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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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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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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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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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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Begin again.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말이 씨가 됐잖아. 지호 저 놈이 재수 없는 소리를 해서 이게 뭐야!”


황재정이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손바닥으로 느끼며 짜증을 부렸다.

오늘은 야외에서 전통혼례의 웨딩비디오를 찍는 날이다.

그런데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더니 빗방울을 뿌려대고 있다.

사인방이 송도의 한옥 가든 처마 밑에 나란히 서있다.

고우찬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분명히 일기예보에서 맑다고 했어. 곧 그치겠지.”

“일기예보가 맞추는 거 봤냐?”

“그만 투덜대. 그래도 장대비는 아니잖아.”


류지호가 황재정을 진정시켰다.


“넌 조용히 해. 네가 말하면 반대로 될 거 같아 불안하니까.”

“바닥에 잔디 깔려있어서 질퍽거리지도 않고, 천막도 쳐놨구만.”

“하늘을 탓해야지 왜 엄한 사람을 잡냐? 비 맞을까봐 그래?”

“내가 우비 챙겼어.”


친구들이 한마디씩 말하자, 황재정이 발끈했다.


“이런 개념 없이 긍정적인 새끼들. 우비 입고 돌아다니다가 물기가 신랑·신부한테 튀면 어쩔래?”

“......”

“하여간 자식들이 프로페셔널 마인드가 부족해.”


황재정의 일침에 사인방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재정아, 어디가?”

“가든 사장한테 천막 좀 넓게 펴달고 말하려고. 카메라에 물들어 가면 죽을 줄 알아.”


발걸음을 옮기던 황재정이 류지호에게 협박 같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오늘따라 재정이가 엄청 예민하게 구네.”

“자그마치 100만 원짜리 일감이잖아.”


이번 웨딩촬영 의뢰는 조금 특이했다.

R타입의 상품이었는데, 함이 들어가는 모습부터 촬영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의뢰를 한 신랑은 대학 교수였다.

가든의 주차장을 채운 하객들의 승용차들이 모두 중형차들인 것으로 봐서, 제법 잘나가는 집안의 자제로 보였다.

어쨌든 며칠 전 신부 집에서 함이 들어가는 것부터 찍었다.

신랑은 함진아비에게 준 노잣돈의 일부를 떼어 류지호에게 팁을 쥐어줬다.

처음으로 받아본 팁이었다.

가든의 직원들이 마당 중앙에 쳐놓은 천막의 지지대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황재정이 고우찬을 향해 손짓을 했다.


“우찬아, 여기 좀 도와줘.”


고우찬이 얼른 달려가 직원들과 함께 천막의 지지대를 움직여 조금 더 넓게 펼쳤다.

황재정이 다가오자 류지호가 물었다.


“가든에 뭐라고 얘기했기에 저러냐?”

“신랑 가족인 줄 알던데?”

“그랬냐?”

“신랑하고 신부 환복 거의 끝나간대.”

“오케이! 가자 준우야.”


신부가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마당을 힐끔거리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황재정이 류지호의 곁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신부 표정이 어둡다. 분위기 좀 띄워.”

“응?”

“날씨 때문에 괜히 우중충하잖아. 그럼 그림이 살겠냐?”

“오오~”


감탄하는 류지호를 무시하고, 황재정이 신부에게 입을 열었다.


“신부님,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보세요.”

“왜요?”

“영화 찍어드리려고 그래요.”


황재정이 신부에게 농담을 던졌다.


“이렇게요?”


신부가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까꿍 하는 느낌으로요.”

“이 친구 말 듣지 마세요. 그렇게 하시면 족두리 무게 때문에 목만 아파요.”


류지호가 황재정을 밀치고 나섰다.


“감독은 나거든.”

“그럼 잘 찍던가. 개판 치면 밥 안 준다. 내가 총무야.”

“치사하게 밥 가지고 협박하냐?”

“그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렇죠, 신부님?”


호호.


신부가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찰칵.


박상우가 이를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고, 하재근 역시 캠코더에 그 모습을 담았다.


“자, 팔을 올려서 소맷단으로 얼굴을 가려보세요. 좋아요. 그 상태에서 팔을 천천히 내리는 겁니다.”


신부가 넓은 소맷단을 내리자 연지곤지를 찍은 얼굴이 드러났다.


“좋아요. 일부러 고개를 드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우찬아 라이트 조금만 들어와.”


신부의 얼굴에 핸드라이트의 빛이 닿았다.


“오오. 신부님 웃으니까 진짜 예뻐요.”


김준우가 설레발을 쳤다.

신부는 부끄러운지 연지가 찍힌 볼이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신부 대기실을 빠져나오며 류지호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짝.


황재정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씨, 안 하던 짓을 하려니까 속이 거북해.”


이어 사모관대를 입은 신랑의 인터뷰를 찍었다.

청사초롱을 든 초동을 앞세운 신랑이 신부가 대기하는 방으로 가서 나무 기러기를 건네는 것으로 전통혼례가 시작되었다.

류지호는 천막 밖으로 나가 풀 쇼트를 찍고, 다시 교배상 근처로 다가와 신랑과 신부의 얼굴 클로우즈 업을 찍었다.

교배상 밑으로 신랑의 시야 높이에서 신부를 찍기도 하고, 반대로 신부의 시선 컷을 찍기도 했다.

상견례에서 신부가 네 번의 절을 하기 때문에 신랑의 반응 샷이나 하객들의 반응을 촬영할 여유가 충분했다.

서양식 혼례는 주례의 앞에 나란히 서서 주로 예식이 진행되기 때문에 놓치는 샷이 별로 없지만, 전통혼례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 마주보고 떨어져서 진행되기 때문에 류지호는 바쁘게 카메라를 움직여야만 했다.

둘로 나뉜 표주박 잔이 신랑과 신부에게 전해졌다.


하하하.

호호호.


하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신부가 표주박 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해도 되는데, 긴장했는지 그만 술을 꿀꺽 마셨다.


‘젠장, 하객들 반응 샷 놓쳤다.’


신랑과 신부에 집중하고 있던 류지호가 하객들의 반응을 찍지 못했다.

크게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아쉬워하는 류지호다.

전통혼례는 신랑과 신부는 방석위에 앉아 있고, 도우미 이모들이 분주하다.

서양식 예식과 달리 전통혼례는 조금 더 풍부한 샷을 얻을 수 있다.

절을 하는 모습이라던가, 서있는 자세와 앉아 있는 자세에서 앵글이 달라진다던가, 서로 마주보고 있어 어깨 너머로 찍는 O.S(Over the shoulder Shot)라던가, 시점 샷(Point Of View shot) 같은 것들을 얻을 수가 있다.

신랑신부가 떨어져서 마주보고 있다 보니 거리감 때문에 아웃 포커스 느낌의 쇼트도 건질 수 있다.

분주하게 이리저리 캠코더를 들이대는 류지호를 보며 황재정이 감상을 내놓았다.


“저 놈이 아주 영화를 찍으려고 작정을 했나? 생난리를 치네.“


폐백까지 촬영을 마친 류지호가 다시 교배상으로 돌아왔다.

다양한 인서트를 찍었다.

표주박에 술을 따르는 근접 샷, 나무 기러기상, 청실홍실, 청사초롱 등등.

일부러 멋을 부리려고 찍은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일종의 편집 소스다.

인물만 계속 나오다가 이런 샷들이 한 번씩 들어가면 왠지 스토리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전통혼례에 등장하는 소품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류지호는 방석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오늘 촬영한 테이프의 녹화 상태를 확인했다.

황재정이 그의 옆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지호야, 상품 하나 더 만들까?”

“무슨 상품?”

“함 들어가는 것부터 신혼여행까지 따라가는 거.”


나중에 이런 상품도 나오긴 한다.

류지호는 이미 경험해 봤기에 잘 알고 있다.

헌데 아무 정보도 없는 황재정이 그걸 생각해 냈다.


“아, 인건비 때문에 안 되겠구나. 건당 출장비를 지급하는 걸로 따지면...”


황재정이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겼다.


“흠. 현재로서는 안 되겠구나. 스튜디오 규모도 그렇고, 고객들 소득수준도 그렇고...”

“......?”

“포토북 있잖아?”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외국 웨딩잡지에 나오잖아. 미국하고 일본 대만은 다 그거 하던데? 근데 왜 이걸 우리나라 사람들이 안하지? 이것도 알아봐야겠다.”


황재정이 혼자 묻고 혼자 대답했다.


“야! 고민 접어. 일단 서울대부터 가고 나서 생각해. 벌써부터 설레발치지 말고!”


류지호가 황재정의 상념을 강제로 깨뜨려버렸다.

황재정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응?”

“얀마! 우리 아직 서지도 못했어. 걷지도 못하는데 뛸 생각하지 말고, 넌 내년에 서울대 입학할 것만 생각해. 내가 그랬잖아. 1,2년 보고 있다고. 일단 웨딩비디오를 알리는 게 먼저야. 그리고 우리는 그 이후를 준비해야 하고.”

“알아들었어. 그만 말해도 돼.”


황재정은 더 들은 것도 없다는 듯 류지호의 말을 끊어버렸다.


“배고프지 않냐? 밥이나 먹자.”


황재정이 휘적휘적 가든 안쪽으로 향했다.


“같이 가!”


류지호도 캠코더를 챙겨 뒤를 따랐다.

야외에서 벌어진 전통혼례가 무사히 치러졌다.

다행히 비바람이 몰아치고 폭풍우가 치는 등의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어느덧 부슬부슬 내리던 가랑비가 그쳤다.

피로연이 마무리 될 즈음에는 비구름이 물러가고 해가 내려쬐었다.

맑게 갠 날씨.

사인방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또 한 건의 의뢰를 무사히 완수했기 때문이다.

황재정이 류지호의 소매를 붙잡았다.


“나 못 믿어?”

“믿지.”

“뭘 믿는데?”

“다.”

“새끼가....”


피식.

황재정이 웃었다.


“나 서울대 간다... 무조건.”

“열심히 해.”

“걱정하지 마. 올해 안에 석민이 따라 잡을게”


황재정이 힘주어 말했다.

류지호는 황재정과 김석민이 전교 1,2위를 다투는 상상을 해봤다.

원만하지 않은 성격의 두 녀석.

꼴사납게 서로 신경전을 벌일 것 같지는 않았다.


‘제법 불꽃이 튈 것 같긴 하네....’


류지호는 말없이 황재정의 등판을 팡팡 두드렸다.


“윽. 아파! 왜 패?”

“격려야, 격려.”

“격려 두 번 받았다가 등판 아작 나겠다. 감정 실어서 격려하지 말고 새끼야!”


❉ ❉ ❉


류지호가 오랜만에 동인천에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가 아니었다.

동생 류순호와 친구들과 함께 라타칠성 계열 패스트푸드 매장에 앉아 있다.


후루룩.


류지호가 아메리칸 커피를 마시며 눈앞에서 먹기 바쁜 동생의 친구 녀석들을 지켜봤다.

겨우 햄버거가 뭐라고.

중학교 3년이나 된 녀석들이 허겁지겁 입 속에 햄버거를 넣기 바빴다.


‘거참, 부모님들이 굶긴 것도 아닐 텐데.... 한 며칠 굶은 놈들처럼 먹네.’


녀석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행복하게 웃으며 햄버거를 먹어치웠다.


“누가 안 빼앗아 먹어. 천천히 먹어. 체한다.”

“형, 너무 맛있어서 입으로 들어가는 걸 멈출 수가 없어!”

“입안에 가득 물고서 말하지 마라. 파편 튀잖아.”


흐흐흐.


류순호와 친구들은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고 서로를 보며 웃었다.

매장의 손님들이 바보처럼 구는 동생들을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지호는 맛있게 먹는 동생들을 바라보니 절로 흐뭇해졌다.


“더 먹을래?”


류순호가 형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더 먹어도 돼?”

“그럼. 아예 종류별로 먹어볼래?”

“치킨 시켜도 돼?”

“안 될 거 없지. 형이 니들 맛있는 거 사준다고 했잖아. 치킨 하고 또?”


류지호가 각종 햄버거와 치킨, 애플파이가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동생들은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치웠다.

그럼에도 계산서에는 1만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 찍혔다.

패스트푸드점을 나선 동생의 친구 한 녀석이 류지호를 불러 세웠다.


“형... 오늘 바빠요?”

“형이랑 여기서 찢어질까? 오락실 가게?”

“그게 아니고요.”

“그럼 뭔데?”

“혹시.... 심지라고 알아요?”

“알지.”

“거기 데려가 줄 수 있어요?”

“그러자.”


유흥업소도 아니고 중학생 동생들을 못 데리고 갈 이유가 없었다.

일행이 1학년 때 미팅했던 빵집 뒷골목으로 향했다.

빽빽하게 붙어있는 빌딩사이의 한 건물.

4층과 5층에 ‘심지’라는 음악 감상실이 위치했다.


‘재정이하고 참 많이도 들락거렸는데....’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정말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다.

참고로 1982년에 문을 연 심지는 2001년까지 음악을 좋아하던 청소년과 젊은층의 인기를 끌던 인천의 명소다.

또한 가난한 청소년 음악 마니아들과 인천출신 락밴드들의 성지(聖地)였다.

건물 4층은 주로 팝음악과 소프트락, 재팬팝을, 5층에서는 하드락과 데쓰메탈 등 헤비메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입장료는 기억대로 1500원.

류지호는 커피를 동생 친구들은 콜라를 받아 감상실로 입장했다.


“우리 언제까지 있을 수 있어요?”

“시간은 따로 제약이 없을 걸? 한번 입장하면 하루 종일 앉아 음악을 들어도 상관이 없을 거야.”

“넵!”

“부모님들 걱정하시니까 적당히 놀다가 들어가.”


실내는 소형 영화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신포고 방송제에서 썼던 사이즈의 스크린에서 뮤직비디오가 상영되고 있다.

스크린 옆에 DJ박스가 있어서 누구나 신청곡을 적어내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음악을 들려줬다.

심지는 인기 팝송부터 R&B, 힙합, LA 메탈, 모던록, 브릿팝, 스래쉬 메탈, 멜로딕 메탈, 블랙 메탈 등등 각종 장르의 최신 외국 음악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인천의 유일한 공간이다.

간혹 클래식 음악과 공연실황을 뮤직비디오로 틀어주기도 했다.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어서 은근히 죽돌이, 죽순이들이 많았다.

커다란 스크린 옆으로 5층의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는 작은 모니터가 달려있다.

갑자기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몇 명이 뛰쳐나갔다.


다다닥.


남학생들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고 싶은 뮤직비디오가 5층에서 상영되는 모양이다.

4층과 5층을 오가며 자신이 좋아하는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는 것.

이곳에서는 늘 벌어지는 광경이다.


‘아!’


류순호의 입이 크게 벌려진 채 다물 줄 몰랐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도 새로웠다.


“형.... 세상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어.”

“유명하지. 심지가....”


류지호 역시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같은 심정이었다.

신청곡을 적어내는 종이를 가져와 동생들에게 돌렸다.


“듣고 싶은 노래나 보고 싶은 뮤직비디오 적어.”


류지호는 종이에 음악 몇 곡을 적었다.

동생 친구들은 볼펜을 입에 물고 고민에 빠졌다.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음악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휴식이다.

어느 순간, 오르간 반주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로이 부캐넌의 읊조리는 듯 우울한 음성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Just a smile, Just a glance, The Prince of Darkness, He just walked past.

(미소를 띤 채, 그저 눈길 한번 주고, 어둠의 왕자는 과거로 사라져 버렸어.

There's been a lot of people They've had a lot to say But this time I'm gonna tell it my way.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었지만 이번에는 내 방식대로 이야기를 들려줄게) ]


로이 부캐넌.

가장 위대한 백인 블루스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다.

그의 블루스 명곡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로이 부캐넌의 멘트가 끝나고 암울하게 들리는 특유의 기타가 흘러나왔다.

류지호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음악에 추억이 실렸을 때의 그 무서운 감정의 소용돌이!

한이 서려 있는 듯한 기타 연주는 류지호의 감정선을 쉴 새 없이 자극했다.

동굴 같았던 반지하방에서 고독과 싸웠던 자신.

류지호는 고독과 삶의 고통에 못 이겨 요절한 천재 예술가는 아니다.

그렇지만 평생 한 분야에 종사하면서 우울, 외로움과 싸웠던 감정들을 가지고 있었다.


“아~”


뭔가 머리를 간질이는데, 뭐라 딱 꼬집어 정의할 수 없는 이미지들.


88서울올림픽이 중계되고 있는 낡은 컬러 TV.

삶이 마모되어 기운 없고 의욕 없는 할아버지.

그는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있다.

티셔츠에는 올림픽 오륜기가 새겨져 있다.

오륜기의 원 하나는 지워져 있다.

햇빛이 들어오는 활짝 열어놓은 직사각형의 창문.

붉은 색 머리띠를 두른 동네 주민들.

올림픽 오륜기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용역깡패들.

집 밖에서 용역깡패와 주민들이 충돌하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욕설과 악다구니.

방안의 TV에서는 소련과의 대결에서 극적인 승리를 따낸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경기가 중계되고 있다.

주민과 용역깡패가 충돌하는 소음이 올림픽 응원 함성처럼 들린다.

소련과의 대결에서 극적인 승리를 따낸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

열광적으로 태극기를 흔드는 관중들.

용역깡패와 주민이 충돌하는 모습이 마치 금메달에 열광하는 풍경처럼.

방안의 TV화면과 용역깡패와 충돌하는 주민들 풍경이 교차한다.

격렬하게 열광(?)하던 주민과 용역깡패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한다.

자전거가 굴러가는 소리.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온다.

주민들과 용역깡패의 정중앙을 유유히 통과하는 소년.

소년이 입고 있는 티셔츠의 등판.

Dream come true?

물음표라고?

굴렁쇠가 쓰러지면, 다시 세워 굴리고, 굴리고, 또 굴리고.

주민들과 용역깡패들은 굴렁쇠가 쓰러질 때마다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른다.

충돌하던 두 진영의 열기가 식어버리고.

양 측이 뿔뿔이 흩어진다.

굴렁쇠 소년이 방으로 들어온다.

소년은 부엌에서 밥상을 차려 노인 앞에 놓는다.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를 한다.

TV도 사각형, 창문도 사각형, 방도 사각형. 사진액자도 사각형.

밥상, 굴렁쇠, 오륜기만 원이다.

드르륵.

집 앞에 세워놓은 굴렁쇠가 미닫이문에 밀려 굴러간다.

동네 언덕길을 저 혼자 굴러간다.

언덕길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 도심은 갖가지 기하학적인 선들로 어우러진 도형이다.

그 도형 안으로 굴렁쇠의 원이 굴러 들어간다.


뚝.


두서없이 떠올랐던 이미지들이 희미해져 간다.

류지호는 황급히 신청곡 종이에 희미해져 가는 이미지들을 글로 적어 나갔다.

10분짜리 단편영화 이미지들이 사라지고 있다.

메모하지 않으면 금방 달아나버릴 이미지들이다.


윙윙윙 위이잉!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기타 연주가 류지호의 심장을 난도질 했고, 머릿속은 당장 조합되지 않는 이미지들이 헤집었다.


“와~ 이거 형이 신청한 거야?”

“응?”

“형....”


음악과 두서없는 상념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류지호를 류순호가 건져 올렸다.


“왜?”

“아니, 아니야.”

“뭔데?”


망설이던 류순호가 겨우 입을 떼었다.


“기타 배우고 싶어.”

“......?”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엄마한테 공부나 하라고 혼날까봐 말을 못했어.”

“음....”

“역시 안 되겠지?”

“일렉기타 배우고 싶은 거지?”

“응. 전자기타.”


류지호가 말없이 스크린에 시선을 두고는 생각에 잠겼다.

형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류순호는 이내 체념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하자. 일단 통기타 교습소를 끊어줄게. 일렉기타 사려면 형이 돈을 좀 벌어야 해.”

“나도 형처럼 새벽에 신문 돌릴까?”

“까불지 말고. 형이 돈 벌면 일렉기타도 사주고 교습소도 일렉기타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바꿔줄게.”

“앞으로 형 말 잘 들을게.”


류지호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질색하며 손을 치워버렸을 류순호는 얌전하게 형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심지에서 실컷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감상한 일행은 용동마루턱에 위치한 기타교습소로 향했다.

통기타 기초 과정에 류순호를 접수해 주자 친구 녀석들이 부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엄마한테 혼나지 않을까?”

“형이 잘 말씀드릴게.”

“고마워 형.”

“기타 배운다고 공부 소홀히 하면 안 돼.”

“응.”


이날 이후 류순호는 동인천에 위치한 기타학원을 들락날락거리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류순호는 고등학교에 입학해 헤비메탈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비록 집안이 풍비박산났지만, 류지호의 조부 때까지 유서 깊은 선비 가문이었다.

선비 가문에 딴따라 형제가 탄생하려고 하고 있다.


작가의말

나름 성공적으로 스토리 아레나를 완주한 것 같습니다. 선작, 조회, 댓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번주까지 1일 2연재를 유지하고 다음주부터 1일 1연재를 기본으로 하고 가능한 자주 연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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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gin again. (4) +5 22.01.18 9,715 214 20쪽
55 Begin again. (3) +7 22.01.18 9,593 216 24쪽
54 Begin again. (2) +8 22.01.17 9,756 211 21쪽
53 Begin again. (1) +11 22.01.17 10,297 200 24쪽
52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6) +14 22.01.16 9,822 211 19쪽
51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5) +8 22.01.15 9,529 194 19쪽
50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4) +15 22.01.15 9,557 186 20쪽
49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3) +16 22.01.14 9,619 192 22쪽
48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2) +12 22.01.14 9,586 196 21쪽
47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1) +6 22.01.13 9,858 194 21쪽
46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3) +7 22.01.13 9,986 204 22쪽
45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2) +20 22.01.12 10,192 204 24쪽
44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1) +14 22.01.12 10,842 211 24쪽
43 Carpe diem... (4) +12 22.01.11 10,462 215 19쪽
42 Carpe diem... (3) +14 22.01.11 10,407 228 18쪽
41 Carpe diem... (2) +12 22.01.10 10,547 236 20쪽
40 Carpe diem... (1) +12 22.01.10 10,926 224 20쪽
39 얘는 혼자 어디 딴 세상이라도 살다 왔나? +8 22.01.09 10,990 239 20쪽
38 연풍(戀風). +12 22.01.08 11,018 231 17쪽
37 영화밥 먹고 살 팔자... (6) +7 22.01.08 10,817 224 22쪽
36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560 234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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