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연재수 :
962 회
조회수 :
4,125,699
추천수 :
126,996
글자수 :
10,687,409

작성
22.01.24 10:00
조회
9,539
추천
195
글자
21쪽

충성을 다 하겠슴다!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가을 시즌의 마지막 웨딩비디오를 고객에게 전달했다.

드디어 한숨 돌릴 틈이 생겼다.

류지호는 연하대 후문의 술집 아네모네로 향했다.

장문식과의 일이 있은 이후로 박팀장과 최대리가 노골적으로 류지호의 주변에서 얼쩡거렸다.

도대체 어디서 대기하는지 알 수 없지만, 외출 시에 대놓고 따라다니는 두 사람이다.


“저 사람들 문제도 확실히 매듭지어야 하고... 조폭이 달라붙는 것도 막아야 하고.”


삶이 달라지는 건 좋은 일이다.

단 긍정적으로 변할 경우에.

경호원이 따라다닐 정도로 자신이 VIP가 된 것도 아니고.

귀찮고 성가실 뿐이다.


“.....”


채연지는 류지호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지호 학생이 하도 가게에 안 와서.... 장부장에게 짜증을 좀 부렸더니 그 난리를 쳤지 뭐야. 나도 지호 학생에게 그럴 줄은 몰랐어. 진짜야.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채연지에게 류지호는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도리어 그 동안 무신경했던 것에 사과하는 게 맞았다.


“단속 각오하고 고삐리들에게 술도 주시고 경찰서에 잡혀갔을 때 변호사까지 붙여주셨는데, 제가 무심했어요. 죄송해요. 그리고 도와주신 점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아니야.”

“도움을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놈이라고 생각하셨겠네요.”

“그런 말 말어. 지호 학생 때문에 가게 매상도 올랐는데, 오히려 내가 도움을 많이 받았지.”


과일소주 아이디어로 계속해서 재미를 보고 있는 모양이다.


“제가 특허를 낸 것도 아니고, 그 부분은 마음 쓰지 마세요.”


류지호가 그제야 가게를 둘러봤다.

패싸움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벽지가 찢어져 임시로 벽지를 발라놓은 곳들이 곳곳에 보였다.

부서진 테이블과 의자는 교체했는지 원래 있던 것과 명확하게 대비가 됐다.


“기물파손에 대한 배상은 모두 받았어요?”

“넉넉하게 뜯어냈어.”

“잘 하셨어요. 그쪽도 건달 같이 보이던데 용케 배상을 받아내셨네요”

“그 사람 건달 아니야. 나이트 사장이 무슨....”

“......”

“그 사람이 사람 써서 괴롭히지는 않지?”

“각서까지 썼는데 더 이상 엮일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럼 다행이고. 요즘 조폭이라고 행세하는 아이들이 옛날 같지 않아서...”


문득 류지호는 목이 타는 느낌이 들었다.


“아줌마, 물 한 잔 마실게요.”

“생맥 한 잔 따라 줄까? 안주는 뭐로? 뭐 먹고 싶어?”

“냉수면 돼요.”


헌데 채연지가 주방에서 맥주컵 두 개를 가져왔다.


펑!


채연지가 거침없이 맥주의 뚜껑을 땄다.

맥주를 채운 컵을 류지호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이야기 해봐. 자퇴하고 학원 다닌다며? 공부는 잘 돼?”

“그건 또 어디서 들으셨어요. 제 뒷조사도 하셨어요?”

“우찬이 학생이 그러더라. 사업도 한다며?”

“아주 동네방네 다 떠버리고 다녔나 보네요.”

“검정고시학원에서도 대장 먹었다고 자랑이 이만저만 아니었어. 근데 지호학생 별명이 6백만불의 사나이야?”

“그런 별명은 처음 들어요.”

“지호학생은 사이보그처럼 인간미가 없다면서 학원에서 다 그렇게 부른다던대?” “우찬이가 그래요?”

“같이 다니는 재욱 학생이.”


검정고시에 합격시키기 위해 류지호가 매몰차게 몰아붙인 것을 두고 고우찬과 김재욱이 꽤나 섭섭했던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 지호학생은 6백만불 사나이는 아니야. 그런데 6백만 불을 벌 사나이는 될 것 같아.”


채연지는 맥주가 삼분의 일 남은 자신의 컵에 맥주를 가득 채웠다.


“내가 술장사를 몇 년 했는지 모르지? 술장사 하면서 별의별 인간을 다 상대해 봤어. 큰회사를 경영하는 사람, 국회의원, 조폭, 공무원, 교수. 의사... 한 때 인천에서 제일 잘 나가는 룸싸롱을 운영했더랬지.”


류지호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남편이 뭐 하던 사람인지는 감 잡았지?”


류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 범죄조직명을 붙일 때 식구파 앞에 활동 지역을 붙여 명칭을 사용해. 남편은 숭의식구파의 두목이었어. 남편이 감옥에 가고 경찰이 숭의식구파라고 부르는 조직이란 게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거든. 근데 검찰과 경찰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봐. 검찰 수사관이고 경찰 정보과 직원이고 시도 때도 없이 가게로 찾아오더라고. 여자 끼고 노는 술집에 경찰아저씨들이 계속 찾아오면 손님들이 오겠어? 별수 있나, 그 사람들 등쌀에 내가 항복을 하고 말았지.”


영화 시나리오로 포장하면 건달과 술집 마담의 그럴듯한 러브스토리가 나온다.

현실에서는 뻔한 화류계 막장 드라마에 지나지 않지만.


“지난번에 아네모네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지? 그걸 내게 팔아. 아니면 레몬소주처럼 로열티를 줄까?”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언제요?”

“레몬소주 로열티 줄 때 분명히 지호학생이 방법이 있을 것 같다고 내게 얘기하자고 했잖아. 뭔가 생각이 있어서 그랬던 것 아니었어?”


생각났다.

그 당시 류지호는 소주방을 떠올렸던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부자가 지호학생을 인정한다며? 지호학생 때문에 그 부자가 손해를 보지 않았다면서?”


고우찬이 채연지에게 미주알고주알 많은 이야기를 떠벌린 모양이다.

류지호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굳이 정정해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채연지에 할 말을 잠시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맥주 한 컵을 다 비울 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아줌마,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응. 말해. 뭐든 들을 준비 되어 있으니까.”

“레몬소주 같은 건 여자들만 찾죠?”

“소주는 마셔야겠는데 그냥 소주는 마시기 힘들고. 그래서 주로 여자 손님들이 찾아.”

“지금 시대에 여성이 술집에 드나들고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시겠어요. 여성 열에 둘이 될까 말까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잘 안될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연하대니까 그나마 찾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대학가니까 가능한 거란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오늘은 제가 경황이 좀 없어요. 고민을 좀 해볼게요. 그것보다 아줌마 이야기를 해보세요.”

“무슨 이야기?”

“아줌마 남편 그리고 아줌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건 왜?”

“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해요.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 하는 것도 맞고요. 하지만 전 아줌마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라요. 인연을 맺든 거래를 하던지 서로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줌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채연지가 묘한 시선으로 류지호를 바라봤다.

류지호는 그런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마주했다.

어디 고등학생이 할 법한 말인가.

어린 나이에 사업도 척척 해나가고 있다고 하더니.


“서로에 대해 알아야 한다라....”


채연지가 낮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신세를 갚는 건 도리다.

류지호 역시 그럴 생각이다.

그런데 채연지 사장이 조폭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뭔가를 그녀와 도모하게 되면 나중에 탈이 날 수도 있다.

조폭들이 의리를 들먹이며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면 자칫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일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류지호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반면 채연지는 과연 고등학생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고민했다.

비록 또래보다 훨씬 성숙하고 대단한 이들이 눈여겨보고 있는 학생일지라도.

마침내 눈을 뜬 채연지의 표정은 전과 달리 어딘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삼류신파극 같은 이야기가 될지도 몰라.”


그녀는 낮은 목소리 톤으로 자신의 살아온 삶을 담담히 털어 놓기 시작했다.

류지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기에 남편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였다.


“......!”


류지호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삶에서 소름이 돋은 것이 아니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와 분위기.

사연 좀 있는 주점 여사장에서 왕년에 한가락 했던 여장부로의 변신이랄까.


“악착같이 돈도 모으고 물주도 물고... 석바위에 가게를 냈는데 그때 남편을 만난거야...”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카리스마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녀가 모든 걸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고 믿을 정도로 류지호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믿을 사람인가 아닌가는 어렴풋이 판단할 수 있었다.


“....으음.”


잠시 고민을 하던 류지호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얻은 삶의 기회는 이전 삶에서 연장된 여분의 삶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다시 시작한 삶이다.

이렇게 살던 저렇게 살던, 그 삶의 결과가 같을 리가 없다.

이미 류지호에게 새로운 인연이 맺어지고, 희미하기만 했던 인연의 끈들이 단단해 지고 있다.

거기에 또 하나의 인연이 추가된다고 해서 뭐가 문제가 되나?

채연지와의 인연이 불러일으킬 변화는 파커가문과 맺은 인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제 이야기나 미국 사람들과 인연은 설명할 필요 없겠죠?”

“...대강 전해 들었어.”


류지호는 결정을 내렸다.


“매상 올릴 수 있는 건 제가 충분히 고민해 볼게요.”

“그래줄래? 돈 드는 건 생각하지 말고. 마음 놓고 고민해봐. 그리고...”


채연지가 말끝을 흐렸다.


“편하게 말해보세요.”

“내가 술장사하면서 데리고 있던 동생들이 있어. 남편 아우들이고 계집들이고 돈도 없는 것들이 씀씀이만 커서는 알거지들이야. 동생들한테 과일소주 알려줘도 될까?”

“제가 특허 낸 것도 아니고, 마음대로 하세요.”


애초에 감사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했을 뿐.


“일단 제가 몇 가지 확인해 볼 것이 있어요. 그 후에 이야기 해봐요.”

“고마워. 지호학생 편할 대로 해.”


류지호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채연지에게 건넸다.


“그리고 주변에 결혼하시는 분 있으면 연락 주세요.”


아네모네를 떠나면서 가온웨딩 홍보를 잊지 않는 류지호다.


사라락.

팔락팔락.


류지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일기장부터 펼쳐 봤다.

혹시 자신에게는 필요 없지만, 쓸 만한 아이템이 있는지 찾았다.

짧은 메모들이 곳곳에 잠깐씩 언급된 것들이 있었다.

PC방, 치킨, 커피, 미용실, 소주방, 노래방, 비디오방...

일단 당장 시도할 수 없는 것들을 지워나가자 소주방과 치킨 프랜차이즈가 남았다.

치킨은 이미 후라이드 치킨을 주력으로 하는 패스트푸드 브랜드 RFC가 들어와 있고, 국내 브랜드로는 펠리컨 등 서너 개 브랜드가 영업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올림픽 끝나고 치킨 프랜차이즈 TV광고가 쏟아졌던 것 같은데... 치킨 메뉴는 알고 있어도 레시피를 모르면 별 소용없는 아이템이야. 그러면 소주방이 남는데.....”


소주방 프랜차이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류지호는 이런 고민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는 영화와 관련된 것 외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일기장을 들춰보며 새로운 아이템 발굴에 관심이 생겼다.

류지호 자신은 아니더라고 주변 사람들이 장사 쪽으로 충분히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이템 몇 개를 찾아냈다.

류지호는 그런 것들을 좀 더 파고들 필요성을 느꼈다.


‘적어도 IMF 전까지는 소주방의 성장 잠재력이 충분할 것 같네.’


❉ ❉ ❉


덜컹, 덜컹.


오랜만에 류지호가 서울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강남 예식장들의 웨딩비디오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언제 웨딩전문촬영업체가 등장할지 몰랐다.

따라서 수시로 웨딩메카의 동향을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강남의 예식장을 돌아보던 중에 웨딩비디오를 촬영을 하는 걸 발견했다.

류지호가 웨딩촬영 기사에게 다가갔다.


“이거 찍는 거 비싸요?”

“왜?”

“우리 사촌 누나가 내년 봄에 결혼하거든요. 결혼식을 비디오로 찍으면 폼 날 거 같아서요.”

“예식장이 어딘데?‘

“그랜드요.”

“50만원. 기사 진행비 포함이야.”


가온웨딩의 D타입이 30만원이다.

강남은 20만원이 더 비쌌다.


“본식만 찍어줘요? 폐백이나 이런 건 안 찍어요?”

“결혼식을 전부 찍어서 멋지게 편집해서 주지. 글자도 넣어주고.”


본식 위주로 촬영해 컷 편집만 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글자를 넣어준다는 건 비디오 초입에 자막을 넣는 걸 의미했다.


“기사님은 스튜디오 소속이에요? 아니면 일당 받고 일하세요?”

“그건 왜 물어봐?”

“제가 연극영화과 학생인데 비디오를 좀 찍을 줄 알아요.”

“학생이면 영화를 찍어야지 뭐 하러 비디오를 찍으려고 해.”

“비디오 촬영에 관심이 많아서요.”

“나는 청담스튜디오에 있어. 나중에 사촌누나보고 한 번 내방해 보라고 해.”


류지호는 촬영기사에게 명함을 받아 챙겼다.

강남도 웨딩비디오가 활성화되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모양이다.


“일단 서울 진출까지 여유가 좀 있겠어.”


마지막 예식장까지 확인한 후, 서초동으로 이동했다.

신효정의 법률사무소를 찾아갔다.

신효정과 마주앉은 류지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경호원에 대해 말씀해 보세요.”

“특수부대 출신으로 위장경호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에요.”

“그 말이 아닙니다.”


류지호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신효정은 잠시 그런 류지호를 쳐다봤다.


“신경 쓰여요?”

“당연히!”

“그들은 지호 학생의 일상생활이 방해되지 않게 주의하면서 위험할 때 신속하게 처리하도록 계약되어 있어요.”

“미국에서 붙여준 경호원입니까?”

“아니요.”


자신이 신효정에게 어지간히 허술하게 보인 것 같았다.

한편으로 류지호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무슨 재벌가 말썽꾸러기 후계자도 아니고.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최상류층 자제도 아니다.

곁에서 세심하게 살펴야 할 세 살 먹은 어린애는 더더욱 아니다.

신효정이 고문변호사라는 지위를 넘어 자신의 보모가 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건 안 될 말이다.

류지호는 실제 십대도 아니다.

당연하지만, 보호를 빙자해 간섭이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절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알겠습니다. 이제 그럴 필요 없습니다.”

“불량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이고, 양아치에게 위협받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경호원들이 장문식과의 유쾌하지 않은 재회를 보고한 모양이다.


“계약관계로 맺어진 사이에서 호의에 대해 공짜는 없지 않습니까? 나중에 저나 파커 가족에게 이런 사안으로 영수증이 첨부되는 걸 원치 않습니다.”


괜히 오버해서 나중에 생색내지 말라는 말을 돌려서 말했다.


“호의 아닙니다. 이는 지호 학생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에 하나일 뿐이에요.”

“......”

“지호 학생과 관련한 사안은 내 독단으로 처리할 수가 없어요. 파커와의 계약에 포함된 것입니다.”

“좋습니다. 일단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단 다음부터는 제게 미리 말씀을 해주세요. 변호사님이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저와 관련된 일을 결정하지 말란 의미입니다.”

“......?”

“특히 저와 밀접하게 관계 된 일은 반드시 저와 상의해 주세요. 조금 극단적인 비유지만, 박통이 어떻게 죽습니까? 그리고 배신하는 사람의 거의 대부분은 측근 중에 있습니다. 특히 제 신변을 책임지는 측근 경호원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 충성도를 먼저 헤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걸 신변호사님이 일방적으로 정해버린 겁니다.”


신효정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변호사님도 야망이 있을 겁니다. 저를 잘 케어하는 것으로 파커가족에게 깊은 인상을 심고 싶었을 겁니다. 그걸 탓할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적 관계든 파트너십이든 선이란 게 있는 겁니다. 저와 변호사님은 가족도 친구도 아닙니다. 고문변호사라는 선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이런 경우가 생기게 된다면 꼭 저와 제 가족의 동의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류지호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고등학생에게 이런 식으로 충고를 듣는 걸 기분 나빠해야 할지 아니면 나이답지 않은 노련함을 칭찬해야 할지.


“약속해주십시오.”

“알겠어요.”

“고맙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제게 몇 분이 따라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일부는 가족을 보호하는 걸로 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미 다 붙어 있어요.”

“......?”

“가족들이 학교나 집, 일터를 제외한 곳으로 외출할 때는 지호학생처럼 경호원들이 은밀히 보호하고 있어요.”


류지호는 너무 황당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좋아해야 할지, 신효정의 과한 행동을 나무라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특수부대 출신 경호원이 자신과 가족을 보호한다는데 뭐라고 불만을 나타낼 수도 없고.


“저희는 대한민국의 아주 평범한 가정입니다.”

“그럴 리가요. 스스로를 과소평가 하지 말아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변호사님은 충분히 능력이 있는 분이잖습니까?”

“그러면 뭐해요? 지금 지호 학생은 겨우 결혼식 비디오나 찍고 있는데.”


류지호는 신효정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아들었다.

파커가의 도움을 받아 큰일을 하라는 의미다.

그래야 그녀가 활약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질 테니까.

그녀는 류지호를 통해 파커가족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허황된 야망과 자만심은 자신을 찌르는 칼이다.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될 자격이 되는지 모르지만, 멀리 있는 파커에 신경 쓰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저의 뜻을 먼저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효정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은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딱히 해가 되는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여기서 더 신효정을 압박하는 것은 일종의 갑질이나 마찬가지.


“변호사님, 저 아직 포기 안했습니다.”

“뭘요?”

“웨딩스튜디오 투자건.”

“현재 자본으로 부족해요?”

“인천에서 소소하게 할 거면 충분하다 못해 여유롭습니다.”

“그런데 왜?”

“내년에는 서울로 진출할 생각입니다. 조금씩 입소문이 퍼지고 있더군요. 서울에서도 웨딩비디오를 하는 전문업체가 생길 조짐도 확인 했습니다.”


신효정이 계속해보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강남에 비디오촬영 가르치는 학원이 있습니다. 원래는 군대 비디오병으로 가려는 현역 입대자들을 대상으로 가르치던 거였습니다. 그랬는데 최근 일반인들도 취미로 배우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재작년엔가 비디오영상작가협회도 생겨났고. 비디오촬영 학원과 협회 아카데미에서 비디오촬영이 가능한 일반인을 양성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곧 이쪽 분야로 진출할 겁니다.”

“무주공산에 경쟁자가 등장하겠군요.”

“본격적으로 웨딩비디오 시대가 올 것 같습니다. 제가 다시 파커 가족을 만나게 될 때는 올해 일 년 간 거둔 실적을 가지고 만나게 될 겁니다. 비록 그들의 성에는 한참 못 미치겠지만.”

“미국에 가고 싶군요?”

“내년 1월 1일부터 해외여행금지가 전면 해제된다는 거 아시죠?”

“알고 있어요.”

“구정 전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알겠어요. 급행료가 들더라도 1월 중순에는 나갈 수 있게 해줄게요.”


내년 1월 1일부터 그간 금지되었던 해외여행이 전면 허용된다.

류지호가 해외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필요한 서류는 전화로 알려주세요.”


류지호는 신효정에게 모든 걸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와 일부러 거리를 두지도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공유하지도 않을 생각이다.

파커가문이라는 배경이 없었어도 신효정이나 채연지 사장이 류지호에게 호의와 믿음을 보였을까.

그럴 리가 없다.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굳건한 신념과 의지만으로 안 된다.

그에 걸 맞는 능력과 사회적 지위가 필요했다.


“곧바로 인천 내려가요?”

“신촌에 가봐야 합니다.”

“저녁식사 같이 할까 했는데 아쉽게 됐네요.”

“다음을 기약하죠.”


류지호는 법률사무소를 나와 신촌으로 이동했다.

신촌 일대를 돌아다니며 이 당시 주점의 대체적인 유행을 확인했다.

확실히 소주방이 등장하기 전이다.

참고로 소주방은 93년에서 94년 초에 신촌에 등장하기 시작해 대학로, 압구정 등으로 퍼져나간다.

몇 년간 대학가와 로데오 거리 등에서 인기를 끌다가 주춤한다.

하지만 2000년대에 다시 인기를 끌기 시작해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어 살아남는다.

주류회사는 계속해서 소주 도수를 내리고, 과일소주도 속속 출시하게 된다.


‘대략 10~15년 정도 해먹을 수 있을까.....?’


채연지 등의 나이로 봤을 때 그 정도 기간이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류지호는 저녁 늦게 인천으로 내려왔다.

잠들기 전까지 다시 한 번 일기장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4개의 방 시리즈.

PC방, 노래방. 비디오방은 관련 전자제품이 아직 따라와 주지 않은 상태.

그렇다면 현재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은 소주방이 남는다.

류지호는 새로 산 노트를 꺼내 사업계획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새로운 한 주 행복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Mr. 할리우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5 충성을 다 하겠슴다! (3) +7 22.01.25 9,322 204 24쪽
» 충성을 다 하겠슴다! (2) +8 22.01.24 9,540 195 21쪽
63 충성을 다 하겠슴다! (1) +10 22.01.22 9,872 214 20쪽
62 Whiplash...! (2) +7 22.01.21 9,484 202 21쪽
61 Whiplash...! (1) +9 22.01.21 9,709 208 27쪽
60 말할 수 없는 비밀. +12 22.01.20 9,704 217 21쪽
59 이런 날도 오는구나... (3) +3 22.01.20 9,625 206 21쪽
58 이런 날도 오는구나... (2) +4 22.01.19 9,732 201 26쪽
57 이런 날도 오는구나... (1) +4 22.01.19 10,039 203 21쪽
56 Begin again. (4) +5 22.01.18 9,715 214 20쪽
55 Begin again. (3) +7 22.01.18 9,593 216 24쪽
54 Begin again. (2) +8 22.01.17 9,756 211 21쪽
53 Begin again. (1) +11 22.01.17 10,298 200 24쪽
52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6) +14 22.01.16 9,822 211 19쪽
51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5) +8 22.01.15 9,529 194 19쪽
50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4) +15 22.01.15 9,559 186 20쪽
49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3) +16 22.01.14 9,619 192 22쪽
48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2) +12 22.01.14 9,586 196 21쪽
47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1) +6 22.01.13 9,859 194 21쪽
46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3) +7 22.01.13 9,988 204 22쪽
45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2) +20 22.01.12 10,194 204 24쪽
44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1) +14 22.01.12 10,842 211 24쪽
43 Carpe diem... (4) +12 22.01.11 10,463 215 19쪽
42 Carpe diem... (3) +14 22.01.11 10,408 228 18쪽
41 Carpe diem... (2) +12 22.01.10 10,548 236 20쪽
40 Carpe diem... (1) +12 22.01.10 10,927 224 20쪽
39 얘는 혼자 어디 딴 세상이라도 살다 왔나? +8 22.01.09 10,990 239 20쪽
38 연풍(戀風). +12 22.01.08 11,018 231 17쪽
37 영화밥 먹고 살 팔자... (6) +7 22.01.08 10,817 224 22쪽
36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560 234 2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