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17 잠행(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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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잠행(11)
머리 높이로 떠 있던 태양이 아래로 내려가자 볕이 한 풀 꺾이며 대지에 그늘이 졌다. 땡볕을 받으며 세이지와 쿈은 지금까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대낮에 두 사람이 요새로 들어가고 난 뒤 이제 반나절이 지났다. 아직 저녁 전이지만 이미 꽤 오래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면서 요새 앞으로 뻗어 있는 대지를 계속 지켜보았지만 파비앙이 요새 안으로 들어간 이후 요새의 두꺼운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던 대지 위로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고 있다.
햇볕이 한 풀 꺾이자 바위 틈에서 세이지와 쿈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저쪽은 아직 조용하다.
“늦네.”
초조하게 세이지가 중얼거렸다. 별 대꾸없이 옆에서 쿈은 대지 저쪽을 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는데 저기 멀리에서부터 무언가가 조그맣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요새에서부터 두 사람이 숨어 있는 바위까지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거리가 있었는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게 엔지프인 것을 알아 챌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왜 이렇게 늦어?”
이윽고 바위 앞까지 온 엔지프를 향해 세이지가 말을 건냈다.
“잘 하고 온 거야?”
“가자.”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엔지프가 말했다. 호흡은 거칠고 옷은 이미 땀에 절어 있다.
“어딜?”
기색이 의아해 되묻다가 세이지는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왜 혼자야?”
엘리어트는 보이지 않는다.
“그 녀석은?”
“저기에.”
“저기?”
엘리어트는 요새 안에 있다. 엔지프가 빠져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혼자 다시 요새로 들어갔다.
여기까지 타고 온 말은 바위에서도 더 떨어진 작은 수풀더미 사이에 보이지 않게 매어 두었다.
“지체할 시간 없어.”
말이 묶여 있는 쪽으로 몸을 틀며 엔지프가 다시 말했다.
“빨리 여기서 벗어 나야돼.”
세이지와 쿈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우리끼리?”
서둘러 그를 쫓으며 세이지가 물었다.
“그 녀석은 어쩌고?”
마뜩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두고 간다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그렇게 되묻는 세이지를 내버려 둔 채 엔지프는 말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토렌은 에들러에 속한 혈맹국이 아니다. 또한 파비앙과의 거리도 가깝지 않았다. 오히려 웬만한 영주국 서너 개 정도는 떨어진 거리에 놓여 있었는데 그러나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영주국이 없어 인접국이라고 말한다면 또 부정할 수 없는 이웃이기도 했다.
요새는 토렌의 영토 경계선 밖에 있었으며 여기서부터 양 쪽으로 비어 있는 대지가 끝없이 이어졌다.
“키히스 님.”
접견실 밖으로 나오자 병사들 둘이 앞으로 걸어왔다.
“지금 바로 오시랍니다.”
모일 사람은 다 모인 건지 이제서야 그를 찾았다.
그러려고 방금 접견실을 나왔으니 병사의 말에 대꾸도 없이 키히스는 몸을 틀었다. 일행이 모여 있는 곳은 이 요새의 상층으로 계단을 통과해 그는 위로 올라갔다.
여러 층을 걸어 올라가 요새 상층으로 들어서니 돌기둥들이 통로 여기저기서 높은 천장을 받치고 있는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요새 상층은 나머지 층과 구조가 다르다.
매끈하게 깍인 수십 개의 돌기둥들이 밑에서부터 솟아올라 바닥과 천장 사이를 받치고 있었고 기둥들이 이곳의 주인인 것처럼 그 사이는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어려울 만큼 좁기도 했다.
다른 층과 달리 바닥마저 돌로 지어져 있는 상층의 복도를 지나가자니 발걸음 소리가 바닥을 울리며 사방에 퍼져댔다.
폭이 사람 팔을 훌쩍 뛰어 넘는 수십 개 돌기둥이 빼곡히 차 있어 복도라고 보여 지지도 않는 통로를 지나쳐 키히스는 앞으로 나갔다. 상층에 있는 유일한 방은 이 돌기둥들의 제일 끝에 놓여 있다.
돌기둥과 돌바닥 자체가 인기척 없이 그 방으로 접근하는 걸 막아주는 일종의 보호벽 역할을 한다. 이런 곳을 기척 없이 지나쳐 방으로 접근할 만한 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자신과 같은 자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다가 문득 그가 자리에 섰다.
“키히스 님.”
뒤에서 따라오던 병사가 그를 부르는 동안 키히스의 시선은 방금 지나친 돌기둥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계단으로.”
방금 전 기둥 뒤에서 느꼈던 기척이 분명 착각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병사를 향해 지시하고 조용히 키히스는 기둥 뒤로 걸어갔다.
여기에 자신과 병사 둘 만 돌아다니는 게 아니니, 돌기둥 사이를 지나가던 다른 병사나 호위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분명 자신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런 요새에 침입해 들어올 사람은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미심쩍으면 빠짐없이 확인하는 게 키히스였다.
오던 방향에서 직각으로 몸을 틀어 그는 제일 끝에 있는 돌기둥까지 걸어갔다. 지나가던 병사 하나가 그에게 인사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여기까지 아무도 없다. 계단 앞에 병사들을 세워 뒀으니 이 층을 빠져 나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착각이었나.’
무심한 시선으로 마지막 돌기둥을 쳐다보며 있다가 잠시 후 키히스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어느새 조용히 자신의 목에 칼날이 닿고 있었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그의 눈동자가 힐끔 옆을 향했다.
“아젠에서 만난 아이들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게 나타나 옆에 서 있는 남자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어디로 데려 갔어?”
옆에 서서 자신의 목에 칼 끝을 들이대고 있는 남자를 키히스는 유심히 쳐다보았다. 몇 번 생각을 떠올린 적이 있어서인지 알아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입꼬리를 올리며 키히스가 웃었다. 일부러 기척을 흘려 자신을 유인한 것이다. 보아하니 병사들과 떨어뜨려 자신에게 질문하기 위해.
“오랜만이야.”
마치 아는 사람인 것처럼 키히스가 입을 뗐다.
“그러잖아도 다시 만나길 바랬는데 이런 곳에서 보는군.”
말하는 목소리가 태연했다.
“왜 이런 곳에 있지? 초대받고 온 건 아닐테고 설마 나 보러 온...”
칼날이 더욱 목 안을 파고 들자 그는 말을 멈추었다. 목에서 피가 스며 나왔다.
“오래전 일이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는 듯한 행동에 키히스가 대꾸했다.
남자의 목에 칼을 들이 댄 채 엘리어트는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태연히 말하고 있지만 자신에게 향해 있는 눈빛은 날카롭고 치밀하다. 여기서 순순히 대답을 할 생각은 분명 없을 것이다.
입을 열 생각이 없다면 억지로 열게 만들 수 밖에. 엘리어트는 주변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려면 눈에 띄기 전 여기서 제압해 남자를 끌고 나가야 한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들어왔어?”
그런 엘리어트의 기색에 그가 어떻게 나올지 어느 정도 짐작하면서 모른 척 키히스는 말했다.
“허가 받고 들어온 건 아닐테고 몰래 여기 들어올 이유가 있나?”
여유로운 기색으로 그가 미소지었다.
“설마 도둑질이라도 하러...”
말소리와 함께 갑자기 허리께에서 뭔가 번쩍해 반사적으로 엘리어트가 뒤로 피했다.
“도둑 새끼면 여기서 죽어도 할 말 없지.”
어느새 꺼내 엘리어트의 허리쪽으로 찔러 들어갔던 단검을 키히스는 자신의 턱 끝에 갔다 댔다.
“침입자는 너니까.”
단검을 왼손에 옮겨 쥐며 키히스는 방금 전 접견실에서 꺼내 온 검을 앞으로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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