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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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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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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2.01.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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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말할 수 없는 비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매주 예식장에서 비디오촬영을 할 때 가온웨딩이 새겨진 조끼를 보곤 하객들이 묻곤 했다.


“어디 방송국에서 나왔어요?”

“저희는 가온웨딩이라고 결혼식 촬영 전문 업체에요.”

“방송이 아니에요?”

“개인이 찍는 겁니다.”


호기심을 해결한 사람들은 이내 관심을 끊어버렸다.

그래도 영 공 치는 건 아니다.

현장에서 가을시즌 예약 3건을 더 잡았다.

가장 저렴한 D타입이었지만,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

예약된 부부들의 예식장이 독점 계약한 4곳에 골고루 분산되었기 때문에 가을부터는 좀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촬영이 끝나면 어김없이 류지호는 판사진과 편집실에 틀어박혔다.

그날그날 사전작업을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쫓기게 되고, 그로 인해 검정고시 시험 준비 등 다른 일에 지장을 초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한창 가편집을 하고 있는데, 황재정의 아버지 황봉호가 찾아왔다.


“마실 거 드릴까요?”

“시원한 물 한잔이면 된다.”


류지호가 컵에 물을 따라오자, 황봉호가 단숨에 받아 마셨다.

잠시 소소한 이야기를 건네던 황봉호가 본론을 꺼냈다.


“우리 재정이는 빼주면 안되겠냐?”

“......”

“공부할 시간도 모자란데, 사업을 하겠다고 하는 게 이 아저씨는 걱정이 되는 구나.”


며칠 전 기말고사를 본 황재정의 표정이 어두웠다.

시험을 망쳤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성적이 올랐다.

헌데 황재정의 아버지가 직접 찾아와 이렇듯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뭔가 사정이 생긴 모양이다.


“재정이하고 대화해 보셨어요?”

“그 놈이 우리와 통 대화를 하려고 해야 말이지.”

“전 재정이의 의사를 존중하고, 재정이가 선택한 걸 지지해요.”

“물에 빠진 놈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지만. 아버지 맘이라는 게 그렇다.”

“이해해요.”

“부모 욕심이 다 그래. 서울대 갈 수 있다는데 그걸 싫어할 부모가 있겠냐?”

“서울대 가고 그 이후에는... 요?”

“대기업에 취직해도 되고, 공무원이 될 수도 되고, 판검사가 되면 더 좋고.”


어른의 입장, 청소년의 입장을 떠나서 류지호는 과거로 돌아오기 전 친구의 인생을 알고 있다.

황재정은 불행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행복하게 살았나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저는 재정이 인생을 책임져줄 수 없어요. 저는 친구이지 가족도 아니고 본인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건 확신할 수 있어요. 지금 경험해보는 모든 것들이 재정이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좋은 경험과 이정표가 되어 줄 거라고요.”

“재정이가 너희들과 사업을 하는 걸 좋아한다면 대학에 가서 해도 늦지 않지. 굳이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재정이 서울대 갈 수 있어요. 전 그렇게 믿어요. 좀 많이 비관적이고, 매사 삐딱선을 타서 그렇지, 일단 입으로 뱉는 말은 어떻게든 지키려는 친구거든요. 재정이가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고, 때에 따라서는 굽힐 줄도 알고, 세상의 무서움을 조금 일찍 알게 된다면 까칠하고 삐딱한 태도가 조금 둥글둥글해지지 않을까요? 더 머리가 커지기 전에요.”


둥글둥글하게 사는 건 평생 공무원 생활을 한 황봉호의 삶의 태도다.

공무원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가치관이 그렇다.


“네가 이 아저씨보다 우리 아들을 더 잘 아는 것 같구나.”

“때로는 어른들이 못 보는 걸 또래의 친구들이 볼 수 있어요.”

“지호 너는 재정이가 그만 둬도 붙잡지 않을 거지?”

“예.”


황봉호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재정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재정이는 목표를 찾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친구로서 그걸 옆에서 지켜봐 줄 뿐이에요. 고3 되면 어차피 학력고사 공부해야 돼서 이 일에 매달릴 수도 없어요. 제가 그렇게 하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고요.”


황봉호가 화제를 돌렸다.


“알겠다. 그나저나 우찬이하고 너는 검정고시 준비는 잘하고 있냐?”

“8월에 끝내버리려고요.”

“그래, 너라면 어려움 없이 검정고시는 통과할 수 있을 거야.”


황봉호가 용무가 끝났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저도 재정이하고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공부 소홀히 하지 말고, 곤란한 일 생기면 어른들과 상의해야 한다.”


황봉호는 당부의 말을 남기고 사진관을 떠났다.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이 미래를 알고 있어서 실패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했다.


“어른들한테 충분히 신뢰를 얻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구나.”


부모에 비할 바가 못 되겠지만, 류지호도 친구인 황재정에 대해 내 일처럼 여기고 있다.

그렇기에 섭섭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툭툭.


류지호는 편집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황재정의 부모님만 그러할까.

필시 김준우의 사정은 더 안 좋을 것이다.

지난 기말고사 스터디 때 조성자의 태도가 어딘지 어색했다.

노골적으로 못 마땅한 태를 내비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류지호를 대하는 조성자의 표정은 딱딱했다.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조금만 믿어 주시지...”


❉ ❉ ❉


올해는 별다른 태풍 없이 장마철이 지나가고 있다.

그래도 계절이 장마철임을 주장하려는지 5일간 비를 쏟아 붓기도 했다.

대기가 습해져서 땀도 잘 마르지고 않고 끈적끈적했다.

때문에 편집실에 처박혀 있는 류지호는 아주 고역이었다.


“내년에는 에어컨부터 들여놓든지 해야지 죽을 맛이네.....!‘


판사진관 임대료, 각종 비용, 인건비 등을 부담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올해까진 에어컨은 사치 중에 사치다.

어쨌든 장마철이라고 해서 결혼식이 아주 열리지 않는 건 아니다.

류지호는 D타입 두 건을 촬영했다.

뿐만 아니라, 부잣집의 돌잔치나 환갑잔치도 몇 번 촬영 나갔다.

빠르지는 않지만, 가족기념일 촬영이 일반인 생활 속으로 퍼져나고 있다.


따르릉!


판 사진관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 여보세요. 판사진관이죠?


류지호는 상대의 목소리를 듣고 단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류지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특유의 이죽거리는 말투, 수화기 너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여왔기 때문이다.


“석민이냐?”

- 꼴통,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애들도 잘 지내냐?”

- 말도 마라. 상은이가 아주 후배들을 잡는다.


박상은이 후배들에게 빠따를 심하게 친다거나 군기를 잡지는 않았다.

박상은 자신이 방송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신입생에게도 자신처럼 행동하기를 강요하는 것이 문제랄까.

방송부 활동에 과도하게 책임감이 강한 박상은이다.


“니들이 고생이 많다.”

- 1학년 애들이 고생이지 뭐.

“그나저나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전화했어?”

- 이번 주 토요일에 방송부 연합회 MT 한대.

“연합 MT?”

- 송도유원지에서 한대.

“그러냐? 가서 재미있게 놀아.”

- 무슨 소리야? 너도 참석해야지.

“난 신포고 재학생도 아니잖아.”

- 점오 기수라니까.

“학교 자퇴한 놈이 가도 되나.....?”

- 신입생 애들이 전부 네 팬이란다. 꼭 말 좀 나눠보고 싶다고 하니까. 잔말 말고 와.


계속 빼는 것도 친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알겠어. 연합MT에서 보자.”

- 오케이 할 거면서 튕기기는.....


류지호는 통화를 마치자마자, 스케줄 표를 확인했다.

다행히 연합MT 당일에 잡혀있는 웨딩촬영은 없었다.

다만, 환갑잔치 하나가 예약이 잡혀있었다.

장비와 소스 백업을 해놓은 후 출발한다고 해도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방송부 선후배를 보는 것은 일주일 후다.

당장은 웨딩비디오 편집에 매달려야 했다.


위잉. 딸깍. 딸깍.


류지호의 손이 조그셔틀과 컨트롤 패드를 바쁘게 움직였다.

화면이 빠르게 포워드 되었다가 정지를 반복했다.


똑똑.


노크소리에 류지호가 작업을 멈췄다.

작업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잠가두었던 편집실 문을 열었다.

손에 비닐봉지를 든 신소연이 문가에 서 있었다.

여름이라 분홍색 줄무늬 반팔 티셔츠에 스노우진 디스코 청바지를 차려입고 있었는데, 소녀다운 풋풋한 얼굴이 은근히 보호본능을 불러일으켰다.


“이거....”


류지호가 신소연이 건넨 비닐봉지를 받아 내용물을 확인했다.

음료수, 빵과 과자다.


“출출할까봐 사왔어. 먹고 하라구.”

“잘 먹을게. 근데 어쩐 일이야? 말도 없이.”

“궁금해서.....”

“아참, 들어와.”


류지호가 신소연을 편집실 안으로 이끌었다.


“와아, 멋지다!”


신소연이 아날로그 편집기와 관련 장비들로 가득한 실내를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아날로그 편집 시스템과 VHS와 8mm 테이프가 꽂힌 책장, 카메라 장비들을 보관하는 캐비닛 등이 들어 찬 실내는 제법 편집 작업실다웠다.


“잠시만 기다려 줄래. 하던 작업이 있어서. 이것만 마무리 할게.”

“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것 마저 해.”


류지호가 바쁘게 손을 돌려 하던 작업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신소연이 턱을 괴고 그런 류지호를 지켜봤다.


“재미있어?”

“그렇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무슨 말이 그래?”

“결혼식이 다 똑같아서. 평생 한 번 밖에 없는 중요한 이벤트잖아. 근데 모두 똑같아.”

“일 시작하면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준다며?”


류지호가 의자를 돌려 신소연을 마주했다.


“미안, 너도 들었겠지만 내가 여러 일이 있었어.”


신소연이 호들갑스럽게 양손을 저었다.


“아냐, 아냐! 따지려고 그런 게 아니고.... 그냥.”

“그 대신이라 긴 뭐하지만, 사과하는 의미에서 이것만 마치고 맛있는 거 사줄게. 지루해도 조금만 참아.”

“난 괜찮아. 천천히 해.”


류지호가 다시 모니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위이잉. 틱.틱.


류지호의 손이 좀 더 빨라졌다.


“나도 너희들 하는 일에 끼워주면 안될까?”

“우리가 하는 일?”

“응.”

“.....”

“나도 비디오 촬영하는 거 배우고 싶어.”

“방송국 PD 하게?”

“어? PD가 되고 싶은 건 어떻게 알았어? 다연이가 얘기했어?”

“그냥 알아.”

“피~ 또 그런다.”

“카메라 무게가 3Kg 조금 넘어. 널 무시해서 하는 말은 아니야, 오해 말고 들어... 꽤 무거워서 한 시간 들고 촬영하기 힘들 거야.”


여담으로 8mm 캠코더를 떠올리면 손아귀에 쏙 들어가는 작은 크기를 생각하게 되는데, 초창기 소닉의 8mm 캠코더는 VHS 캠코더와 크기가 비슷했다.

소형 8mm 캠코더가 시장에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1989년이고, 1992년에 가서야 소형화가 거의 완성된다.


“그럼 편집하는 건? 배우기 어려울까?”

“장비 사용법이나 기본 편집 테크닉이야 금방 배우지. 배워 볼래?”

“진짜?”


신소연이 반색하며 류지호에게 달려왔다.

풋풋하고 건강한 체향이 훅하고 류지호의 코 속으로 스며들었다.


“잠깐만.”


류지호는 작업하던 테이프를 모두 빼 한 곳에 따로 놓아두었다.

그런 후 책장에 꽂혀있는 NG테이프 하나를 꺼내 데크에 삽입했다.


“자리에 앉아봐.”

“네 자리에?”

“아주 기초적인 거 알려줄게. 한 번 해봐.”

“아무나 막 만져도 돼? 그러다 고장 나면......”

“아무나가 아니니까 조작해도 돼. 괜찮아.”

“.....!”

“신포고 애들도 와서 편하게 다루는데 뭘.”


류지호는 조그셔틀 사용법부터 컨트롤 패드의 버튼들의 조작방법을 알려줬다.

조그셔틀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등을 류지호의 손이 덮어 조작할 때마다 살며시 얼굴을 붉히는 신소연이었다.

한 동안 류지호가 신소연에게 기초적인 편집요령을 알려줬다.


“나도 여기 껴줘. 이런 거 꼭 해보고 싶어!”

“공부해, 인마. 또 재수하고 싶어?”

“악담하는 거야? 못 됐어!”

“아, 미안. 재수하지 않으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이었어.”


류지호는 토라져 편집실을 나서려고 신소연을 간신히 달래 도로 의자에 앉혔다.


“안 되겠다.”


류지호가 모니터를 끄고, 편집 데크들의 전원도 모두 내렸다.

한창 팔팔한 청춘이 어두침침한 편집실에 처박혀 일을 하는 꼴이 스스로 생각해봐도 한심하게 느껴지던 차다.


“나가자.”

“밖에 더운데....”

“시원한 팥빙수 먹자. 내가 사줄게. 오랜만에 영화도 보고. 일종의 데이트라고 할까?”


벌떡.

신소연이 기다렸다는 듯 의자를 박차고 박력 있게 일어섰다.


“난 좋아!”


편집실 문을 단단히 잠그고 스튜디오로 나오자, 카메라를 손질하고 있던 박성우가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림 조오타!”


풋풋한 신소연과 막노동으로 까무잡잡해진 피부의 류지호가 나란히 서있자, 나름 봐줄만한 그림이 연출되는 모양이다.

그간 적당한 영양분 섭취와 꾸준한 운동이 성장판을 자극했는지 류지호의 키도 부쩍 자라고, 체격도 좋아졌다.

새삼 성장기에 술담배와 무절제한 유흥이 얼마나 신체발달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박성우가 능글맞은 어조로 물었다.


“데이트 가냐?”

“바람 좀 쐬고 오려고요. 팥빙수 사다 드려요?”

“됐어. 오늘은 사진관에 돌아오지 말고 여자 친구랑 재미있게 놀아.”

“내일 뵐게요.”


명색이 장마 기간이다.

갑자기 비가 쏟아질 수도 있다.

비록 비 예보가 없었다 하더라도.

류지호는 사진관 입구의 놓여있는 우산을 챙겨 사진관을 빠져나왔다.

모처럼 외출하는 김에 맘 편히 쉬기로 마음먹었다.


“핫도그 먹을래?”

“좋아.”


두 사람은 길가 한편에서 핫도그를 팔고 있는 노점으로 향했다.

이전 삶에서 류지호는 신소연과 함께 자주 핫도그를 사먹고는 했다.

류지호는 입이 짧아 음식을 깨작거리기 일쑤였고, 분식을 좋아하는 신소연과 먹성이 비슷했었다.


‘그나마 소연이 때문에 공부를 완전히 손에서 놓지 않을 수 있었지....!’


그녀와 함께 중앙도서관을 다니며 공부한 덕분에 3학년에 올라가 최소한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늘만은 그녀가 하자는 걸 다 해주는 걸로 고마움을 조금이나마 갚기로 했다.

다음으로 미루다가는 영원히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두 개 주세요.”


노점 아주머니가 기름통에서 튀겨지고 있는 핫도그 두 개를 꺼내 설탕이 곱게 펼쳐져 있는 판에 굴렸다.

설탕이 발라진 핫도그에 케첩을 굵게 짜 발랐다.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신소연이 밝게 웃으며 인사하고는 핫도그를 받아들었다.

둘이 핫도그를 먹으며 주안역 전 골목을 걸었다.


‘인연은 인연인가....?’


류지호는 기분이 묘했다.

인연의 사슬이라는 말이 있다.

인연이 있는 사람끼리는 매우 가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절대 끊을 수 없다는 끈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삶이 바뀌었다고 인연의 사슬이 끊어졌을까.

어쩌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인연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 사슬이 굵어지고 희미해지는 건 모두 본인 하기에 달렸을지도.


“무슨 생각해?”


신소연이 류지호의 상념을 깨웠다.


“아무것도 아니야. 팥빙수 먹을래?”

“그럴까?”


두 사람은 눈에 보이는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팥빙수를 하나 시켜 둘이 나눠먹었다.


“이제 뭐 할까?”

“남자가 리드해야지 여자한테 떠넘기려고? 네 성격이 친절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 기분 상했어.”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그런 고리타분한... 아, 지금 팔팔년도였지....?”


류지호는 올해가 88올림픽이 열리는 해란 걸 상기하고, 검지로 볼을 긁적거렸다.


“영화 보고 저녁 먹자.

“무슨 영화?”

“스릴러 좋아해?”

“공포영화 빼곤 다 봐.”


그 길로 두 사람은 택시를 잡아탔다.

도화동 대로변에 위치한 중앙극장에서 마빈 M 코트너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 <노 웨이 아웃>을 관람했다.


‘한 때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의 교과서 같은 영화였지. 아, 그건 전생이고... 여전히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나 대학에서 부교재로 쓰일 수도 있겠구나.’


류지호는 이 영화를 극장이 아닌 90년도 즈음에 비디오로 봤었다.

한국 개봉 당시에 큰 흥행을 이루지 못했다.

극장에서 금방 내린 것으로 기억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관객이 류지호와 신소연을 포함해 스물도 되지 않았다.

암튼 영화 <노 웨이 아웃>은 예상치 못한 전개, 누명, 오해, 주인공에게 불리한 증거들, 제한된 공간 등 서스펜스 스릴러의 공식 같은 온갖 장치들이 암시와 복선으로 뒤범벅되어 주인공을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는 과정을 탁월하게 그려낸 영화다.

관객이 분석하기 전까지는 알아채기 힘들게 몰아붙이고, 마지막에는 반전의 묘미까지.

이 영화를 건성으로 한 번 보면 자칫 반전을 제대로 이해 못할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1940년대 후반이야. 냉전이 극에 달했던 시기지.”


류지호는 신소연을 위해 저녁식사 내내 친절하게 영화를 분석해 주었다.


“와아, 그걸 한 번 보고 다 안 거야?”

“대충은.”


류지호가 한 번 보고 안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면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너처럼 똑똑하고 목소리도 멋있는 애가 여태 왜 사귀는 애가 없었나 몰라.”

“내가 멋있어?”

“그러니까 다연이가 널 찍었지.”

“걔한테 찍히면 다 멋있는 건가?”


류지호는 우스웠다.


“먹을 만 해?”

“말투가 그게 뭐냐? 징그럽게.”

“맛있어?”

“오랜만에 먹으니까 좋아.”

“내 덕에 호사를 누리는 거야.”

“호사까지는 아니고. 오늘 하루 제법이었다는 건 인정.”

“요즘도 중앙도서관 다녀?”

“그것도 다연이가 알려줬어?”

“아니 원석이가.”


류지호는 이때쯤부터 신소연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도서관을 다니며 공부를 했었다는 걸 기억했다.


“바람둥이.”

“원석이가 바람둥이긴 하지.”


신소연이 손가락으로 콕 찍으며 말했다.


“아니 너.”

“난 아무 짓도 안했는데?”


신소연이 쌜쭉한 눈으로 류지호를 흘겼다.

류지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능청을 떨었다.


[내가 널 만난 것이 불가사의야.]

[나는 평범한데. 넌 특별하니까.]


대만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두 남녀 주인공의 대사다.

사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류지호가 신소연과 인연을 맺은 것 자체가 불가사의다.

신소연은 여전히 평범했지만, 착하고 순수했다.

반면에 류지호는 50년의 정신연령과 굴곡이 많은 십대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자식, 앞으로 잘 지내보자.’


류지호는 힘이 닿는 한 그녀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줄 작정이다.

전 여자 친구이자 현생의 여자 사람 친구로.


“소연아.....”

“왜?”

“나랑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생각해.”

[그러지 뭐.]

“가자.“

[어디?]

“너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하러.”

“핏. 그게 뭐야?”


류지호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한 대목을 읊어대자, 신소연이 싫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말할 수 없는 비밀이야.”


류지호가 영화 대사로 대답을 대신 했다.


“으으. 징그러워.”


신소연이 짐짓 장난스럽게 진저리 쳤다.

귀엽게 눈을 흘기는 신소연을 보며 류지호가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과거로 돌아온 후로 숨 가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류지호다.

그런 사이에 찾아온 오늘 같은 소소한 일상이 나쁘지 않았다.


후두둑.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쫙!


류지호가 우산을 펼쳐 신소연을 씌웠다.

두 사람은 한 우산 아래서 주택가 골목을 걸었다.


콩딱콩딱.


신소연은 자신의 뛰는 심장소리가 류지호에게 들릴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류지호는 오랜만에 와 보는 신소연의 동네를 감회에 젖어 둘러볼 뿐.


“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하게 하고 자.”

“집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

“간다.”


류지호는 신소연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돌아섰다.


후다닥.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온 신소연이 창문을 열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산을 받쳐 든 류지호가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친 신소연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막상 씻고 침대에 누우니 잠이 오질 않았다.

몸은 축축 늘어지는데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오랫동안 뒤척이던 그녀가 마침내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신소연은 꿈속에서 하이틴 영화의 발랄한 여자 주인공이 되었다.


작가의말

좋은 밤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PS. dlfqjq님 다시 읽어주시는 것만도 감사한데 후원까지... 감사합니다. 습작 보다 한층 발전된 글이 되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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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할 수 없는 비밀. +12 22.01.20 9,704 217 21쪽
59 이런 날도 오는구나... (3) +3 22.01.20 9,625 206 21쪽
58 이런 날도 오는구나... (2) +4 22.01.19 9,732 201 26쪽
57 이런 날도 오는구나... (1) +4 22.01.19 10,039 203 21쪽
56 Begin again. (4) +5 22.01.18 9,715 214 20쪽
55 Begin again. (3) +7 22.01.18 9,593 216 24쪽
54 Begin again. (2) +8 22.01.17 9,756 211 21쪽
53 Begin again. (1) +11 22.01.17 10,297 200 24쪽
52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6) +14 22.01.16 9,822 211 19쪽
51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5) +8 22.01.15 9,529 194 19쪽
50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4) +15 22.01.15 9,558 186 20쪽
49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3) +16 22.01.14 9,619 192 22쪽
48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2) +12 22.01.14 9,586 196 21쪽
47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1) +6 22.01.13 9,859 194 21쪽
46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3) +7 22.01.13 9,988 204 22쪽
45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2) +20 22.01.12 10,193 204 24쪽
44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1) +14 22.01.12 10,842 211 24쪽
43 Carpe diem... (4) +12 22.01.11 10,463 215 19쪽
42 Carpe diem... (3) +14 22.01.11 10,408 228 18쪽
41 Carpe diem... (2) +12 22.01.10 10,548 236 20쪽
40 Carpe diem... (1) +12 22.01.10 10,927 224 20쪽
39 얘는 혼자 어디 딴 세상이라도 살다 왔나? +8 22.01.09 10,990 239 20쪽
38 연풍(戀風). +12 22.01.08 11,018 231 17쪽
37 영화밥 먹고 살 팔자... (6) +7 22.01.08 10,817 224 22쪽
36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560 234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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