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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뉴야 님의 서재입니다.

여주가 XX를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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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뉴야
작품등록일 :
2022.05.11 16:20
최근연재일 :
2022.07.02 00:14
연재수 :
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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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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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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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23화 - 탁란공녀 창세기

DUMMY

정신을 차리니, 금빛으로 빛나는 소녀를 보았던 들판 위였다.


피곤함 때문에 일어나기가 싫다. 그럼에도 영혼의 기억은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죽는 것도 제대로 안 되는군.”


투덜거리며 일어나자 긴 머리카락이 귓가를 스치는 게 느껴진다. 귓가의 감각을 향해 시선을 돌려본다. 모든게 같은 환경이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온 세상을 비췄던 소녀가 없었다.


룬은 개울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수면에 비춰진 얼굴은, 일리야 룬의 것이다. 다만, 지금 비춰진 룬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그건 퍽이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빌어먹을•••”


그제야 방금 무슨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밀려온다. 방금 룬은 감정 따위에 휘둘려 주어진 사명을 포기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아마도 나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결국 나는•••’


결국 룬은 태양을 볼 수 없게된다.


“마누스 벨라토르. 위대한 전사라•••”


그 순간, 태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네게는 과분한 이름이야. 넌 그저 겁쟁이인데.”


동시에 발 밑에서 빛이 세어나오기 시작했다. 시선을 돌리니, 개울에서는 온 몸을 금빛으로 휘감은 일리야 룬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개울가에서 빛이 터져나와 온 세상을 뒤덮었다.


섬광에 눈을 감았던 룬이 눈을 뜨자, 이번에 룬은 석실의 한 가운데 있었다.


석실의 한 가운데 있던 태양은 온데간데 없었지만, 대신 그곳에는 일리야 룬이 자리했다.


“하지만 이제 너도 이해하겠구나. 그곳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걸.”


룬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곳이라 하면, 어떤 곳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이제서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사실, 말을 듣자 마자 그녀가 말하는 바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일리야 룬은 지금 자신의 삶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만, 이름없는 사내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름없는 사내는, 어느새 일리야 룬보다도 그녀의 삶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네, 하지만 네 선택은 네 생각을 말해주고 있어. 넌 이미 포기했잖아?”


그 말에 이름없는 사내는 깨달았다.


태양은 누군가가 띄워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뜨는 것이다.


태양에 다가가봤자, 불길에 타버릴 뿐이다.


일리야 룬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그래, 너도 똑같아. 계승자니 뭐니 해도 결국 너희는 내게 닿지 못해.”


그 말에 이름없는 사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익숙해보이는 태도가, 신경에 거슬려온다. 어째서일까. 그건 아마도 저말이 사실이 아니고, 진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들 속에 숨어있는 본심을 찾기 위해서는, 진심을 감싼 말들을 벗겨내야 한다.


“그건 너도 같아, 잘난 듯이 말해도 결국 나를 만든건 너야. 그건•••”


“닥쳐. 너 같은 가짜한테 같잖은 충고나 받을려고 하는게 아니-”


“-충고? 재밌는 착각이네. 너같이 싸가지 없는 년한테 충고 같은 걸 해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조롱하는 듯한 룬의 말에, 소녀의 얼굴에 표정이라고 할만한 것이 떠올랐다가 금새 사라졌다. 룬은 방금 지어보인 저 표정이 그녀의 진심임을 직감했다.


이름없는 사내에게 있어 태양인 소녀는, 그저 외로운 아이에 불과했다.


태양은 외로워서 달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달은•••


“역시 저열한 것들을 재료로 써서 그런지 입이 천박하구나. 그거 알아? 내 손짓 한 번이면 넌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거?”


“지금 협박하는거야? 아이고 무서워라. 그럼 내가 여기서 고개 쳐박고서 네게 사과하면 되는건가?”


이름없는 사내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오, 아니지. 그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고, 네가 바라는 건 더더욱 아니야. 일리야 룬, 나의 창조주야. 우리 솔직해지자.”


“그게 무슨•••”


“부러웠지?”


그 말에 진실을 감싼 말들이 벗겨졌다.


발가벗겨진 소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다름아닌 분노였다.


“근데 그거 알아? 앞으로는 더 부러워질거야. 넌 겁쟁이에 불과하고, 또 내게 맡길 테니까.”


“부럽긴 누가-”


“-제발, 제발! 너도 알고 있잖아.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일을 처리한 이유를. 네가 정말로 원했다면, 킨케이드 가문 따위가 너를 위협하는 게 가능했겠어? 넌 그냥 멋들어진 삶이 제발로 네게 굴러떨어지길 기다린 것 뿐이잖아.”


“•••닥쳐.”


“그 속에서 넌 구김살 없는 아이였을테고, 파헬과 유모는 너를 사랑하고 또 헌신했겠지.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했어. 그래서 실망한 너는 날 만들어낸거야. 이게 화나? 당연히 그러겠지. 넌 그게 싫어서 내 뒤로 숨은거잖아, 안 그래? 이-”


“-너한테 만큼은•••”


처음보는 일리야 룬의 표정이, 이름없는 사내를 향한다.


“너한테 만큼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니가 뭔대? 그래. 난 너 뒤로 숨었어. 근데 너도 즐겼잖아? 너도 나만큼 그것들이 좋아진거잖아!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말을 이어가던 일리야 룬은 지친 듯 호흡을 들이키다가, 이내 말을 멈춰버렸다.


“확실히, 네 말대로 저열한 재료를 써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이야.”


일리야 룬과 이름없는 사내의 시선이 교차한다.


“내가 욕하는 건 괜찮은데, 니 입으로 들으니까 괜히 열받네?”


이름없는 사내의 말에 룬은 스스로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의 심기를 거스른 말은 아마도 거짓말들이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향한 연민으로 만든 방패들이었다.


“마누스 벨라토르, 그 이름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아니, 그 이름만큼 내게 어울리는 것은 없어. 나는 네 삶을 지켜온 너의 대전사고, 평생을 너만을 위해 헌신해온 연인이며, 앞으로는.”


그 순간, 일리야 룬은 이름없는 사내의 이름을 결정했다. 그의 이름은 마누스 벨라토르다. 그것보다 그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없었다.


“네게 삶을 알려줄 부모가 될거야.”


일리야 룬은, 아니, 이름없는 사내의 태양은 그녀만의 오만한 전사를 보며 더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게 영원한 밤을 주겠다고 했잖아.”


“생각이 변했어. 삶이란 건, 생각보다 괜찮은 거더라고.”


석실의 중앙에 선 소녀에게서 다시 한 번, 빛이 세어나온다. 빛의 의지 속에서 사내는 소녀가 자신을 시험했음을 깨달았다.


“그래, 그럼 네 말대로 어디 한 번 영원한 밤을 걸어 봐. 분명 그 길은 어둡고 축축하겠지. 그거 알아? 축축한 그것들은 다 사람의 눈물이야. 그들이라 하여 너와 생각이 달랐겠어? 너보다 능력이 부족했을까? 아니, 아니야. 너보다 뛰어난 그들이, 너랑 같은 생각을 가지고, 다른 결말을 맞이했어.”


환한 빛때문에, 이름없는 사내, 아니 이제는 마누스 벨라토르가 된 전사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어디 한 번 해봐. 무엇을해야 하는지 헷갈린다면, 내가 정해줄게. 나를 유혹시켜. 내가 이 세상이 살아갈만하다고 느끼도록, 네 말대로 멋들어진 세상이 이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거라고 느끼도록, 그래서 더는 내가 참을 수 없도록. 나를 유혹시켜.”


웅웅거리는 소음 때문에 목소리로도 그녀의 기분을 짐작할 수 없다.


“네가 무엇을 보여주는지에 따라 나는 태양이 될수도, 어두운 밤거리의 조명이 될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마누스 벨라토르는 확신했다.


“그러니 내 어릿광대야, 춤추고 노래하는 그대야, 친애하는 나의 개새끼야.”


지금 일리야 룬은, 분명 웃고 있다고.


“어디 한 번, 내게 닿아 봐.”


***


검격으로 인한 여진이 가시자 에리나는 자신의 혼이 담긴 구슬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룬에게 맡겨질 때만 하더라도 황금빛이 넘실거렸던 그 구슬은 어느새 회색빛으로 변해있었다.


"이제는 만족하나?"


이면의 세계를 찢고 강림한 메피스토텔레스가 에리나를 향해 말했다.


"결국 모두 네가 원하는 대로 되었어 에리나."


우울한 목소리.


최근 들어 비교적 밝아졌지만, 원래 그에게 어울리는 목소리다.


에리나는 메피스토텔레스가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악인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사실 자체가 그가 선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에리나는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그의 모습에 감사했다.


그들이 함께한 시간에는 언제나 아픔이 함께했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가슴 아픈 모습이었다면 자신은 너무 불행한 여자였다.


날개가 꺼짐과 동시에 건틀릿과 검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에리나는 메피스토텔레스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메피스토텔레스는 허물어지듯 무너지는 에리나에게 달려가 그녀를 품속에 안았다.


"잔혹하구나 에리나. 지난 삼백 년간 네가 없는 세월을 상상해본 적 없거늘..."


그 말은 아쉽다.


마지막 순간이다.


조금 더 어울리는 말이 있을 것이다.


"오늘이 아니라도, 아니 어쩌면 영원히 이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메피스토텔레스는 울먹이며 에리나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네가 없는 세상 속에서 나는..."


에리나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의 어리광을 들어줄 만큼 이해심 많은 여자가 아니었다.


비정한 세상은 에리나를 잔혹하게 만들었고, 그건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결심한 순간 에리나는 자신의 감정을 불길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울먹이는 메피스토텔레스의 얼굴을 끌어 입을 맞췄다.


지금에 와서 무슨 축복을 남긴들 메피스토텔레스는 결국 자신을 잊으리라.


그렇다면 최소한 자신을 오랫동안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자그만치 삼백 년의 세월이다. 필요한 말은 모두 나누었다.


그들에게 있어 필요한 건 말이 아니었다.


말을 이어가려는 메피스토텔레스와, 그걸 막으려는 에리나의 입술이 붙었다가 떼었다가를 반복한다.


하지만 결국 이 이타적인 악마는 이기적인 인간을 이기지 못했다.


메피스토텔레스는 에리나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를 기억해줘.'


죽어가는 연인의 간절한 부탁을, 이타적인 악마는 거절할 수 없다.


그렇기에 메피스토텔레스는 이 순간이 사무치게 싫었다.


이 시간은 언제나 끔찍한 사슬이 되어 자신을 옥죄이리라.


그러나 이별 앞에서 한낱 악마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단지 이 시간이 조금 더 오래가기를.

조금 더 오래 기억하기를.

이 순간이 너무 아프지 않기를.


그저 바랬다.


***


잠에서 깨어난 룬은, 자신의 몸으로 터무니없는 짓을 해대는 에리나와 메피스토텔레스에게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개씨발 호모새끼야!'


룬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술에서 느껴지는 감촉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뜨겁고 말랑한 것이 닿으면서 입가를 간지럽히며 서로를 간절하게 찾았다.


겹친 입술에서는 애틋함과 눈물의 짠맛이 났다.


***


룬은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은 에리나인걸까, 아니면 룬인걸까.


'나오자마자 좆같은 상황이네.'


당장에라도 눈앞에 있는 면상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에리나를 보아 참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메피스토텔레스가 에리나가 떠난 것을 직감한 듯, 입술을 떼어냈다.


룬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좋았냐, 십새끼야?"


"···"


“아주 좋았겠지 시발. 누구는 개고생하면서 굴러다니는데, 계약자란 새끼는 여자에 미쳐서 입술 박치기를 하는 중이니···”


“무슨 착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딱히 네 정신은 남자가 아니다. 일리야 룬이 조형해낸 것은···“


“그냥 좀 닥쳐. 방금까지 입술 부빈 새끼한테 듣고싶은 말은 아니니까.”


그 말에 메피스토텔레스가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표정 풀어라. 계약도 풀어버리기 전에.”


그렇게 불씨를 이어받은 계승자과 고대부터 내려온 악마는 다시 한 번 계약에 성공했다.


***


한편 렌스는 룬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과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악마와 룬 사이에 있던 전투의 여파만으로 녹초가 되어 있던 렌스는 룬과 저 소년이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둘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유인즉슨 룬과 난생처음 보는 그 소년이 여러 차례에 걸쳐 입맞춤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몇 번인가 입맞춤을 나누던 두 남녀는 갑작스레 떨어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악수를 하는 순간, 렌스는 악마가 남겨두었던 창이 공중에 떠오르는 걸 보았다.


“아가씨 뒤!”


그리고 곧바로 소리쳐 룬과 소년을 향해 경고했지만, 그 창은 룬이 아닌 렌스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어?’


재빠르게 날아온 창에 렌스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복부를 꿰뚫렸다.


그 모습을 보며 무어라 소리치는 룬을 보며 렌스는 뒤로 쓰러졌다.


뒤로 쓰러지던 렌스는 생각했다.


'죽는 순간까지 쓸모가 없군.'


렌스는 죽는 순간까지 무력함을 절감했다.


그 때, 소년의 옷자락 사이에서 검은 사슬이 튀어나와 렌스를 향해 날아왔다.


검은 사슬은 렌스의 복부에 틀어박힌 창을 칭칭 휘감았다.


“...뭐...붙잡...고?”


“잔말...고...말하...대로...해”


렌스는 자신을 향해 다가온 룬과 소년이 무언가 대화를 나누더니, 등 뒤에서 아가씨가 자신의 양팔을 고정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가씨의 고정이 견고해지자 어느새 자신 앞에 다가온 소년이 검은 사슬을 집어 당기기 시작했다.


사슬을 쥐고 당길 때마다 복부에서 희끄무레한 악마의 형상이 끄집혀 나오기 시작하더니, 형체가 완성되자 소년이 그 영체를 붙잡고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렌스의 가슴에 구멍을 내며 박혔던 창이 렌스의 코어를 향해 스며들기 시작했다.


렌스는 자신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거대한 마력을 느낌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응급처치를 끝낸 룬과 메피스토텔레스는 곧바로 렌스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몸에서 올라오는 격한 반동에 헐떡이는 렌스를 보며 룬은 이대로 그가 죽는 것은 아닌가 싶어 저도 모르게 메피스토텔레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쳐다봐도 응급처치는 끝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룬은 곧바로 렌스의 코어 속을 확인했다.


렌스의 코어 속에서는 악마의 마력이 제 멋대로 날뛰며 코어와 마나의 길을 점령해가고 있었다..


“이제는 네 차례다, 룬."


그 말을 듣는 순간 룬의 머릿속에 불씨에 대한 정보가 스쳐 갔다.


룬은 곧바로 자신의 코어 중심부에 있는 불씨를 코어 전역으로 퍼트렸다.


그러자 코어가 뜨겁게 달궈지며 중심을 기준으로 회전하며 불씨를 증폭시킨다.


그리고 증폭된 불씨가 룬을 통해 렌스에게 전해지며, 그의 코어 속을 점거한 악마의 마력을 태우기 시작했다.


모든 마력을 태워낸 룬은 그 마력을 외부로 끌어내 렌스가 사용하던 것과 비슷하게 창을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메피스토텔레스가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데.”


그는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렌스와 창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깔끔하게 분리할 수 있다니...”


“분리라니, 그럼 이제 렌스는 괜찮은 거야?”


“글쌔, 괜찮다는 상태를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다른 것 같은데.”


그 말에 룬이 메피스토텔레스를 노려보자 얕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애초에 악마와 타락은 그렇게 복잡한 존재가 아니거든, 악마란 욕심 많은 인간의 말로에 불과해. 과분한 것을 바란 인간은 언젠가 악마가 되기 마련이지. 그러니 저 기사놈의 상태 또한 그렇게 특별하다고는 볼 수 없다.”


메피스토텔레스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 네 친구는 악마와 인간의 경계에 있는, 말하자면 반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보통 반 악마라고 하는 게 정상 아니야?”


“아니, 반쪽짜리 악마 같은 건 존재할 수 없어. 악마는 그 자체로 완성된 존재들이거든.”


그 말에 룬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메피스토텔레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설명해 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이유는...”


“너 설마 또 그 카르마 타령은 아니지?”


“···”


룬이 마지못해 납득하자 메피스토텔레스가 룬을 위로하듯 말을 이어붙였다.


“그래도 이건 네게 있어서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야. 솔직히 저 기사는 네 호위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약했잖아.”


그 말에 룬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보다는 너를 걱정하는 게 어때?”


그 말과 동시에 룬은 부상병을 돕고 있는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세이튼을 포함한 킨케이드 기사단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병력의 반이 룬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킨케이드에서 기사단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한 무력 집단이 아니었다.


레기오르스를 보고 자란 갈파고스에서 유력 가문의 자재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기사가 되는 것을 희망했고, 기사단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대다수였다.


즉, 이들은 갈파고스에서 가장 큰 정치세력이다.


그런 그들이 룬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틀림없이 이들은 룬을 킨케이드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삼아, 도약을 준비할 것이다.


적자인 한스가 살아있긴 했지만, 이들에게 있어 전투에서 도망친 한스는 겁쟁이에 불과했다.


자신이 충성할 대상을 고를 수만 있다면 망설임 없이 룬을 고를 사내들이었다.


그리고 룬 또한 오십 명이 넘는 기사전력을 공짜로 얻는 기회를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메피스토텔레스 또한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것인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도 죽고, 두 후계자 중 살아남은 것이 하나이니 가문을 계승하는 것은 한스가 되겠구나.”


룬 또한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그에 대답했다.


“내가 저들을 한스에게 돌려줄 리가 없잖아.”


오십이 넘는 기사전력을 한 번에 구하는 건 한 나라의 왕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쉬운 전력이다.


“어차피 너는 일리야와 위치스에 볼일이 있지 않느냐.”

“그렇다고 해서 저들을 품지 못할 이유는 없어.”


메피스토텔레스는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어려울 것도 없어, 저들로 용병단을 구성하면 그만이지.”


메피스토텔레스는 신박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기사들이 과연 기사 작위를 버리고 용병단이 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았다.


룬은 마치 메피스토텔레스의 의문을 파악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레기오르스가 사라진 갈파고스는 황무지나 다름없어, 머리가 굴러가는 놈들이라면 누굴 따를지 금방 결정하겠지.”


그리고 룬의 예상은 정확했다.


***


살아남은 킨케이드의 기사단은 차례로 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망설이던 기사들 또한 레기오르스의 죽음에 못을 박아주자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기사들에게 입단속을 시킨 룬은 낙영도에서 있던 전투에서 파이리가 악마를 소환했으며, 그 전투 과정에서 레기오르스와 세이튼이 사망했음을 공표했다.


그렇게 룬은 오십 명의 기사를 얻음과 동시에 낙영도를 구한 영웅이 되었다.


그렇게 룬이 외부적인 일을 처리하는 동안에 기사단과 나스챠는 뒷정리를 맡았다.


사망한 인원들이 많았기에 시체를 수습하는 데만 꼬박 하루가 넘게 걸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거지?”


“...미안해 룬.”


그리고 룬은 그 과정에서 세이튼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분명 룬은 세이튼의 마지막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세이튼이 마지막 숨을 뱉은 자리는 전투의 여파에서 벗어난 자리였다.


“다시 한 번 찾아봐, 그럴 리가 없어.”


“이미 여러 번 확인해본 일이야, 미안해...정말 미안해...”


룬은 나스챠의 울음에 잠긴 목소리를 듣자 더 이상 그녀를 추궁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야, 네 탓이 아닌데 왜 네가 사과를 해.”


하지만 그러면서도 룬은 생각을 멈추진 않았다.


‘위치스에서 개입한 건가?’


위치스에서 세이튼의 시체를 훔쳤다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어떻게? 그 안에서는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없었을 텐데.’


룬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스챠를 들여다보았다.


조금 어색한 느낌이 없잖아 있던 룬과 달리, 나스챠는 한스와 세이튼과도 금새 친해졌다.


그 탓일까, 나스챠는 진심으로 죄책감을 느끼듯...


‘어, 잠깐.’


그 순간, 룬의 뇌리에 나스챠에 대한 의혹 하나가 스쳐갔다.


분명 자신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스챠를 위치스의 첩자라고 예상했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곧바로 나스챠를 의심하지 못했다.


그 사실에 룬은 나스챠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이년이...’


위치스는 아케도니아에서 마법과 주술에 대해서는 제일가는 가문이다.


만약 그녀가 위치스의 첩자라면.


자신이 너무 쉽게 납득한 것도, 세이튼의 시체가 사라진 것도 가능하다.


‘정말 빌어먹을 운명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서리가 껴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배에서는 선원들이 바쁘게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갈파고스에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작가의말

다음 편으로 1부가 완결 납니다.


봐주시는 분들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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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5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5.26 19 0 13쪽
25 24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5 26 0 20쪽
» 23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5 39 0 21쪽
23 22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4 45 0 22쪽
22 21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3 19 0 15쪽
21 20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2 21 0 19쪽
20 19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22 22 0 15쪽
19 18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21 33 0 15쪽
18 17화- 탁란공녀 창세기 +1 22.05.20 28 1 14쪽
17 16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9 29 0 18쪽
16 15화- 탁란공녀 창세기 +1 22.05.18 64 1 15쪽
15 14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7 44 0 21쪽
14 13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6 38 0 20쪽
13 12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6 39 0 16쪽
12 11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5 45 0 14쪽
11 10화- 탁란공녀 창세기 22.05.14 40 0 24쪽
10 9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4 46 0 16쪽
9 8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3 56 1 18쪽
8 7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3 54 2 16쪽
7 6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2 59 2 13쪽
6 5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2 62 1 14쪽
5 4화 - 탁란공녀 창세기 22.05.11 74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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