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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뉴야 님의 서재입니다.

여주가 XX를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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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뉴야
작품등록일 :
2022.05.11 16:20
최근연재일 :
2022.07.02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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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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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 거짓과 함께 춤을

DUMMY

강렬한 햇빛이 내려쬐는 결투장.


나스챠는 자신들에게 집중된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얼굴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관중들을 슥 훑어 본 나스챠는 질색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룬을 향해 말했다.


"겁먹고 튄거 아니야?"


"설마, 그 정도 정신머리가 있었으면 결투를 신청하지도 않았을거 같은데."


나스챠가 따분한 듯이 하품을 하는 순간, 허겁지겁 연무장으로 뛰어온 렌스가 좌중을 향해 소리쳤다.


"결투는 중지입니다!"


룬의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관중의 시선이 렌스에게로 향했다. 렌스는 그 시선들을 모두 무시하며 룬을 향해 가자는 듯 손짓했다.


그 손짓에 룬과 나스챠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렌스는 아랑곳 하지 않고 룬의 팔을 이끌어 대기실로 이동했다.


"데인, 죽었습니다."


"뭐? 그게 무슨..."


렌스는 달려오느라 가쁘게 쉬고 있는 숨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데인 뿐만이 아니라, 어제 아가씨께 창피를 당했던 무리들이 전부 죽었다."


렌스의 말에 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말에 한동안 고민에 잠겨있던 나스챠는, 이내 결론에 도달했다.


"아하, 그래서 벌인 결투인가."


나스챠의 중얼거림에 룬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렌스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생각해 봐. 이 상황에 재네가 죽으면 범인으로 제일 유력한 사람이 누구겠어?"


"아가씨가? 설마, 아가씨가 나선다면 그렇게 뻔하게 죽일 리가 없지 않나."


"너나 나나 그렇게 생각하는거지. 근데 지금 아카데미에서 룬은..."


아카데미에서 룬의 이미지가 주는 감정 중 가장 강렬한 것. 그것은 아마도 두려움이다. 룬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상황과 두려움에서 이끌어낼 결론은 뻔했다.


룬이 심각한 표정을 한 렌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처음부터 단순한 결투 신청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


"그래, 그래도 설마 죽일 거라곤 생각 못했지만."


그 말과 함께 세 사람 사이에서 침묵이 감돌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데인의 결투신청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결투를 신청했고 그 사람이 데인 일행을 죽였다면, 정황상 데인 일행을 죽인 것은 룬처럼 보이게 된다. 같은 결론에 도달한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나스챠였다.


"그래도 데인 하나 죽였다고 네게 타격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나스챠는 진심으로 이해가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룬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내일이면 파티잖아. 내겐 파트너가 필요하고."


그제서야 둘은 데인의 죽음 속에 담긴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겨우 파티에 참석하는 걸 막으려고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아카데미 내부에서 살인은 철저하게 조사받는다. 평민일지라도 그 조사 과정을 피해가기 힘든데, 이번에 죽은 것은 귀족가의 자제들이자 아카데미의 학생이다.


발헤임이던 왕세자던, 이 정도 일을 벌인다면 그 책임을 피해갈 순 없다.


렌스의 말을 들은 나스챠가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왕세자 측에서 직접적인 위험을 느꼈다면, 이야기가 달라져."


그러나 지금 아케도니아 정계를 둘러싼 기묘한 분위기는, 나스챠의 중얼거림에 설득력을 주었다.


“에이씨, 드레스까지 다 맞춰놨는데···”


“뭐 별 수 없지.”


"파트너 때문이라면 제가..."


"아니, 평민인 널 파트너로 데려가면 룬의 평판만 떨어질거야.”


나스챠의 말에 렌스가 상처받은 듯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러면 나는 어때?"


그 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냐?"


나스챠가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생글거리며 손을 흔들고 있는 조로가 있었다.


"방금. 소식은 들었어. 그래서 어때, 나 정도면 나쁘지 않지 않아?"


그 말에 렌스와 나스챠의 시선이 조로의 발끝부터 머리까지 훑기 시작했다. 탐색을 끝낸 렌스와 나스챠는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나쁘지 않아.'

‘괜찮은데, 아니, 오히려 좋아.’


"근데 조로 너 귀족이었어?"

"나도 마스턴데, 설마 귀족 작위하나 없겠어?"


아케도니아에서 마스터는 백명도 채 되지 않는다. 아무런 기반이 없어도 마스터의 작위만 입증할 수 있다면 최소한 백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


조로는 혼란스러워 하는 룬 일행에게 아카데미의 카드를 들어 신분패를 보여주었다. 카드에는 백작위를 뜻하는 문양이 박혀져 있었다.


조로의 문양을 확인한 룬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게 있으면 말을 하지."

"안 물어봤잖아?"


대화를 주고받는 룬과 조로, 그 모습을 보며 렌스와 나스챠는 이번에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울려.'


"야."


나스챠의 부름에 룬과 조로가 동시에 나스챠를 쳐다보았다.


"니가 가라 무도회."


룬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조로가 환하게 웃음짓는다. 의미심장한 표정의 나스챠를 향해 조로가 윙크를 보내며 룬을 향해 말했다.


"괜찮겠지 룬?"

'나스챠 나이스.'


"괜찮고 안 괜찮고 할게 어딨어 지금, 당장 내일이 파틴데"

'나중에 갚아라.'


그렇게 말한 나스챠와 조로는 은밀하게 서로의 주먹을 툭 건드렸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룬이 중얼거렸다.


"근데 설마 니가 귀족일 줄이야."


"내가 왜 귀족이 아니라고 생각했던거야?"


"그건 당연히 니가..."


예절을 모르고 사회성이 없다. 라는 말을 룬은 차마 당사자 앞에서 할 수 없었다.


"...귀족답지 않게 친근해서 그랬지 뭐."


"뭐야 그런 거였구나."


조로는 나스챠의 어색한 대답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조로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룬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파트너로 가면 되는거 맞지?"


조로는 룬에게 응근하게 얼굴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룬은 가까워진 조로에게서 뒷걸음질 치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까, 이거 남자 새끼랑 손 잡고 파티에 가게 생겼잖아.’


그러자 조로가 상처받은 듯 울상을 지었다.


"그 반응은 좀 너무한데."

"너무한건 네 채신머리가 아닐까."


룬은 그렇게 말하고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사시 조로. 파트너로서 부족한 부분은 없다. 실력이라면 이미 아카데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고, 백작이라면 귀족 사회에서도 꿀리지 않는 신분이다. 어차피 일리야 룬의 신분으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정을 마친 룬이 고개를 들었다.


"함께 가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겠어?"


"뭐 별 문제야 없겠지, 그리고 우리 쪽에서도 나온 이야기가 있어서.”


이어진 조로의 말에 순식간에 세 사람의 이목이 조로를 향해 집중되었다. 왕실 기사인 그가 말하는 그의 편이란, 아마도 왕세자를 뜻하는 것이다.


"네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너무 그렇게는 보지 마."


"...왕세자의 명령을 받고 온거야?"


그 말에 조로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꼭 그런건 아니고 권유는 받았지. 너네 입장에서 지금 우리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건 알고 있어."


조로의 말대로 지금 룬은 왕세자 측에서 데인을 암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사실 발헤임가에서 굳이 룬에게 위해를 가할 이유가 없는 이상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데인을 죽인 것은 우리가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 말에 렌스와 룬의 손이 슬며시 검의 손잡이를 향하고, 나스챠는 자신의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워워, 말 한번 잘못 했다가는 그대로 골로 가겠는걸. 하지만 생각해 봐 애들아."


"그래, 세 명이라면 널 제압하기엔 과분하지."


"아니, 싸움 생각 말고."


조로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어제 데인이 죽자마자 긴급회의가 열렸어. 우리 입장에서도 데인이 죽어봤자 네 반감만 살거라고 생각했다고."


"그래, 실제로 그렇게 됬고. 그럼 나머지는 묵여서 생각해볼까?"


세 사람이 자신을 포위하자 조로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 우리 쪽에서 그렇게 해서 얻을 게 뭐가 있는지도 좀 생각해주지 않을래?"


룬은 자신의 평판을 깎음으로서 왕세자 측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떠올려 보았다.


"...의외로 별거 없네?"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왕세자 측에서도 얻을 이득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아직 룬이 명확하게 어느 세력이지 판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룬을 견제하는 것은 하책이다. 확실하게 밟으려는 것도 아니고, 이런 애매한 견제는 일리야라는 벌집을 건드리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지?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설득할 수 있을거 같아서 내가 온거야."


조로는 룬에게 다가와 슬쩍 빠져나온 룬의 검을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범인을 알고 있는 건 아니야. 발헤임...이라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낮겠지."


"그럼 대체 누가 범인이라는거야?"


나스챠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짜증이 실려 있었다. 마치 진실을 알고 있어서 나오는 것만 같은 짜증.


"조로 네 말대로 왕실도 아니고, 발헤임도 아니라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는 건데?"


룬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룬은 본능적으로 나스챠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로가 나스챠가 보지 못하도록 룬의 발을 툭 건드렸다.


"글쌔."


시험하는 듯한 눈빛. 그 시선에서 룬은 한 가지를 알아챘다. 왕실은 이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모른다. 다만 그들의 용의선상에 올라가 있는 것은 발헤임과 또···


"어쨋든 납득은 해준 모양이네."

"그래,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네."


눈앞에 있는 나스챠, 그리고 그녀를 통해 연결된 위치스 가문이다.


룬이 조로의 말에 수긍하자 나스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조로의 반대편을 향해 고개를 팽 돌렸다.


"그럼 내일 데리러 갈게."


"아니, 파티장 앞에서 만나는거면 충분해."


조로가 쓴 웃음을 지었다.


'끝까지 곁은 주지 않는구나.'


왕실 기사와 일리야 가문의 차녀.


결국 그들의 관계에 있어 이익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도 조로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거리감이 크면 클수록 결실을 맺는 과정에 즐거움을 더할 뿐이다.


"그래, 그럼 파티장에서 보자."


그리고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네 사람이 각자의 기숙사로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까마귀 한 마리도 위치스의 연구실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


그리고 다음 날, 타이는 자신의 팔에 앉은 까마귀 한마리와 즐거운 듯 대화하고 있었다.


"아하하, 그렇군요 조로가 있었네요."


타이는 까마귀의 부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솔직히 의외네요. 그 게으름뱅이가 이렇게 대놓고 나설줄이야."


"놀랄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 아이에게는 사람을 홀리는 마력이 있으니까요."


타이의 곁에 서 있는 남자가 대답한다. 그 대답에 타이는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뭐죠 그 표정은, 질투라도 하시나요?"


그 말에 잠시 고민한 남자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거 같네요."


" 솔직하긴, 뭐 그래서 내가 당신을 아끼는거지만요. 엔비 당신도 좀 보고 배우는게?"


그렇게 말한 타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타이의 그림자에서 까마귀 여러 마리가 나와 여러 방향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손은 써 둿으니까. 오늘 하루는 즐기도록 하세요."


그 말과 동시에 남자는 타이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는 파티장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엔비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저자에게 너무 무르다니까요."

"내가 무르지 않았다면, 너는 여기에 올수도 없었어요."


"뭐 내 알바는 아니지만, 그러다가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그거야말로 내 사정이죠. 근데 대체 그 예의없는 태도는 언제쯤 고쳐질지 모르겠네요?"


엔비의 목에 가해지는 거대한 마력의 압박. 처음에는 전신을 가볍게 누르는 듯했던 압력은 점차 목으로 집중되어, 이내 숨조차 쉬기가 힘들어졌다.


"내가 많이 봐주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나요?"


타이는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는 엔비가 무릎을 꿇은 후에야 그에게 걸린 압력을 풀어주었다.


"흥, 끝까지 알량한 자존심이나 세우긴. 뭐 좋아요."


그러고서 타이는 엔비를 향해 팔짱을 끼라는 듯 팔을 내어 보였다. 엔비는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중얼거렸다.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닌데요."


"아하하, 그건 피차일반이에요. 오히려 내 쪽이 좀 더 열받으니까 못 생긴 얼굴을 뭉개버리기 전에 대충 끼세요."


그 말에 엔비가 똥 씹은 표정으로 팔짱을 껴왔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뭐 지금은 잘 모시도록 하지요, 가실까요 마드모아젤 타이."


"집어 치우세요. 기분 나쁘니까."


타이와 엔비는 그렇게 왕세자의 파티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파티장에 못 가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조로."


"미안해. 원래 계획이 아니었는데, 왕녀가 갑자기 파트너를 나로 바꿔 버렸어.”.


나스챠가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갑자기? 위쪽이랑은 이야기 된거 아니었어?"


"나도 잘 모르겠어, 왕세자님과는 이야기를 나눠 봤지만 그분도 모르는 눈치셨어. 정말 미안해."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조로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끝까지 뒤를 돌아보며 사과를 전한 후에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나스챠가 그 뒷모습을 보며 뒷목을 잡았다.


"뭐 저런..."


렌스 또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조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의 룬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지금 룬은 다른 곳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대신 룬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어떤 사람의 기척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익숙한 기척에서는 그리운 느낌이 물신 풍긴다.


"이런,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살아있지 않은 듯 아주 희미한 기척 탓일까, 나스챠와 렌스는 그가 말을 걸기 전까지는 그의 걸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목소리를 들은 나스챠가 불길함을 감추지 못하며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예정된 대로 경악했다.


그곳에는 브이가 있었다.


브이. 룬은 아직도 브이라는 저 이름이 너무도 낯설었다. 그에게 다른 이름은 어울리지 않았다. 적어도 룬에게 있어서는, 세이튼이라는 이름이 주는 울림은 무거워 쉽게 벗어던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 감상을 드러내는 것은, 상대를 향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내 파트너가 도망을 쳐버렸지 뭐야."


새까맣게 변해버린 머리칼과 눈동자가 기억 속에 있는 붉은 색과 어우러져 기묘한 색감을 만들어냈다. 처음 세상의 부름을 받은 그 색의 이름을, 무어라 해야할까.

죄책감과 시작하기 직전의 연정, 그리고 사춘기의 시작과 끝이 섞여 들어간 혼탁한 색상. 복잡하기 그지 없는 저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마도 어려운 일이리라.


룬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건지는 몰라도, 세이튼, 아니 브이가 옅은 웃음을 띄며 입을 열기 시작한다.


"그렇군요, 저도 때마침 파트너를 잃어버린 참이라서요."


입속에서 빠져나온 말들이 피부를 스며 귓가로 들어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브이라는 사람 자체가 룬을 향해 다가오며, 손을 내뻗는다.


"그럼 이건 어때요, 잃어버린 사람들끼리 합을 맞춰보는 건?"


잃어버린 사람들.


룬은 그것이 킨케이드라고 생각했지만, 브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또한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룬이 느끼는 혼란과 마찬가지로, 브이 또한 그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그가 잃은 것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초대해주셨는데,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요.”


룬이 평온한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리고 브이는 그곳에서 자신이 확실하게 잃은 것을 보았다.


마치 그를 따라가려는 듯한 룬의 태도에, 나스챠가 룬을 말리려 하고, 또 렌스가 나스챠의 어깨를 잡아채 그녀를 말린다. 당황한 나스챠의 시선에도 렌스는 룬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시고 싶은대로 하시면 됩니다."


"미쳤어? 저 사람은..."


"그렇기에."


렌스가 옅은 미소와 함께 나스챠를 향해 대답했다.


"아가씨께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확신을 담은 목소리.


브이에게 있어서는 거슬리는 목소리였다. 렌스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듯 브이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다.


브이는 그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도 렌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브이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짜증스레 머리를 넘기고서는 한숨을 내뱉었다.


"고맙네. 스피어경."


그 말에도 여전히 렌스는 깊이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브이는 렌스를 향한 시선을 거두며 룬을 향해 자신의 팔을 내어보였다.


"그럼 가실까요, 일리야의 아가씨."


저 기사와 자신 사이에 있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룬 또한 같은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일리야 룬의 기억과, 알 수 없는 자신의 감정들이 밀어닥쳐 순식간에 그를 끌어내린다. 달이 떨어진 곳에 나타난 것은 이제는 그 형체를 알 수 없게 변해버린 그의 원본이었다.


태초에 나기를 사내로 났던 그는 이미 일리야 룬과 너무 섞여버렸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일리야 룬이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내가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이미 나는 일리야 룬보다 이 삶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요, 벤데타 경."


룬이 내어준 팔에서 죽은 피부의 한기를 느끼는 것과 동시에, 룬의 온기가 브이를 파고들었다.


온기 너머로 느껴지는 익숙한 진동이 브이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게 만든다.


'빌어먹을 심장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군.'


맞닿은 손에서 전해져 오는 진동이 이미 멈춰버린 브이의 심장을 심박수에 맞게 공명시킨다.

죽어버린 브이의 심장을 되살리 듯, 목적없는 움직임을 반복한다.


쿵.


'제발.'


쿵.


'빌어먹을.'


쿵.


'...신이시여.'


마녀와 계약한 자신이 찾는 신은, 어떤 신일까. 실없는 생각에 브이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운명이야.'


브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손을 맞잡은 채 여전히 알기 어려운 표정을 한 룬을 내려다보았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이제는 그 시선의 끝이 자신을 향한다는 점이었다.


브이는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파티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파티장으로 걸어가는 룬과 브이를 바라보는 나스챠는, 그 시선에서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결국 터지듯 불어나온 그 감정은 렌스를 향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렌스는 가만히 그 감정을 스스로를 향해 흘려넣는다.


다만, 나스챠의 것과는 종류가 조금 달랐다. 나스챠가 그들에게서 불안함을 느꼈다면, 렌스는 참을 수 없는 죄악을 느꼈다. 이미 렌스는 한 번 주인을 죽였다.


그리고 빌어먹을 운명은 렌스에게 무덤에서 되살아난 주인을 한 번 더 죽이라고 속삭이고 있다.


렌스가 멀어지는 브이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바보같은 사내는, 이번에도 내게 배신당하겠지"


스스로를 옥죄는 듯한 그 목소리에는 의무적인 분노가 묻어난다.


나스챠는 그 모습을 더는 바라보기 힘들어, 파티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렌스의 시선과 귀도 파티장에서 흘러나오는 여가수의 아리아를 향해 집중되었다.


아리아는 두 사람의 눈을 가려 제 역할을 다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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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3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5 40 0 21쪽
23 22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4 47 0 22쪽
22 21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3 20 0 15쪽
21 20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2 23 0 19쪽
20 19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2 24 0 15쪽
19 18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21 35 0 15쪽
18 17화- 탁란공녀 창세기 +1 22.05.20 30 1 14쪽
17 16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9 31 0 18쪽
16 15화- 탁란공녀 창세기 +1 22.05.18 65 1 15쪽
15 14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7 46 0 21쪽
14 13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6 39 0 20쪽
13 12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6 41 0 16쪽
12 11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5 46 0 14쪽
11 10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4 42 0 24쪽
10 9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4 48 0 16쪽
9 8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3 58 1 18쪽
8 7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3 56 2 16쪽
7 6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2 61 2 13쪽
6 5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2 64 1 14쪽
5 4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1 76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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