두 사람 역시 수풀 저쪽으로 사라지자 엘리어트가 물었다.
“요 옆에요.”
레이가 대꾸했다. 여기 올 때 타고온 말을 멀지 않은 곳에 매어 두었다. 말이 있는 쪽으로 가기 위해 레이와 시즈가 먼저 앞장섰다.
“그나저나 정말 그냥 가요? 꼬맹이 되게 서운해 할텐데."
엘리어트의 옆에서 말하며 아비크는 산을 내려올 때 붙은 나뭇잎이 머리에서 털어냈다.
“파비앙 말이에요.”
엘리어트가 대꾸가 없자 더 중요한 일을 떠올리며 아비크는 이제 말을 돌렸다.
“진짜로 아이들을 데려 간 게 파비앙이라고 생각해요?”
암만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직 몰라.”
같이 있긴 했지만 키히스란 작자가 파비앙 소속인지 지금 거기까지 단언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지금 같이 있는 걸 보면 어쨌든 그런 자식들하고 관계가 있을 지 모른다는 건데..”
레이의 말대로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나무 뒤에 말이 묶여 있는 걸 보며 아비크는 혼자말을 했다.
“별로 좋은 일 아닐 것 같은데요.”
파비앙을 잘 알지는 못해도 영주가 선정을 하기로 유명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장 강력한 영주국이면서도 어진 정치를 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라곤 전체에서 가장 존경 받는 영주가 다스리는 파비앙이 키히스 같은 자와 얽혀 있다는 건 어떻게 봐도 좋은 뜻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더 캐봐야지. 무슨 사정인지.”
대꾸하며 엘리어트는 레이가 나무에 묶어둔 고삐를 풀어냈다.
네 사람이 말에 올랐다. 엘리어트를 선두로 말에 박차를 가하며 그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엔지프가 가르쳐준 곳과 반대 방향으로 그들은 산을 끼고 돌아갔다.
이윽고 산자락이 끝나고 드넓게 펼쳐진 평원이 나오자 조금 전보다 더 거침없이 네 사람은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대지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주변에 야트막한 산들이 가끔씩 보이긴 했지만 대체로 사방이 트인 편평한 대지였다.
그렇게 한동안 달려가는데 엘리어트의 바로 뒤에서 말을 달리던 시즈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달리는 말 위에서 평원 저쪽을 한참 보다가 갑자기 그가 속력을 늦추기 시작했다.
고삐를 잡아당겨 말머리를 옆으로 돌려 잠시 후 시즈가 자리에 섰다.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옆으로 움직이는 말을 진정시키며 시즈는 평원 저 너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그래?”
따라오지 않는 기색에 먼저 달려가던 레이가 마찬가지로 말을 멈추고 말머리를 돌려 그의 옆으로 왔다.
평원 저쪽을 시즈는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야.”
레이는 시즈가 쳐다보고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동안 말에서 내려 시즈는 자리에 엎드려 시즈는 땅바닥에 귀를 댔다.
평원 지평선 너머까지 보려고 최대한 눈을 지그렸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소리는 커녕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제대로 들은 거야?”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채 뭐라도 보려고 애쓰며 레이가 물었다.
“들었어 분명히.”
엘리어트와 아비크가 두 사람 옆으로 왔다.
“발굽 소리에요.”
엘리어트를 향해 시즈는 말했다.
"그것도 꽤 여럿."
“누가 지나가나 보지 뭐.”
말 위에서 아비크가 별 관심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두면 될 걸 쓸데 없이 귀는 좋아가지고.”
“이 정도는 항상 확인했잖아?”
시즈가 항의했다.
“거기다 한 둘이 아니란 말이야."
“방향 알 수 있어? 시즈.”
엘리어트가 물었다.
“네.”
“가서 확인해 봐 그럼.”
지시에 끄덕이고는, 그것 보라는 듯 찡그리며 시즈가 아비크를 향해 혀를 내밀어 보였다.
“가만있으면 될 걸 좌우간 일을 만들어요.”
평원 저쪽으로 달려가는 시즈를 보며 아비크가 중얼거렸다.
“고생은 결국 지가 다하면서.”
“그걸 못 깨닫는 게 저 녀석이잖아. 내버려 둬. 저렇게 좋다는데.”
열심히 뛰어가는 시즈를 보고 레이 역시 무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너무 멀어서 무엇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근처에 마침 있는 커다란 나무위로 뛰어 올라간 시즈가 눈을 지그리며 저 멀리를 내다보았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윽고 그가 다시 엘리어트들에게 돌아왔다.
“병대에요.”
숨을 헐떡이며 그가 말했다.
“병대?”
시즈가 끄덕였다.
“기사랑 기병단인데 수가 좀 돼.”
“얼마나?”
“대충 봐도 천?”
시즈는 덧붙였다.
“엄청 빨리 이동하던데.”
그들은 다 엄청난 속도로 말을 몰고 있었다.
“어디 소속이야?”
“그건 모르겠어. 깃발은 안 보여.”
레이의 말에 대꾸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비크는 시즈가 뛰어온 방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일찍 어딜 가는 거지?”
“그러게.”
옆에서 레이도 중얼거렸다. 천에 가까운 병사들이 아침부터 급하게 말을 모는 건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어디 기습이라도 가나.”
“방향은 곧장 이쪽이던데?”
평원에서 병대는 일직선으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산을 지나려는 것 같아.”
자신들이 반대 방향에서 달려왔으니 이쪽으로 향하면 있는 건 방금 전 내려온 산이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즈가 무심코 덧붙였다.
그런데 중요한 얘기였는지 그 말에 아비크와 레이가 동시에 그를 쳐다봤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레이가 되물었다.
“응.”
왜 되묻는지 몰라 그냥 끄덕이던 시즈는 왜 그러나 싶어 잠깐 생각하다가 그게 무슨 뜻인지 그제야 퍼득 깨달았다.
"아.."
“산채로 가고 있는 건 아니겠죠..?”
엘리어트를 향해 아비크가 말했다.
“벌써.”
엘리어트에게 인장에 대해 듣긴 했지만 뒤처리를 하러 쫓아온다고 하기엔 너무 빨랐다. 하지만 또 아젠에서 마주친 녀석들도 행동력 하나는 더럽게 좋았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설마 싶긴 하지만 아무래도 걸린다. 만에 하나 정말 산으로 향하는 병대면..
“어떻게 생각해요?"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아비크는 다시 말했다.
"만약 진짜면 꼬맹이들..”
경고해주러 자신들이 다시 찾아가는 것도 우습고 가만있자니 루카를 비롯한 엔지프 일행이 걸리고..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더 말하지 않고 아비크는 엘리어트가 입을 떼기를 기다렸다. 어떻게 할 지는 어쨌든 엘리어트가 결정할 일이다.
어떻게 나올지 그렇게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잠시 후 엘리어트가 고삐를 쥔 손을 옆으로 잡아 당겼다.
“가자.”
먼저 말을 돌리는 그를 보고 아비크와 레이도 고삐를 옆으로 했다.
“같이 가.”
허둥지둥 말에 오르며 시즈 역시 왔던 길을 달려가는 세 사람의 뒤를 따랐다.
엘리어트들과 산 아래에서 헤어지고 엔지프가 다시 산채로 돌아온 것은 새벽에 산을 내려갔을 때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린 뒤였다. 엘리어트에게 말한대로 길의 흔적을 지우며 올라오느라 시간이 걸렸다.
슬로런에게 보고를 끝내면 아마 그녀가 사람을 더 보내 그쪽 길을 완전히 없앨 것이다.
슬로런의 집에 도착하자 안으로 들어가기 전 엔지프는 잠깐 자리에 섰다. 며칠 동안 휘몰아친 일이 끝났단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금씩 안정감을 찾았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하나 둘씩 머리속에 몰려 들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까 엘리어트가 한 말에 대한 거였다.
엘리어트에게 그 말을 듣기 전부터 사실 엔지프도 요며칠간을 겪은 후 느낀 바가 있었다. 도둑질하다 뒤로 내빼는 것 정도가 장기가 되어 살다 죽게 될 자신에게 엘리어트가 보여준 행동력과 판단력은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거창하게 훌륭한 인생을 살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걸 보고 나니 도둑으로 살다 시시하게 죽을 게 분명한 자신의 운명에 새삼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한 번에 바꿀 주제도 능력도 없지만.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며 엔지프는 손등으로 간지러운 눈을 문질렀다.
생각해보니 누군가 자신을 위해 충고를 해 준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루카의 바람대로 엘리어트가 자신들 무리에 끼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의지가 됐겠지. 이런 일도 조금 더 상의해 볼 수 있었을 거고.
문득 든 생각에 엔지프는 고개를 좌우로 세게 흔들었다. 말도 안되는 생각. 기사인 그가 자신들과 한 패가 된다는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불가능했다.
그만 잊자. 이제 다시 만날수도 없으니. 그렇게 섭섭한 마음을 지우며 슬로런의 집 앞을 지키고 있는 덩치 큰 남자들을 향해 엔지프는 다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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