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17 잠행(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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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잠행(9)
엔지프들이 엘리어트와 함께 떠난 뒤 루카는 집 밖으로 나와 마당 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의기소침 해져 어제 오늘 그는 계속 시무룩했다.
엘리어트에 대해 제 때 말하지 않아서 이번에는 따라가지도 못했다. 엔지프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 위험해서 라고 했지만 루카로서는 지금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일단 일단락하고 갔지만 돌아오면 또 혼날 것이다. 그리고 또 엘리어트도 결국 여기 있지 않고 돌아갈 거고.. 이런저런 생각에 심란한 마음으로 마당 구석에 놓인 동그란 돌 위에 앉은 채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이. 개 흉내 내는 꼬맹이.”
양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렇게 멍하니 초점을 흐리고 있는데 아비크가 마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다 그를 보고는 입을 뗐다.
“뭐하고 있어? 여기서.”
엘리어트가 엔지프들과 함께 오두막을 나선 뒤 아비크는 이 집에 남아 있다. 레이들에게 사정을 알리기 위해 가슈는 어제 밤 산을 내려갔으니 지금은 그 뿐이었다.
“또 물어뜯을 거 없나 찾고 있어?”
아비크가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자 루카는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아비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왜?”
어쩌라는 건가 싶어 아비크가 반문했다.
“물어도 되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시무룩하게 루카가 대꾸했다.
아비크가 코웃음을 쳤다. 걸어가 그는 루카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루카가 앉아 있는 주변에는 나무들이 무성하게 가지를 뻗어 머리 위를 가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솨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지들이 좌우로 움직이며 아비크와 루카의 얼굴 여기저기에 햇볕이 들다 다시 사라지게 만들었다.
“혹시 엘리어트를 못 쫓아가서 그렇게 처져 있는 거야?”
왜 옆에 앉나 싶어 쳐다보는 시선에 개의치 않고 아비크는 나무 기둥에 등을 댔다.
“여기 있는 게 나아. 그런 데 쫓아다녀 봤자 고생만 한다.”
길게 하품하며 그가 말했다.
엘리어트들이 떠난 지 하루가 지났다. 무슨 일을 것에 대비해 여기 있으라고 했지만 아직까지 이곳은 조용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 종일 가만히 있자니 나오는 건 하품뿐이었다.
처음 와본 집에 들어가서 퍼져 있을 만큼 염치가 없는 건 아니었으니 낮이 지날 때까지는 졸면서 시간이나 보낼 요량으로 앞으로 팔짱을 끼며 아비크는 몸을 좀 수그렸다.
“하긴 너랑 비슷한 꼬맹이 하나 아는데 여기 있었으면 그 자식도 따라간다고 어지간히 시끄럽게 굴었을 거야.”
“나 꼬맹이 아니에요.”
“그래. 그 녀석도 꼭 그렇게 말하더라.”
무심히 대꾸하며 아비크가 눈을 감았다. 그런 아비크를 보고 조심스럽게 루카는 말했다.
“여기서 자려고요?”
대꾸가 없었다.
자리를 피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집 안에 들어가도 할 일이 없는 건 루카도 마찬가지였다.
“저기요. 엘리어트는 어떤 사람이에요?”
잠깐 멍하니 있다가 루카가 무심코 물었다. 자세를 조금 더 편히 할 생각에 몸을 뒤척이던 아비크가 대충 대꾸했다.
“그건 왜?”
“기사라고 하니까..”
루카는 더듬거렸다.
“우리 다 죽일지도 모른다고 해서..”
사실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럴 생각 이었으면 지금 거기 같이 가지도 않았을 걸.”
표정이 어두워지는 루카를 보다가 아비크는 말했다.
“어떤 사람이냐... 글쎄 나도 속을 모르겠어서.”
잠깐 엘리어트를 떠올리며 그는 살짝 으쓱했다.
“하지만 적어도 자길 친구라고 생각하는 녀석들 뒷통수 치는 사람은 아냐.”
아비크는 루카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접어두고 거기 간 녀석들이 돌아오길 기다리기나 해 꼬맹이.”
이제 진짜 잠을 청하려는 듯 거기까지 말하고 아비크가 눈을 감았다. 그런 아비크를 보다가 루카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절벽에 등을 대고 성을 그 끝에 붙인 것처럼 요새 뒤는 암석처럼 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지어진 게 아니라 흡사 절벽을 깎아 그대로 성을 만든 것처럼 보였다.
“둘만 가서 괜찮을까 몰라.”
벌건 대낮에 거기 우뚝 서 있는 요새를 보며 세이지가 중얼거렸다. 석연치 않은 기색으로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러고 보니까 그 자식 누구보고 이래라 저래라야?”
엘리어트의 지시대로 따른 게 새삼 억울했는지 그가 찡그렸다.
“주먹 좀 쓸 줄 안다고, 아무리 그래도 우리한테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게..”
“그래도 기사라니까..”
세이지가 하는 소리에 문득 생각난 얼굴로 쿈이 말했다.
"나름 도움이 되겠지 뭐."
세이지가 의아한 눈이 됐다.
“무슨 소리야?”
쿈이 한 말이 바로 머리로 들어오지 않아 그가 되물었다.
"기사라니 누가?"
“루카가 그러던데.”
그날 엔지프와 루카가 나누던 얘기를 쿈 역시 우연히 들었다.
“그 엘리어트란 남자, 기사라고.”
“진짜야?”
“응.”
“진짜 기사라고?”
너무 뜬금없는 얘기에 연거푸 세이지가 확인했다.
“그렇다니까.”
쿈이 끄덕이자마자 세이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쿈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엔지프한테 알려야지.”
엔지프가 사라진 쪽으로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한 기세에 쿈이 서둘러 그를 만류했다.
“관둬. 엔지프도 아니까.”
세이지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안다고?"
"응."
“알면서 같이 갔다고?”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왜?”
“모르지 뭐.”
태평하게 쿈이 대꾸했다.
“어쨌든 알고 간 거니까 우린 시킨 대로 기다리면 돼.”
그러면서 그는 황량한 대지 끝에 우뚝 서 있는 성쪽을 바라 보았다.
“기사고 또 우리보다 어른이고, 엔지프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지금 이게 그렇게 생각하고 말 일이야?”
알면서 같이 간 엔지프도 그렇고 지금 쿈의 반응도 그렇고, 도대체 이해불가능이었는지 세이지의 표정이 다시 구겨졌다.
“넌 그런 거 알았으면서 왜 그렇게 태연하고?”
“엔지프가 가만 있으면 우린 당연히 가만 있어야지 별 수 있어?”
그렇더라도 자기한테 말도 안하고 입 꾹 다물고 있었던 게 기가 찼지만 다 알면서 같이 간거면 사실 쿈의 말도 맞아서 세이지는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둘 다 어쩌자는 거야?’
소리 없이 기함하며 그가 양 손으로 머리를 쥐어 뜯었다.
“루카 그 자식은 끌고 올게 없어서 우리한테 기사를 끌고 와?”
그러면서 아직 분풀이할 데가 필요했는지 그가 루카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내 이 자식을 그냥..”
“그 녀석도 안 지 얼마 안됐다는데 뭐.”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쿈이 덧붙였다.
“하지만 이걸로 당분간 귀찮은 일은 다 루카한테 떠넘길 수 있을 거야.”
쿈은 평소에 말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가끔 생각 외로 대범한 행동을 보였고 죽이 잘 맞아 같이 움직이는 세이지도 가끔 그에게 놀랄 때가 있었다.
“그걸로 퉁칠 일이냐 이게.”
태평히 말하는 그를 보고 길게 한숨을 쉬며 세이지가 다시 중얼거렸다.
사방을 확인할 수 있는 요새 위에서 절벽을 내려다보면 까마득한 깊이에 그 끝이 시커멓게 보인다.
거기서 요새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는 멍청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요새 위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들 중 그 쪽을 눈여겨 보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있더라도 별 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아래를 쓱 훑어 보는 몇 명의 병사들이 다였다.
그들의 눈에는 아까부터 절벽에 딱 붙은 채 아래에서 위로 기어올라오고 있는 두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성은 진흙 같은 황토로 지어져 있다. 요새 뒤는 절벽에서 그대로 이어진 것처럼 연결되어 있었고 중간 중간 창이라고 보기도 뭐한 열려진 틈 한 두개가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이 들어가기 비좁아 보이는 작은 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니 복도처럼 보이는 흙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지나가는 자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팔을 뻗어 엘리어트는 그 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한 팔 간격 정도 되는 좁은 틈으로 간신히 몸을 통과시킨 뒤, 잠시 후 그는 바닥으로 내려섰다.
절벽 아래에서 여기로 기어 올라올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뒤쪽 경계는 그리 삼엄하지 않았다. 꼭대기에서 병사들이 지나다니는 걸 올라 올 때부터 확인 했지만 아래를 자세히 내려다 보는 자는 없었다.
통로로 내려서자마자 바로 두 사람은 튀어 나와 있는 길다란 흙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올라온 높이로 어림잡았을 때 아마도 요새의 중간쯤 되는 층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엔지프가 말한 상자가 있는 곳은 여기서부터 더 아래. 거기까지 들키지 않고 내려가는 건 혼자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엘리어트는 옆을 보았다.
그의 뒤를 따라 좁은 틈을 통해 안으로 들어와 흙기둥 뒤에 숨어 든 엔지프는 양 손으로 무릎을 집은 채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내뱉고 있었다.
땀 범벅으로 옷은 온통 젖어 등에 딱 달라 붙어 있다.
그 상태긴 하지만 사실 생각외로 오래 지체하지 않고 엔지프는 잘 따라 왔다. 절벽의 경사나 높이를 봤을 때 웬만한 기사도 오르기 쉬운 형태는 아니었다.
“괜찮아?”
엘리어트는 물었다.
거칠게 숨을 내쉬던 엔지프가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대꾸하며 그가 턱에 고인 땀을 문질러 냈다.
중간에 미끄러질 뻔한 걸 엘리어트가 잡아준 덕에 떨어지지 않고 겨우 올라왔다.
엘리어트 말이 맞다. 자신도 간신히 올라올 수 있던 절벽이다. 쿈이나 세이지까지 왔다면, 셋 중 누구 하나는 아마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아직도 가쁜 숨을 내쉬며 엔지프는 엘리어트를 보았다. 이만한 절벽을 기어 올라왔으면서도 엘리어트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 아직도 흘러내리고 있는 땀 덕에 가슴께 달라 붙은 옷을 잡아 당기며 엔지프는 허리를 일으켰다.
기사들은 다들 이렇게 대단한가? 같이 움직여 본 적이 없으니 당췌 알 수가 없다.
“숨소리 좀 더 진정시켜. 안 그러면 들킨다.”
잘 따라오긴 했지만 지금 상태면 들킬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엘리어트는 말했다.
“야 엘리어트.”
그 말에 최대한 숨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며 엔지프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근데 너 왜 쫓기는 거야?”
진작부터 궁금했던 걸 굳이 지금 그가 물었다. 애초에 기사가 이런 데서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 쫓기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대장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있는 걸 보니 돌아갈 곳도 있다는 뜻인데. 무엇보다 이 만한 실력자가 대체 왜 도망다니는지, 지금 보니 그게 가장 의문이었다.
잠시 동안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엘리어트는 앞으로 나왔다. 뒤 따라 엔지프가 나오려는데 발소리가 통로 저쪽을 울렸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기둥 뒤로 얼른 사라졌다.
잠시 후 그들이 지나간 뒤 다시 앞으로 나오려는 엔지프를 엘리어트가 잡았다. 또 다른 병사들이 뒤 이어 바로 앞을 지나갔다.
흙기둥에 몸을 딱 붙인 채 엘리어트는 기둥 뒤에 신경을 집중했다.
“나도 사정이 있어서.”
기척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엘리어트가 대꾸했다.
얼마 간격으로 병사들이 계속 지나가는 걸 보니 안의 경비는 적어도 위보다는 삼엄하다.
“그런데 정말 기사면, 이런 짓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다시 또 병사들이 지나가지 않는지 앞을 주시하고 있는 엘리어트를 향해 엔지프가 작게 말했다.
“새삼스럽긴. 이제 와서 그런 소리야?”
눈을 앞쪽에 둔 채 엘리어트가 대꾸했다.
“그야..”
지금까지 가만있다 이제 와 할 소리가 아닌 건 엔지프도 안다.
“진짜로 여기까지 올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엘리어트의 시선이 힐끔 그를 향했다. 피하지 않고 엔지프도 그 시선을 마주 대했다. 루카가 보인 호의 때문에, 정말 자신들을 도우려는 건가? 정말 그런 이유로..
“이제 진정됐어?”
엔지프의 호흡이 가라앉은 것을 확인하기 위한 시선이었는지 엘리어트가 물었다. 엔지프가 끄덕였다.
"가자 그럼."
다시 앞을 보며 엘리어트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 작가의말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다음화는 금요일에 올리고 다음주부터는 월-금 5회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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