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13 이센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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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이센제(4)
테이드에서 돌아와 영주에게 상황을 보고한 뒤 유시드 헨터만과 얘기를 나누고 나서 네바렌에서 같이 온 병사들을 확인하러 엘리어트는 그들이 기거하고 있는 성 동쪽 끝 탑을 방문했다.
여느 영주국들처럼 병사들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나뉘어 위치한 각각의 성탑을 이용하며 지냈고 토비어스를 비롯한 병사들 대부분 거기에 있었다.
그들에게서 이것저것 얘기를 듣고 당장 급하게 해결해야할 문제 몇 가지에 손을 대기 위해 엘리어트는 종일 움직였다.
바쁘게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아스드에서 마련해 준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뒤 그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아침이 되는 걸 알리듯 밤새 반쯤 열어 두었던 들창을 통해 새소리가 조금씩 새어들어 왔다. 아침이 된 건 이미 한참 전이다.
엘리어트는 아직 침대에 있었다. 잠이 든 건 아니다.
양 팔을 머리 뒤로 괸 채 그는 물끄러미 천장을 보았다. 조금이라도 여유 시간이 생기면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어제 보니 토비어스를 비롯한 병사들은 이제 웬만큼 이쪽에 적응한 듯 했다. 병사들의 식솔들도 모두 아스드에서 마을에 마련해준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아스드 영주의 성품을 알았으니 이대로만 간다면 병사들에 걱정할 만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병사들의 일은 이제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병사들 일 다음 생각이 떠오른 건 역시 랭더발. 헨터만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이제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었으니 언제 또 무슨 일을 벌일지 염두하고 있을 필요는 있다.
거기에 덧붙여 또 하나 그가 생각하는 건 아시오트 글렌 후작에 대해서였다.
아시오트 글렌 후작. 무슨 이유로 그가 랭더발과 함께 하고 있을까.
엘리어트는 그 옛날 어느 성에서 본 적 있는 후작을 생각한다. 오래 돼서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를 떠올리면 뭐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엘리어트를 잠식했다.
엘리어트의 입에서 짧은 숨이 새어 나갔다. 이 모든 걸 한꺼번에 생각해 봤자다. 만일 정말 글렌 후작이 랭더발과 연결되어 있다면 랭더발을 쫓다보면 언젠가 그를 만나게 될 날이 올 지 모른다.
그 때까지 자신도 조금씩 앞으로 나가면 된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쓸데없는 생각을 더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해답이 없는 생각을 멈추며 엘리어트는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모든 생각을 멈추자 숨겨 두었던 마지막 한가지가 머리 속을 채운다.
..... 지금쯤이면 무사히 오스티아로 돌아갔겠지.
물끄러미 천장을 응시하며 그는 생각했다.
레스니악으로 떠나기 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늘 해오던 일이라며 그녀를 안심시켰지만 어쨌든 전장으로 향하는 일이다.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도 그 때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천장은 오래되었는지 거무죽죽하게 색이 변해 있다.
그녀를 다시 만난 뒤 엘리어트는 지난 십 일 년간 한 방향으로 죽은 듯이 흐르고 있었던 그의 시간에 살짝 바람이 닿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제 오스티아로 돌아가 이곳에 없으니 상황은 다시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그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때와 지금은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데비.”
엘리어트의 입에서 낮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네가 보고 싶다.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고자 하는 게 욕심이 아니기를.
눈을 감고 엘리어트는 잠시 그대로 그녀를 떠올렸다.
“엘리어트.”
복도를 걸어와 문 밖에서 시즈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엘리어트. 아직 자요?”
자고 있는 걸 신경 쓸 거면 조용히 할 법도 한데 묻는 소리와는 반대로 나무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복도 양쪽을 크게 울리고 있었다.
“엘리어...”
혹시 안 들리나 싶어 목소리를 조금 더 키우는데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팔을 뻗어 열린 문을 잡은 채 문 안쪽에서 엘리어트가 말했다.
“아침은. 해가 중천이에요.”
막 침대에서 일어났는지 머리가 부스스한 그를 보고 문 밖에 서 있던 시즈는 별 일이란 얼굴이 되었다.
“진짜 여태 자고 있던 거에요?”
“좀 쉬라고 했던 게 너 아냐?”
“내가요?”
그런 말을 했었나 싶었는지 시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좌우간 이제 밖에 나가봐요. 다들 기다려요.”
“왜?”
“왜라니, 엘리어트가 모이라고 했다던데요?”
되묻는 게 의아하다는 듯 시즈가 대꾸했다.
성 뜰 안은 아침부터 시끌벅적하다. 동쪽 성탑을 쓰고 있는 병사들은 전부 모이라는 지시에 칠 백 여명의 병사들이 열을 지어 안뜰에 서서 무슨 일인가 싶은 얼굴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훈련에 대한 권한을 달라면서요?”
그들의 제일 앞에 서 있다가 엘리어트가 안뜰로 나오자 그를 향해 헨터만이 말했다.
“잘 해보십시오 오늘부터.”
어제 엘리어트가 꺼낸 말을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 그는 당장 병사들을 소집시켰다.
“전 다른 볼 일이 있어서 나갑니다.”
말하는 그의 뒤로 보이는 성문 근처에서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번에 나가면 오래 걸릴 겁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도록 해보겠습니다만.”
그는 말했다.
“그 동안 수고하십시오.”
거기까지 혼자 할 말 다 하고 엘리어트를 향해 고개를 까닥하고는 그대로 헨터만이 몸을 돌렸다.
안뜰에서 성문 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가는 헨터만의 뒷모습을 보다가 엘리어트는 병사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엘리어트.”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져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가슈들이 걸어오고 있는 그를 향해 반쯤 몸을 틀었다.
“오랜만이에요 엘리어트.”
잘린 나무 밑둥에 앉아 있던 길더가 반가운 기색으로 그를 향해 손을 반쯤 들어보었다. 엘리어트가 먼저 글레린으로 출발한 뒤 이곳에 왔기 때문에 길더를 보는 건 네바렌을 떠나고 나서 처음이었다.
“몸은 이제 괜찮아?”
길더의 앞으로 걸어오며 엘리어트가 물었다.
“그럼요. 그게 언젠데..”
“언제긴. 얼마 되지도 않았구만.”
웃으며 하는 말이 허세라고 생각했는지 레이가 옆에서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병사들 훈련 시키는 일을 맡는 거예요?”
“그래.”
그 대답에 가슈와 아비크가 울타리 뒤쪽에 서 있는 병사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래도 이 북쪽 지방에서 한 때는 손에 꼽을 만한 영주국이어서..”
모여 있는 병사들의 기색을 살피며 가슈는 말했다.
“지금도 병사수가 그리 적지는 않을 거에요.”
“영주가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었으니 훈련은 둘째치고라도 수적으로 적은 수는 아니지."
그의 옆에서 아비크가 말했다.
"적어도 7,8만?”
“그렇다해도 꼴을 보아하니, 비슷한 병력을 가진 다른 영주국과 상대도 안 될 걸.”
그다지 긴장감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병사들을 보며 레이가 덧붙였다.
네바렌에서 온 병사들은 수많은 전투 경험이 있는데다 마지막까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여기 왔다. 느긋하게 이런 곳에서 훈련이나 받고 있는 아스드 병사들과 비교가 안될 것이다.
“훈련이 쉽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 레이가 자신에게 떨어진 일도 아닌데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다시 말했다.
“아침부터 왜 다들 모여 있어?”
뜰 안쪽 성벽 옆으로 이어진 길에서 시라가 걸어 나왔다. 엘리어트와 마찬가지로 방금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그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병사들 훈련시키는 거야? 이 아침부터.”
“아침은요. 이제 곧 점심 때 될 것 같은데.”
대꾸하며 시즈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이즈먼 군.”
“사절로 왔다고 들었는데.. 그런 분이 너무 여유로우신 것 같아서요.”
“하하. 내가 긴장할 게 뭐가 있어?”
시라가 가볍게 웃었다.
“여기 싸우러 온 것도 아닌데.”
“네쉬하트 님.”
그러고 있는데 토비어스와 병사들 몇 명이 그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왔다.
“잠깐 얘기 좀 하시죠.”
제일 앞에 서 있던 입을 떼다가 그의 주위에 있는 여러 사람을 보고는 망설이며 덧붙였다.
"자리를 좀 옮겨서."
말하기 곤란한 얼굴을 하는 그를 보고 엘리어트가 끄덕이며 걸음을 뗐다.
“시즈.”
그 와중에 굳이 같이 따라가려는 시즈를 갑자기 시라가 불러 세웠다. 시즈가 돌아봤다. 시라는 토비어스와 함께 걸어가는 엘리어트 쪽을 보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네?"
시라는 저쪽으로 가는 엘리어트쪽을 보았다.
"아냐."
곧 고개를 저으며 시라는 시즈를 향해 미소지었다.
"가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시즈는 토비어스를 향해 뛰어갔다. 그 모습을 보다가 시라는 잠깐 생각했다.
'잘못 들었겠지.'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시라는 가슈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엘리어트에게 병사들을 넘기고 마차로 간 헨터만은 마침 성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어딜 다녀오십니까?”
가까이 다가오는 두 사람을 향해 인사를 건내듯 그가 허리를 한 번 굽혀 보였다.
“공녀님들.”
피아와 함께 밖에 나갔다 들어오던 이엘은 아침부터 성 안뜰에 웬 병사들이 모여 있나 싶어 그쪽을 보며 오다가 옆에서 헨터만이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을에요.”
마찬가지로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그녀는 대답했다.
“식재료를 좀 마련해 두러.”
“그러시군요.”
웃으며 그냥 하는 소리였지만 평소 그에게 가지고 있던 인상 때문인지 그 말조차 무슨 뜻이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나요?”
시끌시끌한 안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녀가 물었다.
“별 일 없습니다. 그냥 병사들이 어떤 상태인지 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반쯤은 그가 떠넘긴 거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으며 헨터만은 덧붙였다.
“생각보다 부지런한 사람이에요.”
“아.. 네.”
말하는 게 엘리어트를 지칭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채며 이엘이 모호하게 대꾸했다.
그녀가 다시 안뜰로 시선을 돌리는 동안 헨터만은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또 다른 공녀를 한 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채고는 조심스럽게 공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한참 시끄럽고 나면 이번에는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일테니까 잘 좀 부탁드립니다.”
공녀에게서 시선을 떼며 이엘을 향해 헨터만은 다시 말했다.
“식재료도 준비했다고 하시니.”
“네. 그럴 게요.”
순순히 대꾸하는 이엘을 향해 헨터만이 그대로 고개를 까닥했다.
“그럼 전 이만.”
마차에 오르고 이내 성문을 통과해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보다가 이엘은 성 안뜰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스드는 몇 년 간은 싸움에 휘말린 적 없었지?”
토비어스가 말한 건 아스드 병사들의 텃세로 병사들과 살짝 마찰이 생긴 일이었는데 그 점은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엘리어트는 병사들이 기초 훈련을 하는 동안 통나무로 만들어진 울타리 뒤로 와 있었다. 그런 엘리어트와 함께 병사들이 연습하는 걸 지켜보고 있다가 시라가 묻고 있었다.
“그런 것 같아.”
훈련을 게을리 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전장에 나간 적 있는 병사들과는 기본적인 분위기부터 달랐다. 경험에서 얻어지는 예리함은, 훈련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분위기로 보건데 그 정도 걱정을 하려면 아직 먼 듯 했다.
아스드에 오긴 했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통나무로 된 울타리 한 쪽에 기대 서서 가만히 병사들이 움직이는 걸 보다가 시라는 문득 아까 시즈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네가 그분 양자로 들여진 줄은 몰랐어.”
네쉬하트라는 성을 가졌다는 건 결국 그런 뜻일 것이다.
엘리어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하긴, 내가 먼저 윌더른을 떠났으니. 그 뒤로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
“그러지 않았어.”
다시 병사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엘리어트는 말했다.
“응?”
제대로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시라가 반문했다.
“양자가 된 적 없어.”
엘리어트가 다시 하는 소리에 시라는 잠깐 방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했다.
“엘리어트.”
들은 소리가 이해가 가는 순간 곧 그는 얼떨떨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대답 없이 엘리어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 시선에 시라는 자신이 잘못 알아 들은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야?”
자신을 쳐다보는 엘리어트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잠시 그 시선을 마주하다가 시라가 통나무에 등을 기대며 소리 없이 숨을 내쉬었다. 무슨 뜻인지 당연히 모를 리가 없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말문이 막혀 시라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보니 처음 글레린에서 엘리어트를 만났을 때도 그렇게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때는 반가운 마음에 무심코 지나쳐 버렸다.
시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의 이름을 사칭하는 건, 쉽게 넘어 갈 수 없는 일이다. 이름을 사칭해 이익을 취한다면 당연히 중죄. 그렇지 않고 호기심이나 호승심으로 그런 짓을 한다고 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아마 엘리어트는, 그 중 어디에도 뜻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나중에 문제가 될 거야.”
진지한 얼굴로 엘리어트를 향해 그는 말했다. 기사 직위를 받지 않았다는 얘긴 이미 알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일 수도 있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그것은 더 심각한 사안이 되어 엘리어트에게 돌아올 것이다.
너도 알겠지만..”
깊이 캐물을 생각도 없고 묻는다고 해도 다 말해줄 것 같지 않다.
“괜찮겠어?”
“안 괜찮아도 할 수 없어.”
엘리어트는 말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니까.”
목소리가 평소와 같았지만 어쩐지 엘리어트가 감추고 있던 마음 한 쪽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깊이 다시 시라가 숨을 들이 마셨다.
“내가 다 알 순 없지만...”
혼자말처럼 그가 중얼거렸다.
“어쨌든 너한테 공연히 문제가 생기진 않았으면 좋겠다.”
진지하게 하는 소리에 잠깐 그를 보다가 엘리어트는 그대로 다시 병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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