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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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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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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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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이런 날도 오는구나...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는 괴로운 시련처럼 보이는 것이 뜻밖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검정고시학원에서의 생활이 그랬다.

학원수업은 신포고 수업과 달리 숨통이 트였다.

류지호와 고우찬은 오전반 수업을 들었다.

수업 종료는 오후 1시.

검정고시학원은 빡빡하게 학생을 통제하지도 공부만 강요하지 않는다.

수준도 높지 않았다.

출석 확인 직전 고우찬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어, 그게······.”


류지호의 물음에 고우찬이 말을 얼버무리며 서둘러 교재를 꺼내 책상에 늘어놓았다.

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너!”


류지호는 딴청을 피우는 고우찬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나중에 이야기 하자.”


그 뻔뻔한 얼굴에 한소리 하려던 걸 참는 류지호였다.

류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수업에 집중했다.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의 내용들이라 류지호는 이미 배운 것들을 복습하는 기분이었다.

반면에 고우찬은 처음 듣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업 내내 잔뜩 인상을 썼다.

고졸 검정고시는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국사의 필수과목과 선택과목 1과목으로 총 7과목을 보는데, 한 과목당 100점 만점으로 4지선다 20문항을 본다.

전 과목 평균 점수가 60점 이상이면 합격하는 절대평가다.

이 당시에는 과락이라고 해서 40점미만의 과목이 있으면 낙제다.

고졸 검정고시의 경우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의 문제가 출제되는데, 난이도는 쉬운 편이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친 어지간한 인문계 학생은 어려움 없이 합격할 수 있는 정도.

안타깝지만, 고우찬에게는 불가능한 임무(Mission : Impossible)다.

어느새 모든 수업이 끝났다.

고우찬은 학원에 등록하고 벌써 한 달 가까이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힘내. 점점 좋아질 거야.”


류지호가 툴툴거리는 고우찬을 위로했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애들이 눈에 들어왔다.

앳된 얼굴의 십대로 보이는 여자애들이 화장을 하고 있으니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껌을 질겅질겅 씹던 여자애가 도끼눈을 뜨고 류지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뭘 봐? 한 번 자빠뜨리고 싶어?”


류지호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훠이 훠이. 애들은 가라.”


여자애가 손을 저으며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고우찬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킥킥거렸다.


“애들은 꺼지란다. 애들인 우리는 이만 가자.”


고우찬이 우스워 죽겠다는 얼굴로 말하며 가방을 챙겼다.


“담배 한 대 빨고 올게. 좀만 기다려.”


고우찬이 휘적휘적 팔자걸음으로 학원 건물 뒤편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류지호는 학원 현관 난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멍하니 학원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학원 건물 뒤편에 나무로 만든 사각형 모양의 스탠드 재떨이가 군데군데 놓여있다.

많은 이들이 재떨이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다.

패거리끼리 모여 담배를 태우는 날라리들도 있고, 홀로 떨어져 태우는 성인도 몇 명 보였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여자애들도 몇 명 보였다.

고우찬이 막 담배를 피워 무는데, 한 덩치 하는 남자가 시비를 걸어왔다.


“어이! 네가 광렬이 깬 신포고 고릴란가 하는 놈이냐?”


후우.


고우찬은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내품으며 시비를 걸어온 녀석을 훑어봤다.

가슴두께와 배 둘레가 똑같이 두툼한 체격의 자신 또래로 보였다.

시비를 건 남학생은 기계공고 럭비부 출신의 김재욱이란 녀석이다.

고우찬이 좋은 말로 타일렀다.


“오늘 첫 담배거든. 엉까지 말고 그냥 가던 길이나 가라.”


김재욱이 침을 퉤 뱉고는 바짝 다가섰다.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담배 냄새가 훅 풍겨왔다.


“아, 시팔. 마음에 안 드네.”


고우찬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리고는 김재욱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김재욱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마주 노려봤다.


우드득.


김재욱이 목을 좌우로 까닥거리며 고우찬을 도발했다.

날라리들이 대치하고 있는 둘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이빨로 죽이지 말고, 한 판 떠!”


일부러 고우찬을 도발한 김재욱이 당장 싸움이라도 벌일 듯 자세를 잡았다.

고우찬은 기분이 팍 상했다.

몇 번 빨지도 않은 담배를 땅에 던졌다.


“오오.”


한 판 붙을 것 같은 분위기에 날라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세상에서 불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다는 싸움 구경이 눈앞에서 펼쳐지려 하고 있다.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고우찬과 김재욱 둘 다 만만치 않은 신체를 뽐냈다.

190Cm에 가까운 신장, 적당한 근육질의 고우찬.

그에 비해 작은 신장이었지만, 럭비로 다져진 단단한 체격의 김재욱.

쉽게 승패를 점칠 수 없어 보였다.

하지만 싸움은 모두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됐다.

볼썽사납게 주먹을 휘두를 것도 없었다.


퍽!


고우찬이 놈의 면상의 태권도 뒤후리기를 먹여줬다.

어쭙잖은 개수작을 부린 대가는 컸다.

정확하게 얼굴을 가격당한 김재욱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털썩.


이내 바닥에 뻗었다.

기절한 것이다.


“......!”


박진감 넘치는 싸움을 기대했던 날라리들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류지호가 구경꾼 사이를 헤치고 걸어왔다.

고우찬이 슬그머니 딴청을 피웠다.

기절한 김재욱 옆에 류지호가 쭈그리고 앉았다.


툭툭.


류지호가 김재욱의 뺨을 가볍게 쳤다.


“기절 안 한 거 아니까. 그만 눈 떠.”

“......”

“쪽팔려서 그러냐?”

“......”

“계속 바닥에 누워있는 게 더 모양새 빠지지 않겠냐?”

“시팔!”


김재욱이 욕설을 내뱉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골이 흔들리는지 몇 번 고개를 털었다.

류지호가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 김재욱이 눈동자만 돌려 구경꾼들을 훑었다.


“연하대에서 박광렬이 떨거지들하고 17대 1로 붙어서 묵사발 냈다고 하더니... 너 좀 친다?”


김재욱이 짐짓 대범한 척 굴었다.

류지호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난 류지호. 저 놈은 고우찬.”


김재욱이 류지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기공 럭비부 김재욱이다.”

“반갑다. 그럼 정신 차렸으니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자. 동의 해?”

“으, 응?”

“그냥 덮자고, 비긴 걸로 해.”

“비긴 걸로?”

“괜히 학원 관계자가 알아봐야 쫓겨나기 밖에 더 하겠냐?”


고등학생에게는 고등학생의 룰이 있듯이 학교 밖의 십대들에게는 그들만의 룰이 있다.

흔히 말하는 ‘꼰대’를 끌어들이는 건 옳지 않다.

어른의 손 빌려 코푸는 건 양아치들 사이에서도 금기다.


“그렇게 합의 본거다.”


조용히 없던 일로 마무리 짓는 걸로 상황 끝.

김재욱이 뭐라 떠들기 전에 류지호와 고우찬이 자리를 떴다.


다음날에도 수업은 이어졌다.


“수업 끝! 학원에서 폭력사건이 발생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


강사가 고우찬을 지그시 바라보며 경고를 남겼다.


우드득.


고우찬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목을 풀 때, 등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공부를 좀 못 한 거지 인간 말종은 아닌데 말이지.”


류지호가 돌아보자 김재욱이 건들거리며 서있다.


“너 담배 피냐?”

“아니.”


고우찬이 끼어들었다.


“담배 꾸러 왔냐?”

“넌 피지? 딱 보니까 졸라 피게 생겼다.”

“새끼가.... 어제 피는 거 봤잖아.”

“친하게 지내자. 지금 까치 있어?”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야?”

“어제 봤잖아.”


김재욱의 뻔뻔한 대답에 순간 고우찬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런 둘을 향해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수업 하나 남았어. 끝나고 펴.”

“들었지?”


김재욱이 류지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우찬에게 물었다.


“얘가 대장이냐?”

“우리 폭력서클 아냐, 새끼야!”

“그럼 학교 왜 잘렸어? 뽀대기 불다 걸렸냐?”


뽀대기는 본드 흡입을 일컫는 양아치들의 은어다.


“똥개 잡아먹었다고 퇴학시키더라.”


박광렬의 별명이 똥개였다.


“쉬는 시간 끝났다. 너희 강의실로 돌아가.”

“이따 주안에서 술 한 잔 안 할래?”

“술?”


고우찬이 반색했다.

그러자 류지호가 고우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고우찬이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담에 하자.”

“암튼 수업 끝나고 건물 뒤에서 보자.”


쪽쪽.


김재욱이 과장스럽게 담배피우는 시늉을 해보이고는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어딘지 김재욱의 행동들이 익숙했다.

익살스런 표정에 과장된 몸짓.

함께 어울리는 무리에 한 명씩은 꼭 있는 개그캐릭터.


“......!”


패가 나누어져 서먹서먹한 같은 검정고시반의 학원생들.

몇몇이 짝을 이뤄 대화를 나누었지만 왁자지껄하게 떠들지는 않았다.

류지호는 자신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노랑머리의 날라리 여학생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들의 입가는 비웃는 것 같은데 눈빛에는 호감이 서려있다.


‘에허~’


류지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빨리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학원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똥파리, 날파리, 쇠파리, 초파리 등 온갖 파리들이 주변에 들끓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류지호가 검정고시반에 들어서자, 몇몇 급우들이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학원생들과 어느 정도 친분이 쌓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강의실에 파벌 비슷한 것이 생겼다.


찡긋.


노랑머리로 염색한 여자애가 윙크를 해 왔다.

어제 노랑머리 여자애가 일일찻집 티켓을 팔며 데이트 신청을 해왔다.

거절했다.

어차피 8월에 검정고시를 보고 나면 이어지지 않을 인연들.

깊이 교우를 쌓을 이유가 없었다.


“왔냐.”


옆 책상에 엎어져있던 고우찬이 고개를 들며 인사했다.

책상에 눌어붙어 있던 침이 볼에 붙어 길게 늘어졌다.


“침 좀 닦아라.”

“아, 어.”


손등으로 대충 훔치는 고우찬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류지호는 따끔하게 충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술 좀 그만 먹어!”

“술을 마셔야 인생의 참맛을 안다고 그랬어.”

“어떤 놈이?”

“우리 아빠.”


김재욱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어이, 프랜드!”


김재욱은 자기 강의실도 아닌데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류지호는 그런 김재욱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생긴 것만 봐서는 고우찬과 아주 잘 어울렸다.

속된 말로 양아치 기질이 물씬 풍겼다.

이제 열여덟인 주제에 말끝마다 ‘왕년에 내가’를 입에 달고 살았다.

럭비부였던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그곳에서 잘린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는 사람치고 사연 없는 이 없다.

김재욱은 시합 중에 상대팀 선수와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까지 벌였다고 했다.


“그 X새끼 때문에 징계를 먹어서 올해 시합을 못 뛸 판이었거든. 너무 억울하고 분한 거야. 그래서 그 새끼 학교로 쳐들어갔어. 어떻게 되긴. 미리 챙겨간 빠이프렌치로 대가리를 찍어버렸지.”

“그거 살인미수 아니냐?”

“감독·코치가 잘 무마했어. 나중에 지들도 문제가 될까봐서 운동 중에 다친 걸로 어찌어찌 땜방한 모양이더라.”


시간이 흘러 그런 행동을 한 자신이 쪽팔렸다고 했다.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해 해서는 안 될 짓을 벌였다고.


‘자식이, 분노조절장애도 아니고 렌치로 사람을 찍냐? 공고 애들이 막나간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진짜로 그런 돌아이가 있는 줄은 몰랐네.’


김재욱과 꽤 친해졌다.

고우찬이 구박을 해도 김재욱은 끈질기게 강의실로 찾아왔다.

게다가 워낙 활달한 녀석이라 가까워지기가 쉬웠다.

혼자 떠들고, 혼자 웃고, 혼자 만족하는 타입.

일주일을 어울려 본 김재욱은 나쁜 녀석은 아니다.

그렇다고 착한 녀석도 아니다.

적당히 약삭빠르고.

적당히 의리가 있는.

류지호가 내린 최종평가다.


“잠 좀 자게 저리로 좀 가라 새끼들아.”


고우찬이 짜증을 부렸다.

류지호 주변으로 학원생들이 모여 이러쿵저러쿵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검정고시 학원에 류지호가 신포고에서 공부 좀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당연히 김재욱이 떠벌인 것이다.

몇몇 아이들이 모르는 것이 있을 때면 류지호에게 찾아와 묻곤 했다.

류지호는 공부에 열의가 있는 학원생에게는 귀찮아하지 않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이들은 분명 학업에서는 남들보다 뒤쳐진 이들이다.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 시선에서는 문제아로 보일 수 있다.


‘성적이 꼭 이 애들의 인성이나 행동을 대변하는 건 아니지.’


물론 밑바닥 성적이 말해 주듯 형편없는 놈들도 많다.

지금 시비를 거는 이런 놈처럼.


“야, 고릴라.”


껄렁하게 보이는 양아치 녀석이 고우찬의 다리를 툭 하고 찼다.


“또 뭐야?”

“건물 뒤로 나와.”


진부한 대사다.

헌데 녀석들은 매우 진지했다.

마치 인천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학원폭력을 그린 만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우찬아, 갔다 와.”


류지호의 태연한 말에 고우찬은 깜짝 놀랐다.


“안 말려?“

“가서 적당히 충고 좀 해줘. 일 크게 키우지 말고.”

“진짜지?“

“참으면 계속 귀찮게 굴 거야.”

“알았어. 아무도 기어오르지 못하게 제대로 밟아줄게.”

“밟지는 말고.”

“그럼 꺾어줄게.”


고우찬이 양아치와 강의실을 나서자, 김재욱이 재빨리 따라갔다.

그렇게 한 동안 고우찬은 주안 인근 학원가의 날라리와 양아치들의 도전을 받았다.

초창기에는 사고를 치지 않으려고 했다.

고우찬은 함부로 주먹을 쓰지 않았다.

특별히 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은 싸움으로 번지지 않았다.

험악한 인상발로 시비 붙는 일도 별로 없었고.

그런데 김재욱을 깬 이후로 인근의 양아치들이 파리처럼 꼬여들기 시작했다.

고우찬 입장에서 이런저런 것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이 마음대로 실력 발휘를 해도 되는 환경이다.

고우찬은 재미있어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가진 힘을 활용하지 않는 것은 병신이지.”


고우찬은 딱히 남의 위에 군림할 생각은 없지만,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어느덧 주안 학원가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대장이 되어갔다.

양아치를 잡아먹는 괴물 고릴라.

고우찬은 건드리면 안 되는 상대라는 인식이 박히기 시작했다.


퍽!


용감하게 달려들던 또 한명의 양아치가 날아갔다.


“호식아!”


호식이라 불린 양아치는 나름 주안에서 이름난 놈이었다.

그런 호식이 마저 허무하게 당하자, 좀 논다는 녀석들은 현실을 완전히 깨달았다

고우찬은 이길 수 없는 상대다.

더 이상은 고우찬을 상대로 싸울 자신이 없었다.


씰룩.


고우찬의 험상궂은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감정이 양아치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종지부를 찍을 차례.


“꺼져. 새끼들아! 다시 귀찮게 굴면 그때는 이 정도로 안 끝나!”


며칠 전만 하더라도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양아치였다.

초라한 몰골로 주안 학원골목에서 사라졌다.

류지호에게 시비를 거는 놈도 있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상대를 할 생각이 있었다.

다만 괜히 양아치들과 드잡이 하는 것도 꼴사나운 짓이었고, 시간낭비일 뿐.

사실 김재욱 선에서 해결이 되었다.

류지호까지 휘말릴 일은 없었다.

고우찬은 검정고시 학원 일대에서 유명인사 됐다.

매일 함께 붙어 다니는 류지호 역시 덩달아 위상이 올라갔다.

둘은 검정고시 학원에서 만큼은 싸움 좀 하는 짝패로 인식되었다.


“이제 주안 먹었으니까, 석바위 먹어야지.”

“먹긴 뭘 먹어. 빵이나 처먹어.”


어느 샌가 김재욱은 고우찬의 꼬붕이 되어있었다.

고우찬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승승장구하며 철벽의 고릴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 유치한 별명을 고우찬은 몹시 싫어했다.

차라리 철벽의 킹콩으로 불러 달라나.

어쨌든 그러면 뭐하나.


“우찬아, 영어단어 다 외웠어?”

“응? 응. 아, 아니.”

“이따 사진관 가서 쪽지 시험 볼 거야. 30개 외워둬.”

“내일 봐. 내가 오늘 태권도를 열심히 했더니 좀 피곤해.”

“시끄럽고. 정각 5시에 영어단어 쪽지 시험 볼 거야.”


고우찬은 류지호 앞에서 만큼은 가련한 인생이었다.


“오늘은 10개만 외우면 안 될까? 30개는 너무 많아.”

“그럼 20개.”

“그거나 그거나!”


류지호는 골목대장 노릇하는 고우찬을 보며 조금만 더 스스로를 귀하게 여겨 줬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여간 교감 그 인간 때문에....!’


다시 한 번 신포고 교감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한껏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별안간 고우찬이 김재욱을 끌어들였다.


“재욱이 너도 쪽지시험 봐.”

“난 왜? 안 해. 싫어!”


김재욱이 펄쩍 뛰며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다.


“우리랑 놀려면 지호 말 잘 들어야 돼.”

“대장은 너잖아.”

“우린 그런 거 없어. 친구야 친구!”


친구에 의해 친구는 바뀐다.

가족보다 친구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 시기.

친구의 한 마디로 앞으로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시기다.

지금의 이 시기는 류지호가 한 번 살아봤던 시절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절이기도 했다.

얼마든지 자신 주변의 사람들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

자신이 변한 것처럼.

류지호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지호 저 새끼, 갑자기 기분 나쁘게 웃어.”


김재욱이 구시렁거렸다.


“냅 둬. 지호 저러는 거 앞으로 자주 볼 거야. 그냥 그러려니 해.”


고우찬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 ❉


답동의 카톨릭회관의 지하 전시장.

인천지역 사진작가들의 정기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다소 어둑한 실내에는 작품을 강조하기 위한 스폿 조명만이 빛을 발하고 있다.

인천지역의 프로와 아마추어를 망라한 사진작가들의 작품이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며 전시되어 있었다.

그곳에 박상우와 인연이 있는 류지호와 김준우가 초대되었다.

극적인 상황을 포착해 생생하게 담아낸 사진.

다양한 건축물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찍은 사진.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어떤 작가는 생명의 생동감을 표현했고, 어떤 작가는 어딘지 우울한 정서를 담아내기도 했다.

박상우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모습을 흑백사진에 담았다.

웨딩사진을 우습게보면 안 된다.

웨딩연출사진은 고도의 사진기술과 예술성을 필요로 한다.

김준우가 박상우의 흑백사진 앞에서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김준우가 충분히 사진을 즐기도록 내버려두고 류지호 홀로 전시장을 돌았다.


“......!”


류지호가 한 사진 앞에서 멈췄다.

소래 염전으로 보이는 곳에서 늙은 인부가 나무로 만든 고무래로 소금을 긁어모으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롱 샷(Long Shot)으로 찍힌 이 컬러사진은 늙은 인부 너머 저 멀리 붉게 타오르는 석양이 인상적이다.


“사진이 맘에 들어요?”


옆에서 들린 소리에 류지호의 고개가 돌아갔다.

노타이 와이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차려입은 중년남자가 사진에 시선을 두고 있다.

류지호가 그를 향해 사진에 대한 감상을 표현했다.


“쓸쓸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생동감이 느껴지네요.”

“원래는 석양이 멋들어지기에 풍경사진으로 찍으려고 했는데, 저기 고무래를 미는 할아버지까지 괜히 앵글에 넣고 싶더군요.”

“이 작품을 찍은 작가님이세요?”

“작가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에요. 취미로 찍고 있어요.”


류지호가 중년남자와 작품을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박상우가 다가왔다.


“지호하고는 이미 인사를 하셨나보군요?”


류지호가 의아한 얼굴로 박상우를 바라봤다.


“이런, 지호가 이사님이 뭘 하시는 분인지 몰랐나 보구나.”


류지호는 영문을 몰라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여기 정 이사님은 신신예식장에 계셔. 우리 인천사진작가협회 명예회원이시지.”

“아, 신신예식장....”


중년남자는 인천에서 가장 잘나가는 신신예식장의 정종택 이사였다.

부모가 이선으로 물러나고 현재 예식장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웨딩업계에서도 유명인사다.

류지호가 얼른 주머니를 뒤져 명함홀더를 꺼냈다.

공손하게 명함 한 장을 정 이사에게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다시 인사드립니다. 가온웨딩 류지호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정종택이에요.”


정 이사가 명함에 적혀 있는 영문 소개를 보고 류지호에게 물었다.


“호오~ 웨딩비디오를 찍어요?”

“이번 봄 시즌에 맞춰 친구들하고 창업했습니다.”

“벌써 결혼식 비디오가 인천까지 내려왔나요?”

“저희가 처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라 그런지 유행을 캐치하는 게 빠르군요.”

“일종의 청년창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년이 창업한 회사라... 패기가 느껴지는 표현입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정 이사는 바쁜 사람이다.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류지호는 그들에게 정 이사를 내줘야 했다.


“류 실장, 언제 우리 예식장 방문하게 되면 내 사무실로 와요. 오늘 못 다한 이야기 나눠봅시다.”


정 이사는 마지막까지 점잖고 매너가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일간 찾아뵙겠습니다.”


류지호는 나중을 기약하며 정 이사와 헤어졌다.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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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충성을 다 하겠슴다! (3) +7 22.01.25 9,322 204 24쪽
64 충성을 다 하겠슴다! (2) +8 22.01.24 9,539 195 21쪽
63 충성을 다 하겠슴다! (1) +10 22.01.22 9,871 214 20쪽
62 Whiplash...! (2) +7 22.01.21 9,484 202 21쪽
61 Whiplash...! (1) +9 22.01.21 9,708 208 27쪽
60 말할 수 없는 비밀. +12 22.01.20 9,703 217 21쪽
59 이런 날도 오는구나... (3) +3 22.01.20 9,625 206 21쪽
58 이런 날도 오는구나... (2) +4 22.01.19 9,732 201 26쪽
» 이런 날도 오는구나... (1) +4 22.01.19 10,039 203 21쪽
56 Begin again. (4) +5 22.01.18 9,714 214 20쪽
55 Begin again. (3) +7 22.01.18 9,593 216 24쪽
54 Begin again. (2) +8 22.01.17 9,755 211 21쪽
53 Begin again. (1) +11 22.01.17 10,297 200 24쪽
52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6) +14 22.01.16 9,821 211 19쪽
51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5) +8 22.01.15 9,528 194 19쪽
50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4) +15 22.01.15 9,557 186 20쪽
49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3) +16 22.01.14 9,619 192 22쪽
48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2) +12 22.01.14 9,586 196 21쪽
47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1) +6 22.01.13 9,857 194 21쪽
46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3) +7 22.01.13 9,986 204 22쪽
45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2) +20 22.01.12 10,192 204 24쪽
44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1) +14 22.01.12 10,841 211 24쪽
43 Carpe diem... (4) +12 22.01.11 10,461 215 19쪽
42 Carpe diem... (3) +14 22.01.11 10,406 228 18쪽
41 Carpe diem... (2) +12 22.01.10 10,547 236 20쪽
40 Carpe diem... (1) +12 22.01.10 10,925 224 20쪽
39 얘는 혼자 어디 딴 세상이라도 살다 왔나? +8 22.01.09 10,989 239 20쪽
38 연풍(戀風). +12 22.01.08 11,017 231 17쪽
37 영화밥 먹고 살 팔자... (6) +7 22.01.08 10,817 224 22쪽
36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558 234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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