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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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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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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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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2.01.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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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Carpe diem...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중고등부 겨루기 심사는 경량급부터 중량급 순으로 심사가 진행되었다.

방송제에서도 그랬지만, 류지호는 이상하게 긴장되거나 떨리지 않았다.

문신처럼 새겨져 있던 패배의식이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할 뿐.

특별히 고민하거나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어차피 승단심사 겨루기는 실력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다.

심사 기준에 합당한 기술습득과 구사능력이 있는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KO를 당하거나 포인트를 따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면 망신은 톡톡히 당하겠지만, 2단까지는 어지간히 소극적이거나 개발을 차지 않는 한 대부분 합격점수를 받는다.

류지호는 남자고등부 기준으로 라이트급에 나섰다.


“차렷! 경례!”


류지호와 상대가 인사를 나누고 헤드기어를 뒤집어썼다.

싸움은 선공이 유리하다.

하지만 스포츠 태권도는 선공이 반드시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태권도는 받아차기가 매우 발달된 격투기다.

류지호는 성급하게 상대에게 공격을 날리지 않았다.

천천히 신중하게 겨루기를 진행하려고 했다.


파바박. 팍팍!


회피고 받아치기고 나발이고 그딴 거 없다.

상대가 차면 자신도 차고, 자신이 차면 상대도 차는 공방이 진행됐다.

서로 한 치도 물러남 없이 공격을 날렸다.

겨루기를 하는 두 사람은 죽을 맛이지만.

구경하는 사람들에게는 박진감이 넘쳤다.

짧은 시간 동안 치열하게 발차기를 날리자 류지호와 상대는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차츰 공격이 점점 무뎌지기 시작했다.


‘젠장!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말았어. 침착하게 상대 공격을 피하고 반격해야 했는데. 이게 개싸움이지 어디가 태권도야...’


2분의 시간이 이리도 길 줄은 몰랐다.

류지호는 굳이 상대와 개싸움을 벌여 심사위원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획.

퍽!


남은 시간 류지호는 절대 무리하지 않았다.

태권도 스텝을 밟으며 상대의 공격을 받아치기만 했다.

류지호가 받아치기로 전술을 바꾸자, 허를 찔려버린 상대는 평정심이 흔들렸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상대는 앞차기나 옆차기 같은 효율성이 낮은 발차기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류지호는 여유롭게 피하며 착실하게 상대의 호구에 유효타를 작렬시켰다.


“그만!”


심판이 겨루기의 종료를 선언했다.


“차렷! 경례!”


류지호가 상대와 악수를 나누고 용연태권도장 관원들 무리로 걸어왔다.


“잘했다. 상대가 황소처럼 달려든다고 함께 뿔을 받아버리는 건 미련한 짓이다. 오늘처럼 상대가 저돌적으로 나온다면 말려들지 말고 나의 거리와 템포를 항상 유지할 수 있도록 해.”


홍 사범이 방금 전 끝난 류지호의 겨루기에 대해 감상과 조언을 들려줬다.


“예.”


이 당시까지만 해도 태권도 겨루기가 꽤 재미가 있었다.

큰 기술도 서슴없이 펼치고, 포인트가 심사위원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채점되기 때문에 최대한 공격적인 운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점점 스포츠화 되어가는 태권도.

국기(國技)라는 말에 걸맞지 않게 태권도 수련자의 숫자도 해마다 줄어들게 된다.


“흥분하지 마. 몇 대 맞았다고 눈 뒤집히지 말고.”

“사범님도 아니면서 무슨 코치질이야?”

“엉아 2단이야.”

“저리 꺼져 새끼야. 옆에서 쫑알거리니까 집중이 안 되잖아.”


고우찬은 류지호와 티격태격하며 긴장감을 차츰 털어냈다.


“위치로!”


심판이 겨루기에 나설 고우찬과 상대를 심사장 중앙으로 불렀다.

고우찬이 헤드기어를 쓰며 상대와 눈싸움을 벌이며 기선제압에 나섰다.

신장은 자신과 비슷했는데, 호리호리한 체형이다.

견적이 나왔다.


‘딱 지호 같은 스타일이네. 예쁘게 태권도 하는 스타일.’


고우찬이 예상한 그대로 겨루기가 진행됐다.

상대가 치고 빠지며 받아치는 여우같은 겨루기를 선보였다면, 고우찬은 성격처럼 시종일관 공격일변도로 나갔다.

한 발자국이라도 뒤로 물러나면 진 것이라는 각오가 엿보였다.


퍼퍽! 퍽!


겉으로는 두 진영이 대등하게 치고받는 듯 했다.

조금만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돌아가는 상황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홍 사범처럼.


“우찬이가 밀리네.”


두 눈에 힘을 바짝 주고 고우찬의 겨루기에 집중하고 있는 류지호도 동의했다.

얼핏 보면 고우찬이 제법 치는 것 같다.

하지만 타격점에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고우찬은 태권도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기술이 투박할 수밖에.

유연성도 부족해 다소 뻣뻣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압도적인 체력과 맷집이 발군이다.

마치 탱크 같다.

유효타는 고우찬이 훨씬 많이 허용했다.

하지만 고우찬의 발차기가 한 번씩 꽂힐 때마다 상대에게 무지막지한 데미지가 쌓였다.


‘곰 같은 놈....! 페이스 조절 하라니까.’


공격 일변도가 보기에는 시원시원하다.

대신 체력소모가 크다.

체력이 좋아 상대를 끝까지 밀어붙일 순 있겠지만, 상대 또한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이대로 간다면 상대를 지치게 할 수 있을지언정 쓰러뜨릴 순 없을 거야.’


상대가 차고 빠지면 고우찬은 맞는다.

고우찬이 기습공격을 날리면 상대는 받아친다.


‘겉으로는 우찬이가 파이팅이 넘쳐 보이지만 포인트를 계산하면 상대가 꽤 앞 서.’


그런 일방적이고 심심한 공방 속에서 고우찬의 묵직한 한방이 들어갔다.


퍽!


상대를 집요하게 따라붙은 고우찬의 반달차기가 들어갔다.

깔끔하게 들어갔다.

상대는 충격이 있었는지 비틀거렸고, 고우찬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퍽!

퍼퍽!


고우찬의 발차기가 폭풍처럼 쏟아졌다.

상대는 다급하게 스텝을 밟으며 피하고 막아내느라 진땀을 뺐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눈빛을 빛낸 고우찬이 회심의 일격을 먹이려고 할 때.


“그만!”


고우찬이 아쉬운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잘했어.”

“이제 막 뭔가 되나 싶으니까 딱 끝났어.”


고우찬의 음성에 더 싸우지 못한 진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정식 시합이 아니잖아.”

“빨리 3회전짜리 시합 뛰어봤으면 좋겠다.”


용연태권도장 관원들의 심사가 모두 끝이 났다.

사실 태권도 1단, 만만하다.

차라리 그 기간 동안 복싱을 했다면 ‘오 좀 치겠는데?’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고우찬에 태권도가 특별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난 안 될 거야‘가 아니라 ’나도 하면 되네‘의 차이는 컸다.

류지호 역시 2단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자존감과 패배의식을 떨쳐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작은 계기다.

홍 관장이 뒷짐을 진 채 어슬렁거리며 걸어왔다.


“관장님!”


용연태권도장 관원들이 홍 관장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홍 관장은 건성으로 손을 들어 화답했다.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용연태권도생들이 우렁차게 인사를 했다.

홍 관장이 관원생들의 눈동자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쉬움을 애써 삭이고 있던 고우찬과 눈을 맞췄다.


“많이 아쉽냐?”

“오줌 누다 끊은 거 같아요.”

“실망할 거 없어. 너하고 붙은 놈과 자주 붙게 해주마.”

“.....?”

“어차피 겨루기 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한다. 인천에 고등부 헤비급이 몇 명 안 돼. 훈련이든 시합이든 오늘 승단심사 본 헤비급들끼리는 자주 붙을 수밖에 없어.”


그제야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고우찬이다.

다시 상대와 붙는다면 박살을 낼 자신이 있었다.


“이번에는 작전을 잘 못 짜 상대에게 끌려 다녔어요. 다음에는 절대 봐주지 않을 거예요.”


홍 관장은 승단심사를 본 수련생에게 자장면을 먹이고 귀가시켰다.


❉ ❉ ❉


“아빠, 나 이제 검은 띠야!”


고우찬이 샛방의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잘했다.”


고성재가 옆구리를 벅벅 긁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자, 봐봐.”


고우찬이 검은 띠를 고성재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밥은?”

“관장님이 사주셨어. 아빠는?”


고우찬의 눈에 방구석에서 뒹굴고 있는 막걸리통이 보였다.


“또 밥 대신 막걸리 마신거야?”

“한통 밖에 안 마셨어.”

“쳇.”


고우찬이 마음 안 든다는 듯 불퉁거렸다.

그리고 빈 막걸리 통을 밖에 버리고 돌아왔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고우찬이 고성재 옆에 앉았다.

고성재가 담배를 피워 물며 물었다.


“자랑 다 했냐?”

“관장님이 내가 운동에 소질 있데.”

“태권도?”

“응. 일반부로 배우는 거랑 선수가 배우는 게 다르거든. 나보고 선수 등록하고 시합도 뛰게 해주고 대회도 나갈 수 있게 해 준데.”


고성재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고우찬은 반응이 없는 아버지가 내심 서운했다.

솔직히 또래 중에서는 일대일로 붙어서 늘 이길 자신감이 있었다.

헌데 호구를 차고 태권도 시합을 해보니 길거리 싸움하고 차원이 달랐다.

막무가내 개싸움과 기술로 승부 보는 태권도.

짜릿했다.

길거리 싸움과는 차원이 다른 재미가 있었다.


“네가 정말 하고 싶어서야, 아니면 지호가 옆에서 바람 넣어서?”

“음...”


고우찬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물론 류지호가 바람을 잡기는 했다.

다만 아직도 심사장에서 누군지 모를 상대와 겨뤘던 걸 떠올리면 가슴이 막 뛰었다.


“나 제대로 하고 싶어.”


고성재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오늘 심사할 때 겨루기를 뛰었거든. 상대가 얍삽하게 치는 놈인데 내가 박살냈어. 겨루기를 하는데 막 몸이 떨리고 소름이 쫙 돋는 거야. 지호가 그런 걸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어쩌고 하는데 암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었어. 길거리에서 양아치들하고 치고 박는 거 하고 차원이 달라. 진짜 숨이 차고 다리는 후달리고... 맞으면 기분이 더러웠는데 내가 막 빡! 하고 호구를 차면 끝내주는 거 있지? 정말 진이 다 빠질 정도로 싸웠는데 끝나고 나니까 존나 시원한 거 있지. 몸은 힘든데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하고 싶은 거야. 태어나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어.”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는 고우찬이다.

이렇게 말이 많은 아들이 아니다.

고성재는 아들이 진짜 태권도에 재미를 붙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선수하고 싶으면 해.”

“진짜?”

“하지 말라면 안 할 거냐?”

“아니, 그...”


고우찬은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말끝을 흐렸다.


“아빠가 네 인생 대신 살아 주냐?”

“....아니.”

“네 인생 네 꼴리는 대로 살어.”

“그게 다야? 아버지가 아들한테 뭔가 힘을 주는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은 지호 고 놈한테 들어. 그 놈이 말은 청산유수더라.”

“친구하고 부모하고 똑 같아?”

“시끄럽고. 이불 깔아.”


입을 삐죽 내민 고우찬이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 방에 깔았다.

고성재는 전등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한 마디 했다.


“자기 전에 연탄불 보는 거 까먹지 말고.‘


고우찬은 맥이 탁 풀렸다.

태권도 선수로 진로를 정한 것에 대해 허락을 받아 홀가분하기는 했다.

그런데 뭔가가 빠진 것 같은 기분.

보통의 부자지간에 있을 법한 대화가 없었다.


“쳇.”


고우찬이 불퉁거리며 부엌으로 나가 연탄불을 확인했다.

주인집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가, 집게로 연탄을 집어 돌아왔다.

연탄불을 갈고 방으로 돌아오자, 고성재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렁.


고우찬이 잠든 고성재를 쳐다봤다.


‘메달 따면 대학도 갈 수 있데.’


무정한 아버지는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만, 고우찬은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비록 심사 겨루기라 진지함은 떨어졌지만, 제대로 된 태권도 실전을 경험했다. 용연태권도장에서 형들하고 약식 겨루기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솔직히 길거리에서 싸움질하는 것보다 재미가 있었다.

호구와 헤드기어를 쓰는 것이 갑갑하고, 반칙이라며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많아 짜증도 나지만, 겨루기 뛰면서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전율이 일어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 본 기분이었다.

정식 시합을 뛰면 얼마나 더 재미있을까.


“야이, 씨XXX아! 다 죽여버릴라니까! 이 개@$#%....!”


창밖에서 취객의 걸쭉한 욕설이 들려왔다.

경찰 사이렌도 들렸다.

동네 어디선가 싸움판이 벌어진 모양이다.

고우찬이 살고 있는 동네는 십대에서 이십대 남자들 대부분이 소위 꼴통이요 양아치들이다.

소년원에 들락거리는 것이 무슨 대단한 벼슬인양 으스대는 놈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우람한 체격과 험상궂은 외모를 자랑했던 고우찬이다.

자연스럽게 동네 양아치들로부터 패거리에 들라는 제의를 많이 받았다.

잠시 패거리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류지호의 꼬임에 빠져 용연태권도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자연스럽게 동네 양아치들과 멀어졌다.


‘이제 니들하고는 안 논다.’


빨리 새벽이 돌아와 용연태권도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태권도 수련이 기다려지는 밤이다.


❉ ❉ ❉


새벽공기를 마시며 신문배달을 하다 보니 기온이 꽤나 떨어져있었다.

어느덧 가을이 가고, 겨울이 찾아왔다.

그 서늘함이 묵직하게 굳어 있던 정신을 풀어 헤치는 것 같았다.

온몸을 식혀주는 시원함.

골목을 달리며 차올랐던 땀도 태권도장에 도착하면 식어있었다.

며칠 남지 않은 제13대 대통령선거로 인해 거리는 벽보와 현수막으로 어지러웠다.

홍보를 위해 개조한 트럭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유세하는 소음이 귀를 시끄럽게 했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류지호는 1학년을 마무리하는 기말고사에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


‘과거로 돌아온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학년이 끝나가고 있구나.’


기말고사를 보고 나면 겨울 방학이 기다리고 있다.

방학의 절반을 보충수업이란 이름으로 등교를 해야 하겠지만, 모자란 시간 때문에 강행군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류지호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취약했던 수학실력을 끌어올렸고, 아버지가 선물한 마이마이로 새벽 신문배달과 등하교시에 윤선생 영어 테이프를 꾸준히 들은 덕분에 영어 실력도 향상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죽어라 참고서만 본다고 성적이 나오지는 않는다.

입시교육이 특히 그렇다.

공부하는 방법 혹은 기술이란 말은 매우 진부한 것처럼 여겨진다.

사실은 입시준비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개헤엄을 치는 사람과 숙련된 강사에게 배워 능수능란한 수영기술을 선보이는 사람사이에서 실력 차이가 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류지호는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만의 공부법을 확립했다.

특별할 것이 없다.

꾸준함과 자신만의 학습 리듬.

공부에는 지름길도 왕도도 없기 때문이다.


“시험 준비 많이 했냐?”


기말고사 첫 날 짝꿍이 물었다.


“그럭저럭.”

“이 자식 저렇게 말할 때마다 재수 없지 않냐?”


공부에 담을 쌓은 급우들은 일찌감치 시험기간에 무엇을 하고 놀지 일정을 짰다.

류지호는 그런 분위기에 일절 휩쓸리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정말 공부만 했다.

방송부 활동 말고는 사실 할 것도 없다.

류지호는 중간고사에서 전교 50위권에 진입했다.

주변에서 말들이 많았다.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120등 언저리에서 73등을 끌어 올리는 성적향상을 보였다.

비슷한 성적으로 입학한 급우들은 류지호를 괴물 취급했다.

신포고 전교 50등은 예전 같았으면 서울대를 노려볼 만한 등수다.

교사들조차 류지호의 성적향상에 큰 관심을 보였다.


띠리링~


대한민국 중고생에게 시험이 일상이다.

누군가에겐 지긋지긋한 일이지만. 다른 누군가에는 그저 일상 일뿐.

류지호는 본인이 시험이 일상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에서 그렇게 됐다.


“용석아, 주관식 문제의 답을 모른다고 빈칸으로 내지 말고, 뭐라도 써넣어.”

“아는 게 있어야 써 넣지.”

“정 쓸 게 없으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라고 쓰던가.”

“그랬다간 선생 놀린다고 뒈지게 패지 않으면 다행일 걸.”


킥킥킥.


주변의 급우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문제를 받아든다.

바로 인생이라는 문제다.

인생이란 문제지에 답을 빈 칸으로 남겨 두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 의미가 없는 일을 할 바에 재미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놔야할 때, 정답을 모른다고 빈 칸으로 낼 바에 차라리 오답이더라도 재미난 답을 적어 넣으면 어떨까.

살면서 선택에 순간이 왔을 때,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고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길이다.

의미를 찾기 힘들 때는 재미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

그러면 적어도 후회는 남지 않을 것이다.

삶에서 기로에 설 때마다 선택을 해야 한다.

정답도 오답도 없는 인생의 답에 대한 선택을 말이다.


“젠장! 중간고사를 만회하나 했는데.”

“이번에도 글렀어.”

“닥치고. 드디어 시험에서 해방이다!”


1학년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났다.

시험이 일상이던 한 해를 실질적으로 마무리하는 분위기다.

시험을 잘 보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항상 아쉬운 마음이 남는 것이 바로 시험이다.

그런데 교문을 나서는 사인방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밝은 표정에서 기말시험을 잘 치룬 걸 알 수 있다.

사인방이 대동학생백화점 앞을 지나쳤다.

그때 입구에 서있던 여학생 한명이 불쑥 사인방 앞으로 뛰어왔다.

지난 가을, 신포동 골목길에서 남자에게 추행당할 뻔했을 때 구해준 인애여고 여학생.

단발머리, 맑고 큰 눈, 풋풋하고 청초한 분위기의 김민아다.


“우찬아~”


류지호와 친구들이 놀라 고우찬을 돌아봤다.

특히 류지호의 놀람은 거의 경악에 가까웠다.


“시험 잘 봤어?”


김민아가 배시시 웃으며 고우찬에게 물었다.


“어제는 전화 못 받아서 미안했어. 운동을 좀 빡세게 해서 일찍 곯아떨어졌어. 사과의 의미로 나중에 만두 사줄게.”


고우찬이 김민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김민아는 움찔거리기만 할 뿐, 순순히 머리를 맡기고 얼굴을 붉혔다.


“오늘은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어. 다음에 보자.”

“그래.....”


김민아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고우찬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발견하지 못했다.

고우찬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


김민아가 고우찬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멋있어.”


그렇게 말하는 김민아의 양 볼에는 홍조가 피었다.

그런 그녀가 친구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저게 어떻게 멋지단 말이야!”

“남자답게 잘 생겼잖아.“


남자답게는 그럴 수 있다고 쳤다.

하지만 잘 생겼다는 말에는 절대 동의를 못하는 친구들이다.


“그냥 나 좋다고 따라다니던데?”


고우찬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내뱉었다.

친구들의 추궁에 어떻게 설명할까 하다가, 그냥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


친구들은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특히 류지호는 허탈함과 황당함으로 말문이 막혔다.


“미녀와 야수지?”


황재정이 웃음을 참으며 김준우에게 말했다.


“킹콩과 앤 대로우야.”


류지호가 슬그머니 황재정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킹콩이래.”


류지호와 친구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이씨, 킹콩이라니 이것들이 죽을래!”


고우찬이 성질을 부렸다.


“아라가 고릴라라고 하니까 네 입으로 킹콩이라며?”

“윽. 분하다. 아라를 끌어 들이다니.”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고우찬은 뒷골목 생활을 했었다.

질이 안 좋은 자들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했었다.

그러한 기억은 류지호의 가슴에 묻어야 할 것 같았다.


작가의말

에피소드에 맞는 영화 명대사를 찾아 넣었었는데 그것들을 들어내니 좀 더 스토리에 집중되는 것 같긴 합니다. 여전히 스토리와 묘사의 밀도 문제는 숙제이지만 말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밤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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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Begin again. (1) +11 22.01.17 10,285 200 24쪽
52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6) +14 22.01.16 9,808 211 19쪽
51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5) +8 22.01.15 9,516 194 19쪽
50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4) +15 22.01.15 9,544 186 20쪽
49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3) +16 22.01.14 9,604 192 22쪽
48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2) +12 22.01.14 9,568 196 21쪽
47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1) +6 22.01.13 9,838 194 21쪽
46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3) +7 22.01.13 9,970 204 22쪽
45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2) +20 22.01.12 10,178 204 24쪽
44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1) +14 22.01.12 10,827 211 24쪽
43 Carpe diem... (4) +12 22.01.11 10,447 215 19쪽
42 Carpe diem... (3) +14 22.01.11 10,389 228 18쪽
» Carpe diem... (2) +12 22.01.10 10,534 236 20쪽
40 Carpe diem... (1) +12 22.01.10 10,907 224 20쪽
39 얘는 혼자 어디 딴 세상이라도 살다 왔나? +8 22.01.09 10,974 239 20쪽
38 연풍(戀風). +12 22.01.08 11,003 231 17쪽
37 영화밥 먹고 살 팔자... (6) +7 22.01.08 10,804 224 22쪽
36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529 234 22쪽
35 영화밥 먹고 살 팔자... (4) +7 22.01.07 10,593 213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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