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7 레스니악(1)
2.7 레스니악(1)
조용한 방 한 가운데 열 다섯 명의 남자들이 원형의 길다란 테이블 주변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들 표정이 심각했고 테이블 끝에 서서 혼자 말을 하고 있는 남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혼자 서 있는 남자의 맞은편 테이블 끝에 앉아 가메인 공작 역시 남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노이드 백작이 다녀간 뒤 여러가지 생각에 빠져 있던 가메인 공작에게 이런 자리를 마련했으니 네바렌에서 준비해 달라는 연락이 날아온 건 백작이 다녀간지 열흘이 지난 날이자 여동생의 영주국인 고펜이 랭더발에 함락된 지 엿새가 지난 어제였다.
“그러고보니 마지막 전투로부터 벌써 나흘이 지났군요.”
그 와중에 아까부터 혼자 말을 하고 있는 남자의 표정만이 다른 영주들과 달리 밝아 보였다.
“자드를 시작으로 고펜과 이바르까지. 그 동안 크고 작은 일곱 번의 전투에서 랭더발은 세 영주국들을 모두 함락시켰습니다.”
그 목소리가 다소 경박스럽게 느껴졌다.
“세 곳 다 병력이 크지 않은 소영주국이라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만.”
잠깐 말을 끊고 그가 덧붙였다.
“랭더발의 기사들은, 아.. 다들 아시겠지만 속칭 그 검은 기사단이라고 불리는 자들 말입니다.”
검은 투구와 검은 갑옷을 입고 나타나 순식간에 영주국을 초토화시키고 간 그들에게는 이제 검은 기사단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렇더라도 랭더발의 그 검은 기사단은 매번 그 수가 천을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주들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도 굳이 그 사실을 짚고 넘어가며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 정도 병사수로 랭더발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마지막 싸움에서 살아남은 병사 말로는 적은 불과 일 백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본인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유시드 헨터만은 한 손을 반쯤 들어 보였다.
“믿어지십니까? 만여 명의 병사들을 불과 몇 백의 기사들이 말입니다.”
방안의 심각한 분위기에는 아랑곳 않고 그는 혼자 좀 신이 난 것 같았다.
“그 병사도 곧 바로 사망했기에 랭더발 기사단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헨터만은 말을 이었다.
“그 정도만으로 랭더발이 무슨 수로 그 모든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요?"
싱긋 웃으며 그는 덧붙였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 이제부터 함정을 좀 파야겠습니다.”
모든 영주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어떤 함정 말이오?”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그들 중 누군가 묵직하게 입을 뗐다.
“정체를 알 수 없으니 드러내게 해봐야죠.”
대답하는 목소리가 활달했다.
“전장에 남아 있는 시체가 없습니다. 분명 랭더발도 피해가 있었을 텐데, 그건 검은 기사단이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가져갔단 얘기고 그들을 남겨둬서는 안될 이유가 있다는 거죠.”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함정을 파고 기다려 보는 겁니다. 걸리는 게 있으면 뭐라도 조금은 나올테니. 지금처럼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나아지길 바라면서.”
"그래. 그것도 방법이겠군."
경박한 목소리에 비해 영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닌 걸로 들렸는지 영주가 수긍했다.
“그런데 그럴 만한 병력이 페이테드에서 가능하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시 묻는 영주의 말에 헨터만은 혀를 끌끌 찼다.
“저희 페이테드에 그런 병력이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장소와 방법을 제공했다면 나머진 여러분들이 해결해주셔야죠.”
유시드 헨터만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활기찼다.
“안 그렇습니까?”
그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다 하고 용건은 여기까지라는 듯 입을 다물며 그가 자리에 앉았다. 그가 꺼낸 제안에 대해 이제 영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엘리어트.”
성문 동쪽 초소에 나갔다 들어오던 엘리어트를 마침 밖에 나와 있던 릴이 발견하고는 손짓을 했다.
“영주님들이 돌아가신 뒤 성문 경비를 다시 한 번 재정비 해야할 것 같은데..”
방금 전 네바렌에서 비밀리에 열린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영주들의 배웅을 막 끝낸 뒤 릴은 자신의 앞으로 걸어온 엘리어트를 향해 말을 이었다.
“각 문 초소에 얘길 전하고 확인을 좀 해주겠니.”
“알겠습니다.”
그가 끄덕이자 릴이 좀 미소 짓고는 말했다.
“난 영주님께 가서 보고를 해야겠다.”
말하고 성안으로 걸음을 떼는 그를 잠깐 보다가 엘리어트 역시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 엘리어트는 중간에 나 있는 작은 돌문을 열고 들어갔다. 별채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다시 작은 화원이 이어졌다. 그 화원 사이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그는 걸음을 옮겼다.
사흘 전 엘리어트는 셰릴과 함께 네바렌으로 왔다.
그 날 일로 셰릴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고 그런 그녀를 바로 오스티아로 돌려 보낼 수 없어 일단 네바렌으로 같이 돌아왔다. 가메인 공작에게 사정 얘기를 하니 다행히 오니트 영주와 안면이 있는 공작이 흔쾌히 그녀를 별채에 머무르게 해주었다.
걸어가면서 엘리어트는 잠깐 그 날 일을 떠올렸다.
그 날, 셰릴과 디에나 두 사람이 데리고 있던 아이들 중 셋은 죽고 남은 아홉은 사라졌다.
아마도 정체 모를 남자들이 데려 갔을 것이다. 어째서 기하족 아이들을 데려갔는지,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별채 앞으로 들어서는데 마침 별채에서 셰릴이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엘리어트.”
자신을 발견하고 앞으로 오는 그녀를 엘리어트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갑작스럽게 다시 만난 이후 여러 가지 상황으로 그녀와는 지금껏 변변히 얘기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저기...”
그렇게 생각하는 엘리어트의 앞으로 셰릴은 걸어왔다.
“오스티아에 연락을 할 수 있을까?”
그 앞에 서서 걸음을 멈추며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한데.. 아버지께서 걱정하실 것 같아서.”
로안이나 오스티아 모두 걱정하고 계실 것이다. 며칠 경황이 없어서 넋놓고 있었는데 더 늦기 전에 이제는 연락을 해야 한다.
“연락해 둘게.”
엘리어트는 말했다.
"내가."
“고마워.”
애써 미소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넌, 괜찮아?”
그 모습을 보며 나직히 엘리어트가 물었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그녀는 계속 안색이 좋지 않다.
희미하게 셰릴이 미소지었다.
"괜찮아."
그녀는 대답했다.
성벽 옆을 돌아 샛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아비크는 저쪽에서 모퉁이 한 쪽에 붙어 있는 디에나를 발견했다. 벽에 바짝 붙어 고개를 반쯤 내민 채 뭘 살피고 있는 듯 디에나는 앞을 보고 있었다.
뭐라도 있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뒤에서 아비크는 그녀가 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뭐 합니까?”
불쑥 들려온 소리에 앞에만 보고 있던 디에나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옆에 나타나 있는 그를 보고는 디에나가 조용히 하라는 듯 한 손가락을 입에 댔다.
저쪽 화단 앞에 서 있는 엘리어트와 셰릴을 보고 아비크가 으쓱했다.
“숨어서 뭘 보고 있어요?”
“저기요.”
디에나는 두 사람 쪽을 가리켰다.
“보통 사이 아닌 것 같죠?”
무슨 얘길 하는지 들리진 않았지만 진지한 기색의 두 사람을 아까부터 몰래 보고 있던 그녀였다.
“그냥 얘기 중인 것 같은데..”
같이 좀 있는 걸 갖고 뭐가 보통 사이 아니란 건지 모르겠는 아비크가 대꾸했다.
“자세히 좀 봐요.”
“자세히 본다고 그런 걸 압니까?”
“알죠 그럼.”
디에나는 엘리어트의 옆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 셰릴의 표정을 뚫어져라 살폈다.
“어릴 때 친구라고 했지만.. 무슨 사연이 있을 거에요. 틀림없어요.”
확신하며 계속 두 사람 쪽을 주시하는 그녀를 보고 아비크는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그렇다고 한들 그걸 왜 알아야 합니까?”
“궁금하잖아요.”
디에나는 대답했다.
“셰릴을 안 지 몇 년 만에 이런 건 처음 보는데..”
‘그러니까 그런 게 대체 왜 궁금하냐고...’
아비크는 디에나를 힐끔 쳐다봤다.
“그래도 다행이네. 애들 그렇게 돼서 어쩌고 있나 싶었는데..”
무심코 그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디에나가 자신을 빤히 보자 그는 실언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 실수.”
“슬퍼한다고 애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디에나가 말했다.
“그리고 난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게 몸이 베여서..”
“네?”
“아니에요 아무 것도.”
디에나는 다시 앞을 보았다.
“지금은 그냥 두 사람을 보고 있을래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딴 생각 할 수 있으니까.”
그 소리가 뜻하는 바에 아비크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안 가요?”
계속 옆에 서 있는 그를 향해 디에나가 물었다.
“잠깐 있죠. 뭐 나도 별로 할 일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벽에 몸을 기대는 그를 힐끔 보다가 디에나는 다시 셰릴과 엘리어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략 반나절 간의 긴 회의를 끝내고 가메인 공작은 회의실 밖으로 나와 애용하는 작은 집무실로 들어가 있었다.
“아까 그 자는 누굽니까?”
네바렌을 방문한 영주들이 돌아가는 걸 배웅하고 방안으로 들어온 릴이 아까 같이 있던 남자를 떠올리며 물었다.
“페이테드에서 온 유시드 헨터만이란 자일세.”
공작은 말했다.
“리기타 영주 말로는 꽤 뛰어난 책사라더군.”
“그런 자가 페이테드에 있었습니까?”
릴은 잠시 생각했다.
“뜻밖이군요.”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가메인 공작은 걸어가 창 근처에 섰다.
“검은 기사단을 끌어 내기위해 각 영주국에서 병사들을 차출해 모이기로 했네.”
신록이 우거진 정원 한 쪽 나무들을 내려다 보며 그가 말했다.
아까 그 자리에 모인 자들은 자드와 고펜 그 외 이번에 랭더발에게 침략당한 영주국들과 혈연으로 얽혀 있는 자들로 그들은 다른 영주국보다 조금 더 랭더발에 갚아주어야 할 게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다고 순순히 랭더발이 나타날까요?”
마찬가지로 공작의 여동생 내외도 이번 싸움에서 희생된 걸 생각하며 릴은 물었다. 내색은 안하지만 가메인 공작 역시 그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건 그 페이테드의 남자가 할 수 있다더군.”
“그 정도 힘이 있는 자라는 게 놀랍군요.”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던 릴은 문득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 레스니악 입니까?”
페이테드가 그나마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면 거기서 이어지고 있는 땅인 레스니악은 더 척박하고 위험한 곳이다.
“페이테드, 그 중에서도 레스니악은 잘못 갔다간 살아 나오기 힘든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전투라면, 이길 가능성이 희박할 텐데요.”
조용한 가메인의 기색에 릴은 곧 뭔가를 깨달았다.
“미끼군요.”
나직히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가메인 공작은 창밖을 내려다 보았다.
엘리어트로부터 고펜이 침략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후, 어떻게 손을 써보기도 전에 랭더발은 고펜 영주가를 몰살시켰다. 그것은 다른 두 영주국도 마찬가지였고 이후 이 모든 일이 수도로 전해졌지만 어찌된 일인지 수도에서는 별 다른 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수도에서 가만 있는다면 자신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고 오늘 모인 영주들은 생각하고 있다. 죽은 형제들을 위한 복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앞으로를 위해 그들은 조금이라도 랭더발의 정체를 밝히길 원했다.
가메인 역시 동생 내외와 조카, 조카 손주들을 잃었다. 다른 영주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처음과 달리 그도 가만히 손놓고 있을 수 없는 입장이었고 랭더발에 대한 생각은 오늘 모인 영주들과 같았다.
“미끼 역할을 우리 쪽에서 하게 되었네.”
아까, 미끼 역할을 자청할 곳은 없었으니 그것은 제비뽑기로 정할 수 밖에 없었는데 장사에는 나름 발휘되었던 가메인 공작의 운이 이번에는 불행히도 그 역할을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화원에서 집무실 가까이 서 있는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자 잎사귀들이 사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공작은 잠시 보았다.
“엘리어트를 보낼 생각일세.”
나직하게 그는 말했다.
"나는."
릴이 멈칫했다. 놀랐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진심이십니까?”
대꾸가 없자 공작을 향해 침착하게 릴은 다시 물었다.
“그건 그 애를 사지로 모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공작은 말이 없었지만 참을성 있게 릴은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장사꾼이지 살인자가 아니야.”
이윽고 공작은 말했다.
“그러니 누군가의 아들들을 가만히 앉아 죽게 하느니 하나라도 희망을 걸어 볼 생각일세.”
엘리어트는, 실력이 뛰어나면서도 동시에 정확한 판단을 내릴 줄 아는 발군의 지휘관으로 지금 이 네바렌에 있는 어떤 기사들보다도 뛰어난 청년이다. 그 점을 증명하듯 지금까지 불가능해보이는 싸움에서도 몇 번이나 승리해 왔다.
미끼 역할을 하는 병사들은 십중팔구 전멸당할 것이니 그러니 그런 엘리어트라면 어쩌면 다른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고 가메인 공작은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그 생각이 틀리면 엘리어트가 죽습니다.”
결심이 확고하다는 게 느껴지자 릴의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번졌다.
“확률을 알 수 없는 일에 그 아이 목숨을 거실 겁니까?”
가메인 공작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곧 조용히 그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럴 수 밖에 없다네, 아우드.”
공작은 누구보다 엘리어트를 아꼈다. 그러나 의미없이 병사들이 희생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이 또한 영주의 자리에 있는 자신이었다. 그런 일이라도 가장 성공시킬 가능성 있는 지휘관을 그들과 함께 보내는게 미끼로 쓰일 병사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가메인 공작이 더 이상 말이 없자 굳어진 듯 릴은 가만 있었다. 결정을 번복하는 적이 없는 가메인 공작을 수 십년 동안 겪어온 그였다.
뜻이 변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있는 릴의 앞에서 가메인 공작은 그저 조용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 작가의말
명절이니까 내일 하루만 쉬겠습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는 소망하는 일 모두 다 이루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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