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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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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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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87,409

작성
22.01.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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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7쪽

Whiplash...!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왜 내 전화 안 받아! 집에 전화 걸 때 마다 없다고 하고."


공다연이 류지호를 다그쳤다.

판사진관에 찾아온 공다연이 다짜고짜 데이트를 하자고 징징거리는 바람에 두 손 두 발 다 든 류지호다.

현재 두 사람은 월미도 문화의 거리를 걷고 있다.


“엄마가 여자 친구 사귀지 말래?”

“딱히 그러시지는 않을 걸?”

“그럼 일부러 내 전화 무시한다는 거잖아! 너 죽을래?”


류지호는 그녀의 종알거림을 한 귀로 흘렸다.

오랜만에 해가 쨍쨍한 날이다.

장마철로 인해 다소 처지고 우울했던 기분이 절로 밝아지는 것 같다.


“자퇴야?”

“어.”

“검정고시 볼 거야?”

“어.

“그럼 후배들하고 족보 꼬이는 거 아냐?”

“어.”

“좀 성의 있게 대답 못해!“

“배 안고파?”

“안 고파!”


류지호는 공다연의 투정을 적당히 받아주며 경양식집 ‘예전’ 앞을 지나쳤다.

시인들이 시낭송을 하기도 하고, 작은 연주회가 열리기도 하는 이 당시까지만 해도 예술인들의 문화 공간 노릇을 하던 곳이다.

두 사람의 발길이 포장마차거리로 향했다.

류지호가 레스토랑 ‘헤밍웨이’로 공다연을 이끌었다.

헤밍웨이 옆으로 개성 넘치는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카페가 연이어 붙어있어 서울에서도 연인들이 찾아올 정도였다.

류지호와 공다연은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2층 창가 테이블은 서해의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로 유명했다.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어장관리나 하고.... 쯧.”

“흥, 그건 무슨 뜻이야?”

“어장관리. 남자를 어장에 가둬놓고 물고기 떡밥 주듯이 간보면서 관리한다는 말.”

“야!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설명해!”

“마음에 드는 이성 여럿과 동시에 사귀면서 관계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 이미지 관리를 한다는 말이 어장관리야.”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


류지호는 입을 다물고 창밖을 내다보며 커피만 홀짝 거렸다.

침묵에 진절머리가 났을까.

공다연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잘 지어낸다.”

“너희 집 부자냐?”

“못 살지는 않아.”

“지난번에도 그렇고 항상 택시 타고 다니는 것 같던데?”


인천에서도 알아주는 부자 아들래미 김준우도 버스 대신 택시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진 않는다.

그런데 공다연은 매번 볼 때마다 택시를 이용했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혼자 다닐 때는 택시 타.”

“.....?”

“난 혼자 잘 안 다녀.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주안에 나오느라 혼자였지만.”

“......?”

“파리가 꼬여.”

“파리?”

“중학생부터 온갖 남자들이 음흉한 눈길을 보내고, 심지어는 꼬셔보려고 별 수작을 다 해. 꼬이는 건 날파리 같은 남자들과 불량서클 언니들 뿐. 정말 피곤해. 친구도 별로 없고.”


톡 쏘는 듯한 성격은 차치하고라도 그녀의 외모는 남들이 쉽게 다가오기 힘들다.

교우관계를 형성해야 할 시기에 고립되었으니 예민해질 수밖에.

유복한 가정에서 외동으로 오냐오냐 자랐으면 충분히 이기적일 순 있지만, 공다연은 그 정도가 심했다.


“사실 국민학교 때는 혼혈이라고 놀림도 많이 받았어. 우리 엄마아빠는 토종 한국인인데도 나보고 혼혈이래. 어릴 때는 동네 남자어른들이 못된 짓도 벌이려고 했었고.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안 남자들은 나를 보호하려고 유난스러워.”


사연 없는 사람 없다.

류지호는 이런 사실을 처음 들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서로 노는 물이 달라 그녀의 신상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그런 이야기 아무한테나 이야기해도 돼?”

“남자 친구니까 알아둬야지.”

“누구 맘대로 남자친구야?”

“내 맘이지롱.”

“너도 참 한결 같다.”

“예쁜 게 죄야. 내가 예쁘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뭐.”

“네가 예쁜 건 아는구나?”

“나도 매일 거울 보는데 모르겠어?”


공다연은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숨기는 게 없다.

그 때문에 괴팍하고 성질 더러운 괴짜로 보였다.

황재정, 김석민, 고우찬 기타 등등.

다들 피곤한 타입이다.

왜 자신의 주변에는 다 이런 녀석들만 있는지.

그럼에도 함께 있으면 딱히 싫지는 않았다.


‘내 주위에 벽을 세우고 있었나?’


류지호의 성격이 그다지 사교적인 편이 아니라지만, 명백히 교우관계가 넓은 편은 아니다.

거장치고 스스로에게 엄격하지 않은 이를 찾아볼 수 없다.

한발 더 나아가 위대한 인물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엄격하지만 남에겐 관대하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엄격하더라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식이, 비호감과 상관없이 예쁘기는 하네.’


하얀 얼굴에 떠오른 싱그러운 미소.

단순히 예쁘다는 표현으론 부족했다.


“와. 이쁘다!”


공다연이 창밖을 내다보며 감탄성을 터트렸다.

어느새 월미도 앞 바다와 하늘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석양이 지고 있다.

태양이 지평선에 닿기 무섭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동안 해넘이를 감상했다.

류지호가 먼저 감동에서 빠져나왔다.


“신포동에서 돈까스 먹을래? 이집트 어때?”

“거기 비싼데?”

“항상 먹는 것도 아니고. 데이트라며?”

“호호호. 너 지금 데이트 인정한 거다?”

“데이트가 꼭 연애와 연결되는 건 아니야. 서로 알아가는 과정. 그런 행위를 하는 오늘 같은 날도 데이트지.”

“너 은근히 멋있는 거 알아? 마치 똑똑한 대학생 오빠 같아.”


둘은 헤밍웨이를 나와 신포동 이집트 경양식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


류지호가 돈가스를 썰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공다연을 바라봤다.

작고 붉은 입술로 돈가스 조각을 먹는 모습.

살짝 달아오른 공다연의 불그스레한 양 볼.


‘저런 자연미인이 왜 성형을 했었을까.’


공다연이 서른이 막 넘어갔을 때 성형수술을 했던 걸 기억해냈다.

여배우들은 30대를 넘어가면서 외모에 대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성형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전에 수술을 받은 배우들은 인공미가 티가 많이 났다.

좀 더 아름다워지려고 하다가 관객에게 외면을 받는 경우도 종종 벌어진다.

외꺼풀이 정체성이자 매력이었던 배우가 있었다.

한동안 안 보이다가 쌍꺼풀 수술을 하고 나타났었는데, 몇 년 간 캐스팅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만의 개성과 매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배역을 따내기 위해 자기 관리를 하는 것은 배우에게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성형이나 과도한 체중감량 등으로 정작 감독과 관객이 좋아했던 분위기와 개성을 잃는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짓도 없다.


휙휙.


공다연이 류지호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제야 류지호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가을부터 서울에 연기학원 다니기로 했어.”


이 시기부터 공다연이 본격적으로 연예계를 노크했던 모양이다.


“여의도에 있는 TMT?”

“응.”

“학교는 어떻게 하고?”

“엄마가 담임하고 이야기 잘 했대.”

“그렇구나. 열심히 해라.”

“내가 먼저 스타가 돼서 너 키워줄게.”

“어련하겠냐.”

“아휴, 징그러워. 그런 노티 나는 말투 쓰지 말라니까.”


저녁식사를 마친 후 공다연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비록 즉흥적으로 일어난 일일지언정 예쁜 여자와의 데이트를 싫어할 남자는 없다.

다음에 또 데이트 하자고 공다연이 조른다면.

그건 사절이다.

어쨌든 류지호에게 오늘 반나절의 시간이 또 한 번의 휴가같이 느껴졌다.


“으차! 일하자 일!”


판사진관으로 돌아온 류지호는 편집실에 틀어박혀 웨딩비디오를 편집했다.

곧 가을 결혼시즌이 찾아온다.

예약률을 더욱 끌어올리기 위해 분발할 필요가 있다.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는 말이 있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한다는 뜻이다.

류지호는 이미 잘하고 있지만, 내일을 위해 좀 더 힘을 낼 필요가 있다.


❉ ❉ ❉


옷차림이 단출해지는 무더운 한 여름이다.

반바지 차림의 류지호가 인천시청으로 향했다.

본래의 류지호는 삐쩍 마른 몸매였다.

어떤 옷을 입어도 해골에 천을 씌워놓은 것 같았다.

나이를 먹어도 마른 몸매는 그대로였고, 올챙이처럼 배만 불룩 튀어나왔었다.

이젠 아니다.

일 년 넘게 꾸준히 운동을 해 온 탓에 나름 탄탄한 몸매를 자랑했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몸은 아니다.

적당히 날렵한 근육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수험번호와 이름이요.”

“6724. 류지호.”


인천시교육청에서 류지호가 검정고시 합격증을 받았다.


“...이게 뭐라고.”


전문대 졸업장을 받고도 별 감흥이 없던 류지호다.

이번에는 어딘지 기분이 묘했다.

검정고시 합격증을 챙긴 류지호는 괜히 싱숭생숭했다.

그런 감정도 잠시.

두 번째 삶.

무궁무진한 새로운 기회가 열려서 그럴까.

교육청을 나서는 류지호의 발걸음이 무척 경쾌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가족들은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활달한 류아라조차 심상치 않은 가족들의 분위기에 눈치를 살폈다.

인내심이 바닥 난 류아라가 슬그머니 류순호에게 다가갔다.


“작은 오빠.”

“쉿!”


류순호가 급히 손가락으로 입에 가져갔다.

그때.


“다녀왔습니다!”


류지호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심영숙이 가장 먼저 류지호를 맞이했다.


“아들!”


거두절미.

류지호는 곧바로 가방에서 합격증을 꺼내 심영숙에게 건넸다.


“어머나 세상에.... 정말 지호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거 맞지?”


합격증을 뻔히 보고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심영숙이다.


“대입 합격통지서도 아니고... 겨우 검정고시 합격이에요.”

“엄마가 너무 좋아서 그렇지. 우리 아들. 수고했어.”


심영숙은 ‘우리 아들, 우리 장남’을 연발하며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다.

그 동안의 마음고생이 한 순간에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다.

검정고시 합격증일 뿐이다.

류지호는 이것으로 자퇴했을 때의 안 좋은 기억이 조금이나마 씻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어머니가 저렇게 좋아하셨던 때가 있어나 싶었다.

두 번의 생애를 통틀어 생각해보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순간, 류지호는 사후세계(?)의 기괴한 극장에서 보았던 중풍에 걸린 어머니가 떠올렸다.


주르륵.


저도 모르게 두 볼로 눈물이 떨어졌다.


“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할게요.”


과거로 돌아오고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렀다.


“아들, 왜 그래?”

“앞으로 사고도 안치고, 착하고 듬직한 아들이 될게요.”

“우리 장남, 다 컸는지 알았는데 아직 어린 애구나.”


심영숙은 웃으며 류지호를 안아 주었다.


토닥토닥.


이제는 껑충하게 키가 커버린 류지호다.

당연히 그녀가 아들 품에 안기는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체구로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어머니 품이다.

어머니의 품은 여전히 크고 포근했다.


“형, 축하해.”

“아들, 장하다.”

“큰오빠, 점수 100점 맞았어?”


식구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류지호에게 축하를 건넸다.

심영숙이 류지호의 눈가의 물기를 손가락으로 훔치며 말했다.


“백점이나 마찬가지야. 큰오빠가 한 문제 밖에 안 틀렸대.”


류민상이 아내의 말을 거들었다.


“검정고시 출신이라고 서울대에 못 가라는 법 없어.”


부모님들이 류지호를 한껏 추켜올렸다.


‘서울대라....’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검정고시 출신 중에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도 높지 않고, 사회지도층이 적을 것이란 생각이다.

경제 사정으로 학업을 포기했던 사람들이 검정고시를 보기 때문에 생기는 편견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검정고시 파워는 막강했다.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서울대의 경우 1960부터 80년대까지 검정고시 출신 합격자가 해마다 80∼100여 명에 이르렀다.

1983년엔 135명이 합격하기도 했다.

고교 평준화 전이든 후든 고교 출신별로 신입생 숫자를 산출할 때, 검정고시 출신은 전국의 명문고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항상 5위권 안에 들었다는 말이다.

명문고는 연도별로 부침을 거듭했다.

헌데 검정고시는 꾸준한 숫자의 서울대 신입생을 배출했다.

어쨌든 류지호는 이미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다.

굳이 부모님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지는 않았다.


“이렇게 좋은 날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잔치라도 벌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심영숙이 당장 시장에라도 달려갈 기세다.


“그럴 줄 알고 제가 고기 좀 사왔어요. 오랜만에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어요.”


류지호가 가방에서 신문지에 말려있는 고기를 꺼냈다.


“고기! 고기! 고기 좋아!”


류아라가 방방 뛰며 소리쳤다.

온 가족이 마당 평상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먹었다.


“아들, 술 한 잔 할래?”

“아휴, 아들을 술꾼으로 만들려고 해요?”

“일하느라 몇 달 동안 술 한 잔도 안 마셨어요.”

“그게 고등학생이 할 소리야?”

“합격증 보셨잖아요. 저 고등학생 아닙니다.”

“뭐?”


하하하.

호호호.


늦은 시간까지 마당에서는 류지호와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 ❉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

해수욕을 즐긴 피서객들이 하나둘 송도유원지를 빠져나가고 있다.

그런 피서객들과 거슬러 커다란 배낭을 멘 류지호가 송도유원지로 들어섰다.

양손 가득 먹을거리까지 든 류지호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인천방송부연합회 현수막이 걸려 있는 야영지였다.

신포고 푯말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류지호의 시야에 수많은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공다연이 들어왔다.

주위를 얼씬거리는 남학생들은 여왕벌 주변에 몰려든 일벌처럼 보였다.

그녀는 어디에서나 한결 같았다.

여왕벌이고 스타였다.


“지호야!”


류지호가 뒤에서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군청색 계열의 민소매 티에 반바지를 입은 신소연과 진명여고 방송부 여학생이 다가왔다.


“오랜만이다.”

“진짜 올 줄 몰랐어.”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 저녁에 하고. 우리 애들 텐트는 어디 있어?”

“반대편에 있어. 저 쪽.”

“고마워. 내가 고기랑 과일 많이 사왔거든. 캠프파이어 끝나고 신포고 텐트로 와.”

“응. 이따 봐.”


류지호가 신소연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명여고 여학생이 신소연에게 물었다.


“난 네 비밀을 알아.”

“무슨 비밀?”

“저번에 주안에서 지호랑 만났지?”

“응.”

“다연이도 알아?”

“알아야 해?”

“지호는 다연이가 찍었는데? 걔네 둘이 사귀는 거 아니었어?”

“지호는 남사친이야.”

“그게 뭔데.”

“남자 사람 친구.”

“그런 게 어디 있냐?”

“여기 있잖아.”

“참 말도 잘 만든다.”

“내가 만든 말 아냐. 지호가 만든 말이야.”


류지호는 얼마 안 가 신포고 방송부가 모여 있는 텐트들 찾을 수 있었다.

1학년 후배들이 허리를 넙죽 숙이며 류지호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군대처럼 인사하지 마. 조폭처럼 허리 숙이지도 말고! 니들이 학생이지 조폭이냐!”


류지호가 각이 제대로 잡혀 인사하는 후배들에게 따끔하게 충고했다.


“왔냐?”


김민석이 심드렁하게 인사했다.


“오오. 잘나가는 친구가 뭘 사왔는지 볼까?”


최원석이 류지호가 들고 온 비닐봉지의 내용물을 꺼내놓으며 인사는 생략했다.


“빨랑 가방 풀어봐. 뭘 꾸물거려!”


이철웅이 류지호가 메고 있던 가방을 낚아챘다.


“언제 온다고 알려줬으면 후배들 마중 보내는 건데.”


마지막으로 박상은이 류지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아는 체했다.


“이것들이 사람을 반겨야지 먹을 걸 반기냐!”

“닥치고 메고 온 가방도 얼른 풀어 봐.”


류지호는 친구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모두가 바리바리 싸들고 온 각종 음식과 음료에 온통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잠시.


“지호 팔뚝 봐라. 철웅이 못지않은데?”


못 본 사이에 좀 더 자라고 건강해진 류지호다.

민소매 차림이라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들어봤냐? 이게 그 노가다 근육이란 거다.”

“뭔 개소리야.....”

“고기는 나중에 구워먹기로 하고. 다들 학교생활은 어떤지 썰 좀 풀어봐라.”


류지호는 서로의 근황을 시작으로 친구들과 회포를 풀었다.

그러는 사이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신포고 방송부는 류지호가 사온 먹을거리로 저녁을 해결했다.

저녁식사가 소화될 즈음 연합MT 행사가 진행되었다.


짝짝짝!


통기타를 치며 노래솜씨를 뽐내는 학생도 있었고, 간단한 콩트를 선보인 남학생들도 있었다.

방송부들답게 시낭송을 한다거나 점심방송의 일부분을 시연해 보이는 여학교도 있었다.

간단한 장기자랑이 끝이 났다.

야영장 중앙에 쌓아놓은 장작더미에 불이 붙여지고, 캠프파이어가 이어졌다.

수십 명의 방송부들이 흥겨운 유로댄스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댔다.

서로의 허리를 붙잡고 장작더미를 돌며 기차놀이를 하기도 하고, 서로의 손을 맞잡고 방방 뛰기도 했다.

류지호와 김석민이 나란히 앉아 그런 광경을 지켜봤다.

학생들에게 둘러싸여있는 공다연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던 김석민이 입을 뗐다.


“진짜 다연이랑 사귀는 거야?”

“.....”

“방송부연합회에서 별의 별 소문이 다 났더라.“

“너는 안 믿잖아.”

“네 성격에 다연이 같은 애랑 잘도 만나겠다.”

“내 성격이 어떤데?”

“사람 가려서 사귀는 거 아니었어?”

“가려서 사귀면 너랑 친하게 지내겠냐?”


김석민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계속 따져봐야 김석민 자신만 손해다.

애초에 말상대가 되지 않았다.


“쟤는 구미호도 아니고 여기저기 꼬리 아홉 개를 아주 그냥...”

“알고 보면 불쌍한 애야.”

“뭐가 불쌍해?”

“어릴 때 놀림도 많이 받고, 나쁜 일도 많이 당할 뻔 했다더라.”

“이 바보가!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 그거 다 지어낸 이야기래. 다 뻥이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십대 아니냐?”


영화판이던 직장이던 십대들의 사회던 수많은 루머가 떠돌아다 다니기 마련이다.

사실도 있고, 험담도 있으며 악의적인 소문도 있다.

류지호가 일일이 그런 소문에 휘둘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느낀 그대로.

그것 외에는 심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근데 우찬이는 왜 같이 안 왔어? 너희들 매일 붙어 다니잖아.”


주안의 검정고시 학원가를 석권한 고우찬이다.

그로 인해 덩달아 류지호의 위상이 올라갔다.

김재욱까지 가세해 세 명이 몰려다니자 시비를 거는 놈이 어느 순간 싹 사라졌다.

실업계 고등학교의 폭력서클이 시비를 걸어올 줄 알았다.

헌데 노는 물이 달라서 그런지 특별한 사건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시합 준비 때문에 요새 도장에서 살아. 나도 우찬이 보기 힘들어.”

“검정고시 합격했다며?”

“응.”

“축하해.”

“땡큐.”


답안 표기에서 실수만 없으면 합격이야 당연한 것이고, 꽤 좋은 성적이 기대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언제나 고우찬이다.

영어와 수학은 과락이 확실했다.

고우찬은 내년에 다시 시험을 치러야 할 것 같았다.


“올해도 진명여고가 방송제 도와주기로 했다며?”

“그렇게 됐어.”

“진명여고 애들 불러서 고기 좀 먹여야겠다.”


❉ ❉ ❉


류지호가 여고방송부 텐트촌 사이를 기웃거렸다.

텐트 안에서 신소연과 공다연이 대화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지호한테 꼬리치지 마.”

“말이 지나쳐. 나는 그런 적 없어.”

“근데 왜 지호 만나러 갔는데?”

“비디오 편집하는 거 배우러 갔어.”

“그 것만 배웠어? 웃기시네. 영화도 봤잖아.”

“왜 나한테 따지듯이 묻는데?”

“내 남자친구하고 단 둘이 만났잖아. 내가 화가 안 나!”

“지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던데?”

“뭐?”

“너나 나나 그냥 친구래. 여사친. 여자 사람 친구래.”

“그게 무슨 헛소리야!”


류지호는 더 이상 들으면 안 될 것 같아 돌아섰다.


“다연이 너는 여러 남자애들 치마폭에 싸고 남한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해. 그 남자애들이 네 소유는 아니잖아.”

“말 다했어?”

“난 그 남자애들처럼 네가 데리고 다니는 꼬붕이 아냐. 난 네 친구라고.”

“흥. 너도 남자애들이 헤벌레 하는 거 즐겼잖아.”

“그런 적 없어.”

“웃기시네.”

“나를 너와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아줘.”

“네가 그런다고 지호가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해? 어림없을걸. 걔도 남자야.”


류지호가 그녀들의 텐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웬만하면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관련 있는 것 같아 나서야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지호?”


언제 짜증을 부렸냐는 듯 공다연이 화사하게 웃었다.


“다연아, 묻고 싶은 게 있어.”

“......?”

“나와 사귀고 싶은 이유가 뭐야?”

“이유야 많지. 넌 다른 시시한 애들보다 내게 어울리는 남자야.”

“그걸 누가 정하지? 네가? 내 의사나 감정은 상관없이?”


그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는 공다연이다.


“지호야, 왜 그래? 너도 날 좋아하잖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 그저 같은 방송부 출신, 동창생 같은 존재야.”

“...뭐?”


공다연이 반사적으로 신소연의 아래위로 훑어봤다.

평범했다.

나이에 맞게 순수하고, 풋풋한 여느 여고생과 다름없다.

외모는 공다연 자신과 견줄 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방송부 업무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재능 넘치는 여학생이다.

그리고 어쩐지 류지호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다하는 성격.


“소연이 때문이야?”


공다연의 느닷없는 말에 신소연이 움찔거렸다.


“누구 때문도 아냐.”


류지호의 입에서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소연이 착한 거 알아. 그런데 나는 예쁘잖아. 내 옆에 있으면 널 더 빛나게 해줄 수 있어. 나 공다연이야.”

“그 반대겠지.“

“반대?”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공다연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방송부연합 모임에서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일 뿐.

이젠 그녀가 어떤 타입인지 알게 됐다.

언제나 한결 같았다.

자기중심적이고, 잘난 척하기 좋아하며 자기만의 세계가 너무 강했다.


“네가 빛나기 위해서 날 필요로 하는 것뿐이야. 마치 값비싼 장신구처럼. 지난번에 내가 어장관리 이야기를 들려준 걸 잊었어? 너에겐 연합회장이든 또 다른 잘나가는 남자애든 상관없어. 넌 그저 여왕벌이 되고 싶은 거야.”


누군가의 들러리가 되는 건 절대로 사양이다.

정곡을 찔린 공다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너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되겠지. 근데 난 아무 가면도 안 쓴 맨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이 좋아.”

“지호야 난....”


앞으로 공다연과 방송부 출신 친구로는 지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정신 나간 십대들처럼 그녀의 일벌이 되고 싶진 않다.

확실하게 정리를 해야 했다.

류지호는 냉정하게 굴었다.


“네게 친구는 딱 두 종류뿐이야. 네가 빛나기 위해 가져야 하는 친구와 짓밟아야 하는 사람. 어쩌면 나도 무시하고 짓밟아야 하는 사람이었을지 모르지. 네가 네 입으로 그랬지 예쁘지 않냐고. 맞아 객관적으로 보면 넌 예뻐.”


공다연은 제발 류지호가 독설이 아닌 좋은 말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근데 왜 스스로 빛날 생각은 안 해?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널 돋보여 줄 사람을 거느리는 게 널 더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건 아냐. 외모가 아름답다고 해서 내면까지 저절로 아름다워지지도 않고. 우리가 앞으로도 좋은 인연을 이어가려면 더 이상 친구들에게 상처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한테 왜 그래?”


공다연이 애처롭게 말했다.


“우리 모두 똑같이 인간이고, 실수를 하기 마련이야. 완벽한 사람은 없어. 다연아, 실수를 했으면 숨어있지 말고 나와야 해. 한 번은 실수이지만 두 번은 그렇지 않아. 소연이에게 사과해. 그리고 네 멋대로 나에 대한 소문 퍼뜨리고 다니지도 말고.”


류지호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공다연은 서러웠다.

한편으로 분하고 억울했다.

류지호가 왜 자신에게 잔인하게 구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흑흑.


신소연은 선뜻 공다연에게 다가가 위로해 줄 수 없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뒤로하고 신소연도 떠나갔다.

홀로 남겨진 공다연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로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어디선가 통기타소리에 섞여 여학생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타닥타닥.


캠프파이어를 하고 남은 잔재가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고 있다.

그 앞에 류지호와 신소연이 나란히 앉아있다.

두 남녀는 말없이 타들어가는 모닥불을 바라볼 뿐.

류지호가 장작을 하나 모닥불에 넣었다.


“겨울방학 때는 비디오 찍는 것도 알려줄게.”


신소연이 반색하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류지호가 신소연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도장 찍기, 서명하기, 복사하기, 코팅하기 등등.

유치해 생략했다.

물론 이 시기에 유행하지 않은 행동이기도 했고.


“신방과는 어느 대학을 목표로 하고 있어?”

“이대.”


신방과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은 묻는다.


“PD 되려고? 아나운서, 기자?”

“방송국 PD."

"그 안에도 분야가 많잖아. 시사교양, 예능, 드라마, 쇼오락, 라디오도 있고.“

“드라마 찍는 PD가 되고 싶어.”


영화와 드라마는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본질은 똑 같다.

먼저 길을 걸어본 류지호가 도와줄 수 있다.

물론 신방과를 나왔다고 전부 PD가 되거나 기자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직 PD나 기자들의 프로필을 보면 신방과보다는 타 학과 전공자인 경우가 많다.

특히 방송계는 예전부터 SKY 출신이 꽉 잡고 있다.

지상파 방송국에서 웬만큼 독보적으로 유능하지 않으면 비SKY 출신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가 하늘에서 별 따오는 난이도다.

비SKY 출신이 국장급 이상 올라간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언론계, 의학계, 사학계 등도 마찬가지다.

암튼 20년이 지나면 의예과 같은 일부 학과가 아니고서는 전공을 살려 취업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취업자체가 힘들어지니 전공도 사실상 의미가 없어지지만.

그때가 되면 자조적으로 ‘전공’이란 말이 ‘전 공부가 싫어요’의 줄임말로 쓰인다.

어쩌면 7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이들이 지방대학을 나와도 중견기업 정도는 골라서 갈수 있는 마지막 세대인지도 몰랐다.

대입경쟁률은 역사상 최악을 기록하지만, 일단 대학을 졸업하면 대기업은 몰라도 어지간한 기업은 입사할 수가 있었으니까.


“많이 편해 보여. 처음에 볼 때만 해도 왠지 되게 불편하고 어색하고 뭔가 이상했는데...”


미팅 때를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막 삼촌 같고, 작은 아빠 같고 그랬거든. 되게 징그러웠어.”

“내가 너희들보다 정신연령이 높아서 그래.”

“피...”


하하.


류지호는 웃음을 터트리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쏟아질 듯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십대일 줄 알았다.

비록 우여곡절 많은 일 년이었지만, 축복 같은 나날들이었다.


작가의말

행복한 불금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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