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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뉴야 님의 서재입니다.

여주가 XX를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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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뉴야
작품등록일 :
2022.05.11 16:20
최근연재일 :
2022.07.02 00:14
연재수 :
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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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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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글자수 :
403,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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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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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8화 - 탁란공녀 창세기

DUMMY

룬은 잠을 뒤척이게 하는 찬바람에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부서진 벽이 아직 수리되지 않아 대충 천으로 막아 놓기만 하여서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그렇게 넘어온 간사한 바람은 룬에게 벽에 처박힌 레기오르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결국 룬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불과 베개를 챙겨 유모의 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유모에게 어리광을 부릴 때면 유모는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며 그녀를 나무라곤 했지만, 결국에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룬을 위로해주었다.


유모의 따뜻한 체온을 떠올리며 기분이 좋아진 룬은 방문을 똑똑 두드리고는 유모를 불렀다.


"유모, 자?"


대답은 의외로 룬의 뒤편에서 들려왔다.


"아니요.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룬은 그제야 자신이 유모의 기척을 놓치고 있다는 걸 인식했다.


하지만 이 순간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지금 도움이 필요한 것은 자신이다.


"잠이 안 와서. 같이 자면 안 돼?"


할렌은 잠시 고민했다.


평소라면 이 어린아이를 위로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겠지만, 그녀 또한 사람이었다.


방금까지 흥정을 위해 가판대 위에 올려놓았던 아이를 위로하기에는, 아직 할렌의 늙은 가슴 속에는 양심 비스무리한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양심은 오직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이기적인 물건이었다.


할렌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아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에게도, 룬에게도 짜증이 밀려왔다.


"오늘은 피곤하네요. 내일 다시 와주실래요?"


할렌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이 작은 아가씨가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룬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할렌이 룬을 내려다보자 룬은 마치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본 사람처럼 굳어있었다.


"누구랑 만났어?”


순간 할렌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오랜 연륜은 상황에 대한 기계적인 대처를 만들었다.


"네 맞아요 아가씨.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오늘은 너무 늦은 거 같아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낸 말들이 만들어짐과 거의 동시에 입 밖으로 튀어 나가고 있었다.


"앞으로 아가씨의 처우에 대해서 저도 고민이 되었거든요. 이번일 만 해도 그래요. 대체 아가씨를 어떻게 여기면..."


말씨를 흐리던 할렌은 혼이 나간 듯 자신을 쳐다보는 룬을 보자 마음이 급해 졌다.


"그래서 가주님을...레기오르스님을 만나서..."


할렌은 최대한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더 이상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차라리 입술을 질끈 물고 화를 내보려던 찰나에 룬이 말했다.


"응. 알았어 유모."


할렌은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한 룬의 태도가 무서웠다.


갓난아이부터 키워온 아이가 자신을 부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심장을 옥죄었다.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온 몸으로 퍼져나간다.


하지만 죄책감으로 만들어진 사슬이 할렌의 늙은 몸뚱아리를 휘감았다.


결국 이번에도 할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방으로 돌아온 이후 룬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세수였다.


차가운 물이 눈두덩을 지나며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었지만, 이상하게도 양 볼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룬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장이 텅 빈 것과 같이 차가웠고, 목은 텁텁한 것을 먹은 것처럼 갑갑하다.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세어 나와 시야가 가려져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이대로 달려나가 유모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왜 유모한테 레기오르스의 마나가 남아있는 거야?'


하지만 그러기에 룬은 이미 사람에 대해 알아버렸다.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룬은 얼마 전 학교에서 바라보던 창가를 떠올랐다.


‘결국엔 이런 결말이네.’


가진 것 없는 소녀에게도 자신의 방과 창문 정도는 있었다.


그렇게 룬은 홀린 듯이 테라스의 창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최근 몇 달간 룬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선택에 끊임없이 고뇌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것을 멈춘 것은 킨케이드 일가를 향한 복수심.

아니, 사실 룬 또한 무엇이 자신을 멈춘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단지 억울했다.


잘못한 것은 내가 아닌데, 무릎 꿇어야 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하는가


그래, 인정하자.


사실 이전까지 이 선택은 억울함에 대한 방어기재에 불과했었다.


무서운 현실에서 언제든 도망칠 수 있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하지만 방어기재에 불과했던 음울한 상상은 이제 현실이 되려 한다.


그렇게 룬은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와 난간 위에 섰다.


숨을 들이켜자 차가운 밤바람이 폐로 밀려들며 온몸을 차갑게 식혀주었다.


아마도 이것이 죽음의 온도이리라.


냉기가 몸속과 밖을 모두 에워싸자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공포가 밀려왔다.


차가우면서도 때때로 불길하게 심장을 두드리는 그 감각은 때로는 거세게 심장을 두드리면서도, 머릿속에는 차가운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죽으면 이런 걸까?’


공포는 룬의 발걸음을 잠시 멈춰 세웠다.


걸음을 멈춰세우 룬은, 어째선지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나약한 자신의 삶은 죽음조차 온전히 갖지 못한다.


동시에 억울했다.


또래의 아이들은 대부분 인생에서 행복을 느꼈으며, 그들에게 있어 시간이란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한 되새김이다.


그에 반면 자신은 너무 다양하게 불행했다.


친부모는 자식을 팔아넘겼으며, 어릴 적부터 자신을 키워온 유모는 룬보다는 자신의 안위와 가문의 보신을 중요하게 여긴다.


낯선 환경에는 그녀를 학대하는 시어미와 아들의 약혼자를 탐내는 시아비가 있다.


룬은 다른 아이들이 가지는 평범한 일상의 단 한 조각조차 자신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 사무치게 억울했다.


그 사실이 억울해서, 차마 몸을 던질 수가 없었다.


세이튼이 잘난 듯이 떠들었기에, 룬은 발헴 가문이 어떻게 몰락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빌어먹을 세상은 자신의 죽음에도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으리라. 아마도 빌어먹을 가족은 내 죽음을 저울 위에 올려놓고 흥정을 하리라. 아마도 빌어먹을 삶은 이런 내 처지를 보며 배꼽을 잡으리라.


그리고 빌어먹을 운명은 그냥 개새끼다!


룬은 테라스를 등진 채로 무너지듯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서 무릎을 감싸 그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나쁜 놈들'


분노가 만들어 주는 열기보다 비정한 현실에서 세어나오는 한기가 차갑다.


피부를 뚫을 것만 같은 새벽바람보다도 구멍이 난 것만 같은 가슴이 시리다.


'개새끼들'


어쩌면 지금이라도 유모를 찾아가서 태연스럽게 말을 건다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사실 유모는 정말 자신을 위해 레기오르스를 만난 게 아닐까?


덧없는 희망이라는 생각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룬의 상체가 앞으로 쏠리며 무게 중심이 이동한다.


그리고.


'개새끼들...'


전환.


이라고 밖에는 하지 못할 일이 일어난다.


어깨를 움직인다. 등줄기의 신경을 타고 근육이 움직이는 감각이, 오르가즘처럼 온 몸을 향해 울려 퍼진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실존하는 육체의 감각은 상상 이상으로 짜릿했다.


“···시발, 이게 무슨 일이야?”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다. 방금 일리야 룬은 삶을 포기했다. 개새끼들을 되뇌이며 몸을 던지려는 순간, 내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 애초에 나는 무엇인가? 희미하게 나마 일리야 룬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룬의 서재는 아이답지 않게 온갖 기괴한 책으로 가득 차있었고, 나라는 존재는 그곳에서부터 탄생했다.


그다지 자각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생각 해야만 한다.


내 존재의 목적성이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다.


나는, 일리야 룬의 무의식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가, 그리고 어디를 향해 가야하는 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길게는 빽빽하게 채운 종이를 이 방 전체에 채운다고 하더라도 정의하지 못할 삶의 정답에 대한 것일수도 있지만, 짧게 말하자면 룬을 대신하기 위해서다.


그렇다. 나는 일리야 룬의 대행자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파수꾼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룬을 대신해서 룬을 지키는 것이다.


룬을 대신해서 빌어먹을 운명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을 끝마쳤을 때, 다시 룬을 불러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부활의 의식이다.


방금까지 일리야 룬이 겪고있던 것이 길게 죽어가는 과정이었다면, 앞으로의 길은 모두 그녀의 부활만을 위한 걸음이다.


그러자 룬은 자신도 모르게 테라스의 창문을 바라보며 툭 던지듯 중얼거렸다.


"메피스토텔레스"


이전과는 다른 목소리의 온도에 메피스토텔레스는 순간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반사된 어둠 속에 스스로를 숨긴 악마가 대답 하려는 순간, 룬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대답해 이 개새끼야.”


-듣던 중 험악한 소리군.


룬은 자신과 닮은 목소리에 창문을 올려보았다. 창문 속에 비친 또 다른 자신은, 방에 있는 전신 거울을 가르키고 있다. 대충 무릎을 털고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에서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악마를, 같은 눈빛으로 노려본다..


-역시 장작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그런 눈빛을 하는구나.


"고유명사 빼, 이 새끼야.”


거울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던 눈매가, 조금 흔들린다.


-어린 아이가 입버릇이 험하구나.


"어린 아이? 하, 내가 애새끼라니 진짜 빌어먹게 재밌는 상황이긴 해.”


자신의 말을 끊어버리자 어이가 없다는 듯 거울 속 자신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번 아이는 좀 많이 특이하군.’


악마는 어쩌면 자신과 용사의 안목이 틀린 것은 아닌지 잠시 고민했다. 이어지던 생각이 룬의 질문에 의해 끊어졌다.


"오랫동안 살아온 악마야. 너는 내게 답해야 한다. 어째서 일리야 룬은 괴로운 것이냐?”


대뜸 들어온 질문에 반사적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악마는 순간 진지하게 고뇌하기 시작했다. 그는 답이 옳지 않을지라도 항상 인간에게 답을 주는 존재다.


한참을 고민한 악마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길 위에 있는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노력하는 인간은 나아가기 마련이고, 나아가는 인간은 방황하기 마련이며, 방황하는 인간이 괴로운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 대답에 일리야 룬의 가죽을 뒤집어 쓴 이름없는 사내는 냉소한다.


병신 같은 선문답. 그것은 일리야 룬이 바라는 답이 아니다. 너는 내게 좀 더 그럴듯한 답을 줘야 한다.


“그럴듯하구나. 하지만 너무 얕다. 그 정도로는 나를 유혹하지 못한다.”


룬의 말에 악마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방금 대답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꼬마는 자신이 왜 강림한 것인지 얼추 파악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상호의 이익을 위한 대화 뿐이다. 그럼에도 눈앞에 있는 꼬마는 질문을 던졌다.


메피스토텔레스는 농담으로라도 그 질문이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무슨 대답을 해주길 바라느냐.


꼬마의 눈이 나를 향한다. 슬쩍 위로 향하다가도, 다시 내려가며 샅샅히 살핀다. 끝내 내게서 다른 의도가 없다는 것을 파악한 것인지, 입꼬리를 말아올린다.


악마의 눈으로 보아도 저 꼬마는, 요사스럽다.


“구원을 바란다. 메피스토텔레스, 나는 네 답에서 구원을 바라고 있단 말이다. 세치 혀를 굴려 나를 이 지옥에서 끌어내라. 그리고 앞으로의 내 길 위에 구원이 있다고 속삭여라. 그럼 나는 네 것이 될테니.”


-구원이라. 어려운 말이다. 설사 신이라고 하더라도 너를 구원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런데도 너는 악마에게 구원을 바라는가?


“신? 아니, 일리야 룬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악마다. 빛은 이 아이를 더욱 숨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아이에게 완벽한 어둠을 주겠다. 다시는 더러운 것을 보지 않을 수 있도록, 칠흑을 선물하겠다.”


거울에 비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내 표정일까 아니면 악마의 표정일까.


알 수 없지만, 알 수 있다.


거울 속에 비친 일리야 룬의 눈이 요사스럽게 휘어진다.


-그렇군. 너는 일리야 룬이 아니지만, 필시 나는 너를 찾으려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렇다면 계약자야, 그 말대로 그대에게 완벽한 어둠을 주겠다. 다시는 세상의 추한 것을 보지 않도록 영원한 밤을 선물하겠다.


샛노랗고 일자로 찢어진 눈동자가 룬을 향한다. 흔들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늙은 악마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입꼬리를 비틀어올린 악마가 시험하듯 말했다.


-하지만 명심해라. 언젠가 맞이할 마지막 순간에 그대는 이 시간을 돌아볼 것이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선택은 오직 그대만의 것이다.


머릿속을 뒤지려는 듯한 시선에, 룬 또한 그를 마주본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눈초리가 악마를 향한다.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한 이 아이가 끝내 고른 것이 나였다. 그런 우리에게 선택을 논하는가?”


-나는 악마다. 그대들의 사정 따위 내 알 바가 아니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계약해라.


오만한 악마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리고 선택해라.


거울 속에, 일리야 룬의 모습 속에 가려진 그의 실체를 볼 수는 없지만, 룬은 그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애초부터 룬이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결국 일리야 룬은 저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 이정도면 잘 견뎠다."


스스로 되뇌이는 듯한 말. 그렇지만 어째선지 메피스토텔레스는 저 말이 다른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고 느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강해져야하지.”


룬의 중얼거림을 들은 메피스토텔레스가 입이 찢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일리야 룬, 내가 너를 대신하마.”


그 말과 동시에, 악마는 준비해온 모든 회유와 협박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저 단단한 아이는 어떤 조건을 내밀어도 그와 계약을 맺었으리라.


그러나 불쌍한 아이다. 저 아이는 지금 스스로가 어떤 상황에 놓인 건지도 알지 못한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에 휘둘려 몸의 균형을, 아니 정신의 균형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는 것은 악마의 소관이 아니었다.


메피스토텔레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룬을 향해 말한다.


-그렇다면, 이름없는 자여. 그대는 일리야 룬을 받아들여 그녀의 운명을 계승할 것을 맹세하는가?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이 그 자격이 있다. 맹세한다 메피스토텔레스. 앞으로 나는 일리야 룬으로서, 그녀를 계승하겠다."


룬 또한 고개를 끄덕인다. 동시에 메피스토텔레스의 의미심장한 표정이 룬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대가 계승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세겨두는 것이 좋을거야.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나?


“기만이군, 일리야···.아니, 나에게 선택지 따윈 없다. 그리고.”


담겨 있던 것이 모두 흘러내려 간듯한 눈동자가 거울을 향한다.


“그대 또한 알고 있다.”


메피스토텔레스는 룬이 웃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가면임을 알았다.


-운이 좋구나, 이름없는 자야. 내 길고 무료한 삶 속에서 이 정도의 조건으로 제안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 꼬마가 계승의 의미를 알기나 할까.’


틀림없이 이 무명자는 후회하게 된다.


이름이 없다 하여 그 존재가 없지는 않다. 그는 일리야 룬이 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잃어버렸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전환의 순간에, 일리야 룬은 자신을 위해 온 몸을 불사르던 무명자의 존재를 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름없는 저 존재는 아름답다.


-좋아 일리야 룬. 이제 우리는 계약으로 맺어졌다. 우리의 시작은 달랐으나 그 끝은 함께할 것이요, 그대의 아침과 저녁에 내가 있을 것이니.


거울 속 악마는 품 안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구슬을 꺼내 룬에게 보여주고는 거울 속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룬의 주머니에서도 묵직한 감촉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대 또한 나를 계약자로 받아들여 의무를 수행하겠는가?


언젠가 보았던 약속의 말들.


지금 이 자리에 선 것은 늙은 악마와 이름없는 사내이나, 계약을 맺는 것은 두 사람이 아니었다. 이름없는 사내는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일리야 룬과의 계약을 맺는 것이요, 늙은 악마 또한 일리야 룬과 계약을 맺는 것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차피 룬에게는 선택지도 없었다. 계약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나’ 는 사라진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았다.


피할수 없다면, 즐겨야만 한다.


룬은 언젠가 참석했던 언약식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나 일리야 룬은, 그대의 계약자가 되어 성실히 의무를 수행하겠다.”


이 말들은 모두 일리야 룬을 위한 말이다.


이름없는 사내가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랑의 헌사다.


그 사실을 깨닫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고동 사이에 숨은 말들을, 그대는 알아챌까.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나의 말이 그녀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구조적으로 영원히 닿을 수 없다.


태양이 뜨기 위해서는, 달은 져야만 한다.


그러나 우습게도 보이지 않는 나의 말이 전해진 것은, 다름아닌 악마 였다.


메피스토텔레스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나 또한 맹세한다. 계약 이후에 그대의 희생만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요, 언제나 그대를 존중하겠다.


거울을 두고 비치는 두 소녀의 얼굴에 모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존중할 것이며.


"기쁠 때는."

-그대의 웃음이 되고.


"슬플 때는."

-그대의 비가 될 것이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대와의 계약에서 눈을 돌리지 않겠다.


그리고 거울 속 자신은 손가락을 들어 룬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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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3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5 39 0 21쪽
23 22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4 45 0 22쪽
22 21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3 19 0 15쪽
21 20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2 21 0 19쪽
20 19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2 23 0 15쪽
19 18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21 33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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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6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9 29 0 18쪽
16 15화- 탁란공녀 창세기 +1 22.05.18 64 1 15쪽
15 14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7 44 0 21쪽
14 13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6 38 0 20쪽
13 12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6 39 0 16쪽
12 11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5 45 0 14쪽
11 10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4 41 0 24쪽
10 9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4 47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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