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16 엘리어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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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엘리어트(2)
들어오자마자 눈동자를 빙 돌려 가게를 둘러 보며 헨터만은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작은 가게라 움직이기가 불편했는지 몸을 조금 옆으로 해 그는 진열대 사이를 걸었다.
두 사람이 쳐다보는 시선을 알았을 텐데 아랑곳 않고 그러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는 그가 진열대 위에 놓인 포목천 하나를 뒤집어 보았다.
“물건은 괜찮군요.”
웬만한 물건에 대해서는 안목이 꽤 높은 그가 이런 작은 가게에 어울리지 않는 좋은 물건이라는 태도로 짧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진열대 사이를 빠져 나와 자신을 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엘리어트에게는 시선을 맞추지 않고, 조금 전 포목천을 보던 것처럼 감정하듯 셰릴 쪽을 빤히 보다가 이윽고 그가 싱긋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손님이었으면 들어오자마자 점원을 찾았을 텐데 그러지 않길래 걸어오는 그를 보고 있다가 인사에 셰릴 역시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물었다.
“베일리 씨를 찾아 오셨나요?”
손님이 아닌 베일리 씨를 찾아오는 남자들이 가끔 있었다.
“아니오. 전 이쪽..”
그러나 그 질문에 다시 싱긋 웃으며 남자가 엘리어트를 가리켰다.
“이쪽 일행입니다.”
그 말에 그녀가 엘리어트를 보았다.
“여긴 어떻게 왔습니까?”
들어올 때부터 헨터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엘리어트는 그녀의 시선에 이제 입을 열었다.
“어떻게는요. 가게에 물건 구경 하러 왔죠.”
그렇게 말하며 헨터만은 다시 셰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처음 인사드리네요. 유시드 헨터만이라고 합니다. 아스드에서 엘리어트와 같이 있습니다.”
“아.. 네.”
남자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친절하게 들렸지만 엘리어트가 그를 바라보는 게 꼭 친한 사이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얼핏 하며 셰릴은 말했다.
“셰릴 D. 오니트라고 합니다.”
남자가 이름을 말했으니 그녀도 자신을 소개할 수 밖에 없었다.
“오니트 아가씨라.. 그렇군요.”
이름을 들은 그의 얼굴에 조금 전과 다른 표정이 순간 지나갔지만 셰릴이 알아채기도 전에 기색을 지우며 헨터만은 태연히 말했다.
“오스티아 영주가 아가씨군요.”
엘리어트의 신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먼 곳인데 용케 여기까지 오셨네요.”
이름만 듣고 오스티아에 대해 말을 꺼냈던 사람은 많지 않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해져 셰릴은 다시 엘리어트를 보았다.
“잠깐만 데비.”
그 시선에 엘리어트가 나직히 말했다. 자리를 피해달라는 뜻으로 들려 셰릴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난 가게 뒤에서 염료 좀 확인하고 올게.”
염료로 사용하는 풀들을 가게 뒤에 널어 놓고 말리고 있다.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는 헨터만을 향해 목례를 해 보이고는 그녀가 몸을 돌려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가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걸어가는 셰릴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헨터만을 향해 무뚝뚝하게 엘리어트는 말했다. 헨터만에게는 이 가게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그런 질문은 하나마나 아닙니까. 내가 어떤 얘기까지 알아 낼 수 있는 사람인지 잘 알텐데.”
별 걸 다 묻는다는 듯 대꾸하며 헨터만은 엘리어트가 서 있는 테이블 의자를 옆으로 빼내며 걸터 앉았다.
“뭘 숨겨 두고 말을 안 하나 했더니 생각보다 굉장한 걸 숨겨 뒀네요.”
말투가 거슬렸는지 엘리어트의 시선이 좀 차가워 지는 걸 느끼며 헨터만은 으쓱했다.
“칭찬으로 하는 소립니다. 보통 미인이 아니어서.”
옷차림은 수수하고 치장 하나 하지 않았지만 척 봐도 눈에 띌 만한 미모였다.
“여자라.. 당신 성격으로 봐선 사실 예상 못했는데. 그것도 오니트 남작가의 아가씨를.”
그가 으쓱했다.
“여기 있는 거 오니트 영주님도 아십니까?”
“성에 있지 않고 왜 나왔습니까?”
그 말에 대답해 줄 생각없이 냉담히 엘리어트는 말했다.
“그렇게 바라던 기회에, 할 일이나 하지.”
평소답지 않은 냉소에 헨터만은 웃었다.
여길 찾아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가 날 만큼 안으로 들어간 아가씨는 그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다. 그걸 알게 되는 것도 소득이었다.
“가봤더니 베이그릴스 영주도 아기실 영주도 지금 아무도 없네요.”
헨터만이 이곳에 온 건 베이그릴스가 아니라 언젠가 언급했던 아기실의 영주가 베이그릴스를 방문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자주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한 해 한 번 정도는 경치 구경이나 사람 사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그나마 가까운 베이그릴스에 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기실에 끈이 닿기 위해 베이그릴스 영주에게 오래전부터 뒷공작을 해오던 그였으니 지금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아기실 영주와 마주치기 위해 눈치 빠르게 헨터만이 이곳으로 온 건 보쇼의 성에서 돌아온 지 꼭 닷새 만이었고 지난 번 셰릴을 만나러 온 뒤로는 거의 한 달 만이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꼼짝 없이 기다리게 생겨서 심심한 김에 다시 나왔습니다.”
원체 헨터만 같은 자와의 접촉을 꺼리는 아기실 영주라 굳이 온다는 말을 하지 않고 불쑥 찾아왔더니 두 영주는 때마침 인근 사냥터로 사냥을 나간 터였다.
“은둔 생활 비슷하게 한다고 들었는데 한 때 제법 전장을 누볐던 자답게 영 가만히 있는 성격은 아닌가 봅니다.”
“그런 만큼 가볍게 볼 자도 아니란 뜻이죠.”
무심히 대꾸하며 엘리어트는 자리에서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나가죠.”
엘리어트가 말했다.
“왜요?”
앞장서는 그를 멀뚱히 헨터만이 쳐다보았다.
“장사 방해하면서 여기 계속 있을 생각입니까?”
“여기 있는 물건들 몽땅 사들이면 방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담담히 대꾸하며 걸어가 엘리어트는 가게 문을 열었다.
“성질도 급하셔라.”
가게 문을 붙잡고 자신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엘리어트를 의자에 앉은 채 쳐다보고 있다가 어쩔 수 없는 기색으로 곧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주들이 돌아올 때까지 정말 시장에서 시간을 보낼 셈이었는지 밖으로 나온 헨터만은 셰릴에게 돌아간단 말을 하러 간 엘리어트가 다시 올 때까지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한테 중요한 건 무엇보다 시간이라서,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걸 아주 싫어합니다.”
엘리어트가 나오자 헨터만은 말했다.
“그 시간에 어디라도 돌아다녀보면 적어도 가만 있는 것보다 얻는 게 있으니까요.”
그는 굳게 닫혀진 가게 문쪽을 가볍게 손으로 가리켰다.
“오늘은 이미 꽤 수확이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아기실 영주의 눈에 들 이유가 있습니까?”
더 이상 헨터만의 주의가 셰릴에게 향하는 걸 원치 않는 엘리어트가 말을 돌렸다.
지금부터는 헨터만과 같이 돌아갈 생각으로 그는 일단 셰릴에게 성에 갔다 온다는 말을 하고 나온 터였다.
헨터만을 괜히 혼자 뒀다가 만에 하나 자신도 모르게 여기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 어쨌든 엘리어트로서는 그가 셰릴에 대해 많이 알게 되는 게 그다지 석연치 않은 일이었다.
“아기실이 어떤지 전혀 모르는 거죠?”
그런 생각을 아는 지 모르는지 질문이 가소롭다는 듯 헨터만이 혀를 차고 있었다.
“아기실이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라곤의 대영주국인 아드리엥이나 퍼보스, 파비앙을 능가하는 힘을 휘둘렀을 겁니다.”
두 사람이 가게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이 근처에서 가장 강력한 혈맹국이 어딘지 압니까? 바로 에들러입니다.”
걸어가면서 헨터만은 말했다.
“베이그릴스도 그렇고, 3대영주국 중 하나인 파비앙도 거기 속해 있죠.”
말이 길어지고 있었지만 셰릴에 대한 얘기가 더 나오지 않자 옆에서 걸으며 엘리어트는 잠자코 그 말을 들었다.
“랭더발이 에들러에 속한 파비앙과 접촉하고 싶어한다는 말이 나온 건 벌써 한참 전입니다.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라도 만약 그게 사실이라 언젠가 우리가 이 지역에서 그들과 마주칠 일이라도 생긴다면 도움이 필요해질 거고, 그럴 만한 도움을 얻을 만한 곳은 아마 아기실 뿐일겁니다.”
엘리어트가 조용해진 것이 자신의 말에 동의하는 뜻이라고 생각하며 헨터만은 거보라는 듯 말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지금까지 당신 생각을 이해 못한 건 없습니다."
대꾸하는 엘리어트의 목소리가 무뚝뚝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뭐든 쉽게 뜻대로 될 거라고 여기는 데 동조하지 않을 뿐이지.”
“쉬울 거라고 생각해야 가는 길이 힘들어도 포기가 더딘 법 아닙니까.”
가벼운 투로 덧붙이며 헨터만은 시장 중앙으로 통하는 길 아래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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