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6 전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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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전조(3)
셰릴들이 머물고 있는 있는 집 주변은 작은 수풀들이 무성할 뿐 키가 큰 나무들은 집에서 대략 50아르쯤 떨어진 곳에서부터 자라기 시작해 숲으로 이어졌다.
숲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나무 위에서, 그 중 제일 높은 나무 가지 위에 올라 선 채 키히스는 집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문 앞에서 얘길 하고 있는 남자는 둘. 멀리서 기척을 감추고 있어서 인지 아직 자신들이 주시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채지 못한 듯 했다.
방금 전 여자와 아이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복면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리며 키히스는 옆에 있는 자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무 가지를 밟고 서 있던 남자들이 그의 지시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며 나무 위에서 사라졌다. 일렌 키히스의 모습도 곧 나무 위에서 사라졌다.
“그 사람한테 뭐라고 했어?”
남자를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이 지나 돌아온 셰릴을 향해 초조한 기색으로 나르가 물었다.
“별 얘기 안 했어.”
엘리어트가 아젠으로 떠나는 걸 배웅하고 난 뒤 부엌을 잠깐 정리하고 돌아온 셰릴은 묻는 소리에 안심하라는 듯 대답했다.
“아젠에 가서 상황을 보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라고.”
“그게 다야?”
다소 예상 밖의 말이었는지 나르가 다시 확인했다.
“그 사람,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거야?”
"응."
셰릴은 끄덕였다.
“그렇게 말했어.”
“거봐.”
셰릴의 대꾸에 디에나가 끼어들었다.
“괜히 아무도 못 믿을 거처럼 굴더니.”
“내가 언제?”
“아까 그랬잖아.”
굳이 짚고 넘어가는 디에나의 소리에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문 채 나르가 눈을 찌푸렸다.
엘리어트가 아젠으로 출발하고 난 뒤 한참 동안 가슈는 마당에서 문으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나무 계단 앞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어 가느다란 풀꽃이 나풀거린다. 주위는 조용하고 한적하게 느껴졌다.
“이쯤이면 닙센은 지났겠네요.”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응시하며 옆에 서서 마찬가지로 보초를 서고 있던 길더가 입을 열었다.
“아까 대장하고 얘기하던 여자 말이에요.”
궁금하다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누굴까요?”
“내가 알겠냐.”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보기도 했지만 아까 엘리어트가 아젠에 가는 걸 여자가 배웅했다. 어떻게 아는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그러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사뭇 진지해 보였다.
“그냥 아는 사이는 아닌 것 같죠?”
“글쎄.”
관심없는 얼굴로 무심히 대꾸하는데도 가만있는 게 심심했는지 나무기둥에 몸을 기댄 채 길더는 계속 가슈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 봤을 땐 몰랐는데, 가만 보니까 보통 미인이 아니더라고요.”
셰릴을 떠올리며 그는 말을 이었다.
“대장하고 별 사이 아니면 내가 한 번 들이대 볼까요?”
“이 상황에 그럴 생각이 드냐?”
“이 상황이 어때서요? 큰 일도 없는데.”
“큰 일 없어서 만들게?”
가슈는 발아래 자라 있는 잡초를 무심히 손으로 뜯어냈다.
“웬만하면 문제 일으키지 말고 네바렌으로 돌아갈 때까지 조용히 있자.”
“이 정도가 무슨 문제가 된다고 그래요.”
그렇게 응수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두 사람이 돌아보았다. 웬 아이 하나가 문밖으로 뛰어 나오는 게 보였다.
우당탕 뛰어나오다 바로 문 밖에 앉아 있는 가슈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멈추려하는 것 같았지만 발이 꼬였는지 그대로 아이가 가슈의 앞에서 비틀거렸다. 얼결에 가슈가 넘어지려는 아이를 잡았다.
“티크.”
몰래 밖으로 빠져 나간 아이를 서둘러 쫓아 왔던 셰릴은 가슈가 아이를 붙잡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 섰다. 엄마가 보고 싶다며 칭얼거리다가 나르와 얘기하는 동안 몰래 빠져 나온 걸 그녀가 쫓아온 참이다.
아이를 팔에 안아 들며 가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살짝 표정이 굳는 셰릴을 쳐다보며 그는 말했다.
“우리도 들었어요.”
아젠으로 가기 전 엘리어트와 아비크에게 이미 상황은 전해 들었다.
“걱정 마세요.”
가슈에게서 아이를 넘겨 받는 셰릴을 향해 상냥한 투로 길더도 말했다.
“우리 입 무거워요.”
“네.”
다소 당황한 기색으로, 아이가 괜찮은지 확인하며 그녀가 대꾸했다.
“하지 마라.”
아이를 다독이는 셰릴을 보면서 주의 주듯 가슈는 길더를 향해 나직히 말했다.
“뭘요?”
짐짓 길더가 으쓱했다.
“지금 너 하려는..”
그렇게 말하는데 문득 다시 기척이 느껴졌다.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기척에 가슈와 길더가 동시에 뒤를 돌아 보았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저쪽 끝에서 저녁 노을에 비친 그림자가 하나 둘 씩 길게 들어서고 있다.
마당 끝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남자들 모습에 아이를 안고 있는 셰릴의 앞으로 나오며 두 사람이 그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가슈와 길더가 집 앞에 있는 동안 아비크는 뒤로 돌아와 집 뒤를 확인하고 있었다. 앞에서는 가슈와 길더가 자리 잡고 앉아 서로 쑥덕거리고 있으니 자신까지 굳이 거기 있을 필요는 없다.
집 뒤는 울타리 하나 없이 긴 터로 이어졌는데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았는지 잡초가 우거져 허리 높이까지 자라 있다. 무성한 풀을 양쪽으로 헤치며 아비크는 뒤쪽으로 걸어갔다.
울타리 없는 수풀 끝은 다행히 여러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과 연결되어 있다. 도망칠 경우를 대비한다면 집은 좋은 위치다.
검을 양쪽으로 휘둘러 잡초를 쳐내며 아비크는 길가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 앞으로 나왔다. 움직이기 편하게 집에서 길가 끝까지 수풀을 다 헤쳐 놓고 그는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는 그대로 잠시 서서 집을 올려다 보았다.
저 집 안 어딘가에 디에나는 아이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헬렌을 떠나온 뒤, 가끔 생각이 났었다. 밝은 갈색 긴 머리에 동그란 눈을 가진 여자. 뭐가 불만인지 그 예쁜 얼굴을 자주 찌푸리며 매사 좀 시큰둥해 보이는, 그래서 한 번은 마틸다에게 그 자신과 비슷해 보인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들은 여자.
길을 조금 더 넓히기 위해 풀을 다시 쳐대며 아비크는 집 쪽으로 되돌아 갔다.
사실 그는 지금껏 여자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싸울 때만 집중할 수 있었고 그 외는 매사 시시하게 느꼈다. 그런 점은 여자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자 냄새를 풍기며 접근하던 여자들은 좀 있었지만 그런 여자들과는 대화가 잘 되지 않았고, 자신에게 뭘 원하는 지 이해를 못하겠으니 대하는 것 자체가 편하질 않았다. 자신도 남자였으니 그렇다고 오는 여자를 마다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굳이 잡고 싶은 적도 없었고.
하지만 디에나는 좀 달랐다. 왜인지 그녀에게는 웬만해서는 먼저 말을 섞지 않는 그도 별 부담이 말을 걸 수가 있었다. 그녀는 그런 점에서 가슈나 시즈와 말할 때와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많은 얘기를 나눴다거나 아니면 그녀를 남자처럼 여겼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 편한 여자. 그리고 언젠가 포목점 앞에서, 바닷물에 반사되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갈색 머리와 함께 딱 한 번 보여준 밝은 웃음이 아름다워 잠시 눈을 떼지 못했던 여자. 그녀에 대해서는 그런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혤렌을 떠난 뒤 이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디에나를 예상치 못하게 다시 만난 뒤 그녀는 의외로 크게 그를 흔들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잡초를 쳐내려가던 손을 멈추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자신도 모르게 그가 혼자말을 했다.
“무슨 생각 하는데요?”
앞에서 날아온 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디에나를 보고 그가 멈칫했다.
“아무 것도.”
고개를 돌리며 어물쩍 넘어가려는데 그 기색에 개의치 않고 디에나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런 데도 길이 있네요.”
얼마나 오래 내버려 뒀는지 수풀이 길저쪽까지 무성했다.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보려고 그의 옆에 서서 한 손을 눈썹에 대며 그녀가 저기 멀리를 내다 보았다.
“어디로 이어지려나..”
“어디로든 아젠으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아비크가 대꾸했다.
“그럼 이쪽에서 추적자들이 올 일은 없겠네요.”
다행이라는 듯 디에나가 중얼거렸다.
"일단은. 뭐 추적자들이 굳이 길을 따져가며 올 것 같진 않지만."
"네?"
“어떻게할지 결정 했습니까?”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디에나를 향해 아비크는 물었다.
“계속 여기 있을 수도 없고, 결국엔 페이테드로 가는 것도 여의치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도 없고요.”
“아마도요.”
대답은 수긍이었지만 목소리는 수긍하는 기색이 아닌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문득 아비크는 다시 물었다.
“그러고보니 어디서 왔어요?”
셰릴과 달리 그녀는 오스티아 출신이 아니라고 했다.
“집이 어딥니까? 그쪽은.”
묻는 소리에 디에나의 시선이 힐끔 그를 향했다.
“난...”
말하려는 그녀를 보다가 갑자기 아비크가 고개를 돌려 집 저쪽을 쳐다보았다.
“왜요?”
의아한 듯 묻는 디에나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하며 그가 조용히 집 옆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그의 눈빛이 차츰 날카로워 지고 있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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