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17 잠행(1)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2.17 잠행(1)
키가 그리 크지 않은 나무가 주변을 덮고 있는 벌판 한가운데 있는 성이었다.
마을에서는 꽤 떨어져 있었지만 여느 성처럼 굳건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다가 입구는 성벽 위에 있는 보초병들이 확인을 거치지 않고는 열리지 않는 두꺼운 문으로 되어 있었다.
여름의 한 가운데 더위가 이미 절정에 다른 날. 성은 마치 달궈진 쇠덩이처럼 열기를 가득 머금은 분위기를 풍기며 풀벌레 소리만 간간히 들리고 있는 벌판 한 곳에 그렇게 서 있었다.
더위 때문에 성이 달궈진 쇳덩이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거기서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들은 마찬가지로 열에 익은 엿가락처럼 늘어져 성벽 위 여기저기 걸려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무더위에,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은 눈은 뜨고 있었지만 주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성벽 아래 어딘가에서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그림자 세 개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그들은 그저 빨리 밤이 되어 조금이나마 이 더위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성벽 한 쪽에 찰싹 붙어 있던 그림자가 바깥쪽으로 벗어나 성벽 위의 동태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이내 재빨리 원래 자리로 들어갔다.
바로 머리 위에 보초병 셋. 중간에 튀어 나온 난간으로 다행히 여기는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각이었지만 그게 아니어도 굳이 아래를 내려다 볼 수고를 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 보초병들의 기척을 느끼며 그림자는 그대로 모퉁이 안으로 사라졌다.
서로 맞대어 이어지고 있는 성벽 사이에 좁은 틈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수로를 통해 이 성으로 같이 들어왔던 일행들이 먼저 일을 끝내고 그 한 쪽에 숨어 있다 그가 들어오자 앞으로 나오며 한 손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다 챙겨 왔어?”
그가 다가가자 둘 중 키가 작은 쪽이 물었다. 남자가 손으로 두르고 있던 복면의 턱 근처를 잡아 당겼다. 복면이 흘러내리며 땀에 젖은 얼굴이 드러나는 동안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보따리 하나를 들어 보였다.
“늬들 껀?”
묵직해 보이는 보따리를 보고 얼굴이 환해지는 두 사람을 향해 들고 있던 손을 내리며 엔지프는 물었다. 두 사람 다 각각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꾸러미를 앞으로 들어 보였다.
“루카는?”
다들 챙길 건 챙겨 온 걸 확인하고 이제 성 밖으로 나갈 생각에 엔지프가 다시 물었다.
“없어.”
여기 들어온 일행은 넷. 오늘 처음 자신들을 따라 나선 루카는 첫날이니 여기 근처에서 망이나 보고 있으랬는데 어찌된 일인지 자리에 없었다.
“그 자식 괜히 데려왔어.”
찌푸리며 세이지가 작게 투덜거렸다.
“여기 더 있다 사단나지 말고 그냥 나가자.”
외딴 곳에 있는 어느 귀족의 성에 성주가 모아 놓은 재물이 두둑하다는 얘기를 어둠의 경로로 전해 듣고 담도 크게 대낮에 여기 들어온 네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여기 계속 눌러 있을 건 아니었다.
“기다려.”
그러나 버리고 갈 마음은 전혀 없는 엔지프가 입을 뗐다.
“올 때까지.”
작게 투덜거리긴 해지만 더 토를 달지 않는 세이지의 앞에서 엔지프는 잠시 기다렸다. 금방 돌아갈 걸 알았을 테니 루카도 멀리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는데 초조한 기색으로 발끝을 툭툭 거리는 세이지의 뒤에서 마침 루카가 다가왔다.
“어딜 갔다 와?”
엔지프가 뒤에 대고 하는 소리에 세이지와 쿈이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분위기나 보고 있으랬더니 너 이..”
“미안.”
일행 중 막내이자 오늘 처음 끼어든 루카가 으르렁대는 세이지 옆으로 갔다.
“이 성 지하에 비밀 창고가 있어.”
그러면서 그가 말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조금 전에 병사들이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오는 걸 봤으니까.”
손에 묵직해 보이는 궤짝 몇 개를 들고 내려갔던 병사들이 올라 올 때는 빈손이길래 뭔가 싶어 병사들이 사라지고 난 뒤 그는 몰래 병사들이 들어갔던 지하로 내려갔다 온 참이었다. 지하층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진 방이 하나 있었는데 문을 열어 볼 순 없었지만 척보기 에도 중요한 물건이 있는 방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어쩔래?”
그래도 감하나 좋은 녀석이라 그냥 흘려들을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세이지가 엔지프를 향해 물었다.
“어쩌긴.”
눈을 반짝이며 루카가 대답을 가로챘다.
“훔쳐야지. 지금 당장 가서..”
“진정해.”
엔지프가 입을 열었다.
“이미 여기 오래 있었어.”
들키지 않았다고 해도 지나치게 오래 머물면 꼬리를 밟힌다.
“지금은 무리야.”
“그럼 관둬?”
루카가 멀뚱히 그를 향해 다시 물었다.
“내일 해.”
엔지프가 다시 대꾸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이 난 얼굴이 되는 루카를 보다가 엔지프는 다시 복면을 끌어 올렸다. 그걸 본 세 사람 역시 서둘러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다시 수로를 통해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앞장서는 엔지프를 따라 세 사람은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엔지프 일행이 다시 성에 온 건 그러나 다음날이 아닌 바로 그날 밤이었다. 이미 한 번 성에서 물건을 훔쳐냈으니 그게 발각되면 경비가 삼엄해져 다시 성으로 잠입해 들어오는 건 무리였다.
사실 이럴 거면 아까 낮에 들어왔을 때 해치우고 갔어야 했지만 이미 시간을 끌었단 생각 때문에 아까는 그렇게까지 오래 여기 있을 배짱이 없었다.
성안이 조용한 걸 보니 아직 아까 물건을 훔친 건 들키지 않은 듯 했다. 자신이 발견했으니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루카도 포함해 이번에는 엔지프와 세이지, 쿈과 루카가 성안으로 들어갔고 같이 있는 일행 중 둘이 망을 보기 위해 더 따라왔다.
“여기서 기다려.”
수로를 막 빠져 나와 성안으로 들어오자 이제 아까 낮에 자신이 했던 역할을 루카가 두 사람에게 주지시켰다.
“어디 가지 말고.”
둘 다 최근에 자신들 패거리에 낀 남자들이었다.
“걱정 마.”
둘 중 그래도 며칠 일찍 들어온 라드라는 청년이 자신보다 나이도 훨씬 어린 루카가 윗사람 흉내 내는 게 못마땅했는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다 이럴 때가 있는 거야.”
고까워 말라는 듯 그런 그에게 오히려 훈계하듯 다시 덧붙이며 루카는 먼저 자리를 뜨는 세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까 엔지프 일행이 서 있던 곳에서 모퉁이 두 개쯤 더 돌아가면 거기에 루카가 말한 지하층 문이 있었다. 한밤중이 되었지만 여전히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성의 분위기는 낮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반나절도 안 돼 한 번 왔다 간 곳이라 어디서 어떻게 경비가 이뤄지고 있는지 아직 꿰뚫을 수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일행은 지하창고 앞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쿈.”
창고 문 앞에 서서 엔지프가 부르자 손에 들고 있던 가느다란 철사 몇 개를 입에 물고 쿈이 잽싸게 앞으로 나왔다. 자물쇠 앞에 몸을 숙여 앉아 능숙하게 쿈이 열쇠를 따는 작업을 하는 동안 엔지프와 세이지 그리고 루카는 주변에서 움직임이 없는지 최대한 동태를 살폈다.
“너무 쉬우니까 오히려 불안한데.”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 안하는 주변 분위기가 오히려 불안했는지 제일 뒤에서 세이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눈치 채진 않았을 거야.”
물건을 훔칠 땐 항상 최대한 늦게 발견될 수 있게 그 자리를 꾸며 놓으라고 지시했다. 세이지나 쿈이 제대로 따랐다면 그들이 가져온 식재료나 옷감 같은 게 없어진 것을 눈치채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훔쳐온 은화가 문제긴 했지만 그것도 비슷한 무게로 만들어 놓은 보따리로 그 자리에 채워두고 왔다. 안을 열어 확인해 보지 않은 이상 없어진 것은 아직 모를 것이다.
지금까지 조용하다면 아직 들키지 않았단 뜻이고 설령 들켰다고 해도 자신들 같은 좀도둑을 잡기 위해 지금 함정을 만들어 놨을 리 만무했다. 애초에 다시 올지 어떨지도 알 수 없는 판이니 지금 조용한 건 그저 경비가 허술하기 때문이 다일 것이라고 엔지프는 생각했다.
열쇠 구멍으로 철사 몇 개를 집어 넣고 몇 번 손을 움직이다가 딸깍 소리가 나자 쿈이 손을 멈추었다. 걸쇠를 밀어내자 이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을 옆으로 밀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엔지프가 먼저 앞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러고 있는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어둠속에서도 바닥에 떨어져 있는 짚더미나 군데군데 튀어나와 있는 모퉁이 뒤로 순식간에 네 사람이 몸을 숨기는 순간 발소리가 나던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날아왔다.
“병사들이 몰려 오고 있어.”
어둠속에서도 침착하게 들려온 소리에 엔지프가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가.”
그 말에 쿈과 세이지가 벌떡 일어나 그대로 몸을 돌렸다. 엔지프 역시 그들을 따라 나가려다가 루카가 움직이는 기색이 없는 걸 알고 그가 고개를 돌렸다.
“루카.”
“문도 열었는데..”
이미 자물쇠도 연 마당에 그냥 나가기가 아까웠는지 선뜻 발을 못 떼고 루카가 머뭇거렸다.
“내가 들어가서 아무 거나..”
“됐어.”
병사들과 맞설 생각은 아예 없는데다 한 명이라도 잡히는 건 용납하지 않으니 낌새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그대로 도망치는 게 예전부터의 원칙이었다.
“나가 빨리.”
루카의 팔을 잡으며 엔지프가 망설이는 그를 잡아 끌었다.
다같이 뒷마당으로 나오자 이제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가는 병사들의 그림자가 멀찍이 보였다.
“리드는?”
뒷마당 한 쪽에 나 있는 수로 입구를 막아놓은 열십자 모양의 격자를 들어 올리며 엔지프가 물었다.
“먼저 나갔어.”
침착하게 대꾸하며 엘리어트는 그와 함께 묵직한 격자를 위로 들어 올렸다.
뒷마당에서 이어진 수로는 들판을 따라 그리 멀지 않은 개울로 이어졌다. 수로 끝으로 나와 첨벙거리며 그들은 개울 위로 올라왔다.
“에잇 젠장..”
하루 두 번이나 오물이 흐르는 수로관을 왔다 갔다 했으면서 별 소득도 없던 것에 불만이었는지 밖으로 나오자마자 세이지가 공중에 대고 욕을 내뱉았다.
“뭐야, 괜히 고생했잖아.”
이렇게 된 게 루카의 잘못이기라도 한 듯 그러면서 그가 루카를 째려보았다. 어찌보면 생트집이었지만 오히려 루카가 그 시선에 움찔거리며 기를 못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어둠 속 어딘가에서 리드가 앞으로 나왔다. 진작 빠져 나와 그는 근처 어디에 숨어 있었다. 일행들 외에 더 이상 수상한 기척이 없음을 알고 그가 앞으로 나왔다.
“빠져 나왔네.”
어정쩡하게 걸어 나오며 리드가 엔지프를 향해 말을 걸었다.
“혼자 살겠다고 도망쳐?”
냉담히 엔지프가 말했다.
“비겁한 놈.”
병사들 일부가 갑자기 성벽 위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자마자 여기까지 내뺀 리드는 겸언 쩍은 얼굴이 되었다.
“그 놈들 우리 잡으러 온 거야?”
사실 기척이 느껴지자마자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쳤기 때문에 어떤 상황인지는 몰랐다.
“우리도 몰라.”
엔지프 역시 병사들과 마주치기 전에 사라졌으니 진짜로 자신들을 눈치 채고 잡으러 온 건지 아니면 혹시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나왔어?”
“병사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럼 그냥 있어?”
대답하는 목소리가 무뚝뚝했다.
엔지프로 말하자면 사실 검실력도 좋았고 한 때는 한 마을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던 만큼 주먹을 쓰는 것도 보통 이상은 되었지만 일행을 이끈 다음부터는 싸움은 일체 피하고 오로지 도망치는데 모든 재능을 쏟고 있었다.
“어이 신참.”
리드와 한참 뭐라고 떠드는 엔지프의 옆에 있다가 루카는 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잘했어.”
자리에 앉아 상황이 정리되길 기다리고 있는 엘리어트를 향해 그는 말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눈치껏 하면 돼.”
짐짓 루카가 덧붙였다.
“그렇다고 너무 나서지는 말고.”
잘난 척 말하는 루카를 보다가 엘리어트는 대꾸했다.
“나서지 않고 눈치껏. 알았어.”
엘리어트가 하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기분 좋은 얼굴로 루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