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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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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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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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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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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그때 누군가 무릎걸음으로 PD 단상으로 다가왔다.

하재근이다.

그는 시종일관 류지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뭔가 다급한 지시사항이 있을 것이라는 걸 눈치 챘다.


“순서 교체. 라디오 드라마.”


하재근이 바로 알아듣고는 무릎걸음으로 물러났다.

류지호가 다시 자연스럽게 단상으로 올라섰다.


“엇, 쟤들 문제 생겼나보다.”

“에이, 다들 평온한데 뭘.”


눈치 빠른 타 학교 방송부들이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시 단상에 자리 잡은 류지호가 대기실을 힐끔거렸다.

하재근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다행히 순서를 바꾼다는 지시가 잘 전달된 모양이다.


“몬데그린 쇼의 한수호.”

“조인환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프로그램이 끝났다.


짝짝짝!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한수호와 조인환이 퇴장했다.

본래 여기서 축전영상이 상영되어야 했다.

하지만 VCR에 문제가 생겨 현재 빔프로젝터는 무용지물.


라 라라라~


이재호가 순발력을 발휘했다.

라디오 드라마 <자전거 도둑>의 메인 테마곡을 틀었던 것.

밝은 조명이 무대 위를 환하게 밝혔다.

대기실에서 신포고 방송부와 진명여고 방송부 1학년 여학생들이 무대로 올라왔다.

연극이나 라이브 콘서트에서는 출연진이 입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프로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다.

여학생들은 의자에 자리를 잡았고, 남학생들은 스탠드 마이크 앞에 섰다.

신포고 방송부는 라디오 드라마 공연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

긴 테이블을 놓고 의자에 앉아 라디오 방송을 선보였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정적인 느낌과 동적인 느낌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출연진 배치만으로 보는 재미까지도 추가한 것이다.

류지호가 낸 아이디어다.

라디오 드라마판 <자전거 도둑>이 진행됐다.

류지호는 좀처럼 드라마에 집중할 수가 없다.

문제가 생긴 VCR을 들고 음향실로 들어간 3학년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단 의미다.

방송제는 생방송이다.

일 년에 단 하루, 단 한차례.

다음 기회도 없고, 오직 이 순간뿐.

류지호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열정을 불태워 준비한 비디오 영상물들을 틀 수 없게 되는 것인가.

류지호가 흔들리는 것이 무대 위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는 한수호에게 전해졌을까.


‘괜찮아.’


한수호가 류지호를 향해 눈을 찡긋 거렸다.


후우.


내심 호흡을 고른 류지호가 한수호를 향해 흰 이를 드러내며 마주 웃어보였다.


‘문제없어요.’


그 짧은 시간.

대사와 효과음 사이에 마가 떴다.

방송 중에 오디오가 비었다는 의미.

라디오 드라마에서 목소리와 효과음 등이 겹치는 것도 난감하지만, 정적이 맴돌 때도 마찬가지다.

아무 소리도 없는 것은 일종의 방송사고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연기자는 감정을 담은 호흡소리라도 내야 했다.


‘정신 차리자.’


류지호가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라디오 드라마 연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일단 급선무는 무사히 라디오 드라마를 진행하는 것이다.

VCR 문제는 당장 자신이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 ❉ ❉


몇 번의 실수가 있었다.

관객들은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류지호가 임기응변으로 즉각적으로 오더를 내렸기 때문이다.

효과음이나 음악과 대사가 살짝 어긋나면서 마가 뜰 때면, 한수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쳐 애드리브를 유도했다.

그러면 한수호는 능청스럽게 애드리브를 치며 다음 장면으로 부드럽게 넘겼다.

류지호는 방송사고가 일어날 것 같을 때마다 귀신 같이 반 박자 먼저 수신호를 줬다.

사운드 볼륨이 작은 느낌이 들면 오디오믹서를 조정하는 이재호에게 즉각 사인을 줬다.

친절하게 엄지와 검지를 벌려 보이며 볼륨을 지적해 줬다.

드라마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류지호의 집중력은 최고조를 찍었다.

뮤직비디오를 찍은 경험 때문인지 최원석은 제법 뻔뻔하게 굴었다.

이철웅과 김석민이 대사를 씹어 당황할 때는 즉각 한수호가 마이크 앞으로 나섰다.


“마르코, 어디 몸이 불편한가, 왜 말을 더듬거리나?”

“아, 그, 그게...”

“흠. 아무래도 자네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 쉬는 게 좋겠어.”


한수호는 본인이 대본을 썼기 때문인지 스토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즉흥대사를 쳤다.

류지호와 한수호는 수십 번 호흡을 맞춘 듯 서로 손발이 척척 맞았다.

공다연과 신소연이 그런 두 사람을 연신 힐끔거렸다.

이명한 대신 들어온 한수호도 놀랍고, 겨우 1학년인 주제에 자신만만하게 PD를 보고 있는 류지호는 더 놀라웠다.


‘헤드셋이 아쉽네. 인터콤만 갖추었어도 훨씬 진행이 부드러울 텐데. 내년 예산에 무조건 인터콤 추가다.’


류지호는 모든 걸 핸드사인에만 의존하는 이 시기 방송제에 내심 치를 떨었다.


한편 음향실에서는 모든 기술 파트들이 모여서 분해된 VCR을 심각한 얼굴로 살펴봤다.

하재근이 심각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헤드에는 문제가 없는 거지?”

“응.”

“그건 다행이네. 그럼 VHS 테이프가 문제라는 건데...”


VHS는 재생을 반복하거나 먼지 같은 이물질이 많은 곳에서 오랜 시간 보관을 하면 화질이 열화 될 수 있다.

열화(Generation Loss)는 아날로그 저장 매체의 복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정보가 손실되는 것을 의미한다.

VHS 테이프의 품질이 좋지 않은 시기다.

한 번 손상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자기 테이프가 씹히거나 심하면 끊어지기도 했다.

또한 VCR 헤드에 이물질이 끼거나 노후화 될 때도 VHS의 자기 테이프가 손상된다.

하재근이 테이프를 들어 보였다.


“이게 원본이냐?”


박상은이 즉시 대답했다.


“네.”

“카피 해놓은 것도 없어?”

“잘 모르겠어요.”

“내년에 PD 볼 놈이 그런 것도 체크 안 했어?”

“복사하면 화질 떨어진다고 그냥 원본으로 틀자고 해서....”


하재근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미련한 놈들. 기껏 한번 복사한 걸로 얼마나 화질이 떨어진다고.”


다른 3학년 선배가 나섰다.


“일단 비디오 데크부터 다시 원상복구 시켜놓자.”


VCR을 원상복구 시킨 후, 클리닝 테이프를 여러 번 돌려 헤드를 닦아 주었다.

하재근이 VHS 테이프의 커버를 열어 자기테이프에 씹힌 부분을 확인했다.


끼릭. 끼릭.


테이프가 돌아가는 홈에 손가락 껴 한참을 돌렸다.

클리닝 액이 마른 것을 확인하고, VHS 테이프를 넣고 재생시켰다.


끼릭. 끼릭.


무리 없이 재생이 되는가 싶더니 다시 테이프를 씹기 시작했다.


“어휴!”

“젠장!”


3학년 선배들의 입에서 욕설이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박상은의 속도 타들어 갔다.

모든 것이 자신 탓인 것만 같았다.

테이프를 수리하기 위해 씹힌 부분을 잘라내고 스카치테이프를 붙이는 임기응변을 발휘할 수 있지만, 하재근은 쉽사리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잘못해서 스카치테이프의 끈끈한 접착성분이 헤드에 남을 경우 더 큰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짝짝짝.


음향실에서 VCR과 테이프를 놓고 씨름을 하고 있을 때, 라디오 드라마 <자전거 도둑> 공연이 끝이 났다.

추가적인 사고 없이 준비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류지호가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빙글빙글 돌리고, 손가락으로 숫자 4와 5를 차례로 펴보였다.

4번째 순서와 5번째 순서를 바꾼다는 신호다.

한수호가 대번에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라라라~


이번에도 스크린에서 축전이 나와야 할 순서다.

하지만 VCR과 VHS 테이프에 문제가 생겨 축전을 내보낼 수 없는 상황.

이재호가 흥겨운 음악을 내보냈다.

그 사이 무대세팅을 바꾸는 작업이 진행됐다.


다라란. 딴딴!


음악이 바뀌었다.

무대 위에 의자 두 개가 놓여지고, 마이크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음향실에서 한수호가 걸어 나오고, 대기실에서 류지호의 담임 연정훈이 걸어 나왔다.


짝짝짝!


관객들이 두 사람을 박수로 환영했다.

연정훈이 의자에 앉는 걸 확인한 한수호가 마이크를 잡았다.

별안간 류지호가 객석을 향해 몸을 돌려 박수를 유도하는 시늉을 했다.


짝짝짝!


앞서 보다 더 열광적인 박수가 쏟아졌다.


“여러분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왜 이런 선생님이 여고가 아니고 남고에 그것도 고리타분한 신포고에 계신지... 참고로 연정훈 선생님은 미혼이시고 나이는...”

“28살입니다.”

“일단 연정훈 선생님과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에 치열한 경쟁 끝에 인기투표 1위를 차지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십니까?”


한수호가 능숙하게 대담을 진행했다.


“쟁쟁한 선생님들도 많으신데 제가 인기투표에서 뽑혔다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영광입니다. 앞으로 제자들에게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업도 재미없게 하신다더니 소감도 참 모범적으로 말씀하시네요.”


연정훈은 모든 질문들에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진솔하고 꾸밈없는 모습에 신포고 학생뿐만 아니라 타 학교 여학생들도 호감을 표했다.

일종의 토크쇼 프로그램이다.

류지호가 특별히 사인을 낼 일이 없다.

류지호는 슬그머니 단상에서 내려와 자연스럽게 음향실로 들어갔다.

그 또한 방송제의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너 인마 여기 들어오면 어떻게 해?”

“지금 토크쇼 중이라 시간 좀 있어요. VCR이 잘못된 건가요?”

“VCR은 괜찮아. 아무래도 VHS 테이프 불량인가 봐.”

“다행이네요. 그런데 표정이 다들 왜 그래요?”


류지호가 의아해 선배들에게 물었다.


“이게 원본이라며?”

“원본이면 왜요?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봤어요? 임시방편이라도 그렇게도 하죠.”

“그러다가 VCR 헤드에 스크래치 생기거나 끈끈한 거 묻으면?”

“그것도 그러네요. 그럼 할 수 없이 원래 테이프를 틀어야겠네요.”

“아. 이런 바보들!”


그제야 하재근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쳤다.

씹힌 테이프는 방송제 진행의 편의를 위해 영상을 모아놓은 것이다.

개별적인 영상을 매번 VCR에 넣었다 뺐다하는 것이 비효율적인지라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영상 테이프가 따로 존재할 터.

굳이 망가진 테이프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코앞에 닥친 어려움에 함몰되어 시야가 좁아졌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상은아, 빨리 방송실로 달려가서 테이프들 모두 챙겨서 가져와. 하나도 빼놓지 말고.”

“예? 옛!”


박상은이 힘차게 대답하고 다시 방송실로 달려갔다.

하재근이 VCR을 살펴보는 류지호를 대견하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지호야, 잘했다.”

“모두 당황해서 그래요. 그리고 재근이형.”

“뭐든 말해.”

“상은이한테 미안하지만, 형이 재호형 서브 좀 봐주세요. 애들이 경험이 없다보니 순발력이 떨어져서 대처가 잘 안 되는 거 같아요.”

“맡겨라!”


하재근이 주먹을 불끈 쥐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우리는 뭐 도와줄 거 없어?”

“형들은 다시 객석으로 돌아가 주세요.”


선배들이 류지호에게 기운을 북돋아 줄 수 있는 말을 한마디씩 건넸다.


“알겠어. 우리만 믿어.”

“지금까지 못한 거 다 보여주고 와!”

“힘내라.”

“쫄지 말고, 즐겨.”


짐짓 태연한 척 했지만, 류지호의 속이 꽤나 타들어갔다.

다행히 대안을 찾았으니 방송제를 본궤도에 올려놔야 했다.

마침내 신포고 방송부의 진정한 방송제가 시작되었다.


턱.


류지호가 다시 PD 단상으로 돌아왔다.

대담 프로그램도 막바지다.

믹서콘솔에 자리를 잡은 하재근이 류지호를 향해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신포고 인기투표에서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하신 연정훈 선생님과의 대담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연정훈 선생님께 박수 부탁드립니다.”


팟.


강당의 불이 꺼졌다.

관객들이 기대감에 술렁거렸다.

빔프로젝터에서 축전 영상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꺄아악!

와아~


순식간에 대강당 객석에서 난리가 났다.

스크린에서 KBC 1TV에서 방영되고 있는 청소년 드라마 <사랑이 열리는 나무>의 최대성과 최수용의 모습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 출연하고 있는 최대성... 최수용입니다. 신포고등학교 6회 방송제를 축하드립니다. 방송제는 재미있게 보고 계십니까?]


스크린에서 꽃미남 탤런트 최수용이 물었다.


“네에에!”


관객들이 열광적으로 대답했다.

목소리로 듣는 것과 이렇듯 영상으로 보는 것은 천지차이다.

관객들은 일시적으로 실제 두 연예인을 마주하고 있는 착각에 빠졌다.


[신포고등학교 방송제 재미있게 봐주시고, 저희가 출연하고 있는 ‘사랑이 꽃피는 나무’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최대성씨도 한 말씀 해야죠.]


꺄아악!


여학생들이 다시 한 번 비명 같은 환호를 터트렸다.


[최대성입니다. 저도 신포고 방송제 축하드리고요. 앞으로 저희 드라마도 많이 봐주세요. 감사합니다.]


오오!


최대성이 마초남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말을 하자, 남학생들의 반응이 폭발했다.


[신포고등학교 방송부 화이팅!]


두 배우가 파이팅 포즈를 취하면서 영상이 끝이 났다.

류지호가 이재호와 눈을 맞췄다.


‘갈까요?’

‘우린 준비됐다.’

‘갑시다!’


류지호와 이재호가 눈을 대화를 나눴다.


두둥!


스크린에 ‘신포고 생활백서’라는 자막이 떠올랐다.

노래방 기기가 처음 나왔을 때처럼 자막 같이 조악했다.

이것마저도 졸업생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여의도에 있는 외주프로덕션에서 작업한 것이다.

VCR과 VHS 테이프 문제로 프로그램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지만, 지금부터는 논스톱이다.

연이어 비디오 공연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신포고 생활백서]


뮤직비디오와 함께 신포고 방송부가 야심차게 준비한 영상물이다.

소심함과 어설픈 모습으로 입학한 어리바리 신입생들이 신포고에서 생활하며 진지하고 때론 엉뚱한 고등학생의 모습으로 탈바꿈해가는 과정을 재미있게 그려낸 세미다큐멘터리 영상물이다.

미친개 교감이나 학생주임, 교련교사, 개장수 같은 캐릭터가 강한 교사들을 몰래카메라로 찍은 영상도 있고, 각종 학교 행사에서 찍힌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장면만을 따로 추려 사이사이에 삽입했다.

슬랩스틱 장면을 많이 넣은 덕분인지 여러 차례 웃음이 터졌다.

5분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러닝타임.

잠시 여유가 생긴 류지호가 객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족과 동생 친구들은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치 영화라도 감상하는 것 같았다.

진명여고 방송부들이 모여 앉은 객석이 눈에 들어왔다.

라디오 드라마를 마친 1학년들이 어느새 선배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류지호는 그 사이에 앉아있는 공다연과 시선이 마주쳤다.

우연이 아니다.

공다연은 류지호가 PD포지션을 잡는 순간부터 시선을 떼지 않고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쟤는 방송제는 안 보고, 왜 나를 보는 거지?’


공다연 뿐만 아니라 신소연 역시 류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


공다연은 지난 뮤직비디오 촬영 날부터 류지호를 달리 보게 됐다.

미팅 때부터 뭔가 또래와 다른 면모를 풍기더니,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는 전문가의 포스를 마구 분출했다.


‘쟤는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


방송 프로듀서가 꿈인 신소연이다.

그녀는 류지호의 작은 손짓 하나까지도 동경하는 눈빛으로 지켜봤다.


‘쟤가 진짜 1학년 맞는 거야?’


선배들도 저 위치에 서면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텐데, 류지호는 크게 긴장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도저히 자신 또래의 고등학생으로 보이지 않았다.

암튼 관객들은 신포고 생활백서를 즐거운 표정으로 관람했다.


다당. 다당!


느닷없이 ‘담배가게 아가씨’ 전주가 흘러나왔다.


짝짝짝짝!


류지호가 이번에도 객석을 향해 박수를 유도했다.


뚝 -


기타 반주가 끊어지고, 강당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몇 초의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팟!


예고 없이 빔프로젝트에서 스크린을 향해 빛이 쏘아졌다.


불쑥.


화면에 연정훈이 배를 벅벅 긁으며 나타났다.

부스스한 연정훈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입을 연다.


[원석아~ 88라이트 하나 사와라.]

[삼촌, 담배 심부름 좀 그만 시켜요! 왜 만날 나한테 심부름 시켜!]

[우리 집에서 만만한 게 원석이 너 밖에 없잖아.]


어색하다.

흔히 발연기라고 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관객들은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 없고,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투덜투덜.


최원석이 집을 나와 골목길을 걸어간다.

구멍가게에 도착한 최원석은 담배를 파는 구멍에 돈을 넣고, ‘88라이트 하나요.’ 하고 안쪽에 대고 소리친다.

그때 담배, 거스름돈과 함께 구멍 밖으로 삐죽 나오는 희고 가는 여자의 손가락.

손톱에 봉숭아물이 들어있다.

최원석이 담배 판매대 구멍 앞에서 망설이다가 이내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가게 문턱에 선 최원석은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굳어진다.


‘금연광고인가?’


관객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때.


두둥!


‘담배가게 아가씨’의 흥겨운 전주가 스피커를 때린다.

이어 공다연의 청순하면서 가련한 여성미를 뽐내는 영상이 나오고, 본격적인 뮤직비디오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뮤직비디오를 감상했다.

연출을 맡았던 하재근은 다소 찌질한 가사 내용을 우아하게 포장하고 싶어 했다.

류지호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찌질하면 어때.

날 것 그대로.

방송제에 오는 관객들은 돋아나는 새싹만 봐도 까르르 웃을 것 같았고,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처럼 순수했다.

그렇기에 억지로 포장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올 뿐이다.

아마추어가 프로 흉내를 내다보면 분명 어색한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류지호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산과 능력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멋 부리려고 하기보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뮤직비디오가 되기를 바랐다.


하하하.

짝짝짝.


공다연에게 딱지를 맞아 울부짖는 한수호에서 빵 터졌고, 공다연에게 고백하기 위해 갖은 짓을 다 벌이는 최원석에게는 격려의 박수가 터졌다.

공다연이 관객을 향해 예쁘게 웃어 줄 때는 남학생들이 휘파람을 불고 환호하며 요란을 떨었다.

그 모든 상황은 류지호가 미리 3학년 선배들에게 부탁해 의도한 것들이다.

관객 속에서 은근히 바람을 잡으라는.

선배들은 류지호가 주문한 바람잡이 임무를 백퍼센트 수행했다.

류지호는 PD단상에 우두커니 서서 관객들의 반응을 즐겼다.

그런 류지호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방송부장 박상은.

그는 질투심과 호승심, 자책감 등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멍하니 류지호를 바라봤다.


‘후우. 내 자리였는데...’


박상은이 애써 아쉬움을 털어냈다.

자신이 저 자리에 서있었다면, 상황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저처럼 여유롭게 진행할 자신이 없었다.

류지호가 연출한 코믹액션 장면이 스크린에서 상영되었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엄마 젖 더 먹고 와라잉~]


국어책을 읽는 듯한 고우찬의 대사가 불쑥 튀어나왔다.

엑스트라로 출연한 험악한 인상의 선배들이 ‘유머 1번지’ 스타일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선보여 관객들의 배꼽을 빼놨다.


[나를 보며 웃어주는 아가씨 나는 정말 사랑해 아~ 나는 지금 담배 사러 간다.]


석양을 배경으로 걸어가던 최원석이 별안간 튀어 올라 발바닥을 부딪치는 모습에서 뮤직비디오가 끝이 났다.


하아~


관객들의 아쉬운 탄성이 강당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뮤직비디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빠들 나한테 혼 좀 나볼래요!]


공다연이 양손을 허리에 척 올리고 화면 정면을 응시하는 장면이 나왔다.

끝난 줄 알았던 뮤직비디오의 에필로그다.

공다연과 동네불량배들의 액션 장면.

공다연이 엑스트라가 날리는 주먹을 옆으로 피하며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팔을 꺾어 버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험악한 인상의 고우찬의 낭심을 힘차게 걷어차는 것까지.

공다연에게 혼쭐이 난 고우찬이 꼬리를 말고 달아난다.


짝짝!

휘이익!


객석에서 박수와 휘파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공다연이 달아나는 불량배들을 보며 탁탁 손을 털면서 카메라를 바라본다.


[오빠들~ 새나라의 어린이는 어떻게 한다고요?]


그리고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끝.


류지호의 주장으로 찍은 에필로그까지 뮤직비디오 상영이 끝이 났다.

청순가련의 캐릭터 공다연의 마지막 반전은 그녀의 매력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저 여자애 연예인이야?”

“배우인가 봐. 진짜 예쁘다.”

“나 쟤 아까 봤어. 라디오 드라마 하던 여자 얘잖아.”

“쟤 진명여고 다녀. 방송부일 걸.”


관객들이 공다연을 두고 떠드는 광경이 객석 곳곳에서 벌어졌다.


‘괜히 다연이 캐릭터를 살려줬나?’


방송제의 주인공이 공다연이 된 것 같았다.

하재근은 방송부 위주의 콘티를 짰었다.

주인공은 당연히 최원석.

류지호는 카메라를 잡는 순간 뮤직비디오가 달라졌다.

류지호는 공다연이 그저 예쁜 여자아이, 병풍으로 남길 원하지 않았다.

공다연도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그녀가 지나치게 예뻐서?

천만에.

비록 가사를 그대로 영상으로 옮기는 뮤직비디오라 하더라도 반전과 드라마가 있으면 좋다.

이런 것이 일종의 의외성이다.

관습처럼 인지했던 것이 뒤집어 질 때 관객은 재미를 느낀다.

청순하고 가련하게 그려졌던 가녀린 소녀가 험악한 사내들을 통쾌하게 제압한다.

교과서적인 반전.

류지호는 자잘한 에피소드로 쌓은 이야기에 방점을 찍어줬다.


“......!”


공다연은 최종 편집되어 상영된 뮤직비디오를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그저 자신의 미모를 써먹는 것으로 끝인 줄로만 알았던 뮤직비디오에서 자신은 캐릭터가 있었다.

또한 당당히 주인공이었다.


“류지호... 좋은 녀석이었어. 호호호.”


그렇게 신포고 방송부가 준비한 모든 프로그램이 끝이 난 줄로만 알았다.


작가의말

행복한 밤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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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이런 날도 오는구나... (1) +4 22.01.19 10,026 203 21쪽
56 Begin again. (4) +5 22.01.18 9,702 21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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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Begin again. (2) +8 22.01.17 9,742 211 21쪽
53 Begin again. (1) +11 22.01.17 10,285 200 24쪽
52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6) +14 22.01.16 9,808 211 19쪽
51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5) +8 22.01.15 9,516 194 19쪽
50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4) +15 22.01.15 9,544 186 20쪽
49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3) +16 22.01.14 9,604 192 22쪽
48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2) +12 22.01.14 9,568 196 21쪽
47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1) +6 22.01.13 9,838 194 21쪽
46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3) +7 22.01.13 9,970 204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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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1) +14 22.01.12 10,827 211 24쪽
43 Carpe diem... (4) +12 22.01.11 10,447 215 19쪽
42 Carpe diem... (3) +14 22.01.11 10,389 228 18쪽
41 Carpe diem... (2) +12 22.01.10 10,534 236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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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얘는 혼자 어디 딴 세상이라도 살다 왔나? +8 22.01.09 10,975 23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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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530 234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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