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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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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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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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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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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7쪽

블루오션인 건 확실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며칠 전, 류지호는 신효정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서울에 볼일이 있어 올라갈 예정인데, 혹시 시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신효정은 일요일이라도 상관이 없다면서 언제든 찾아오라고 말했다.

류지호는 그녀가 근무하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하고 혼자가 아닌 사인방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신효정을 만나러가는 김에 친구들과 강남의 예식장을 함께 둘러볼 작정이다.

대한서림 앞에서 만난 사인방은 한껏 들떠있다.

서울 나들이를 하는 줄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옷 입고 왔냐?”


고우찬이 아버지 것으로 보이는 검은색 정장바지에 구두까지 신고 나타났다.

흰색난방을 배바지 안에 넣은 모습에 험악한 인상이 더해지니 영락없는 조폭이다.


“왜 이상해?”

“안 이상한게 이상한거지 인간아!”


황재정이 타박했다.

한동안 고우찬의 옷차림을 놀려먹은 후에 동인천역으로 향했다.

전철요금은 기본구간인 1구간과 외곽지역인 2구간으로 나누어 요금을 받았는데, 1구간 요금인 200원과 2구간의 요금인 300원으로 구분되었다.

처음에는 이런 경험들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반년이 지나 적응이 되어서인지 이제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란 말이 맞는 것 같다.


“서울 어디 가는데?”

“강남.”

“오, 강남!”

“좋아할 것 없어. 결혼식장 현장답사만 할거니까.”

“지난번에 말한 그 사업 때문에?”

“재정이하고 준우도 기왕에 같이 가는 거 꼼꼼하게 살펴봐.”


황재정과 김준우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우찬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나는?”

“너는 길이나 잃어버리지 말고. 잘 따라다녀.”

“이것들이 내가 코찔찔이 국민학생인 줄 아나!”


사인방은 한 시간 반의 전철여행 끝에 강남역에 도착했다.


“얼빠진 얼굴 하지 말고 잘 따라다녀.”


류지호는 강남역 주변 풍경에 넋이 나가 있는 친구들을 이끌고, 목화예식장부터 들렀다.

강남은 80년대부터 이미 대한민국 웨딩의 메카였다.

최고의 예식장이 강남 일대에 흩어져 있었다.

현재 강남의 목화예식장, 청담동의 원앙예식장, 신사역 대로변에 위치한 그랜드예식장 등 수많은 예식장이 성업 중이다.

목화예식장을 둘러본 사인방이 신사동으로 이동했다.

기억 속에서 유명 연예인들이 결혼식장으로 이용할 만큼 명성이 자자했던 그랜드예식장을 두 번째로 둘러봤다.

마지막으로 청담동으로 이동해 원앙예식장을 확인했다.

대규모 예식홀과 화려한 시설을 갖춰 예비부부들이 선호하는 예식장 중 한 곳이다.

인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의 결혼식이 열리다보니 웨딩비디오 촬영도 볼 수 있었다.

VHS 비디오카메라를 어깨에 걸친 남자가 바쁘게 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촬영을 했다.


‘아직은 기록용 수준의 촬영이구나.’


비디오촬영을 하는 기사는 편집은 고려하지 않고 그저 예식을 끊이지 않고 모두 촬영하는 데만 몰두했다.

류지호는 예식장 직원에게 웨딩비디오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김준우는 기념촬영을 진행하는 사진사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했다.

황재정은 예식보다는 결혼식장의 인테리어와 대관비 같은 비용에 관심이 더 많았다.

고우찬은 곧장 피로연장으로 달려가 갈비탕을 얻어먹는데 열중했다.


“주안의 고려예식장만 가도 뭔가 다른 세상에 온 거 같았는데, 서울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강남이니까.”

“우리 큰누나는 호텔에서 하려다가 법으로 하면 안 된다고 해서 그냥 예식장에서 했거든. 근데 여기 예식장보니까 굳이 호텔에서 안 해도 폼 나겠다.”


허례허식이라며 호텔에서의 결혼식을 금지했다.

또한 결혼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전통적인 혼례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대신에 호화판 예식장 결혼식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일부 부유층과 연예인들이 강남의 화려한 예식홀을 찾게 되었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식장이 하나둘 생겨나 경쟁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호텔예식 금지법이 폐지될 거야. 그게 막아진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니까. 그때 되면 유명스타들이 호텔에서 결혼하면서 다시 호화 결혼식이 주목받게 되겠지. 강남을 중심으로 중상위계층에서 다시 호텔예식을 시작하면서 고급 예식이 과열화 되고 오늘 본 것들은 호화판 결혼식 축에도 못 들걸.”

“마치 본 것처럼 말한다?”

“안 봐도 비디오지.”

“뭐가 안 봐도 비디오야?”


황재정이 눈을 가늘게 뜨고 류지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사업하겠다는 놈이 공부를 안 했을까봐. 웨딩잡지고 신문기사고 이쪽 분야 전문가들이 그렇게 전망하더라. 중요한 건 웨딩사업이 유망한 사업아이템이라는 거야.”


류지호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하자 황재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무엇을 믿고 친구가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믿어 그냥. 그놈에 의심병은...”


예로부터 결혼은 인륜지대사라고 했다.

하지만 점차 사치풍조와 과시욕 때문에 결혼이 변질된다.

2000년에 들어서면 호화판 결혼식이 강남을 중심으로 열리게 되고, 지나친 혼수 문제로 양가에 갈등이 빚어져 신혼 초에 벌써 결혼이 파탄 났다는 신문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오기 시작한다.


‘예식문화 뿐만 아니라 혼수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지.’


광복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는 한복 또는 한복을 만들 수 있는 옷감이 혼수의 전부였다.

그런데 60~70년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양복, 한복, 화장품, 핸드백, 밍크코트, 각종 보석류, 현금 등으로 그 품목이 점차 확대됐다.

2010년대 이후엔 가방 하나에 수백만 원씩 하는 명품 위주로 혼수를 꾸리는 커플도 있고, 신혼집을 마련하는 것에 엄청난 출혈을 감수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자신들의 결혼 준비를 대행업체에 맡긴다는 생각은 이 당시에는 생각도 못할 일이지.’


10년 후 즈음 봇물처럼 등장하게 될 웨딩 컨설팅 회사는 결혼 문화를 근본부터 바꿔버리게 된다.

예비부부들은 웨딩 컨설팅 회사의 예식 전문가(웨딩 매니저, 웨딩 플래너, 웨딩 디렉터, 웨딩 컨설턴트)에게 의뢰해 결혼식 준비의 모든 걸 맡기는 경우가 보편화된다.

일부 업체는 ‘주례, 축가, 사회’를 패키지로 만들어 판매한다.

당연히 결혼식 비용도 천정부지로 뛴다.

식장 대관료나 일명 ‘스드메’(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에 들어가는 비용에도 엄청난 거품이 끼게 된다.

한국에서는 매년 30만 명 이상의 예비부부가 결혼식을 올린다.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사치풍조가 사회전반에 나타나면서 90년대에 들어서면 웨딩산업이 폭발적으로 발전한다.

류지호가 생각하기에 웨딩컨설팅이나 스드메 같은 부분은 시지상조일 수 있지만, 웨딩촬영은 충분한 수요가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되었다.

황재정이 빼곡하게 메모가 된 류지호의 수첩을 힐끗거렸다.

한글인지 뭔지 모를 글자와 영어가 복잡하게 뒤섞여 적혀 있었다.

초성으로 메모한 단어들이 많이 보였다.

남들이 알아볼 수 없게 자신만의 암호로 적어놓은 것 같았다.


“또 어디가? 이제 그만 돌아다녀!”


친구들은 세 곳의 예식장을 둘러보며 파김치가 됐다.

친구들이 투정을 부리든 말든.

예식장과 관련한 용무를 마친 류지호는 서울지방법원으로 이동했다.

법률사무소가 밀집해 있는 건물 앞 공중전화에서 신효정에게 전화를 걸어 도착을 알렸다.


또각! 또각!


흰색 블라우스에 세련된 투피스 정장을 입은 신효정이 건물을 빠져나왔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당당하게 걸어오는 그녀를 보고, 사인방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혹시 우리한테 오는 건가?”

“설마....?”


사인방 코앞까지 다가 선 신효정이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입을 열었다.


“어서 와요. 지호학생.”


사인방의 고개가 류지호를 향해 돌아갔다.


“안녕하세요.”

“친구들하고 함께 왔나 보군요?”

“인사드려. 신효정 변호사님이셔.”

“아, 안녕하세요.”


표정관리가 안 되는 사인방이 신효정에게 인사를 했다.


“좀 이르긴 하지만, 밥 먹으러 갈까요?”

“네!”


고우찬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인간아, 갈비탕을 네 그릇이나 처먹고 밥이 들어갈 데나 있냐?”

“꺼진 지가 언젠데, 난 아직도 배고파.”


신효정과 사인방은 근처 고깃집에 자리를 잡았다.


지글지글!


불판위에서 삼겹살이 익어가고, 고우찬이 익지도 않은 고기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황재정이 그런 고우찬의 손을 쳐내고 사나운 눈초리로 째려봤다.

대화 없이 멀뚱히 익어가는 고기를 지켜보고 있을 때, 신효정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방학이라고 놀러만 다는 건 아니겠죠?”

“잠잘 시간도 부족할 정도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황재정이 도발적으로 물었다.


“변호사님은 어디 대학 나왔어요?”

“하버드.”

“......!”


사인방이 놀란 표정으로 신효정을 바라봤다.

류지호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

유학파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하버드일 거라곤 생각 못했다.

신효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젓가락으로 삼겹살을 하나하나 뒤집었다.

황재정이 특유의 냉소적인 어투로 다시 물었다.


“공부 엄청 잘하셨겠네요?”

“엄청 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죠.”

“하버드 나왔으면 미국에서 돈 벌지 왜 한국에 와서 해요?”

“사회생활은 다 똑같아요. 인맥이 없으면 높이 올라가기가 쉽지 않아요. 미국은 머리만 똑똑한 아시아 여자애가 버티기에 버거운 나라랍니다. 한없이 자유로울 것 같지만 또 보수적이에요. 큰물에서 노는 사람들은 출신도 많이 따지고.”


신효정의 어조가 왠지 가라앉은 것 같다.

류지호 역시 충분히 이해할 만한 답변이라서 저도 모르게 말을 보탰다.


“하버드 유학생들은 한국에서 따로 동문회를 만들어 활동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한국에서 최고의 대학을 나온 수재들이기 때문에 각자 고등학교나 대학동문들이 빵빵하기도 해서 굳이 하버드 인맥을 관리할 필요가 없다나 뭐라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신효정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어요?”

“저희가 뺑뺑이긴 하지만 인천의 명문고 학생입니다. 나름 잘나가는 졸업생 선배들이 많습니다.”


사실과 달랐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뉴욕대 영화과 출신 선배 감독의 말이었다.

미국 최고, 나아가 세계 최고의 명문 대학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아이비리그(Ivy League).

그곳 대학 출신 한국 유학생들은 80년대까지만 해도 동문회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않았단다.

그들은 이미 한국에서 명문고등학교와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학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끼리는 하나 걸러 동창이고 동문이라나.

굳이 미국 학교 동문임을 내세울 이유나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없어요. 단지 이들이 모임의 ‘티’를 내지 않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죠. 그런데 미국은 좀 달라요. 내가 인턴으로 근무한 미국의 법률사무소에서는 전체 300명의 법률가 중 80명이 하버드 출신이었어요.”

“지들끼리 다 해먹네.”


황재정이 삼겹살을 집어 먹으며 중얼거렸다.

신효정은 피식 웃고는 류지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명문 대학을 나온 동문들끼리 결속하는 현상은 한국에만 있는 일이 아니에요. 하버드 동문 모임은 미국에서도 상류사회에 들어갈수록 더욱 굳건해요.”


류지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고우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우찬이 쌈 채소에 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을 올려 한입에 꿀꺽 삼켰다.

얼굴 전체로 미소가 번진 고우찬이 허겁지겁 삼겹살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복스럽게 먹는 고우찬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탁!


신효정이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류지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은근히 미국 상류사회는 출신 대학 가지고 인간적으로 모욕 주는 일도 다반사에요. 상류사회 네트워크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한 번이라도 가보게 된다면 자신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죠. 구역질 날 정도로 물어보는 출신성분, 출신학교에 대한 질문, 자화자찬, 일부러 내뱉는 고급단어들, 짜증날 정도의 조언. 충고랍시고 뭔가 해주는 척 하는 교만함.”


신효정이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소주 한 병만 주세요.”


신효정이 종업원이 가져온 소주를 자작을 하려는데 류지호가 소주병을 낚아챘다.


“자작하면 앞에 있는 사람 삼대가 재수 없답니다.”


고우찬이 소주잔을 들이밀려다가 눈치를 보곤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하버드 출신이 한국에서도 꽤 규모가 큰 법률사무소에서 일하시는 것 보면 누구한테 쉽게 쩔쩔맬 것 같지 않은데.... 파커 가족에겐 지나차게 저 자세를 보이시던데......”

“날 떠보는 거예요?”

“G&P IB가 무슨 골드만대거스나 레만 브라더스 급이라도 됩니까? 아니면 파커라는 성을 쓰는 가문이 미국에서 대단한 겁니까?”


역시 재밌는 학생이다.

헌책방에서 미국 잡지를 사다가 영어공부를 한다더니, 겉멋은 아닌 모양이다.


“패밀리 오피스라고 알아요?”

“모릅니다.”

“인베스트먼트뱅크(투자은행)는요?”

“기본적인 개념은 압니다.”

“G&P는 미국의 수많은 투자은행 가운데 최소 30위권에는 들어갑니다.”


황재정이 ‘겨우 30위?‘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참고로 월스트리트에서 활동하는 투자회사와 헤지펀드는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요. 최소 1만 개가 운영되고 있죠. 두 가문의 재산만으로 운영되는 투자회사임에도 30위 안에 든다는 말은.... 상상이 안 되죠, 사실.”

“.....!”

“지호 학생은 혹시 포브스라고 들어봤어요?‘

“미국의 경제전문잡지 아닙니까? 매년 부자순위, 기업순위 발표하는 잡지....”

“G&P는 그레이엄과 파커 가문의 이니셜에서 따온 겁니다. 두 가문은 매년 포브스가 발표하는 The Forbes 400, List of billionaires, America's Richest Families List에서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곳이죠. 윌리엄 파커 어르신이 가문의 큰어른이시고, 지호학생이 구해 준 소녀의 아버지, 제임스 파커가 막내 아드님이 되시죠. 참고로 파커 가문의 가업은 농업이고, 공식적으로 세계 5~6위를 차지하는 글로벌 농업기업을 소유하고 있죠.”


류지호는 음모론에 등장하는 유대계 곡물 카르텔의 일원이냐는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할 뿐.

파커와 그레이엄이 합작해서 설립한 투자은행의 CEO가 레오나의 아빠 즉 제임스 파커란 것과 파커 가문은 미국 중부의 유력 가문이면서 농업분야를 중심으로 수많은 방계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대표적인 상속가문이라는 것.

비록 성세가 예전보다는 못하다는 평가가 있지만, 한때는 미국 최고의 가문이라는 호칭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정도의 명성이 자자한 명문가라는 것.

여전히 미국의 경제, 정치, 사회 각 분야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

신효정의 설명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황재정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대화하는 두 사람을 지켜봤다.

영어 발음에서 상당히 혀를 굴리는 변호사 아줌마를 친구가 말빨로 눌러주길 기대하면서.


“give and take라는 말이 있어요. 무슨 말일까요?”


술기운이 돌아서인지 볼이 달아오른 신효정이 물었다.


“줄 건 주고받을 건 받자는 뜻이죠.”


류지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주고받는 것은 나중에 생각하자는 뜻일 수도 있어요.”

“....음 기브가 없으면 테이크도 없고, 반대로 테이크가 없으면 기브도 없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으면 된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뭐 그런 말씀입니까?”


통상 계약이라는 이름이 붙을 때에는 give and take를 기반으로 한다.

계약은 구속력이 있기 때문에 받을 것과 줄 것을 명확하게 규정한다.

사회는 무수한 거래 관계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모든 거래가 계약이라는 형태를 취하지는 않는다.


“지호학생이 친구에게 만 원짜리 선물을 받았어요. 지호학생은 그 다음에 얼마짜리를 선물할 거죠? 친구로부터 100만원을 빌렸어요. 그 다음 얼마를 돌려줄 건가요?”

“똑같거나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돌려주겠죠.”

“둘 사이에 관계가 깨졌어요. 인연이 다했어요.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잊힌 거예요.”

“......”

“어때요? 일단 주고 나중에 받는 것은 손해에요. 일단 받고 나중에 주는 것은 이익이에요. 처음에 받은 이는 도중에 둘 사이의 거래가 중단되더라도 상관이 없어요. 반면 처음에 준 이는 상대로부터 준만큼 받아내지 못한 채 거래가 중단되면 손실을 입는 거예요. 때문에 일단 받고 보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되지요.”

“도둑놈 심보....”


황재정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들은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에요. 지호학생은 그 사람들의 손녀이자 딸을 구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줘요. 그러면 지호학생은 그걸 토대로 성장해요. 성장한 지호학생은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겠죠. 그러면 또 다른 거래가 발생해요. 거래라고 해도 좋고, 인맥이라고 해도 좋아요. 그렇게 사회적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가르치는 말투가 아니다.

그런데 괜히 거슬렸다.

류지호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변호사님에게 제임스씨와의 인맥이 무척 중요하겠지만, 나와 가족은 크게 상관없습니다. 언제 또 다시 만날지 알 수 없는 인연, 부질없는 희망고문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거래니 뭐니 말치장 해봐야 그 관계가 오래가지도 않을 겁니다. 인맥 물론 중요합니다. 다만 목적을 가지고 억지로 끈을 엮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더더욱 그 꼬마 아가씨의 부모님이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상류층이라고 하니 차라리 홀가분하기까지 합니다. 그 분들이 저나 신변호사님의 얕은 수나 기대감을 읽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까요.”


신효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잘나가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고 안달을 한다.

그것이 비즈니스건 또는 인맥이건.

또 그런 이들의 눈에 띄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 학생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한다.

세상 물정을 아직 몰라 순수한 것인지.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면 또 세상물정 모르는 애송이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는 학생이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뭔가요?”

“혹시 제임스씨가 한국에도 투자를 하고 있습니까?”

“그런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아요.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류지호는 신효정의 마지막 말을 들릴 듯 말 듯 읊조렸다.


“궁금한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아버지는 완고한 분입니다. 파커 가족의 호의를 마치 복권이나 일확천금으로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호의를 받아들일까 합니다.”

“다른 방식?”

“투자를 받아보고 싶습니다.”

“이미 윌리엄 어르신이 지호학생의 미래에 투자하겠다고 하셨어요. 아마 국내 대학은 물론 해외유학 이후 미국에서의 취업까지 후원을 해주실 거예요.”

“제가 친구들과 사업을 하나 구상하고 있습니다.”


신효정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사업이라니.


“지호학생이 사업을 구상을 하고 있고, 그를 위해 투자를 받겠다고요?”


지호는 확신 어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사업은 아닙니다. 하지만 블루오션인 건 확신합니다.”

“푸른 바다?”

“그건 회사이름을 그렇게 지을까 생각해 본 거고... 암튼 오늘도 사업 구상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던 겁니다.”


류지호는 재빨리 말을 둘러댔다.

앞으로 30년 후에는 블루오션이라는 단어가 경제전문가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사용할 정도로 널리 쓰인다.

아직은 아니다.

심지어 개념조차 발표되지 않은 용어다.


“하겠다는 사업이 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제가 사업계획서를 준비해서 제임스씨에게 직접 브리핑 하고 싶습니다.”

“흐흠.“

“사업에 투자를 받겠다고 하면 그저 봐주는 시늉만 할 뿐. 어린 녀석이 기특하다 애썼다 정도로 그칠 겁니다. 하지만 신변호사님이 조금만 저를 도와주신다면 파커 가족의 자세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내게도 리스크가 있어요.”

“압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고등학생과 허튼 짓을 벌인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고, 사업계획이라는 것이 유치하다면 신변호사님의 안목이 의심을 받을 테고, 능력까지 폄하되겠죠.”


류지호는 열변을 토하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차분히 말을 하고 있었다.


“신변호사님이 우리 가족의 고문변호사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맞습니까?”

“파커 가족이 출국하기 전에 부모님과 계약을 하게 될 거예요.”

“고문변호사 부분은 아버지도 받아들이실 겁니다. 저희 같은 서민들이 살면서 아쉬울 수 있는 것이 친인척이나 지인 중에 의사, 경찰, 변호사가 있는 겁니다. 변호사와 연이 닿은 걸 마다하지 않으실 겁니다. 또한 만약 제가 사업이든 유학이든 어떤 일에 대한 법률적인 부분에 대해 신변호사님과 상의를 하게 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호학생이 따로 법률가를 고용하지 않는다면.”

“소송대리를 필요로 한다거나 법률행위를 하게 될 경우에 별도로 선임계약 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포괄적인 법률서비스를 하게 될 거예요.”

“일단 이렇게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준비가 되면 먼저 신변호사님께 상의를 드리겠습니다. 만약 신변호사님 선에서 커트를 당하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좋아요.”


십대라고 해서 사업을 시작하지 말라는 법 없다.

미국의 유명한 기업가들은 십대부터 작은 비즈니스를 시작한 이력들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입시지옥에 허우적거리는 한국의 청소년이 떠올릴만한 사업이 있을 턱이 없다.

다만 류지호의 확신에 찬 모습에서 묘한 기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황재정이 류지호의 옆구리를 툭하고 쳤다.


“왜?”

“우리가 처음 알게 된 때가 언제야?”

“그건 왜?”

“말해봐!”

“문예부 신입생 환영회 날 한진각에서.”

“우리 네 명이 처음 놀러간 데는?”

“놀러 간 데가 한 두 군데냐?”

“입학하자마자.”

“월미도...?”


별안간 황재정이 류지호의 볼을 꼬집었다.


“아파!”


류지호가 황재정을 밀쳐내며 소리쳤다.


“너, 이 새끼.... 진짜 내 친구 류지호 맞지?”

“미친놈! 아니면 어쩔 건데? 무를 거냐?”

“하긴 그것도 그렇다.”


황재정은 류지호에 대해 생각해봐야 골치만 아팠다.

두 달 사이에 완전 딴 사람으로 변했다.

좋은 쪽으로 변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딴 사람으로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청소년기를 건너뛰고 갑자기 경험 많은 어른이 된 것 같다.


‘귀신이라도 씐 거야 뭐야?’


그렇다면 뭔가 엉뚱한 사람처럼 보이거나 무당 같아보여야 하는데, 평상시에는 그렇게 침착하고 멀쩡할 수가 없다.

솔직히 황재정은 친구가 하버드 대학 출신의 변호사와 맞짱(?) 뜨는 모습이 멋있었다.

배다리 헌책방 골목을 뻔질나게 들락거린다고 하더니 만물박사가 된 모양이다.


‘혼자만 잘난 척 하게 냅 둘 순 없지.’


황재정은 묘한 승부욕이 동했다.

친구 류지호의 언행과 행동이 친구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질투심이 없는 순수한 경쟁심은 성장의 밑거름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황재정으로서는 내심 불안한 것도 없지 않았다.

때때로 친구가 홀로 딴 세상을 사는 것 같을 때가 있어 보이니까.

마치 무당이 접신한 것처럼.


“그만 좀 처먹어 돼지야!”

“신경 꺼.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대!”


비록 만사태평인 두 친구는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고 자신만 너무 심각한 것일지라도.


❉ ❉ ❉


신효정은 류지호와 친구들에게 푸짐한 저녁 대접했다.

류지호 일행은 너무 늦기 전에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류지호가 오늘 하루 메모한 수첩을 보고 있는데, 황재정이 말을 걸었다.


“기회는 만나기도 힘들고, 그걸 잡기는 더 힘들어. 나중에 기회를 차버렸다고 억울해하거나 후회해봐야 소용없다.”

“살면서 기회가 세 번 온다는데 한 번 쯤 놓칠 수도 있지.”

“목숨 걸고 구해준 거 잖아. 그에 대한 보상 아니야? 배가 불렀어. 자식이.....!“


황재정은 언제나 현실을 본다.

이성적인 말만하고.

도움이 될 때가 많았었다.


“친구가 네가 어려울 때 따뜻한 밥 한 끼와 용기를 불어넣어주었어. 나중에 네 형편이 나아졌을 때 너는 친구에게 무엇을 해줄 거냐?”

“뭐든 지 다.”


류지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구라는 새끼가......”


매사 비관적인 황재정의 어두운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원하는 대답이 나왔으니까.

그것도 한 치의 망설임이나 고민 없이.


“긍정적으로 살자. 재정아~ 만날 틱틱 거리지만 말고... 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상대방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은 경우 이에 대해 빚으로 인식하게 되고, 더 많은 비용을 치러서라도 이를 갚아버림으로써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런 마음의 채무에서 예외가 되는 것은 가족, 연인과 친구가 아닐까.

그래서 차라리 돈을 그냥 주면 주었지 가족, 친구와 돈 거래 하지 말라고 한다.

류지호는 잡념을 털어내고 다시 수첩을 들여다봤다.


“진짜 그 미국인한테 웨딩촬영 사업 투자 받으려고?”

“응.”

“될까?”

“하기도 전에 안 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도 안 되겠다.”

“그러다 망하면?”

“안 망해.“


뭘 알아야 따지기라도 하지.

너무 확신에 차서 대답을 해버리니, 황재정으로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류지호는 한 번 삶을 실패하고 나서 스스로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자신은 뭔가 대단한 일을 실현할 인물 혹은 그릇이 아니다.

고등학교 생활을 만족스럽게 마치고 나면 힘든 현실과 마주할 것이다.

조금 더 치열하게 삶과 싸우다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할 것이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삶보단 조금은 괜찮은 가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류지호의 목표다.

조금만 더 윤택하게, 조금만 더 여유롭게.


‘남부럽지 않을 정도... 그 이상은 욕심이고, 욕심은 대부분 안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니까.’


류지호가 돈을 왕창 벌자고 선언 한 바 있다.

뜻대로 된다면 세상은 모두 부자들로 득실 될 것이다.

부의 규모는 스스로 결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내려주는 걸지도 모른다.


작가의말

행복한 휴일 보내십시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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