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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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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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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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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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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Carpe diem...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오늘 1학년 기말고사 성적이 발표되었다.

류지호는 지난 중간고사 성적에서 큰 변동이 없었다.

그렇지만 전교 50등 안쪽이다.

반 등수로는 3등이다.

게다가 3학년 선배들이 학력고사에서 꽤 괜찮은 성적이 기대되어 K대 혹은 Y대를 노려볼만 하다고 했다.

비록 서울대를 노려볼 수 없다고 해도, K·Y대는 확실한 학교의 성과다.

그리고 2학년 오철규와 1학년 김석민은 전교 톱을 노리는 재원들이다.

거기에 꼴통인줄 알았던 류지호는 무섭게 성적이 올랐다.

그러니 공부 잘 하는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저렇듯 친절하게 나올 때 반드시 따라오는 게 있다.

진학상담.

부모님을 불러 촌지 요구를 할 것은, 불 보듯 명확했다.


“저 양반이 교회 가서 회개하고 개과천선했나?”

“미친개가 아니고 싸이코로 별명 바꿔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볼 때는 지호한테 쫄았어. 혹시 지호가 경찰에 신고할까봐 쫀 거야.”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막상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교감에게 빠따를 맞았다면 겨울방학을 맞이하는 기분은 최악으로 치달았을 터.

교감에게 언젠가 크게 한방 먹여줄 생각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쨌든 류지호는 졸업하기 전에 이런 짓을 한 번은 벌여보고 싶었다.

방송부만 할 수 있는 반항이니까.

그것은 류지호의 생각이고.

박상은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방송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과 협동이야. 방송부는 혼자 잘났다고 굴러가지 않아. 너에게는 한순간의 유희일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야. 앞으로 우리 가운데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건 우리 모두의 잘못과 같다고 생각해.”


류지호는 분명 이기적인 행동을 했다.

친구들에게 사과를 해야 마땅했다.


“미안하다. 내가 경솔했어.”

“나 혼자 편하자고 빠지면 다른 동기가 그 짐까지 떠안는다. 다음부터는 나도 껴줘. 혼자만 재미 보지 말고.”

“뭐?”


순간, 친구들은 박상은의 말을 잘못 들었나싶어 되물었다.


“앞으로는 나도 함께 하자고.”


김석민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앞으로는 이런 짓을 또 하자는 거야?”

“사고를 쳐도 우리가 똘똘 뭉쳐서 쳐야지. 우리 구호가 뭐냐? 우리는 하나다 아냐?”

“아놔... 이 돌아이들...”


이철웅이 어이없다는 투로 한탄했다.


“지호가 이상하게 변하더니 상은이까지 전염됐어. 전염병이야 전염병. 지호 너는 앞으로 내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마. 난 옮기 싫어.”


김석민이 치를 떨었다.


띠리리링.


수업종이 울렸다.

박상은이 손등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앞으로 내밀었다.

김석민이 슬그머니 빠지려고 하자, 류지호가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아씨, 이런 유치한 건 좀 생략해. 우리가 운동부도 아니고!”


김석민이 짜증을 부리면서도 박상은의 손등에 손을 포갰다.

박상은의 손등에 방송부들의 손이 포개졌다.


“우리는!”

“하나다!”


류지호는 손발이 불에 구워지는 오징어처럼 오그라들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힘차게 ‘하나다’를 외쳤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은 영국 시인 '로버트 헤릭'의 '처녀들에게, 시간을 소중히 하기를' 이란 시를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왜 시인은 할 수 있을 때 장미 봉오리를 모으라고 했을까? 그것은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을 것이기 때문이야.]


‘할 수 있을 때 장미 봉오리를 모으라'는 말은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한 구절로부터 유래한 말 ’카르페 디엠 (carpe diem)‘ 즉 ’현재를 즐겨라‘ ’너만의 인생을 살아라‘ 라는 의미다.

류지호는 ‘우리는 하나’라는 방송부 친구들의 구호에 두 단어를 보탰다.


“카르페 디엠!”


❉ ❉ ❉


꽝!


유도장에서 격렬한 운동 소리가 흘러나왔다.

류지호는 예전처럼 매일 유도를 하진 못했지만, 틈틈이 유도장에 나왔다.

운동을 마친 류지호는 수돗가에서 수건에 찬물을 적셔 땀을 닦아냈다.

찬물이 몸에 닿을 때마다 피부가 깨질 듯 아려왔다.

대신 느슨해졌던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연말 잘 보내고, 보충수업 때 보자.”

“메리 크리스마스!”


가장 먼저 류지호가 유도실을 빠져나왔다.

신포고 운동장은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이브이니 당연했다.


“상쾌하네.”


폐로 들어오는 공기가 무척 맑다.

황량한 운동장을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눈송이가 떨어졌다.

올해는 화이트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았다.

본래도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음 주면 1987년도 마지막이네.”


떨어지는 눈송이를 맞으며 류지호는 과거로 돌아온 후 8개월을 되돌아봤다.

마치 8년을 압축한 것 같았다.

하루하루, 일분일초를 아껴가며 바쁘게 지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다.

바쁜 가운데도 여유가 있었고, 힘들었지만 즐거웠다.


[노력은 항상 이익을 가져다준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공통점은 게으름에 있다. 게으름은 인간을 패배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성공하려거든 먼저 게으름을 극복해야 한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 알베르 카뮈가 한 말이다.

류지호는 한 번 살았던 시간을 똑 같이 살았다.

그러나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지는 않았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하루하루조차 축복이다.]


성현들의 말이 실감이 나는 지난 몇 개월이었다.

노력은 항상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카뮈의 말을 곱씹으며 류지호는 힘차가 발걸음을 내딛었다.


북적북적.

징글벨 징글벨 징글 올더웨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해 동인천 일대가 한껏 들떠있다.

트랙수트 즉 일명 추리닝 바지에 블랙 파카 점프, 후드 집업을 받쳐 입은 류지호가 동인천의 대한서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해보니 사인방과의 약속시간이 한참이 남아 있다.

시간도 보내고 신간 서적도 확인할 겸 대한서림 안으로 들어갔다.

대한서림 내부도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류지호가 전문서적 코너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예술서적 섹션에 모자가 달린 붉은색 더플코트를 입은 여학생이 책을 고르고 있다.

더플코트는 단추 대신에 달려있는 토글(toggle)이 떡볶이를 닮았다고 해서 ‘떡볶이 코트’라고 불렀다.

더플코트의 여학생이 고개를 돌려 류지호를 발견했다.


“다연아 오랜만이다.”

“응. 너도.”


오랜만에 봐도 공다연은 예뻤다.

정갈한 머리칼이 작은 움직임에도 찰랑거렸고, 야리야리한 몸매가 보호본능을 불러일으켰다.

긴 속눈썹과 오뚝한 콧날, 붉고 적당히 도톰한 입술까지.

친근함과 당돌함에 말괄량이 기질까지 갖춘 남학생들의 로망 그 자체였다.

공다연이 스타니 슬랍스키의 <배우수업>을 건성으로 훑으며 입을 뗐다.


“책 사러 왔어?”

“응.”


류지호가 굉장히 두껍고, 크기도 다른 책보다 몇 배는 큰 신간을 한 권 빼들었다.


“무슨 책이야?”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


류지호는 이미 신효정을 통해 영문판을 구해서 소장하고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 빈공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빡빡하게 박힌 글자들, 600여 컷의 명작영화 스틸사진까지, 이론과 실기를 아우르는 영화필독서 가운데 하나.

한국 영화학도들의 전공서가 될 책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출판 됐다.

책값은 매우 비쌌다.

그럼에도 진지하게 완독한다면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은 책이다.

프로들도 매너리즘에 빠질 때 읽어보면,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그거 영화 백과사전이야?”


공다연이 백과사전에 맞먹는 두께에 질린다는 듯 표정으로 물었다.

류지호는 대답 대신 책 안의 내용을 펼쳐 보여줬다.

여러 명작 영화들의 스틸 컷들이 페이지마다 예시로 박혀있다.


“입문자들이 영화라는 매체를 이해하는데 매우 좋은 책이야.”


공다연이 류지호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네가 연기를 하게 되더라도 한권 쯤 소장해서 평생을 두고 볼만해. 영화 일을 하는 동안은... 언젠가 불현듯 내가 하고 있는 영화가 예술인지 텍스트를 단순히 영상으로 옮기는 단순 노가다인지 회의가 들 때가 있는데, 이 책을 꺼내 읽다보면 새삼 영화가 예술이라는 내 믿음이 맞다는 걸 알게 해주거든. 많은 좋은 영화서적 중에 이 책은 쉬우면서도 어려워.”

“쉬우면서 어렵다고? 그게 말이야, 방구야?”

“이 책은 세계영화사 속에서 빛나는 온갖 작품을 가져다가 예를 들고 설명하거든, 아는 만큼 보인다고 보다보면 자괴감이 들곤 하지.”


류지호의 눈동자에 씁쓸함과 회한이 담겼다.

공다연이 손을 들어 류지호의 눈앞에서 흔들어대며 물었다.


“넌 도대체 정체가 뭐야?”

“신포고등학교 교육방송국 SPBS 17기 류지호.”

“....치.”


공다연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토라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리 ‘척‘ 해봐야 류지호에게 안 통하는 걸 알면서도.

예쁜 짓을 습관적으로 해보는 공다연이다.

류지호가 책장 한 칸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영화서적 코너를 살폈다.

영화와 관련된 변변한 책들이 보이지 않았다.

영화진흥공사에서 펴낸 몇 권의 책과 비디오촬영기법 같은 실기 책들이 보였다.


‘다연이에게 ’배우수첩’이나 우타 하겐의 ’산 연기‘를 사줄까....?’


‘배우수첩’이나 ‘산 연기’는 연기를 전공하는 학생이 한번쯤 읽어보게 되는 필독서다.

미국에서는 두 책이 대학 연기전공 교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당시에는 오로지 스타니 슬랍스키의 ‘메소드 연기‘가 대세였고, 브레히트 연기론의 경우 브레히트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책의 출판 자체가 불가능했다.


“왜, 찾는 책이 없어?”

“네가 볼 연기론 책이 있나 살펴봤어. 출판된 책이 없네.”

“연극영화과 언니들이 메소드 연기 책 읽어보라던데?”

“좋지. 그거 읽어봐. 영화진흥공사에서도 연기론 책을 출판했던 것 같은데.... 교보나 종로 같은 서울 대형서점으로 가야 있나보다.”

“제목이 뭔데?”

“제목은 잘 생각 안 나고... 표지도 구리고 좀 그래.”

“책에서 방귀 냄새나?”

“아. 후지다는 말이야. 번역을 좀 성의 없이 한 책들이 많아. 영화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불어나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발번역을 해 놔서.”


공다연이 짐짓 오버하듯이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너 진짜 아는 거 많구나!”


자연히 책을 고르던 손님들의 시선이 둘에게 모여졌다.

언제 호들갑을 떨었냐는 듯 공다연이 원래 표정으로 돌아갔다.

17살 밖에 안 된 녀석이 참 피곤하게 산다.

류지호는 벌써부터 연예인 흉내 내는 공다연이 안쓰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암튼 ‘영화의 이해‘는 연기를 하게 되더라도 볼만해.”


류지호는 영화의 이해를 한 권 챙겨 계산대로 향했다.

직원에게 한 권 더 필요하다가 말하자, 창고에서 새 책을 가져왔다.


“이거 진짜 나 사주는 거야?”

“크리스마스 선물.”


연기를 하게 될 후배에게 선물하는 마음이다.

피곤하고 귀찮은 녀석이지만, 기꺼이 책값 계산을 마쳤다.

창밖에는 어느새 눈이 그쳤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했던 연인들이 무척 아쉬워하겠구만.’


류지호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공다연이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왔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뭐해?”

“친구들하고 연하대 후문 가서 놀 것 같아.”

“아, 그렇구나.”

“소연이 기다려?”

“응.”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공다연이 참지 못하고 침묵을 깼다.


“사실 나.... 너 좋아해.“

“......!”

“내가 우리 학교에 너랑 사귄다고 소문냈어. 근데 아무도 안 믿더라.”

“후우.”

“응? 왜 한숨을 쉬어?”


공다연이 샐쭉이 쳐다보았다.


“네가 지금 많이 심심한가 해서. 훅 들어오니까 어느 타이밍에서 웃어야 할지 잠시 헛갈렸어.”


류지호는 검지로 볼을 긁적거렸다.

난처하고 황당하고 심사가 복잡할 때, 저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다.


“너 지금 쑥스러워하는 거야?“

“황당해서 그래.”

“그게 그거지.”

“전혀 다른 말일걸.”

“그냥, 인정 좀 하지?”

“다른 말이야.“


공다연은 류지호를 빤히 바라봤다.


“너는 어때?”

“뭐가?”

“나 좋아해?”

“아니.”


류지호의 대답에 공다연의 눈빛이 예상치 못한 펀치를 맞은 것처럼 흔들렸다.


“이씨.”


공다연의 자존심에 금이 가벼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류지호는 빨리 공다연을 떨어뜨려 놓고 싶을 뿐.


“눈알이 제대로 달려있는 사내놈이 맞아?“

“솔직히 말할게. 난 너한테 아무런 감정도 못 느껴.”

“와... 재수 없어. 네 스타일 아니라는 거잖아.”

“스타일하고는 상관......”

“내가 어떤 성격인지 알지?”


류지호는 당연히 알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냥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래라 그러니까...”

“오늘부터 사귀는 사이. 오케이?”

“억지야.”

“이미 소문 다 났어.”

“아무도 안 믿는다며? 내 친구들도 그래.”

“진지해 주면 안 돼?”

“나 지금 무척 진지한데?”


공다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독한 마이페이스.


“너 사랑 안 해봤지?

“그럴 리가. 해 봤어.”

“웃기시네. 언제?”

“전생에.”


푸하하하.


공다연이 눈물까지 찔끔거리면서 웃었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감정과 분위기 변화가 오늘 날씨보다 더 변덕스러웠다.


“우리 나이 또래의 팔팔하게 끓는 청춘은 이성을 맘껏 좋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 물론 시도 때도 없이 바뀌기는 하지만 난 딱히 순정적인 러브스토리를 바라지 않아. 여러 사람 만나보고 딱 너다 싶어도 사귀다보면 아니기도 하는데.. 첫 눈에 반하고,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고 그런 게 있다고 믿지도 않고. 그러니까 나랑 한번 사귀어 봐. 또 모르잖아. 우리가 만나다 보면 진짜 운명처럼 될지.”


‘다연이가 내게 관심이 있다? 전혀 몰랐다면 거짓말이지. 왜 자신만 보면 귀찮게 하고, 엥엥거렸는지. 호감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툰 사람들이 흔히 하는 행동이지.’


다 떠나서.

설마 이렇게 대놓고 말할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호감 정도는 있겠지 싶었지만.

뮤직비디오 촬영부터 방송제까지 함께한 시간이 있으니까.

분명 공다연은 매력적인 여자애다.

고등학생 눈높이에서 그렇다.

좀 피곤한 스타일이긴 해도 외모가 예쁘면 어느 정도 감수 있을지도 모른다.

류지호 입장에서 전혀 ‘아니올시다‘다.

신소연이 수줍게 고백했을 때.

피가 뜨거운 십대였다면 신소연과 교제하며 사랑하는 감정을 키웠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류지호는 그녀들과의 관계를 객관화 시켰다.

원조교제를 떠올리거나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신소연이나 공다연은 철딱서니 없는 딸 아이 같았다.

아니면 ‘담배가게 아가씨‘ 뮤직비디오에서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삼촌의 마음처럼 동네 예쁘장하게 생긴 여고생을 보는 느낌.

딱 그 정도다.


“...피곤해.”


그렇게 공다연과 사랑타령으로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사인방 친구들이 하나둘 대한서림에 나타났다.

그때까지 공다연은 류지호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치근거리는 남자를 처리해준 인연으로 사귀게 된 고우찬과 김민아.

김준우는 상고에 다니는 여학생을 데리고 와 친구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녀는 공부도 잘했고, 얼굴도 예뻤고, 성격도 좋았다.

류지호가 보기에 둘은 오래갈 것 같지 않았다.

지금 이 시기에 김준우가 상고에 다니는 여학생을 사귀었던 걸 기억해 냈지만, 저 여학생인지 알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이브조차 황재정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진 못하는 모양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녀석은 뚱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오랜만이다 다들!”


10여분이 지나자 신소연과 진명여고 방송부 여학생들이 도착했다.

류지호는 반갑게 약간은 어색하게, 진명여고 방송부 여학생들과 인사했다.

류지호의 곁에 있는 공다연을 발견한 신소연의 표정이 어두웠다.


‘나쁜 놈!’


그에게 딱지를 맞고, 대범한 척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여자 친구로 막상 친한 친구가 자리하자, 심사가 매우 복잡했다.

왠지 억울해진 신소연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너보다 더 멋지고 친절한 남자 사귀고 만다. 나쁜 놈.’


류지호가 묘한 기류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비록 오해였고 나중에 밝혀질 해프닝이겠지만, 어색하다고 회피해 버리면 영영 관계가 불편해진다.

친구들 사이에서 그의 눈길을 피하던 신소연에게 류지호가 먼저 입을 뗏다.


“소연아, 메리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절 보내.”

“지호 너도. 메리크리스마스.....”


공다연이 류지호에게 떨어져서 신명여고 방송부와 함께 섰다.


“야! 날라리. 연하대 후문 가서 술 마시지 말고 건전하게 놀아.”

“나중에 방송연합회에서 보자.”

“메리크리스마스~”


진명여고 방송부들이 인현동 쪽으로 사라졌다.


“날라리들. 원래 뭐하려고 했냐?”


류지호가 친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응?”

“원래 계획이 뭐야?”

“저녁 먹고, 커피 마시고, 또... 연하대 후문으로 넘어가자.”

“내가 보기에 처음 보는 준우 여자친구나 민아나 다 착하고 순진해 보이는데, 날라리 노는 곳 가지 말고 일단 영화 보자.”

“난 찬성!”


김준우가 대뜸 동의하고 나서자, 그의 여자 친구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내가 쏠게. 영화 보고 신포동 경양식집 가서 저녁 먹자. 다들 어때?”

“찬성!”


일행들은 오성극장으로 향했다.

올해 크리스마스 시즌의 극장가는 <로보캅>으로 시작해 로보캅으로 끝난다.

대한극장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해 내년 2월까지 50만 명을 동원하게 된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탑건>과 <리셀웨폰> 또한 <로보캅>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모두 흥행을 이룬다.

류지호는 여자애 둘을 위해 <천녀유혼>을 골랐다.


“우찬아, 난 좀 별론데.... 공포영화는.”

“저기 나도 귀신 나오는 영화는 무서워서 못 볼 것 같아요.”


여학생 둘은 <천녀유혼>이 호러영화인 줄 알았다.

인간과 귀신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홍보 때문이다.

사실 <천녀유혼> 역시 <영웅본색>처럼 재개봉관에서 터진 영화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밀려 개봉관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류지호는 모두의 의견을 존중했다.

어떤 영화를 보든 무슨 상관이랴.

그저 친구들과 크리스마스이브에 놀며 추억을 쌓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 그걸로 만족할 뿐.


작가의말

중요하지 않은 수 있지만. 영화 관련 사조 혹은 이론서 등은 굳이 바꾸지 않을 생각입니다. 공공 성격이 강한 기관이나 단체 기업명 역시 특별히 바뀌지 않고 언급 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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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rpe diem... (4) +12 22.01.11 10,448 215 19쪽
42 Carpe diem... (3) +14 22.01.11 10,390 228 18쪽
41 Carpe diem... (2) +12 22.01.10 10,534 236 20쪽
40 Carpe diem... (1) +12 22.01.10 10,908 224 20쪽
39 얘는 혼자 어디 딴 세상이라도 살다 왔나? +8 22.01.09 10,975 239 20쪽
38 연풍(戀風). +12 22.01.08 11,004 231 17쪽
37 영화밥 먹고 살 팔자... (6) +7 22.01.08 10,804 224 22쪽
36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530 234 22쪽
35 영화밥 먹고 살 팔자... (4) +7 22.01.07 10,593 213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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