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15 보쇼의 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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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보쇼의 성(2)
반나절 이상 탑안에서 나오지 않다가 저녁이 다 될 때쯤 아비크는 부스스한 머리 꼴로 침대에서 일으나 성탑 밖으로 나왔다.
“으...”
실컷 자고 일어났더니 이제 좀 피로가 풀렸는지 머리 위로 길게 팔을 뻗으며 아비크는 탑 앞으로 널찍하게 트여 있는 빈터를 보았다. 아침 나절에 돌아왔을 때만해도 거의 사람이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느새 병사들이 제법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뭐가 이리 수선스러워?’
저녁이 다 되가는 이 시간에 생긴 부산스러움에 그가 잠깐 앞에서 움직이는 병사들 쪽을 보았다. 여기 저기 흩어져 각자 뭔가를 하고 있는 듯 보였는데 그 중에 시즈가 섞여 있는 걸 보고 아비크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뭐하고 있어?”
뭘 하는 지 커다란 나무에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시즈의 앞으로 가며 그가 물었다.
“숫자 맞추기.”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시즈가 크게 말했다.
“나무 뒤에 둘. 성탑 뒤에 여섯, 아니 일곱..!”
자신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아비크가 한 손을 귀에 대며 찡그렸다.
“맞죠?”
고개를 홱 돌려 나무 뒤에 대고 시즈가 다시 말했다. 잠시 후 나무와 바로 옆에 있는 성탑 뒤쪽에서 병사들이 한 두 명씩 걸어 나왔다.
맞춘 게 얼척없다는 얼굴로 앞으로 걸어 나온 열 명 가까운 남자들을 보고 시즈가 거보라는 듯 말했다.
“거봐요. 괜히 생사람 잡고 있어.”
목소리가 의기양양했다.
엘리어트가 가고 가슈와 길더, 레이는 그의 지시대로 기존에 병사들 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기사들과 함께 병사 일부를 맡아 훈련하는 걸 봐 주고 있었다.
시즈도 가끔 거기 있었는데 딱히 병사 훈련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대신 가끔씩 훈련을 농땡이 치는 병사들을 찾아내곤 했다.
숨어서 몰래 휴식을 취하던 병사들은 어디에 있든 바로 알아 채고 찾아오는 시즈를 보고 기가 막혀 했고 거기에 어떤 속임수가 있다고 생각하며 뭔지 말하라고 그를 닦달하던 중이었다.
“내 말 맞죠?”
병사들을 향해 시즈는 말했다.
“이 성안이면 어디 있든 귀로 다 안다니까.”
귀가 좋아 발소리 만으로 몇 명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자신의 말에 코웃음친 병사들을 향해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시즈가 다시 말했다.
“별 걸 다 확인시키네.”
이 상황이 뭔지 알고 시즈의 옆에서 아비크가 중얼거렸다.
오후가 지나서야 아비크와 마찬가지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엘리어트는 자신의 숙소로 들어 왔다. 숙소로 오자마자 이번에는 가슈들이 찾아왔다.
돌아왔는데 반나절 이상 보이지 않는 그를 찾아온 가슈들은 베이그릴스 일이라든지 그가 떠난 뒤 아스드에서의 일이라든지, 별 거 없었지만 하여간 그 동안의 일을 짧게 전했고 곧 그가 쉴 수 있게 해주기 위해 엘리어트의 숙소에서 빠져 나왔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네요."
엘리어트의 숙소를 빠져 나와 성안 복도를 걸어가며 길더가 말했다.
"무슨 소득?"
"왜 있잖아요. 그 아가씨 만났다면서."
걸어가며 길더가 양 팔을 머리 뒤로 했다.
"인연은 인연인가 보네."
"너도 인연 같은 거 믿냐?"
레이가 으쓱했다.
"여자면 다 좋다는 줄 알았는데."
"전 그런데, 엘리어트는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길더가 웃으며 응수했다.
복도를 한참 걸어가는데 반대 방향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피아가 보였다. 세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그들을 향해 목례를 해 보였다.
이엘과 행동을 대부분 같이 해 이제 성 사람들 대부분은 그녀를 알고 있었고 가슈들 역시 한 두번 마주친 적 있었다.
“어디 가십니까, 아가씨.”
복도에서 그녀쪽으로 제일 가까이 서 있던 가슈가 피아를 향해 가볍게 물었다.
"성 밖으로 나가세요?"
그녀는 차림새가 외출복 차림이었다.
"보쇼의 성에요."
그 질문에 머뭇거리며 그녀가 말했다.
“오르그 백작님이 회의를 소집하셨다고 해서..”
묻는 소리에 잠깐 머뭇거리다가 피에는 말했다.
“혹시 무슨 이야기라도 듣지 않을까 해서 가 보려고요.”
인사치레로 가볍게 물었던 소리에 날아온 다소 뜻밖의 대답이었다.
“갑자기 거길 가시려고요?”
“갑자기 그런 건 아니고요..”
피아가 살짝 말을 흐렸다.
“저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불편을 끼쳐서..”
여기까지 오게 된 상황에 대해서는 그녀도 알고 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요.”
조금 전 우연히 마주친 헨터만에게 보쇼의 성에서 있을 회의에 대해 들었다. 회의를 주도하는 오르그 백작은 그녀의 외사촌 숙부로 먼친척이었지만 아버지가 영주의 자리에 있었을 때 사이가 친밀한 편이었다. 백작 역시 그녀를 많이 예뻐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뜻밖의 대답에 가슈는 좀 의아한 기색이 되고 있었다.
“이엘 아가씨도 아십니까?”
“아직.. 이제 말하려고요.”
이제 그만 지나가려는 듯 그녀가 다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슈 역시 거기에 맞춰 끄덕였다.
그대로 지나치는 피아를 보다가 잠깐 고개를 돌려 가슈는 복도 저쪽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응시했다.
오르그 백작을 비롯에 아쉬 근처 영주들이 가끔씩 보쇼의 성에 모인다는 얘기는 그도 들은 적 있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아쉬와 가깝고 아쉬는 랭더발이 속한 혈맹국이니 지금 거기 가는 건 좋은 느낌은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나서서 말릴 일도 아니니.
“야. 뭐해?”
먼저 가던 레이가 따라오지 않고 서 있는 그를 불렀다.
‘알아서 말하시겠지.’
얘기가 들어가면 이엘 아가씨께서 알아서 판단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가슈는 두 사람을 향해 걸어 갔다.
칼릭스가 쉐네드에 와 지낸지도 이제 두 달이 넘었다. 그 사이 병사들은 조금씩이지만 변해가고 있었고 우트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도 칼릭스가 어떤 사람인지 슬슬 알아채고 있는 중이었다.
성의 꼭대기 층 돌로 둘러싸인 널찍한 방안으로 방금 러셀이 들어왔다.
“보쇼의 성에서 지금 회의가 있다고 해요.”
들어와 방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향해 그가 방금 전에 알게 된 소식을 전했다.
“오르그 백작을 비롯해, 꽤 많은 영주들이 모여 있는 모양이에요.”
보쇼의 성은 쉐네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르그 백작의 사유지 안에 있는 성이었다. 지금은 쓰지 않는, 산속 깊은 곳에 홀로 있는 버려진 성으로 조용한 분위기에 영주들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종종 그곳에 모이곤 한다는 말이 있었다.
“우린 왜 따돌리고?”
구석 자리에 주저 앉아 있던 반델포드가 마치 러셀이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 나쁜 기색으로 말했다.
“우리 뿐이 아니라 아쉬 혈맹국들은 어차피 한 곳도 초대받지 못 한 것 같아요.”
방금 전 소식통한테 들은 소리를 생각하며 러셀은 말을 이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아쉬를 배제한 주변국들과 다른 몇 몇 영주들이 모인거라고 들었어요.”
“아드리엥이나 퍼보스도?”
이번에는 출입문 근처, 러셀과 제일 가까운 곳에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이벨이 물었다.
“네.”
“자기네들끼리 모여 봤자 무슨 소릴 할 수 있다고 그런 거지?"
아쉬에 속하지 않은 영주국들은 그다지 힘있는 영주국이 아니다.
“무슨 꿍꿍이들일까요?”
앞머리를 살짝 털어내며 칼릭스의 옆에 있던 우트가 중얼거렸다.
“아쉬 혈맹국들은 왜 배제한거고.”
“랭더발 때문이겠지.”
칼릭스는 말했다.
“이유가 있다면.”
짧게 대꾸하고 그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 중인지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무슨 생각 합니까?”
표정이 진지한 그를 보고 의아한 듯 우트가 물었다.
“오늘 밤 보쇼의 성을 친다.”
생각에 잠겨 있던 칼릭스가 곧 말했다. 이벨과 러셀, 반델포드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야.”
그 대답에 갑자기 짧은 정적이 돌았다.
“진심이십니까?”
잠시 가만있다가 반델포드가 묵직하게 되물었다.
“그래.”
칼릭스의 대답에 러셀과 우트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진짜 쉐네드 병사들을 끌고 가서 다 죽이라고요?”
재차 확인하듯 우트가 다시 물었다.
“우리가 했다는 증거는 없어야지. 병사들은 필요 없어. 여기 다섯으로 충분할거야.”
칼릭스는 덧붙이는 소리에 우트는 이제 말문이 막힌 얼굴이 되었다.
“보쇼의 성에 적어도 서른 명 이상의 영주들이 모일 겁니다.”
방 한구석에 서 있던 반델포드가 천천히 다시 말했다.
“그런 일을 저질렀다 발각되면 인척으로 얽힌 북쪽 지방 영주들의 적어도 반은 적으로 돌리게 될 텐데요.”
“그게 겁나?”
쳐다보지 않고 되묻는 소리에 반델포드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그럴리가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이득이 있습니까?”
러셀이 천천히 물었다.
“아쉬가 그렇게 만만한 혈맹이 아니라는 걸 알릴 수 있겠지.”
아쉬 혈맹국을 처음 시작한 건 쉐네드였다. 쇠락해진 지금의 쉐네드로서는 그 의미가 많이 바래 있긴 했지만.
“그리고 나서 화살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그걸 지켜볼 거야.”
그는 말을 이었다.
“잘하면 흐름을 조절해 우리 쪽으로 기회를 오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걸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게 해야지.”
거기까지 말하고 그가 입을 다물며 방안에 있는 네 사람을 보았다.
“어때?”
무엇에 대한 질문인지 애매한 물음이었다.
잠깐 있다가 곧 러셀과 이벨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소리 없는 한숨을 한 번 내쉬며 우트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칼릭스는 오지 않는 편이 낫지 않아요?”
이제 보쇼의 성까지 가야할 거리를 생각하며 러셀은 말했다.
“표면적이나마 우리가 아닌 것으로 하려면 혹시 모르니 여기 있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맞습니다.”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 있던 반델포드가 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보쇼의 성 정도는 제이더 님 없이 저희끼리도 충분합니다.”
그가 칼릭스를 향해 공손한 표현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야.”
방 한 가운데 놓인 테이블 한 쪽에 걸터 앉아 있던 칼릭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 모든 일은 내 주도하에 진행한다. 모든 걸 알고 상황을 통제하는 사람은 내가 되어야 하니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러셀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말을 준비할께요”
무슨 뜻인지 당장 이해하긴 힘들었지만 더 말릴 생각은 없었는지 그렇게 말하며 러셀이 먼저 몸을 돌렸다.
우트가 그 뒤를 따르고 반델포드 역시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이 걸어 나간 문쪽으로 육중하게 걸어갔다.
“선방을 날리는 건 찬성하지만..”
세 사람이 문밖으로 나가고 혼자 남아 있던 이벨은 눈썹을 찌긋 올리며 칼릭스를 향해 물었다.
“진짜로 뒷감당할 자신 있어요?”
칼릭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자 이벨은 공연한 걸 물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가죠. 오늘 밤 안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할 거에요.”
“그래.”
앞서는 칼릭스의 뒤로 이벨이 그를 따라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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