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18 전환(2)
2.18 전환(2)
성을 빠져나와, 셰릴과 디에나는 여느 때처럼 시장 한 구석에 있는 가게로 향했다. 축제 때문에 시장은 요즘 한산하다. 거기에 맞춰 가게 역시 며칠 한가했다.
오늘은 가는 길에 길가에 사람 하나 더욱 보이지 않는다. 보통 때면 가게에서 일하는 노이나 티에리들이 근처에서 서성이기도 했는데 그들마저도 없다. 보이지 않으니 그건 또 그것대로 염려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드러나게 그리고 드러나지 않게 받고 있는 차별에 노이나 티에리를 비롯해 가게를 드나들고 있는 기하족 청년들의 불만은 조금씩 더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다 또 다시 시장 사람들과 싸움이 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분위기다.
예전에 엘리어트가 가게 앞에서 시비 걸러온 상인들을 혼내 준 뒤, 뭐라고 말이 돌았는지 몰라도 그 뒤로 다시 가게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자들은 없었지만 그렇게 되고 나니 이번에는 티에리들이 먼저 싸움 걸 일이 없는지 꼬투리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셰릴과 디에나는 여기서 딱히 주도권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베일리씨가 그녀를 대우해주고 있어선지 아니면 작물에 관해 그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어 가게를 운영하는데 그녀의 역할이 결정적인 것 때문인지 몰라도 여간해서는 그녀들을 따르는 편이었지만 무슨 일이 터졌을 때 그걸 통제할 능력도 권리도 그녀들에게 없음을 셰릴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나서서도 안 될 일이고.
불안하게 느껴지는 이곳의 청년들을 위해서 마을 밖으로 나간 야네드 베일리 씨라도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며 가게 문을 열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렇게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가게 안에 누가 서 있었다. 그녀가 방금 전까지 빨리 돌아오길 바랬던 야네드 베일리가 가게 한 쪽에 있는 걸 보고 셰릴은 멈칫했다.
누가 들어오는 소리에 베일리 씨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일리 씨.”
셰릴과 디에나가 잰걸음으로 그 앞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입니다.”
앞으로 걸어온 두 사람을 향해 공손히 그가 말했다.
"아가씨들."
그가 돌아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하며 셰릴은 끄덕였다.
"이제 돌아오신 거예요?"
셰릴과 디에나가 지난 번 아스드에 다녀오기 전부터 그는 마을에 없었으니 근 한달 만에 돌아온 셈이다.
"진짜 멀리까지 가셨나 보네요."
가볍게 디에나가 항의했다.
"가게 일은 우리들한테 다 떠넘기고."
"디에나."
난감한 얼굴로 셰릴이 그녀를 불렀다.
"아.. 죄송합니다."
오래 마을을 비웠기에 그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미안한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말하며 걸어가서 그는 가게 문에 빗장을 걸었다.
왜 문을 잠그는지 의아하게 보는 두 사람을 향해 야네드 베일리는 말했다.
"제가 혼자 돌아온 게 아니라서요."
무슨 소린가 싶어하는 두 사람의 뒤쪽에서 가게와 창고 사이를 연결하는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 안에서 소리없이 남자가 걸어 나왔다.
안쪽에서 나온 남자와 셰릴과 디에나는 눈이 마주쳤다.
"라이노 씨."
예전에 아젠에서 만나 자신들을 야네드 베일리 일행을 소개해준 라이노가 거기 서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조금 반가운 기색으로 셰릴은 말했다. 베일리 씨 일행에게 그녀들을 소개해 준 뒤 그는 다시 모습을 감췄고 그 뒤로는 볼 수 없었다.
"그러게. 여태 어딨었어요?"
셰릴과 디에나가 그를 향해 한마디씩 하자 그런 친밀감이 낯설었는지 라이노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눈이 붉어진 그는 베일리 씨 일행과 같이 다니지 않는다. 언젠가 한 번 베일리씨에게 물어본 적 있는데 꽨 먼 곳에서 바쁘게 지내고 있다는 모호한 말을 들었다.
"이제 여기서 지내시는 건가요?"
셰릴은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라이노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아가씨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 겁니다."
그러면서 그가 대꾸했다.
"할 말.. 저한테요?"
뭘 말하고 싶은지 몰라 셰릴이 반문하는 동안 라이노가 베일리를 향해 눈짓을 했다.
“최근에 기하족 중에 눈이 붉어지는 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그 눈짓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베일리는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드문 일이었는데 지금은 이유를 알 수 없이 변화가 늘고 있죠.”
셰릴이 궁금해하는 소식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아 그는 얘기를 덧붙였다.
“알아본 바로는 그런 마을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마을 몇 개는 몰살당하고 몇 개는 마을 전체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 중 일부가 우리와 같이 있는데...”
베일리는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이 아가씨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뜻밖의 소리에 셰릴은 의아해졌다.
“저를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어째서 저를...”
야네드 베일리나 라이노 같은 사람도 처음 셰릴이나 디에나를 받아주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받아줄 수 있었던 건 베일리 일행이 어느 정도는 노출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더욱 심한 숨어 있는 기하족이 먼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은 평범한 얘기가 아니다.
“죄송한 얘기지만.."
미안한 기색이 살짝 돌았으나 돌려 말하지 않고 베일리는 말했다.
"아가씨한테 도움을 받고 싶어서요.”
"제게요?"
무슨 영문인지 셰릴은 납득이 안됐다.
“제게 무슨.."
잠깐 생각하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가게 일을 말하시는 거라면, 그 쯤은 누구라도..”
“그것도 물론 도움이 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럼요?”
무슨 이유로 자신을 만나려고 하는지 셰릴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왜 저를 만나고 싶어하는지 저는 잘.."
“아가씨가 귀족이니까요.”
그녀의 기색에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춰 야네드 베일리는 말했다.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는 몇 안 되는 귀족이니까 그렇습니다.”
진지한 얼굴에 뭐라고 해야할 지 셰릴은 말문이 막혔다.
“당장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난감해하는 기색에 베일리는 다시 말했다.
“일단은 한 번 만나기만 해주셔도 됩니다.”
“생각해 봐주십시오.”
라이노까지 덧붙이며 머리를 조아리자 더욱 난감해져 셰릴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가게에서 얘기를 한 뒤 라이노와 야네드 베일리는 정오가 되기 전에 가게에서 사라졌다. 저녁이 다 될 때까지 있다가 셰릴과 디에나는 해가 완전히 지기 전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게 밖으로 나왔다.
“거절하는 것도 뭐하게 나오네요.”
성으로 이어진 길로 내려오며 디에나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할 거예요?”
“모르겠어요.”
여러 가지 생각으로 셰릴은 머리가 복잡했다.
“그냥 만나기만 한다면야 뭐.. 상관없지 않아요?”
거기에 대고 깊이 생각할 거 없다는 듯 디에나가 말했다.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가볍게 생각해도 될 일인지, 그걸 모르겠어서요.”
길옆에 세워진 손수레에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며 셰릴은 앞으로 걸었다.
해가 다 지기 전 두 사람은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성문을 통해 별채로 이어진 길로 들어서는데 아침에 넘어진 화단 근처에 아릴이 앉아 있는걸 보고 두 사람이 자리에 섰다.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길 한 가운데 떡하니 앉아 그녀는 아침과 마찬가지로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있었다.
책을 햇빛에 비추듯 위로 들어 올리더니 이내 머리에 얹으며 그녀가 손으로 책 위를 눌렀다. 그렇게 장난을 치다가 시선을 느꼈는지 아릴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을 발견하고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 위에 올려 놓은 책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자 그녀가 허리를 숙였다.
두 사람이 아릴의 앞으로 걸어갔다.
“왜 여기 있어요?”
“또.”
셰릴의 뒤에서 디에나가 책을 집어 드는 그녀를 향해 덧붙였다.
“그건 왜 계속 들고 다니면서 떨어뜨리고.”
책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아릴이 겸언쩍게 웃었다.
“그게, 다 이유가 있어요.”
축제 첫날 바닷가에서 어느 기사를 보고 홀딱 반한 리스가 그의 책을에 연애 편지 끼워 두고 싶어했다. 편지를 끼워 둔 채 가져가 기사가 발견하게 해달라는 게 그녀의 부탁이었다.
“그냥 책을 갖고 싶어서 찾는 줄 알았는데..”
생각지 못한 용도에 아릴은 손에 든 책을 머리 위로 들어 보였다.
“이렇게도 쓰이더라구요.”
너무 고전적인 수법에 혼자 놀라워하는 그녀를 향해 셰릴은 상냥히 물었다.
“심부름만 하고, 아가씬 축제 참가 안 해요?”
“이게 참가하는 거에요.”
냉큼 아릴이 대꾸했다.
“생각보다 재밌어요.”
“그렇게 재밌으면 가서 할 일 하지 왜 여기 있어요?”
디에나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할 일 하려구요.”
디에나에게 대꾸하고는 아릴은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크게 말했다.
“연애 편지 쓰는 법 좀 알려주세요.”
무슨 엉뚱한 소린가 싶었는지 자신을 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아릴은 덧붙였다.
“리스가 저보고 써 달랬는데 그런 거 잘 몰라요 전.”
“그런 걸 누가 대신 써요?”
“리스가 부끄럼이 많아요.”
책까지 훔쳐와 달라고 하는 걸 보면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거기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으며 아릴은 베시시 웃었다.
리스가 부탁했을 때는 부담스러웠는데 생각해 보니 두 사람하고 또 얘기할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성으로 돌아오는 아릴의 발걸음은 가벼워져 있었다.
“왠지 두 분은 그런 것도 잘 아실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봤는데요?”
기가 막힌 듯 대꾸하며 디에나가 입을 이죽거렸다. 그런 걸 잘 쓰는 재주가 있었으면 자신 일도 벌써 해결을 봤을 것이다.
“그러지 말고 좀 도와주세요.”
양 손을 앞으로 모으며 아릴이 머리를 숙여 보였다.
“네?”
멀뚱히 쳐다보는 두 사람을 슬쩍 보고는 아릴이 다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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