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20 균열(7)
두올린의 지하 감옥은 백년을 넘게 이어오면서 수십 번의 보수와 확장을 거쳤고 그 덕에 지금의 영주도 그 규모와 구조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생긴 부산물이었는 지는 몰라도 가슈가 아비크가 우물 속에서 들어선 좁은 통로는 몇 걸음 간격으로 진행 방향을 계속 바꾸고 있다. 구불구불 이어진 형태가 두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뱀의 뱃속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반복적으로 방향이 변하는 통에 흙벽에 자꾸 어깨를 부딪치며 두 사람은 더듬더듬 앞으로 나갔다. 그러던 두 사람의 머리 위가 일순 갑자기 높아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에 연기가 꽉 들어 찼다.
“이게 뭐야?”
아비크가 의아해하는 동안 가슈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습하고 무거운 공기. 정체되어 있는 뿌연 공기는 자세히 보니 연기가 아니라 수증기였다.
“이런 게 왜 여기 있는 거야?”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무거운 수증기를 들이 마시며 아비크는 통로가 끝난 앞을 보려고 애썼다.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도 없는데다 수증기가 어찌나 꽉 차 있는지 그 앞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인지 지금 이곳에 어둠은 없다. 우물을 한참 내려 왔으니 분명히 지하 깊은 곳일 텐데 어디서 빛이 들어오는지 앞은 밝았다.
“감옥 안으로 들어오긴 한 건가?”
앞을 확인하며 아비크가 말했다.
“글쎄.”
당장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다 구불구불한 통로를 몇 번씩 돌고 돌았으니 얼마나 움직였는지는 고사하고 방향조차 판단하기 어려웠다.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하고 흙벽 사이에서 가슈는 앞으로 나왔다. 발밑은 단단했지만 흙으로 되어 있다. 돌바닥이면 영주의 성 지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흙으로 되어 있으니 이것도 알수 없다.
통로에서 완전히 나와 가슈와 아비크는 수증기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인기척도 아직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수증기 때문에 옆에 누가 있어도 알기 어려울 지경이지만 누가 있다 해도 두 사람의 기척 역시 쉽게 알아 챌 수 없을 것이다. 재수 없이 코앞에서 바로 마주치지 않는 이상 지금 당장 들킬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잘못 온 거 아냐?”
어느 정도 움직인 것 같은데도 계속 수증기 안을 벗어나지 못하자 아비크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피쇼란 녀석, 엉뚱한 데로 우릴 데려 온 건 아니겠지?”
“그건 더 확인해 봐야..”
말하며 계속 앞으로 걸가는데 수증기가 조금씩 옅어지더니 시야가 순간 개였다. 뜬금없게도 두 사람의 바로 앞에 커다란 바윗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건 또 뭔가 싶어 손으로 돌의 윗부분을 두드리며 아비크가 그 앞을 돌아 나가려는데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수증기 안으로 몸을 숨기며 두 사람은 바위 뒤를 주시했다. 잠시 후 창을 든 병사 둘이 바위 바로 앞을 지나가는 게 보였다. 조금 있다 기척은 이내 멀어졌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
병사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니 적어도 성에서 이어진 구조물로 들어선 것은 분명하다. 그럼 아마 지하 감옥의 한 자락일 것이다.
“이왕 마주친 거 그냥 때려 눕힐 걸 그랬나?”
누군지 몰라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지만 보초병이면 차라리 때려 눕혀 놓는 게 나을 뻔 했다고 생각하며 아비크가 말했다. 가슈는 바위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뭐하러? 그냥 지나가게 두는 게 낫지.”
이제 아무도 없는 곳에 돌길이 길게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보며 가슈가 대꾸했다.
“어차피 상대할 놈들이면 지금 하나라도 줄여두는 게 낫잖아?”
아비크가 다시 말했다.
“넌 아주 여기서 싸울 마음을 먹고 있구나.”
“그럼 아냐?”
“네가 길더한테 뭐라고 할 이유가 뭐냐 대체.”
한숨처럼 덧붙이며 가슈는 병사들이 사라진 방향을 다시 보았다. 바닥에 무거운 수증기가 가라앉아 있긴 하지만 시야는 확실하다. 어디로 이어졌는지 모를 좁은 돌바닥이 앞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병사들이 사라지고 나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한 걸 보니 여긴 경비가 삼엄한 쪽은 아닌 것 같았다.
가슈는 방금 전에 왔던 수증기 안을 돌아 봤다.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런 곳에 밖으로 이어진 길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할 것이다. 생각했다고 해도 수증기 속에서 방향을 제대로 찾기가 어려우니 도망칠 마음이 급한 누군가가 이쪽으로 탈출할 마음을 먹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자신들도 지금 다시 왔던 길을 제대로 찾을지 확신하기 어렵다. 구불구불하고 방향을 파악하기 어려운 통로에 수증기, 거기다 이렇게 인기척이 안 느껴지는 곳까지 있는 경비병. 길잡이가 있다고 해도 이런 곳이면 길을 잃고 헤매다 잡히기 십상이다.
“정신 좀 차려야겠는데.”
같은 생각이었는지 아비크도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피쇼란 녀석 여길 빠져 나온 건 순전히 운이야.”
“그건 확실해 보여.”
끄덕이며 가슈는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너무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것도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경험이 있어 도망치는 건 잘 한다고 해도 페이든 일행이 훈련이 잘 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럼 두 사람이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더구나 나갈 때는 들어올 때보다 더 많은 인원이 같이 빠져나가는 게 목적이다. 어디서 어떻게 갇히게 될 지 구조도 잘 모르는 곳에서 굳이 처음부터 많은 인원으로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움직일 사람 수를 줄이는 게 좋겠어.”
가슈가 말하자 아비크도 끄덕였다.
“동감.”
이제 가서 페이든에게 상황을 전하고 안으로 들어올 인원을 정하기 위해 두 사람은 왔던 쪽으로 발을 돌렸다.
“이럴 거면 대장 쪽을 더 도와줄 걸 그랬나?”
엘리어트를 떠올리며 아비크가 중얼거렸다.
“인원이 늘면 눈에 띌 부담도 커지니까..”
뒤에서 또 경비병이 지나가지 않는지 주시하며 가슈는 대꾸했다.
“그쪽도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거야.”
아까 둘로 나뉠 때 엘리어트가 아침이 되어 성에 사람들이 조금씩 들어 찰 무렵에 일을 시작하라고 했으니 이제 거의 시간이 다 되었다. 페이든 들에게 말을 전하고 돌아오면 얼추 맞을 것이다.
수증기 안으로 들어서며 두 사람의 모습이 곧 사라졌다.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카뷔에 에르디스는 아침 일찍 성을 나설 계획이었다.
어제 모인 사람들과 안면을 튼 것으로 표면적인 그의 역할은 다 했는데다 용건이 없는 곳에서 미적거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 사실 그는 어젯밤 성을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행보를 시작하고 도둑 고양이처럼 몰래 사라지는 것도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인내하며 하루를 여기서 보냈다.
불필요한 격식을 전부 차린 뒤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오후 일정을 오전으로 앞당긴다고 합니다.”
그런 그 앞에서 지금 키히스가 말하고 있었다. 밤새 밖에 있다 조금 전 성안으로 들어와 짜증난 얼굴로 안뜰을 정리하고 있던 아게드를 지나쳐 그는 여기로 왔다.
“이유가 뭐야?”
잠시 입을 열지 않고 있다가 이윽고 카뷔에 에르디스가 말했다.
“장사꾼들 물건에 누가 손을 댄 것 같은데..”
키히스는 대답했다.
“영주가 다른 사람들한테 망신 당하는 걸 피하려고 오후 행사에 모인 사람들을 끌고 갈 모양입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키히스는 입을 다물었다. 카뷔에 에르디스는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도 뻥긋 않고 가만 있는 주군이 다시 입을 열 때까지 키히스는 기다렸다.
“무슨 일인지 영주가 정확히 알고는 있나?”
잠시 후 카뷔에 에르디스가 천천히 물었다.
“아게드가 파악하고 있지만 아직 확실히는 모르는 듯 합니다.”
키히스는 말했다.
“먼저 보고 드리고 저도 가서 알아보려 합니다.”
짧게 대꾸하며 키히스는 말을 이었다.
“마차는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늘 아침 카뷔에 에르디스가 여길 나가는 것은 그도 알고 있다.
“이제 그만 가시죠.”
대꾸없이 카뷔에 에르디스는 가만 있었다. 갑작스러운 계획 변경. 우연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서의 우연을 쉽게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시죠 영주님.”
가만히 있는 그를 보며 키히스가 다시 재촉했다.
“.... 출발을 잠시 미루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카뷔에 에르디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하고 다시 내게 와 보고해.”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키히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길게 왈가왈부 할 것도 없이 주군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 그대로 그가 방을 빠져 나갔다.
혼자 남은 카뷔에 에르디스는 침대에 걸터 앉은 채 여전히 꿈쩍 안했다. 큰 문제가 아니더라도 계획된 일이 변경되는 것에 그는 예민했다. 그의 성이 아닌 두올린의 성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까부터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렇게 날카로워진 신경을 가라앉히며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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