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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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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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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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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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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영화밥 먹고 살 팔자... (6)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가워요.]


예쁘장한 여고생이 카메라를 보고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모습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까아악!

와아아!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서 최수용과 손종민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가난한 간호사 역으로 출연하고 있는 하이틴 스타 이정연이다.

청순가련의 상징.

하이틴 스타의 등장에 남학생 여학생을 불문하고 열광에 도가니에 빠졌다.


[오늘 방송제는 재미있게 보셨나요? 직접 여러분들을 만나 축하를 전하지 못해 아쉽지만, 분명히 방송제는 재밌고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여러분을 즐겁게 해드렸을 거예요. 그렇죠? 내년에 열릴 방송제도 미리 응원할게요. 그럼 여러분 안녕히 돌아가세요. 안녕~]


이정연이 화면 속에서 손을 흔들며 방송제의 엔딩을 장식했다.


팟!


모든 전등이 들어와 강당을 환하게 밝혔다.


짝짝짝짝!


방송제를 보고 들뜬 관객들의 흥분은 무대 인사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한수호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방송제 재밌게 보셨나요?”

“네에에!”


관객들은 즉각적으로 환호했다.


“노래 해! 노래 해!”


객석에서 다소 뜬금없는 요구소리가 빗발쳤다.


“저희는 가수가 아니고요. 가수의 노래를 트는 방송부입니다. 가수의 노래는 시민회관에 가셔서 콘서트를 들으시게 좋을 것 같네요.”


관객들의 아쉬움의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졌고, 스피커에서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별안간 한수호가 마이크를 류지호에게 넘겼다.


“This is our time. Time for us to dance!!”

(지금은 우리의 시간이고, 우리가 춤을 출 시간이다.)


마이크를 잡은 류지호가 목청껏 외쳤다.


둥둥둥.


영화 <풋루스>(84년)의 주제곡이 스피커를 때렸다.


짝!짝!짝!


흥겨운 ‘풋루스’ 리듬에 맞춰 관객들이 모두 기립해서 박수로 박자를 맞췄다.

물론 이 역시 방송부 3학년들이 바람을 잡았다.


[자유롭게, 발을 움직여, 일요일에 신는 신발을 신고 Ooh-whee, Marie 흔들어, 날 위해서 흔들어 봐 Whoa, Milo 이리와, 이리와 한번 해봐 슬픔을 집어던져 모두 함께 발을 마구 움직여.]


1학년들이 소위 개다리춤을 방정맞게 추며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휘이익!

캬아악!


남학생들의 날카로운 휘파람과 여학생들의 비명이 터졌다.

이어서 2학년들이 게가 옆으로 가는 듯 발바닥을 열심히 비벼대며 뒤를 이었다.


“한수호! 잘 생겼다!”


3학년까지 무대 인사를 마치자, 음악 볼륨이 나이트클럽을 연상시킬 정도로 치솟았다.

관객들은 흥겨움에 절로 어깨춤을 추며 박수를 쳐댔다.

열광적인 관객들을 바라보며 방송부원들은 감동에 흠뻑 빠졌다.

모두의 심정은 단 하나.


대성공!


방송부원들이 관객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한수호가 방송부원들을 돌아봤다.


‘후달려 뒈지는 줄 알았네.’


이명한이 맹장이 터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눈앞이 깜깜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허둥댔던 것도 사실이다.

다행인 것이 류지호가 생각보다 훨씬 더 잘해냈다는 것이다.

그저 잘해낸 정도가 아니다.

신포고 방송부에게 최고의 방송제를 선물해 주었다.


[This is our time. Time for us to dance!]


영화 <풋루스>에서 주인공이 졸업파티에서 외치는 대사다.

락 음악을 금지했던 시대.

춤이 신성을 파괴한다며 졸업식에서 허용하지 않았던 완고했던 시대.

그런 폐쇄적인 인습에 사로잡힌 시골마을에 자유로운 도시에서 이사 온 아웃사이더 청소년.

보수적이고 완고한 어른들 앞에서 소년이 성경을 들고 말한다.


[하느님도 우리가 즐기기는 원하신다. 지금은 우리가 춤을 출 시간이다.]


자신들의 잣대로 자식들에게 개성과 자유로움을 강제한 어른들과 정신적 거세를 당한 청소년들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지금은 우리의 시간이고, 우리가 춤을 출 시간이라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행복하게.

지금을 즐겨라.

한수호는 류지호가 선곡한 이 엔딩 음악이 썩 마음에 들었다.


‘이제 1학년인 주제에 우리 SPBS의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단 말이야.’


무대인사까지 마친 방송부원들의 얼굴에서 시원함과 뿌듯함이 느껴졌다.

오로지 공부밖에 모르던 김석민도 방송제에 감동을 받은 얼굴이다.

그는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크하게 굴었지만 들뜬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류지호의 기분은 남달랐다.

뿌듯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올랐다.

달라질 뻔 했던 방송제 역사를 원래대로 돌려놨다.

아니, 본래보다 훨씬 성공적인 결과를 이루어냈다.

세상에는 재능이 넘치는 인재와 타고 나길 그렇게 태어난 천재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이들 모두가 위대해지지 않는다.

위대는커녕 성공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쩌면 재능보다 도전하는 용기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실천할 수 있는 행동력이 더 필요한 거다.

류지호는 재능을 따지게 앞서 행동력을 보여주었다.

성공이든 실패든.

과정 속에 답이 있는 법이다.


‘이럴 때 띵 소리와 함께 퀘스트 컴플리트라는 문구가 눈앞에 떠올라야 하는 거 아닌가?’


피식.


실없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껏 차오르는 성취감을 즐기느라 류지호가 가장 늦게 무대에서 내려왔다.

관객들이 하나둘 강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방송부원들의 지인들이 무대로 몰려들었다.


“철웅아, 축하해.”


작고 아담한 체구의 귀염성 있는 얼굴의 여학생이 이철웅에게 꽃을 선물했다.


“와줘서 고마워.”


헤벌쭉.


이철웅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찢어졌다.

공다연을 보고도 담담했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싹이 트는구나.’


방송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객석을 열심히 두리번거리기에 공다연을 찾아 기웃거리는 줄 알았다.

VCR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딘지 넋이 나가 있더니, 새로 생긴 여자 친구를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방송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동료들에게 민폐가 되는 행동이었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성공리에 방송제 마쳤다.

때문에 류지호는 그를 탓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한수호! 자꾸 딴 데로 새지 말고 이리 와봐!”


타학교 방송부들이 비디오 영상을 튼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신포고 방송부 2학년들을 붙잡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빔프로젝터하고 스크린 어디서 빌렸냐?”

“스크린 사이즈가 어떻게 돼?”

“빔프로젝터 몇 인치까지 카바 되냐?”

“비디오 편집은 어떻게 했어?”

“글자는 어디서 넣었냐?”

“나중에. 나중에 한번 신포동에서 모이자. 그때 너희들 궁금증 다 풀어줄게.”


모든 방송부원들이 스타였지만, 그 중에서 단연 공다연과 최원석이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뮤직비디오에서 주인공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특히 공다연의 주변은 학생들로 들끓었다.

그녀가 움직이면 남학생들이 쪼르르 뒤를 따라왔다.

몇몇 남학생들은 대놓고 호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빵집에 가자며 데이트 신청을 했고, 뮤직비디오의 남자들처럼 보기 좋게 딱지를 맞았다.

최원석의 주변에도 여학생들이 얼쩡거렸다.

급히 휘갈긴 러브레터를 건네는 여학생도 보였다.

황혜경이 여학생들을 몰고 류지호에게 다가왔다.

류지호가 인사하기도 전에 대뜸 물었다.


“중학교 때 방송부 했어?”

“아니요.”

“그럼 뭐 했어?”


류지호가 고우찬을 돌아봤다.


“롤라 탔을 걸요? 아마도...”


중학교 때 고우찬과 롤러장에 놀러 다니는 것 외에는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아이였다.


“이씨. 너 누나한테 함 맞아볼래?”


황혜경이 화를 냈다.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두툼한 팔뚝까지 흔들어 보였다.

여성에게 건장하다는 표현은 실례다.

그런데 황혜경의 체격은 남학생 못지않게 듬직한 것이 사실이다.


“야! 비켜봐. 우리도 이야기 좀 하게.”


황혜경과 함께 온 여학생들이 차례로 자신을 소개했다.


“난 IBS 부장 신윤미.”

“KBC 조영은.”

“방송제 잘 봤어. 난 PBS 김희경이라고 해.”


류지호를 찾아온 여학생들 모두가 방송부장들이었다.

남고 방송부장들이 한수호에게 몰려들자, 여학생들이 류지호에게 몰려왔던 것.


“이번 방송제 다 네가 계획을 짰다며?”

“다 함께 했습니다.”

“우리 1학년 차장 소개 시켜줄게.”

“어따 대고 소개팅 주선질이야!”


황혜경이 버럭 화를 냈다.

류지호가 예의바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 교양 있는 진명여고 방송부장 답게.....”

“시끄럽고! 나중에 이 누나들이랑 회의 좀 해.”


누나라고 인정하기 좀 그렇지만... 일단 그렇다고 치고.


“회의요?”

“여기 온 애들은 전부 학교에 비디오카메라가 있어. 그래서 너희한테 배우고 싶대.”


류지호가 깜짝 놀라 물었다.


“여고에 비디오카메라가 있다고요?”

“여고라고 무시 하냐? 지금!”


황혜경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류지호는 여학생들의 학교 배지를 빠르게 훑었다.

인천에서도 알아주는 사립명문여고와 신포고에 비견되는 공립여고 배지를 달고 있다.

그제야 납득이 됐다.


“저는 일개 엔지니어예요. 차기 국장인 상은이와 이야기 나눠보세요.”


류지호는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될까봐 선을 그었다.


“나중에 너희 부장하고 회의할 때 빠지면 내가 두고두고 괴롭힐 줄 알아.”


황혜경이 협박의 말을 남기고, 여학생들과 떠나갔다.

사인방마저 저마다 전시회와 남은 축제를 즐겨야 했기에 어느새 떠나고 없었다.

류지호의 주위에 가족들만 남았다.


“저 언니들 못됐어!”


입술이 댓 발이 나온 류아라가 성질을 부렸다.

류지호는 그런 여동생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고릴라 오빠한테 혼내주라고 이를 거야.”


고우찬이라고 별 수 있을까 싶지만.

여동생의 귀여운 투정에 그저 웃어넘길 뿐.


“우리 아들이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정말 멋졌다.”


심영숙은 소녀처럼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류지호를 칭찬했다.


“괜히 부끄럽네요.”

“울 큰오빠가 최고! 최고!”


류아라가 방방 뛰며 앙증맞은 손으로 엄지를 추켜올렸다.

조막만한 얼굴에 눈동자가 까맣고 고운 어린이가 그러니까 꼭 강아지 같았다.


“그래, 고맙다.”

“큰오빠, 나도 연예인 할래.”

“연예인?“

“응. 나도 저기 언니처럼 탈랜트 할 거야.”


류아라가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공다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류지호가 좋은 말로 타일렀다.


“탤런트 하려면 머리가 좋아야 해. 아주 많이.”

“나 머리 좋아. 구구단 다 외웠어.”

“아라는 국어책 한 권 다 외울 수 있어?”

“음.. 국어책 한 권?”

“응, 철수와 영희가 하는 말 다 외울 수 있어? 바둑아 놀자 다음에 뭐야?”

“그걸 다 어떻게 외워...”


류아라는 불안한 눈초리로 애처롭게 대답했다.


“그치, 탤런트 하려면 국어책 보다 훨씬 두꺼운 책을 다 외워야 하는데, 아라가 할 수 있을까?”


류아라가 금세 시무룩해졌다.

류지호가 여동생을 안아 들었다.


“아라야.”

“응?”

“오빠는 아라가 지금은 그냥 친구들하고 뛰어놀고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어.”

“그래도.....“

“나중에 아라가 중학교 가면 그때 다시 오빠랑 얘기하자.”

“왜 중학교인데?“

“탤런트는 잠도 많이 못자고 밥도 많이 못 먹고 책도 많이 외워야해. 아라는 매일매일 그렇게 살 수 있어?”

“아니.”


류아라가 어림없다는 듯 단박에 대답했다.


“그러니까 국민학교 졸업하고, 아라가 건강하게 자라면 그때 가서 얘기해 보자.”

“알았어.”


류순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라 너 혹시 숙제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지?”

“......”


류아라는 작은 오빠의 물음을 못들 척 딴청을 피웠다.


쓰담쓰담.


류지호는 그런 여동생이 너무 귀여워 다시 한 번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두가 돌아가고 방송부원만 남았다.

인현전자상가 음향장비 업체 트럭이 앰프와 믹서콘솔을 실어 돌아가고, 방송부원들이 대강당을 정리했다.


“.....!“


류지호는 강당을 나오기 전 텅 빈 실내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오늘의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


❉ ❉ ❉


신포고 방송부원들이 졸업생 선배들이 예약한 삼겹살집에 둘러앉았다.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어.”


모두가 방송제에서 겪었던 경험담에 흠뻑 빠져들었다.

자체 제작한 뮤직비디오.

학교생활을 그린 영상물.

그리고 최고의 스타들이 직접 신포고 방송제를 위해 출연해준 축전영상까지!

학교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관객들.

그럴 때마다 신포고 방송부원들은 그간 흘린 땀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여름 내내 대본을 짜고,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하러 여의도에 왔다 갔다 하면서 방학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갈 정도로 정신이 없었지만, 땀 흘려 준비한 프로그램으로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을 때 그 짜릿함.

카메라와 마이크 뒤에 숨겨진 방송부원들만의 소중한 추억들까지.

그게 SPBS의 스피릿!

모든 방송부원들의 로망이다.


왁자지껄.


졸업생 선배들은 성황리에 끝난 방송제에 고무되어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후배들이 졸업생 선배들을 어려워해 적당히 먹고 마실까봐 아예 주방에서 삼겹살과 술을 나르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은 1학년들 역시 방송제의 여운을 즐겼다.

최원석과 김석민이 사이다를 건배하며 말을 나눴다.


“후, 긴장 되서 죽는 줄 알았어.”

“난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 그래도 재미있었어.”

“시간 아깝다고 투덜거렸잖아!”

“그랬지. 공부를 해야 하는 황금같이 귀중한 시간을 이렇게 소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억울했어. 근데...”

“근데?”

“너무 재미있었어. 나 시골 갈 때 빼고 외박 한 번 한적 없었거든.”

“토요일하고 일요일에 독서실에서 자는 거 아니었어?”

“새벽에 아버지가 데리러 오셔.”


이철웅이 은근한 어조로 류지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걱정은 안 됐어?”

“무슨 걱정?”

“그 사람 많은 데서 네가 막 지휘를 해야 했잖아? 사람들이 다 너만 쳐다보고.”

“전혀.”

“왜?”

“난 우리 방송부를 믿었으니까. 나름 할 만 했고.”


본래 소극적인 성격의 류지호였다면 움츠러들어서 계속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기회조차 없었을라나...

어쨌든 류지호에게 여유가 생겼다.

한 번 인생을 살아보았기 때문에?

아니다.

그것과 다르다.

경험 때문이다.

분명 영화감독으로는 실패했었다.

다만 조감독 생활에서까지 무능했던 건 아니다.

저예산 영화부터 블록버스터 영화까지 다양한 영화에서 조감독을 수행했었다.

류지호가 무능하고 센스가 없다면 감독들이 믿고 조감독을 맡기지 않을 터.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연출부 생활을 시작해 서른 중반까지 이십여 편의 영화에서 조감독을 했던 경험이 류지호에게 남아 있었다.


“하여간 오늘 멋있었어!“


이철웅이 찬사를 보냈다.

이번 방송제는 대성공이라고 자부해도 좋았다.


“내년에는 우리가 주역인데 잘 할 수 있을까?”


박상은이 우려 섞인 질문을 던졌다.


“응. 당연하지.“


이번에도 류지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했다.


“그러면 좋겠지만...“

“왜 말을 얼버무려?“

“쉽진 않을 것 같아서.”

“왜 그렇게 생각해?“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질 거 아냐.”


그 대답을 들은 류지호도 쉽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지금 박상은이 우려하고 있는 것.


“내년에는 다른 방송부들도 다 따라하겠지?”

“글쎄...”


류지호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박상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모르는 것도 있어?”

“내가 점쟁이냐? 그걸 어떻게 예상하겠어.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 우리처럼 하려면 돈이 많이 들 거라는 거. 외부 지원 없으면 우리처럼 하는 건 꿈도 못 꿀걸.”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나 좀 많이 가르쳐줘.“

“친구끼리 뭘 가르쳐. 함께 열심히 해보자. 넌 PD로 난 기술파트로. 7회는 우리 한번 날아다녀 보자고. 기술파트는 내가 책임질게. 상은이 넌 PD로서 우리를 잘 이끌어 줘.”


류지호가 박상은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짝!


박상은이 자신의 손바닥을 힘차게 부딪쳤다.


지글지글.

왁자지껄.


방송제를 진두지휘하느라 진을 뺏기 때문일까.

류지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났다.


‘삼류감독이라고 해서 바보멍청이는 아니니까... 경험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영화감독으로 실패했던 경험은 류지호에게 커다란 교훈을 남겼다.

따라서 류지호는 아집과 욕심을 버렸다.

그저 하루하루 삶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자 했다.

힘을 빼고 나니 여유가 생기고, 시야가 넓어졌다.


“힘 빼. 영화나 생각이나.”

“네 이야기에 자신을 가져.”

“그건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바로 네 자신의 것이야.”

“잘 안 풀린다고 해서 절대 도망치지 마. 그건 스스로의 꿈을 부정하는 짓이니까.”

“영화는 삶을 담는 거다. 기술과 트렌드 따위에 얽매이지 마.“


구구절절 옳은 조언들.

조감독 시절 존경하고 따랐던 감독이 항상 입버릇처럼 던졌던 조언들이었다.

류지호는 그 조언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정신에 박혀있던 예술지상주의 때문이다.

예술영화와 상업영화.

그 간극은 무척 컸다.

아마추어시절에는 비교적 그 마인드가 통했다.

그러나 프로들이 활동하는 영화판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영화판은 썩었어. 어떠한 철학도 삶에 대한 질문도 없이 만든 영화는 쓰레기통으로 가야해.’


당시 류지호가 할 수 있는 것은 남의 영화를 씹는 것이 전부 일 뿐.

아집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영화를 작업할 때 잔뜩 겉멋만 들어갔다.

겨우 잡은 연출기회에서도 고집을 피우고, 되도 않는 겉치레만 고집하다보니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내 영화는 충무로에서 통하지 않는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계속해서 물을 먹었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급기야 자신감이 떨어졌다.

아무리 수천편의 영화를 보고, 수백편의 시나리오를 쓰면 뭐할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데.

이후로 영화에 대한 갈망은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충무로의 변방으로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결국 IPTV 19금 영화판에서도 저 밑바닥의 세계로 떨어졌다.

그 곳에서조차 점점 경쟁이 치열해졌다.

자연히 연출기회는 날로 줄어만 갔다.

류지호가 실패한 인생을 산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감독으로서 류지호는 아집에 사로잡혀 영화판을 비난할 줄만 알았지 스스로를 갈고 닦지 않았던 것이 크다.

가장 중요한 영화의 본질을 놓쳐버렸다는 것이 치명적이다.

그 때문에 말년에 사람들이 저질이라 무시하는 에로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근근이 살았다.

19금 영화라고 우습게보면 안 된다.

그 바닥에서 작업하는 사람들도 나름 프로들이다.

러닝타임 70분에서 80분 분량의 각본료가 50만원.

글자 10포인트, A4용지 한 장에 1만 원 정도 계산해 줬다.

그걸 또 절반으로 후려치는 양아치도 있다.

그런 양아치들은 어디서 대본 하나를 가져와 당당하게 ‘우라까이‘하라고 요구했다.

‘우라까이’는 일본어 우라가에스에서 온 말로 주로 언론계에서 쓰던 은어다.

뒤집다.

계획을 변경하다.

기사 내용이나 핵심을 살짝 돌려서 쓰는 것을 기자 세계에서 ‘우라까이’ 한다고 했던 것이 연예계 전반으로 퍼져 널리 쓰였다.

영화판에서는 ‘우라‘라는 말과 뒤집는다 둘을 혼용해서 사용했다.

그럴 때면 류지호는 대본을 양아치에게 정중하게 돌려줬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고 자위하면서.


후우.


류지호는 복잡한 심정이 담긴 한숨을 내뱉었다.


‘힘 빼... 내 이야기에 자신을 가져. 영화는 삶을 담는 것이다.’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진즉에 깨달았다면 영화감독으로 성공하지 않았을까.


‘과거로 돌아온 이 기적이 혹시 다시 한 번 영화감독으로 재기해 보라는 신의 계시일까?’


내내 흐릿했던 미래에 대한 윤곽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류지호의 운명은 다른 방향으로 틀어지지 않았다.

그는 사업을 할 팔자도 공부만 열심히 파는 모범적인 성격도 아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것.

그걸 위해 온 인생을 던지는 삶.

과거로 돌아와도 평생 영화 밥을 먹을 팔자란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외면했던 사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엉뚱한 것에 한 눈 팔 것이 아니라 본래의 팔자로 돌아가야 함을 깨달았다.

방송제를 준비하는 동안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야기를 만들고 그걸 촬영해서 편집한 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고 즐긴다는 것을.

사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될 뿐.

그게 산다는 것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는다!’


파커 가족이라는 엄청난 인연까지 생겼다.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종자돈이 태산증권 계좌에서 열심히 돈을 불려나가고 있다.

자신의 삶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최고의 영화감독이 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최고의 영화제작가가 되면 된다.

반드시 감독으로 성공하지 않아도 영화판에 발자취를 남기면 되지 않을까.

이왕이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면 좋고.

성공적인 삶의 비밀 별 거 아니다.

무엇을 하는 게 자신의 운명인지 찾아낸 다음, 그걸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던 자신의 일을 사랑하려무나. 네가 어릴 적에 영사실을 사랑했던 것처럼.]


영화 <씨네마천국>에서 고향을 떠나는 토토에게 알프레도가 해준 말이다.

이 말이 류지호의 머릿속에 종소리처럼 울렸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라.....


작가의말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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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충성을 다 하겠슴다! (2) +8 22.01.24 9,513 195 21쪽
63 충성을 다 하겠슴다! (1) +10 22.01.22 9,856 214 20쪽
62 Whiplash...! (2) +7 22.01.21 9,469 202 21쪽
61 Whiplash...! (1) +9 22.01.21 9,697 208 27쪽
60 말할 수 없는 비밀. +12 22.01.20 9,691 217 21쪽
59 이런 날도 오는구나... (3) +3 22.01.20 9,614 206 21쪽
58 이런 날도 오는구나... (2) +4 22.01.19 9,721 201 26쪽
57 이런 날도 오는구나... (1) +4 22.01.19 10,026 203 21쪽
56 Begin again. (4) +5 22.01.18 9,702 214 20쪽
55 Begin again. (3) +7 22.01.18 9,582 216 24쪽
54 Begin again. (2) +8 22.01.17 9,742 211 21쪽
53 Begin again. (1) +11 22.01.17 10,285 200 24쪽
52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6) +14 22.01.16 9,808 211 19쪽
51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5) +8 22.01.15 9,516 194 19쪽
50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4) +15 22.01.15 9,544 186 20쪽
49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3) +16 22.01.14 9,605 192 22쪽
48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2) +12 22.01.14 9,568 196 21쪽
47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1) +6 22.01.13 9,839 194 21쪽
46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3) +7 22.01.13 9,970 204 22쪽
45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2) +20 22.01.12 10,179 204 24쪽
44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1) +14 22.01.12 10,828 211 24쪽
43 Carpe diem... (4) +12 22.01.11 10,448 215 19쪽
42 Carpe diem... (3) +14 22.01.11 10,390 228 18쪽
41 Carpe diem... (2) +12 22.01.10 10,534 236 20쪽
40 Carpe diem... (1) +12 22.01.10 10,908 224 20쪽
39 얘는 혼자 어디 딴 세상이라도 살다 왔나? +8 22.01.09 10,975 239 20쪽
38 연풍(戀風). +12 22.01.08 11,004 231 17쪽
» 영화밥 먹고 살 팔자... (6) +7 22.01.08 10,805 224 22쪽
36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530 234 22쪽
35 영화밥 먹고 살 팔자... (4) +7 22.01.07 10,593 213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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