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16 엘리어트(3)
2.16 엘리어트(3)
시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던 헨터만과 함께 엘리어트가 성으로 돌아간 건 오후가 훨씬 지나 저녁이 거의 다 됐을 때 쯤이었고 베이그릴스 영주와 아기실 영주가 돌아온 건 거기서도 한참이 더 지난 한밤중이었다.
밤이 깊었지만 아직 할 말이 남았었는지 두 영주는 베이그릴스 영주의 침실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응접실에 있었다.
“가봅시다.”
다과를 준비해 달라고 했다는 소리를 어디서 전해 듣고는 그 때까지 내내 별관에서 기다리던 헨터만이 말했다.
“이 시간에요?”
이미 늦어 이렇게 불쑥 찾아가는 건 그냥 봐도 반길 일은 아니다.
“종일 기다렸는데 그냥 공칠 순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예의라고는 생전 챙겨 본 적이 없는 헨터만은 영주를 찾아가기 전 옷매무새를 매만지고 있었다.
“일단 가서 얼굴이라도 봐야죠.”
어깨 양 쪽을 한 번 씩 털어내고는 그렇게 말하며 그가 방을 나섰다. 어쩔 수 없이, 엘리어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과를 준비해 이제 막 응접실로 들어가려는 하녀에게 돈 몇 푼을 쥐어 준 뒤 헨터만이 그녀에게서 널찍한 은쟁반을 받아 들었다. 가볍게 노크를 하고는 기척이 나자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은 작지 않았지만 가운데 두 남자가 마주보고 앉아 있는 2인용 테이블을 비롯해 제법 단촐하고 아늑하게 꾸며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지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는 찰나 베이그릴스 영주가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안으로 들어온 헨터만을 보고 그가 앞에 앉아 있는 또 다른 남자가 눈치 채지 않게 그를 향해 살짝 눈짓을 했다.
무대포로 찾아온 줄 알았더니 이미 베이그릴스 영주와는 얘기가 되어 있던 눈치에 엘리어트는 자신들 쪽에서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다른 한 명의 남자를 보았다. 뒷모습 뿐이었지만 풍채가 좋고 앉아 있는데도 키가 꽤 컸다.
두 사람 사이로 걸어가 헨터만이 들고 있던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늘 시중을 들던 하녀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멋지게 차려 입은 남자가 쟁반을 내어 놓자 뭔가 이질감을 느꼈는지 그제야 남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재밌는 얘기라도 나누시는 중이신가 봅니다. 영주님들.”
영주의 시선에 예의 바르게 헨터만이 말했다.
“그러던 중일세.”
티나지 않게 아기실 영주의 눈치를 살피며 베이그릴스 영주가 재빨리 대꾸했다.
“자네는 웬 일인가? 연락도 없이.”
“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뵙기 어려운 분께서 이곳에 계시다고 해서.”
평소보다 훨씬 사람 좋은 듯 웃으며 두 사람이 말을 주고 받는 걸 엘리어트는 그저 보고 있었다.
자신을 지칭한다는 걸 알았는지 방안에 있던 다른 남자의 시선이 헨터만을 향해 있었는데 그 기색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자신은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나아 보였다.
“유시드 헨터만이라고 합니다.”
그걸 아는 지 모르는지 영주의 시선에 헨터만이 이제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영주님.”
“유시드 헨터만.”
베이그릴스 영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남자가 묵직하게 입을 뗐다.
“그 이름 들어 본 적 있지.”
턱 아래 수염을 단정하게 기른 중년이 넘어 보이는 자였다. 눈빛은 조용했지만 시선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나에게 무슨 볼 일이 있나?”
이런 일이 익숙했는지 그다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아기실 영주가 그를 향해 묻고 있었다.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다시 정중히 대답하며 그를 향해 헨터만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밤중에 불쑥 나타난 게 무례인 줄은 알지만 아기실 영주님을 뵙게 될 기회가 흔치 않아 실례를 무릅쓰고 끼어 들었습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실례라고 말하면서도 표정은 뻔뻔한 게 유들유들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자네에 대해선 오베른의 영주에게 들은 적 있네.”
그러나 그 생각만큼 너그럽지는 않았는지 그를 향해 아기실 영주가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웬만한 영주들은 전부 휘젓고 다닌다는 말은 들었네만 하지만 나까지 손에 쥐고 흔들 생각에 찾아온 거라면 착각일세.”
“영주님 저는 결코 그래서...”
“자네 입에서 나오는 얘기가 궁금하지도 않고 여기서의 내 시간을 방해 받으면서 듣고 싶지도 않네.”
헨터만의 말을 자르며 아기실 영주는 말했다.
“차는 잘 마시지. 더 할 말 없으니 이만 나가보게.”
그렇게 말하며 아기실 영주가 헨터만이 내려 놓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왔던 사람처럼 별 말도 못해보고 조금 뒤 두 사람은 쫓겨나듯 그대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자리를 마련해 주긴 했지만 아기실 영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는지 베이그릴스 영주도 더 도움을 주진 못하고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모른척하고 있었다.
“저렇게 나오는 이상 호감을 사긴 어렵겠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엘리어트가 말했다. 영주의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헨터만의 계획은 시작도 전에 끝을 보는 것 같았다.
“다시 기회를 봐야죠. 뭐.. 영주들한테 퇴짜 맞은 적 한 두 번도 아니고, 이 정도는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에 호의적인 반응을 얻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했는지 헨터만은 태연했다.
“호의든 불신이든 일단 얼굴이라도 알렸으니까 어느 정도 목적은 달성한 셈이고요.”
말을 들으며 엘리어트는 조금 전 얼굴을 봤던 아기실 영주를 떠올렸다. 쉰이 넘은 나이지만 풍체가 건장한데다가 옷 아래로 제법 탄탄해 보이는 골격이 느껴졌다. 전장을 돌아다닌지 오래 되었고 은둔 생활 비슷하게 하고 있다고 해도 그냥 손 놓고 있는 영주는 아닌 듯 했다.
“그럼 이제 돌아갈 겁니까?”
순전히 아기실 영주와 얘기를 해 보기 위해 여기 왔으니 그게 무산된다면 이 이상 다른 볼 일은 없다. 그러니 내일이라도 돌아갈 수 있었다.
“영주가 며칠은 더 여기 있을 거라고 했으니 그 동안에는 있어야죠. 돌아갈 때까지 몇 번 더 구애 해 보고.”
“보기만큼 끈질긴 편인가 보네요.”
무심히 하는 소리에 헨터만이 으쓱했다.
“당연하죠.”
이 정도에 물러선 적은 그 역시 한 번도 없었다.
“여기 계속 있는 게 당신한테도 좋은 거 아닙니까.”
짓궂게 농담을 한 마디 덧붙였지만 신경 쓰지 않으며 엘리어트는 굳게 닫혀진 문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 뒤로 며칠 동안 말대로 성에서 서성이며 헨터만은 아기실 영주와 다시 얘기를 해 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엘리어트 역시 그와 함께였다. 그러느라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대체로 꼼짝없이 성에 있어야 했다.
그 동안 받은 게 있었으니 헨터만의 무언의 압력으로 중간에서 아기실 영주와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다시 말할 기회를 마련해 주느라 베이그릴스 영주 역시 소리없이 분주했다.
그 입장에서는 헨터만도 놓칠 수 없는 자였고 아기실 영주 역시 뜻을 거슬러 함부로 눈밖에 날 수 없는 사람이어서 둘 사이에서 그는 좀 진땀을 빼는 듯 보이고 있었다.
좋을 거라던 헨터만의 말과 달리 엘리어트는 그와 함께 낮에는 꼼짝없이 성에 있었고 저녁이 될 때쯤 가게에서 돌아온 그녀를 만나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는 게 다였다.
한 이삼일을 그렇게 성에서 보내며 분위기를 보고 있었다. 나흘 째 되는 날 아침 일찍 머물고 있던 별채에서 나와 엘리어트가 본관으로 들어가는데 베이그릴스의 세나즈 영주가 급하게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어딜 그렇게 가십니까?”
영주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엘리어트는 물었다.
“영주님께서 아침 일찍 오베른에 다녀오신다고 하네.”
갑자기 말이 나왔는지 그는 좀 서두는 기색이었다. 오베른 영주와 친한 사이었기 때문에 여기 왔을 때 아기실 영주는 가끔 그를 만나러 가곤 했다.
“지금 말입니까?”
어제 밤 늦게부터 새벽까지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가 아침이 되어 이제 막 그친 참이었다. 비는 그쳤지만 날은 먹구름이 끼어 있었고 쏟아진 비의 양이 제법이니 길은 거의 진흙탕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하네만 곧 아기실로 돌아가실 모양이라 오늘 아니면 안 되실 것 같네.”
마침 엘리어트를 만난 게 잘됐다는 듯 그는 말을 이었다.
“헨터만에게 얘기 좀 전해주게. 난 얼른 가서 준비를 해야하니.”
“알겠습니다.”
엘리어트의 대답에 영주는 한숨 돌렸다는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헨터만에게 받는 압력이 제법이었는지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의 등살에서 벗어나는 걸 안도하는 듯 했다. 서둘러 복도를 걸어가는 그를 보다가 다시 별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어트도 몸을 돌렸다.
베이그릴스 영주가 서둘러 아기실 영주를 뒤쫓아 가고 얘길 전해 들은 헨터만이 김샜다는 듯 별관 방안으로 들어가 오늘 하루 무슨 짓을 꾸밀지 생각하는 동안 엘리어트는 성 밖으로 나왔다.
저녁 때 셰릴을 별관에서 볼 수 있었지만 늘 디에나와 함께 있어 자주 얼굴을 보기도 어려웠고 여기 있으면서 낮에 계속 떨어져 있는 것도 신경이 쓰여 오늘 하루는 그녀와 함께 있을 생각이었다.
가게로 갈 생각이긴 했지만 그러기 전에 시장 한 곳에 있는 대장간에 들릴 것이다. 이전에 아비크와 같이 왔을 때 필요할 때 이용하라면서 알려준 소식통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었다.
레이의 매가 소식을 알릴 때 그쪽으로 보내진다고 했으니 그럴 일은 없었지만 혹시 무슨 연락이라도 와 있는지 확인도 해보고 이 근처 소식도 알아 둘 생각이었다.
대장간은 시장 제일 끝의 가장 외진 곳에 있었다. 여러 가지 철제 기구나 무기 같은 것을 파는 곳이니 번화한 한 한 가운데 있는 게 보통이었으나 이 대장간은 시장과 이어지는 곳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한적하고 외진 곳에 있었다.
아무래도 물건을 파는 것보다 다른 용도로 이용되고 있는 듯 했고 가까이 가보니 그 생각대로 망치질 소리 하나 없이 안은 조용했다.
“무슨 볼 일이쇼?”
엘리어트가 입구 근처로 가 안을 들여다 보는 와중에 대장간 안 쪽에서 불쑥 소리가 날아왔다. 그림자로 어두워 보이는 안에서 웬 남자가 손에 묻은 그을음을 수건에 문지르며 앞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레이 반트의 소개로 왔습니다.”
말하자 수상한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보다가 곧 말하며 남자가 몸을 돌렸다.
“들어 오슈.”
남자를 따라 엘리어트는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쇠를 담금질 하는 장소를 지나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바로 뒤가 트인 뒷마당으로 나왔다. 그 바로 앞에 사각 격자로 된 사람 대여섯은 들어 갈만한 헛간 같은 게 있었다.
헛간이라기 보다는 작은 감옥 같이 생겼는데 문을 여니 그 안에 새 둥지가 여러 개 보였고 위가 뚤려 있어 안으로 새들이 날아들어 올 수 있게 보였다.
“확인 할 거면 돈을 내야지.”
문을 열고 멀뚱히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자 심드렁히 그가 대꾸했다.
대장간 남자에게 돈을 좀 쥐어주자 그가 헛간 안으로 들어가 안에 있는 새둥지를 전부 확인해 보고는 곧 아스드에서 온 연락이 없음을 확인해주었다.
그러고나서 인근에 특별한 소식이라도 있는지 묻자 또 뚱한 표정을 짓는 남자에게 다시 돈을 주고 몇 가지 얘기를 듣고 난 뒤 엘리어트는 잠시 후 대장간을 나섰다.
둥지마다 표식이 조금씩 되어 있는 걸로 보아 대충 훑어보고도 사실 아스드에서의 전서구는 없었다는 걸 알았을텐데 조금 전 남자는 굳이 둥지를 전부 확인하고 난 뒤 엘리어트에게 말을 전했다.
대장간에서 철을 연마해 기구를 만들지 않고 이렇게 해서 돈을 버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어트는 방금 전 지나왔던 대장간 안으로 걸어 들어 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방금 전 남자와 형제인지 쌍둥이처럼 꼭 닮은 또 다른 덩치 큰 남자가 가게 바로 그의 앞을 지나치며 대장간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이거 하나 뿐이오.”
그래도 대장간에서 만든 물건을 하나도 팔지 않는 건 아니었는지 앞에서 무언가를 들어올리는 남자의 손에서 묵직한 쇳소리가 느껴졌다. 등을 돌리고 있어 보이진 않았어도 날이 있는 무기라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짧은 목소리와 함께 돈을 건냈는지 남자의 손에서 짤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돈을 세는 동안 그 옆을 지나던 엘리어트의 눈에 건내 받은 검을 끌어 안은 채 이제 가게를 빠져 나가려는 남자의 옆모습이 얼핏 보였다.
며칠 전 셰릴이 있는 가게 앞에서 봤던 청년 중 하나를 보고 엘리어트의 시선이 더 자세히 그쪽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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