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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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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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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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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2.01.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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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Carpe diem...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사인방이 다시 한 번 김준우의 집으로 모였다.

2학기 중간고사를 대비한 합숙에 들어갔다.

이 합숙에 대해 어른들은 일종의 스터디그룹으로 받아들였다.

독서실에서 밤을 샌다고 해도 허락할 판이다.

믿을 수 있는 친구의 집이니 흔쾌히 외박을 허락해 주었다.

열심히 간식을 만들어 나르는 조성자는 아이들이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다.

외아들이 벌써부터 술담배를 하고, 사진에만 푹 빠져있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친구라는 녀석들이 영 못미더웠던 것도 사실이다.

비록 시험기간에 한정이 되었지만,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공부한다는 것을 보면서 아들과 친구들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사인방 먹으라고 내오는 간식과 식사가 풍성해지는 건 당연했다.


“우찬이는 이걸로 공부해.”


류지호가 노트를 내밀었다.

꼴찌면 어떠냐는 태도를 보이는 고우찬이다.

녀석만을 위한 맞춤형 암기과목 노트였다.

반드시 나올 법한 것만 따로 추렸다.

이 노트만 암기한다면, 적어도 꼴지는 면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이거 한번 풀어봐.”

“네가 뭔데 쪽지시험을 보고 지랄이야?”

“50점 넘으면 햄버거 세트 하나.”

“제일 비싼 거 두개에 콜라 추가!”


간단하게 치른 고우찬의 쪽지 시험결과는 형편없었다.


“크윽. 이 돌대가리.“


황재정의 입에서 낮은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류지호의 분노에 찬 시선이 고우찬을 향했다.

없는 시간 있는 시간을 쪼개 암기과목 노트를 만들었건만.

고우찬은 건성이다.

뒤통수가 따가웠던 것인지 류지호를 돌아본 고우찬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미이안!”


류지호는 고우찬의 성의 없는 사과에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꾹 눌러 참기로 했다.


‘그래, 고우찬! 기왕 이렇게 된 거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류지호가 고우찬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찬아.“

“으응?“

“빨리 외울 필요 없으니까, 천천히 신중하게 외워 봐.”

“그, 그럴까?”

“잠자기 전까지 1시간마다 쪽지 시험 볼 거니까 차근차근 외웠으면 좋겠어.”

“그냥 잠자기 전에 빡세게 보면 안 될까?”


현재 시간은 6시.

시험기간에는 12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사실 아무리 고우찬의 머리가 나빠도 겨우 두 장을 외우는데 5~6시간은 아니다.

고우찬은 친구들이 공부하는 동안 만화책을 보거나 잠을 퍼질러 자거나 담배를 피우러 나가 어딘가에서 태권도 발차기를 연습하는 것으로 시간을 모두 허비할 터.

1시간마다 쪽지시험을 보면 몇 개라도 외우게 되지 않을까.

주의가 산만한 고우찬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시끄럽고. 자기 전에 아무 때나 생각나면 쪽지 시험 볼 거야.”


잠시 햄버거 세트를 포기할까 고민하는 고우찬이다.

뭐가 되었든 자신을 위해 암기노트까지 만들어 준 친구의 부탁이다.

고우찬도 더는 뻗댈 수가 없었다.

피곤했다.

사인방이 한 공간에서 장시간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어르고 달래느라 진이 쭉쭉 빠지는 기분이다.


‘나중에 졸업하고 보자. 내가 이자까지 톡톡히 받아주마.....!’


❉ ❉ ❉


방송부는 중간고사 기간을 앞두고, 가급적 요란한 음악은 자제했다.

교감이 면학분위기 조성을 위해 차분한 음악을 주문했다.

아니, 명령했다.

김석민이 진행하는 건전가요 시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오늘은 클래식 음악 가운데도 긴 편에 속하는 두 곡을 선곡해 틀었다.

말러의 ‘교향곡 3번‘과 리스트의 ‘산 위에서 듣는 것’ 이었는데, 20분이 넘는 대곡이다.


“중간에 음악 끊지 말고 그냥 놔둘 거야. 클로징 멘트하기 전까지 편하게 있어.”


류지호의 말을 듣자마자, 김석민이 스튜디오 부스를 빠져나왔다.

김석민은 곧장 수학참고서를 펼쳤다.

류지호가 말을 걸었다.


“문과 갈 거냐?”

“응.”

“경영학과 가려고?”

“그렇지 뭐.”

“이과 가라.”

“왜?“

“내가 볼 때 너는 공부하는 거 좋아해. 지식욕과 탐구심도 있고. 연구하는 걸 무척 좋아하는 타입이야. 그렇지 않냐?”

“야! 또 왜 그래?”

“이과 가서 컴퓨터 공학 공부해봐. 서울대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공돌이는 싫어.”

“컴퓨터 공학 전공자가 왜 공돌이야. IT, Information Technology! 앞으로 몇 년 만 지나면 정보통신 기술이 세계를 지배한단 말이야. 너처럼 머리 좋은 놈이 기업연구소에서 통계나 작성하고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는 경제 분야 연구 붙잡고 앉아있어 봐야 시간 낭비야.”

“정보통신 기술? 앨빈 토플러가 말한 정보화 시대?”

“그래. 20년만 지나면 세상은 지금은 상상하지도 못할 것들로 가득 찰 거래.”

“영문 타임지 본다고 지금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거야?”


김석민이 가소롭다는 투로 대꾸했다.

하지만 류지호는 나름 진지했다.


“IT 기술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분야가 거의 존재를 하지 않게 될 거라더라. 내가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투자회사 회장님하고 펜팔하는 거 알지? 그 회장님이 정보통신 분야가 유망하다고 강조 또 강조하시더라고.”


류지호가 IT 분야에 관심이 많다고 한 적은 있었지만, 제임스가 강조한 적은 없다.

잘 나가는 미국인이 한 말에는 관심을 가져줄까 싶어서 가져다 붙였을 뿐.


“그렇게 전도유망하면 네가 하면 되겠네.”

“친구가 진심으로 조언하면 듣는 척이라도 좀 해봐라.”

“난 다른 놈들하고 달라. 네가 공상과학소설을 아무리 그럴듯하게 써도 하나도 재미없어.”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이 내놓은 답이 항상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똑똑한 사람은 본인이 정한 답이 아니면 정답이 아니라는 아집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크다.

바로 지금의 김석민처럼.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

“흥.”


김석민이 콧방귀를 뀌며 수학참고서에 고개를 처박았다.


“자식이.... 모두 함께 잘 먹고 잘 살면 좀 좋아.”


귓등으로 흘려듣는 김석민의 태도에 류지호는 진한 아쉬움이 들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누군가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가는 삶을 산다.

그 길에서 벗어난 곳으로 발을 들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만의 인생 노트가 분명 있을 텐데.

사람들은 누군가의 정답노트를 따라가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누군가의 정답이 내게도 정답이란 보장이 없는데 말이지.’


✻ ✻ ✻


“우헤헤. 내 밑으로 80명 깔았다.”

“간신처럼 웃지 마! 덩치는 산만한 놈이... “

“헤헤헤.”


이번 시험에서 자신의 등수 밑으로 무려 80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고우찬의 입이 찢어져라 헤벌쭉 할 수밖에.

이제 십여 명의 전교 꼴찌들과 우열을 논하던 고우찬은 없다.


‘암기과목 족집게 노트까지 준비해 공부를 시킨 보람은 있었네.’


도토리 키 재기였지만, 류지호는 지금의 성적을 즐기도록 놔두었다.

고우찬만 성적이 오른 것이 아니다.

황재정 역시 전교 100등 안에 진입했다.


“나 문과로 마음 굳혔어.”

“괜찮겠어?”

“경영학과에 지원해볼 생각이야.”


황재정은 류지호의 조언을 받아 들여 문과를 선택 했다.

대학도 상대 진학으로 결정했다.


“아직 대학과 학과 고민할 시간은 많아. 성급하게 결정하진 말자.”


김준우는 아쉽게도 100등 안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조금만 노력한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방송부 1학년 마지막 성적체벌 집합이 있었다.

기말고사가 남아 있긴 했지만, 사실상 마지막 성적 체벌이다.

방송제를 기점으로 2학년들은 업무 전반을 후배들에게 인계하면서 사실상 일선에서 물러났다.

신포고 방송부의 중심이 부장인 박상은에게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체벌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이번 2학기 중간고사가 사실상 마지막 성적체벌 집합이다.


“17기는 전설을 쓰는 구나.”


성적표를 확인한 한수호가 밝은 표정으로 입을 뗐다.


“모두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한수호의 치하에 1학년들이 우렁찬 대답으로 화답했다.

1학기에 성적이 형편없이 떨어졌던 박상은과 이철웅이 입학 때 성적을 복구했다.

최원석은 1학기의 성적을 유지했다.

전교 톱인 김석민에게 등수는 의미가 없었다.

만점을 놓쳤느냐가 주관심사라고 할까.

특히 류지호는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성적을 올렸다.

전교 50등 안쪽으로 진입한 것이다.


“솔직히 착하고 말 잘 듣게 생겨서 뽑았거든. 근데 지호 이놈이 매번 우리를 놀라 게 만든단 말이야.”


오철규가 류지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류지호는 그의 손길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상은이는 너무 방송부일에만 매달리지 마.”

“맞아. 네가 덜 신경 쓴다고 방송부 안 돌아가는 거 아니야.”

“우리가 학생이지 신포고 교직원은 아니잖아.”


박상은은 천성이 책임감도 강하지만, 방송부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틈만 나면 오디오믹서 조작을 연습하고, 방송실이 무슨 자기 집 안방이라도 되는 양 쓸고 닦고 유난을 떤다.


“그래도.... 명색이 국장인데....”


박상은이 말을 흐리자, 한수호가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다.


“18기는 죽어나겠다. 상은이가 겉으로 보면 착한데 은근히 애들 잡는 스타일이야.”

“아, 아니에요. 신입생 들어오면 잘 해줄 거라고요. 제가 형누나들만 있어서 동생을 얼마나 갖고 싶었는데요. 친동생처럼 잘 대해줄 거예요.”


박상은이 항변했다.

2학년뿐만 아니라 동기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가 믿지 않는 눈치다.


“철웅이 저 놈은 터치 안하면 운동장에서 살 텐데 걱정이다.”

“형들 걱정 마세요.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기로 했어요. 여자 친구랑 같은 대학 가기로 했거든요.”


이철웅이 짐짓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퍽이나...”


하하하.


류지호가 툭 던진 말에 방송부원 전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류지호의 성적향상의 비결.

별것 없다.

동기부여 그리고 체력 관리.

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태권도와 유도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긴다거나 몸이 고되진 않을까 주변에서 우려했다.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가 컸다.

운동 덕분에 장시간 공부를 할 수 있는 체력을 기를 수 있었고, 학업으로 쌓인 스트레스도 풀 수 있었다.

열심히 준비한 방송제를 통해 평생 동안 기억할 추억도 남겼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 ❉ ❉


일요일은 신문배달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우찬은 새벽같이 일어났다.

오늘따라 어딘지 들떠 있다.

고우찬이 눈을 뜨자마자 한 일은 밤새 활짝 펴 이불 밑에 넣어두었던 태권도복을 꺼내 확인하는 것이다.

태권도복에 지저분한 주름이라도 잡혔나 꼼꼼히 확인했다.

그런 후 도복을 정성스럽게 개서 가방에 넣었다.

일련의 행동들이 마치 의식을 치루는 것 같았다.


“밥 먹자.”


아침 밥상을 들고 고성재가 방으로 들어왔다.


“잘 먹겠습니다!”


김치찌개와 계란프라이를 반찬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숟가락으로 크게 한입 떠 입안에 욱여넣는 고우찬을 향해 고성재가 입을 열었다.


“심사는 어디서 한다고?”

“실내체육관.”

“현장에서 데모도가 다칠 때가 언제인 줄 알아?”

“......?”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을 때야. 너무 힘을 빼도 긴장감이 떨어져 사고가 나지만, 바짝 힘이 들어가도 사고가 터진다.”


고성재가 그 답지 않게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들뜨지 말고, 욱하지도 말고. 아빠가 목공일 할 때 항상 멀리 떨어져서 보는 거 봤지? 이미 결과를 내놓고 떨어져서 보는 건 의미가 없어.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 작업을 하는 사이사이 확인해야 하는 거야.”


고우찬은 아버지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한 일이든 현장직은 안전이 최우선이다. 기껏해야 전기톱이라 해도 사람은 실수해. 어느 순간 다칠지 아무도 몰라.”

“안 다쳐. 난 아빠 닮아서 용가리 통뼈거든.”


고성재가 아들의 머리를 후려치려는 듯 숟가락을 들어올렸다.


“...씁!”

“그렇다고 살살할 수 없잖아!”

“누가 살살 하래? 최선을 다 하되 다치지 않게. 신중하란 말이야.”

“알았어. 오늘따라 웬 잔소리래?”

“이놈에 자식을, 그냥 콱!”


고성재가 숟가락을 내려치자, 재빨리 뒤로 물러나는 고우찬이다.

그런 사이에도 밥을 입안에 욱여넣는 걸 잊지 않았다.


“1단 따올게!”


집을 나선 고우찬이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온힘을 다해 뛰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조깅하듯 달렸다.

운동을 하다보면 자신의 몸에 대해 잘 알게 된다.

고우찬이 태권도의 막 입문했을 때 정 사범이 해준 말이다.

그 의미를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터.

다만 고우찬은 육체를 조종하는 것이 마음이란 걸 알게 됐다.

아무리 강한 육체를 가진 사람도 마음과 정신이 병들면 쉽게 쓰러지고 만다는 것.


‘육체의 힘은 영혼이 주는 충격을 견뎌낼 정도로 강하지 못하다.’


친구 류지호가 해준 말이다.

아직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운동을 열심히 하다보면 언제간 알게 되겠지....’


용연태권도장 승단시험 응시자들이 숭의동 인천실내체육관에 모였다.

고우찬이 북적거리는 체육관을 둘러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인천에서 태권도 하는 애들은 다 모였나봐!”


관람석에는 승단시험 응시자들의 가족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협회주관 승단시험이라 인천지역에 소재한 모든 도장 응시자들이 모였다.


“저쪽에 우리 도장 푯말 있다!”


따로 대기실이 있을 리가 없다.

그저 도장 별로 표지판을 걸어놓았을 뿐.

류지호가 체육관 내부를 둘러봤다.

지나치게 긴장한 수련생도 보이고, 짝다리를 짚고 애써 태연한척 하는 수련생도 보이고, 껄렁한 태도를 보이는 수련생도 보인다.

홍 관장이 협회장의 곁에 앉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화장실 다녀올 사람은 미리 다녀와.”


홍 사범의 말에 몇몇 수련생이 대열에서 이탈했다.

류지호는 한쪽으로 물러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좋네...”


류지호는 너무나 쉽게 찢어지는 다리를 보며 새삼 신기했다.

어느새 몸이 유연해져 있었다.


팡!


가볍게 발차기를 해보았다.

근육과 관절의 활동반경이 꽤나 늘었다.

한창 성장기다.

편식하지 않고 각종 음식을 잘 먹고 있다.

게다가 꾸준히 운동을 한 덕분에 근육도 골고루 붙었다.

단전호흡을 가장한 복식호흡을 매일 한 덕분인지 집중력도 좋아지고 심신도 안정됐다.

숨쉬기 운동도 평생 꾸준히 하면 폐활량도 늘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반대로 담배를 꾸준히 피우면 폐가 썩는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멀리한다.

이 간단한 이치를 지키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고우찬이 곁에서 몸을 풀었다.


“컨디션은 어때?”

“아주 좋아.”

“1단 심사는 실수만 안하면 돼.”


소년부를 시작으로 품새 심사가 시작됐다.

체육관의 절반은 품새 심사가 진행되고, 나머지 절반은 겨루기 심사가 진행됐다.

세 명의 심사위원이 수련생들의 시연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며 채점표에 점수를 적었다.

중등부 차례가 되자, 용연태권도장 관원 몇 명이 심사장으로 입장했다.

1품 혹은 1단 승단심사는 태극 1장에서 7장 사이에서 무작위로 하나, 필수로 태극8장을 시범 보여야 했다.

용연태권도장 관원들은 홍사범의 혹독한 수련 덕분인지 비교적 무난하게 심사를 마쳤다.

드디어 고등부 품새 심사가 시작됐다.

고우찬이 먼저 품새 시험을 치렀다.


“준비. 태극 4장 시작!”


진행자의 구령에 따라 품새가 펼쳐졌다.

고우찬의 품새는 다소 투박한 모양새다.

헌데 막고 지르는 동작에 힘이 넘쳤다.

힘끝이라고 해서 동작 마무리에 절도 있게 끊어주는 세밀함은 떨어졌다.

대신 건장한 체격에서 펼쳐지는 자세 하나하나에 박력이 있었다.


“준비. 태극 8장 시작!”


태극 8장은 태극 품새의 마지막인 만큼 유단자가 아닌 수련생에게는 난이도가 있었다.

고우찬의 출발은 역시 힘이 넘쳤다.

하지만.

초반 이단차기에서 축이 되는 발이 약간 흔들렸다.

즉 한 발을 찰 것처럼 주었다가 살짝 뛰어놀라 반대발로 앞차기를 찰 때 바닥을 딛고 있던 발이 살짝 움직인 것이다.

시작부터 실수가 벌어지자 고우찬이 당황했다.

게다가 고우찬의 앞에서 품새를 펼치는 다른 도장 수련생의 시범 속도가 빨랐다.

덩달아 고우찬도 앞의 수련생의 속도에 휩쓸렸다.

고우찬은 자신의 호흡을 잃어버리고, 다른 도장 수련생의 속도대로 품새를 끝마칠 수밖에 없었다.


‘젠장!’


고우찬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용연태권도장 잠깐 와봐.”


심사위원이 고우찬을 심사위원석으로 불렀다.


“태권도 언제부터 시작했어?”

“6개월 정도 됐어요.”

“긴장했냐?”

“초반에 이단차기할 때 축이 흔들리는 바람에 막 꼬여서.... 제 페이스를 잃었어요.”

“실수 몇 번 했는지 기억해?”

“당겨턱지르기에서 실수하고 저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져서 전체적으로 강약 조절에 실패한 것 같아요.”

“알았어. 가봐.”


고우찬이 넙죽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용연태권도 관원들에게 합류한 고우찬은 풀이 죽었다.


“고우찬, 잘 했다. 그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합격이야. 투박해도 절도가 있었어.”


평상시 칭찬에 인색한 홍 사범이 웬일로 고우찬을 격려했다.

심사위원 3인의 평균점수로 합격여부를 판단한다.

3인 중 두 명이상이 커트라인 점수만 넘으면 합격이다.

예를 들어 심사위원 한 명이 55점을 주고 나머지 두 명이 각각 60점 이상을 채점했다면 합격이다.

2단 승단심사자인 류지호의 차례가 되었다.

심사장으로 입장한 류지호는 가볍게 호흡을 골랐다.


후우웁.


2단 승단시험자에게 주어진 품새는 기본 품새인 태극 8장과 필수 품새인 고려다.

보통 무작위 품새는 태극 4장을 많이 본다.

류지호는 운이 없었다.

난이도가 있는 태극 8장이 걸렸다.


“준비! 태극 8장 시작!”


초보자에서 유단자, 고단자로 진행되면 숙련도에 있어서 속도의 완급과 몸의 중심 이동, 힘의 강약 등이 더욱 중요해진다.

하나의 동작을 펼치기 직전의 준비 동작은 자연스럽게.

동작이 펼쳐지는 순간은 빠르게.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자연스럽게 진행되다가, 이동순간은 다시 빠르게.

즉 고단자로 갈수록 품새를 시연함에 있어서 자연스럽고 속도의 완급이 중요했다.


쫙!


고우찬이 실수했던 이단차기를 류지호는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멋지게 펼쳐보였다.

몸통막기에 이어 몸통을 두 번 지르고.


“악!”


류지호의 아랫배에서부터 터져 나온 기합소리가 강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함께 승단시험을 치루는 조원들의 속도와 상관없이 류지호는 자신만의 템포로 태극 8장을 펼쳤다.

고우찬의 위풍당당하고 힘이 넘치는 동작과는 다르게, 최대한 자연스럽고 생동감 넘치도록 동작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였다.

고려 품새는 30개 동작으로 가장 많은 동작수를 가지고 있다.

류지호는 완만하게 호흡을 골라야 할 때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동작을 펼쳤고, 연속해서 공방이 벌어지는 동작에서 절도의 변화를 주면서 안정감을 보여주기 위해 바짝 집중했다.

고려 품새에서도 류지호의 동작은 변함이 없었다.


“그만! 쉬어!”


류지호의 품새 심사는 흠잡을 곳 없이 비교적 무난하게 마칠 수 있었다.

본래 류지호는 이렇지 않았다.

다소 덜렁대는 성격이었다.

이젠 아니다.

태권도 품새를 시작으로 완급조절의 맛을 알아가고 있었다.


작가의말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습니다. 이번 주까지 1일 2연재를 이어갑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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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6) +14 22.01.16 9,808 211 19쪽
51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5) +8 22.01.15 9,516 194 19쪽
50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4) +15 22.01.15 9,544 186 20쪽
49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3) +16 22.01.14 9,605 192 22쪽
48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2) +12 22.01.14 9,568 196 21쪽
47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1) +6 22.01.13 9,839 194 21쪽
46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3) +7 22.01.13 9,970 204 22쪽
45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2) +20 22.01.12 10,178 204 24쪽
44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1) +14 22.01.12 10,827 211 24쪽
43 Carpe diem... (4) +12 22.01.11 10,447 215 19쪽
42 Carpe diem... (3) +14 22.01.11 10,389 228 18쪽
41 Carpe diem... (2) +12 22.01.10 10,534 236 20쪽
» Carpe diem... (1) +12 22.01.10 10,908 224 20쪽
39 얘는 혼자 어디 딴 세상이라도 살다 왔나? +8 22.01.09 10,975 239 20쪽
38 연풍(戀風). +12 22.01.08 11,004 231 17쪽
37 영화밥 먹고 살 팔자... (6) +7 22.01.08 10,804 224 22쪽
36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530 234 22쪽
35 영화밥 먹고 살 팔자... (4) +7 22.01.07 10,593 213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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