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연재수 :
962 회
조회수 :
4,125,632
추천수 :
126,996
글자수 :
10,687,409

작성
22.01.16 10:00
조회
9,821
추천
211
글자
19쪽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6)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덜컹.


류지호가 비어있는 방송실로 들어가 캐비닛을 활짝 열어젖혔다.

수많은 VHS 테이프 사이에서 스티커가 붙어있는 테이프를 몇 개 챙겼다.

더 이상 신포고에 다닐 일이 없는 류지호는 마지막으로 폭탄을 하나 터트릴 예정이다.

바로 교감을 학교에서 쫒아내는 것이다.

덤으로 신포고 몇몇 교사들에게도 경고가 될 만한 이벤트를 궁리 중이다.

류지호는 테이프들을 챙겨 판사진관의 편집실로 돌아왔다.

VHS 테이프들에 담겨있는 교감의 모습들을 따로 모았다.

방송제 준비를 위해 연정훈 인터뷰를 촬영하며 찍힌 돈봉투 받는 교감의 모습.

한창 대입 원서를 쓰던 시기에 학부형들로부터 촌지를 받는 영상들.

학력고사가 끝나고 원서를 쓰던 시기에 일부러 교무실 스피커의 선을 단선시켰다.

비디오카메라를 교감의 책상이 잘 보이는 곳에 놔두고, 스피커를 수리하는 시늉을 하며 학부형들에게 촌지를 받는 교감을 비디오카메라에 담았다.

일종의 몰래카메라였는데, 이런 허술한 촬영을 신경 쓰는 교사는 없었다.

심지어 마이마이로 교감과 학부형의 대화를 녹음까지 해두었다.

은밀하게 행해지는 일이었으면 류지호의 이런 노력은 소용이 없었겠지만, 학부형으로부터 촌지를 받는 행위가 워낙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그런지 교감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촌지를 챙겼다.

교감에게 한방 먹이기 위해 졸업할 때 즈음 써먹으려고 했던 것들이다.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탁!


류지호는 교감의 촌지영상 VHS테이프 카피 작업을 마쳤다.

우체국에서 각 언론사에 테이프를 보냈다.

교육청에 익명으로 민원까지 넣었다.

명확한 증거가 있는 이상 교감은 해직은 면하더라도 중징계를 피할 수 없을 거라 기대했다.


✻ ✻ ✻


그 날 이후로 류지호는 일간지와 방송 뉴스를 확인했다.

별다른 반응이 없다.

언론사에 전화를 걸면 돌아오는 반응은 시큰둥했다.

뉴스감도 안 된다는 것이다.

류지호는 물증이 확실한데 뉴스감이 안 된다는 것이 납득이 가질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일간신문을 종류별로 사서 기사를 확인했다.

온통 13대 대통령의 취임과 그에 따른 장밋빛 전망,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미국문화원에서 시한폭탄이 발견되었다는 뉴스, 이라크 공군기가 이란 최대 정유소를 폭격함으로 벌어질 여파 등이 도배되었다.

특히 경제면에는 한미 재무장관회담에서 미국이 자본 및 금융시장 조속 개방과 원화 평가절상 가속화를 강력히 요청한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각종 사건과 사고가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교사의 체벌과 촌지수수에 관한 뉴스는 찾아볼 수 없었다.

끼니때가 되면 밥을 먹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해서 뉴스가 안 된다는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으로 부정적인 뉴스를 통제하는 걸까.

신효정에게 도움을 청할까 류지호는 몇 번을 망설였다.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하면 손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서울대, 하버드 출신의 변호사라면 인맥이 상당할 테니까.

신효정이 류지호의 보모나 집사가 아니라는 사실.

류지호가 갑이고 신효정이 을의 관계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류지호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신포고등학교 총동문회 전화번호 부탁합니다.”


류지호는 114 안내원이 불러준 전화번호로 연락을 취했다.

총동문회를 통해 신포고 동문들이 재직 중인 언론사를 수소문했다.

그런 곳 중 경인일보에 다니는 동문 선배와 겨우 연락이 닿았다.

또한 공중파에 근무하는 선배들을 직접 찾아 다녔다.


“선배로서 참 쪽팔리네. 모교에 이런 작자가 버젓이 선생질을 하고 있다는 걸 몰랐어. 우리 학교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선배님들이 다니실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저희가 아무래도 뺑뺑이다 보니.....”

“제보자 보호 차원에서 네 존재는 감추도록 하마.”

“당사자하고 몇 명은 제보자가 저란 걸 눈치 챌 겁니다. 그리고 선배님 단독은 아닐 겁니다. 경인일보의 26회 송일성 선배님도 기사 내주시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도꾸다니(특종)도 아니고, 괜찮아.”

“크게 터지면 신포고 명예가 떨어지는 일이잖습니까.”

“신포고 명예는 신포인이 지켜야지 남의 손에 맡길 순 없다.”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방송부 선배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방송국으로 사라졌다.


후우.


류지호는 안도와 기대감에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모교를 사랑해서라거나, 부조리를 고발한다거나, 정의실현이니 하는 거창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정 부분은 교감에 대한 복수를.

가장 중요한 것은 패배의식을 완벽하게 털어내고,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서고 싶어서다.

열여덟 살이라는 이 위치에서 자신이 가진 것들로 과연 어느 정도까지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 ❉ ❉


[인천의 A고교 교감이 고3 수험생의 대학입학 원서 편의를 조건으로 청탁성 촌지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인천시교육청에 따르면 인천지역 명문고로 유명한 A고교 교감 B씨가 지난해 수험생 C군, D군 등 다섯 명에게서 각각 많게는 50만원에서 적게는 10만원의 금품을 수수하고, 대입 원서에 편의를 봐준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하위권 성적이었던 C군에게는 부정입학까지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취재결과 B씨는 매년 고3 수험생 가운데 부유한 집안의 학부모를 수시로 학교로 불러 진학상담이란 명목으로 촌지를 챙겨왔으며 담임교사의 업무까지 수시로 간섭해 월권을 해 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혐의에 대해 B씨는 강력 부인했다. 인천시교육청은 교사들의 촌지수수와 불법 찬조금 모금 등 교육 부조리에 대해 특별 감찰을 벌인다고 밝혔다.]

- 경인일보 송일성 기자.


신문기사가 나간 후.

류지호는 아버지와 함께 신포고 학생부실에서 퇴학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퇴학서류를 바라보는 류지호의 표정은 홀가분해 보였다.

발목에 뭔가 묵직한 쇠공이 매달려 있다가 해방된 자유로움.

착각일지 모르지만,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제약이 풀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걸로 끝인 겁니까?”

“다 끝났습니다.”


퇴학절차라는 것이 허탈할 정도로 간략했다.

류민상은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로써 류지호는 중졸이 되었다.

부자는 학생부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었다.

문득 류민상이 뒤를 돌아봤다.

아들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비척비척 따라올 줄 알았다.

헌데, 생각보다 담담하고 편해 보였다.

류민상이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겪을 고난을 대비한 액땜이라고 생각해.”

“믿어달라는 말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아버지.”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세상은 네가 테레비나 책에서 본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험해.”

“제가 나태해지고 삐뚤어지면 매를 들어 주세요.”

“매를 들어서 네 고집을 꺾을 수 있었다면 진즉 회초리를 들었어. 인석아.”

“실망시켜드리지 않을게요.”

“아버지가 아들을 믿어야지 어떻게 하겠냐.”


류민상은 담배가 당겼다.

점퍼 안주머니에 들어있는 88담배갑을 꺼내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아버지, 저는 방송부 친구들 만나고 갈게요. 먼저 돌아가세요.”


류민상이 아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돌아섰다.

류지호는 아버지가 교문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지켜봤다.


딴따라라라.


신포고 점심방송이 시작됐다.

그 시공간에는 자퇴한 류지호의 자리는 없었다.


드르륵.


방송실 문이 열리자 신입생들이 넙죽 허리를 숙이며 힘차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방송실 한쪽에 각 잡고 서있는 후배들을 바라보는 류지호의 마음은 착잡했다.

박규민, 윤철욱, 김영석, 김현수, 고인철.

SPBS 방송국 18기 신입생들의 이름들이다.

서른 살 이후로는 인연이 끊어졌던 후배들.

이번에도 류지호가 학교를 떠남으로 해서 이들과의 인연이 이어질 것 같지 않았다.

류지호가 착잡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애들아.”

“넷. 선배님!”

“철웅이가 운동하자고 꼬셔도 넘어가지 말고 공부해. 국장인 상은이 속도 썩히지 말고. 공부하다 모르는 거 있으면 석민이한테 물어보고, 옷 입는 거나 여자문제는 원석이하고 상담하고...”

“옛!”


신입생들이 우렁차게 대답하자, 류지호가 피식 웃었다.


“너지?”


김석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류지호에게 은근히 물었다.


“뭐가?”

“뒤끝 있다?”


교감의 비리를 폭로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방송부 친구들이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디오테이프 몇 개가 없어진 걸 우리가 모를 줄 알았어?”


그것까지 알고 있었으니 딴청을 부릴 이유가 없다.


“이왕이면 정의 실현이라고 해줄래?”


류지호가 너스레를 떨자 이철웅이 류지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또라이 같은 놈!”


크크크.

류지호와 방송부 친구들이 웃었다.


“우리 이제 다시는 못 보는 거야?"

"야~최원석! 내가 자퇴했다고, SPBS 17기를 해체 할 수 있겠어?“

“너 이제 17기 아냐.”


김석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와, 학교 그만 둔다고 방송부에서도 잘린 거냐?”

“너 점오야 점오! 17.5기!”


박상은이 류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시 뭉쳐야지 다시 뭉쳐서 가을에 방송제 해야지. 안 그래? 네가 기술파트 책임져야 할 거 아냐. 안 그러냐고!”

“우리 다시 다 만나는 거다?”

“새끼들... 잘나간다고 쌩까는 놈 있으면 찾아가서 응징할거고, 못산다고 죽을 듯 찌질한 놈 있으면 잘살 때까지 못살게 굴 거야. 우리 중에..누가 먼저 죽을 진 모르겠는데, 죽는 그날까지 아니 죽어도 우리 SPBS 17기는 영원할 거야!!"


영화 <써니>에서 수지네 집 대문 앞에 모인 칠공주 멤버들의 울고불고하며 이별하는 장면처럼 감동적이지는 않았지만, 류지호는 충분히 친구들에게 감동했다.

누군가 훌쩍거렸다면 류지호는 오글거려 방송실을 박차고 나갔을 지도 몰랐다.


척.


박상은이 손을 내밀었다.

이어 한 명 한 명의 손이 그 위에 포개졌다.


“우리는!”

“하나다!”

“카르페 디엠!”


이어진 친구들과의 구호제창 역시 오글거렸지만, 류지호는 힘껏 카르페 디엠을 외쳤다.

원래 구호였던 ‘우리는 하나’에 이어 ‘카르페 디엠’이 방송부 구호에 추가되었다.

비디오 방송제와 함께 구호 하나를 신포고 방송부에 남기고 떠나는 류지호다.


자퇴.


류지호는 과거로 돌아와 또 하나의 중대한 결정과 선택을 했다.

신포고를 떠남으로 해서 완전히 달라질 삶.

앞으로 운명이란 시나리오에 순응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틀에 박힌 시나리오를 각색해 운명을 거스를 것인가.

전적으로 류지호 자신에게 달렸다.


꾸욱.


류지호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불확실한 미래.

미래가 바뀌면 또 어떤가.

어차피 이전과 똑같은 영화의 길을 걸어가면 무조건 실패한다.

모든 걸 리셋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옳다.

지금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를 똑바로 바라보고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류지호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말 한 것처럼.


‘Seize the day!‘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 ❉ ❉


9시 뉴스에 모자이크 처리된 신포고 교정을 배경으로 촌지 뉴스가 나갔다.

중간에 류지호가 제보한 영상도 잠깐 나오기도 했다.

반응은 그저 그랬다.

걸린 놈만 바보가 된, 그런 분위기다.

지역신문인 경인일보에 기사가 나가고 나서, 유력일간지도 뉴스를 싣기 시작했다.

비록 대서특필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사회면에 작게 나갔지만, 언론에 오르내리게 되니 신포고 동문들이 들고 일어났다.

결국 KBC 간판 탐사보도 <추적25시>가 신포고를 중심으로 교육계에 만연한 대학입시 원서편의 대가성 촌지 프로그램이 방영되기에 이르렀다.

<추적25시>에서 류지호가 제보한 VHS테이프와 마이마이로 녹음한 교감과 학생주임의 음성이 고스란히 방영되었다.

그때서야 관계당국이 나섰다.

비록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할 이슈는 아니었지만, 인천지역에서 만큼은 큰 이슈가 되었다.

특히 신포고는 동문들과 일부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하루 종일 학교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화기에 불이 났다.


“이 개자식들이 뭐라고? 나를 해임해?”


꽈앙!


교감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전화기를 던져 버렸다.


“후우, 후우.”


교감은 길게 숨을 내쉬며 진정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겨우 이 따위 민원으로 30년 넘게 교직생활을 한 나를 쫒아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쉽게는 안 될 거다!”


자신은 곧 교장이 될 몸이다.

그런 자신이 학생 한 명에게 놀아나다 못해 모욕을 당했다.

치욕감에 매일 밤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다.


“너 이 X새끼!”


교무실로 들어서는 류지호를 발견하고 교감이 악을 썼다.

류지호의 편안한 얼굴을 확인한 순간 찢어 죽이고 싶다는 살심까지 일었다.

그래서였을까.

교육자로서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내뱉었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알고 있는 거냐? 이 XX 같은 새끼야!”

“전 알고 있었더라고요. 내 위치,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없는 일.”

“내가 널 가만둘 것 같아?”

“왜 질풍노도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오락가락 했을까요?”

“무슨 개소리야!”


교감이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류지호는 그런 행동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교감 선생님은 생각해 본 적 없으시겠지만. 학생들이 뭘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지 관심도 없으니까.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겠지요?”

“어디서 교감 선생님이란 소리를 입에 담는 거냐!”


교감의 호통에도 류지호의 표정은 일말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자퇴했다고 다 끝난 것 같지?”

“이제부터 시작 아닐까요?”

“두고 보자! 이 XXX! 당장 내 학교에서 꺼져!”


길길이 날뛰는 교감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추해보일 수가 없다.

한편으로 통쾌함이 가슴을 적셨다.

머릿속에 암처럼 자라있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도 같다.

점차 머릿속이 개운했다.


“이제야 비로소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교감선생님께 약간의 고마움은 있네요. 제가 한 일이 먹히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 하는 마음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도 통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비록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교감이 당장에라도 류지호의 뺨을 후려칠 듯 한 발자국 나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지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깨달은 게 또 있어요. 새로 시작하는데 전에 살아본 거랑 똑같이 살면 재미없다는 거.”

“이, 이 미친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교감의 혈압이 올라갈수록 류지호의 미소는 짙어졌다.

류지호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서 나갔다.


“두고 봐 이 새끼야!”


등 뒤로 교감의 악에 받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류지호가 복도를 걸었다.

교실에서는 수업이 한창이다.

저 지루하고 낡은 직육면체의 틀과 쇠창살 같은 창문들, 창백한 형광등과 흰색과 검회색으로 칠해진 사방의 벽들.

교감에게 복수하고 시원했던 기분은 콩나물 배양실 같은 교실을 보자 급격히 우울해졌다.


“......!”


회한과 후련함이 류지호의 두 눈을 물들였다.

두 번째 고등학생 시절이 끝이 났다.

역할 놀이든 리얼 삶이든.

좋은 추억으로 남을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될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두 번째 청춘의 페이지 한 장이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툭.


운동장으로 나온 류지호의 발에 축구공이 굴러와 부딪쳤다.


뻥.


류지호가 힘껏 축구공을 찼다.

축구공이 저 멀리 체육시간이 한창인 학생들에게 날아갔다.


‘영원히 안녕이다. 내 학창시절아.’


류지호는 신포고 교문을 빠져 나와 응봉산 정상을 넘어갔다.

차이나타운을 지나쳐 인천역부터는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도 없이 그저 달렸다.


[아이는 400번을 때려서 키워야 올바르게 자란다.]


프랑스 속담이다.

이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누벨바그 대표 영화가 있다.

<400번의 구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년 앙뜨안느 드와넬이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른 채 묵묵히 달리는 모습을 카메라가 담담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무려 3분이 넘게 소년이 달리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속 소년은 해변에 도달한다.

류지호는 월미도 해안도로에 도착했다.

해변가를 따라 달리던 소년은 바다에 가로막혀 다시 모래사장으로 나온다.

그리고 소년이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소년의 당황, 허무, 불안이 담긴 복잡한 표정은 단연 압권이다.

이 감당할 수 없는 열린 결말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 중에 하나로 꼽힌다.

영화 속 소년이 자신을 구속하는 것들로부터 도망쳐 끝내 도달한 곳은 해변.

탁 트인 해변은 소년의 자유를 향한 갈망.

바다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따뜻한 부모의 품.

일반적인 해석이 그렇다.

류지호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다.

달라졌다.

어쩌면 바다라는 거대한 장애물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소년의 처지를 역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영화 속 소년은 교정 시설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바다에 가로막혔다.

소년은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관객에게 묻는 것 같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바다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수용한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탁 트인 해변과 푸르고 높은 하늘은 자유다.

하지만 바다는 소년에게는 나아갈 길을 가로막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장애물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희망도 없다.]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지난 삶의 기억과 열여덟이라는 현실에서 발생했던 부조화를 극복한 류지호가 비로소 평면 스크린을 뚫고 나왔다.

앞으로는 입체적인 현실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변화될 환경과 삶이 류지호의 뜻대로 될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서.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Mr. 할리우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5 충성을 다 하겠슴다! (3) +7 22.01.25 9,322 204 24쪽
64 충성을 다 하겠슴다! (2) +8 22.01.24 9,539 195 21쪽
63 충성을 다 하겠슴다! (1) +10 22.01.22 9,871 214 20쪽
62 Whiplash...! (2) +7 22.01.21 9,484 202 21쪽
61 Whiplash...! (1) +9 22.01.21 9,709 208 27쪽
60 말할 수 없는 비밀. +12 22.01.20 9,703 217 21쪽
59 이런 날도 오는구나... (3) +3 22.01.20 9,625 206 21쪽
58 이런 날도 오는구나... (2) +4 22.01.19 9,732 201 26쪽
57 이런 날도 오는구나... (1) +4 22.01.19 10,039 203 21쪽
56 Begin again. (4) +5 22.01.18 9,714 214 20쪽
55 Begin again. (3) +7 22.01.18 9,593 216 24쪽
54 Begin again. (2) +8 22.01.17 9,755 211 21쪽
53 Begin again. (1) +11 22.01.17 10,297 200 24쪽
»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6) +14 22.01.16 9,822 211 19쪽
51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5) +8 22.01.15 9,528 194 19쪽
50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4) +15 22.01.15 9,557 186 20쪽
49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3) +16 22.01.14 9,619 192 22쪽
48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2) +12 22.01.14 9,586 196 21쪽
47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1) +6 22.01.13 9,858 194 21쪽
46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3) +7 22.01.13 9,986 204 22쪽
45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2) +20 22.01.12 10,192 204 24쪽
44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1) +14 22.01.12 10,842 211 24쪽
43 Carpe diem... (4) +12 22.01.11 10,462 215 19쪽
42 Carpe diem... (3) +14 22.01.11 10,407 228 18쪽
41 Carpe diem... (2) +12 22.01.10 10,547 236 20쪽
40 Carpe diem... (1) +12 22.01.10 10,926 224 20쪽
39 얘는 혼자 어디 딴 세상이라도 살다 왔나? +8 22.01.09 10,989 239 20쪽
38 연풍(戀風). +12 22.01.08 11,018 231 17쪽
37 영화밥 먹고 살 팔자... (6) +7 22.01.08 10,817 224 22쪽
36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559 234 2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