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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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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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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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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3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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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우리는 가족입니다!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최초의 경양식집은 서울역 근처에 있는 1925년 오픈한 그릴 레스토랑이다.

그곳이 서양식 스테이크의 원조 식당으로 알려졌다.

최초의 빵가루 입은 형태의 돈가스 원조집은 인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인천에는 돈가스로 유명한 여러 경양식집이 성업 중이었다.

신포동에는 등대, 잉글랜드, 씨 사이드, 이집트 등이 대표적인 돈가스 레스토랑이었고, 신흥사거리 쪽에 국제 경양식이란 이름의 가장 오래된 경양식이 영업 중이었다.

1972년 당시 미군부대 장교식당에서 양식요리를 익히고 퇴직한 사장이 스넥 하우스라는 상호로 개업한 국제 경양식은 우리나라 돈가스집의 원조 격인 곳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오픈한 등대 역시 15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성업 중이다.

류지호는 등대 경양식집으로 가족을 안내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지호 네가 알아서 주문 해.”


류지호가 가족들을 대신해서 후식까지 주문했다.

돈가스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류아라의 얼굴에 미소가 퍼져 나갔다.


“마, 맛있어.”


류아라로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어 본 맛이다.

큰오빠가 썰어준 돈가스 조각을 욕심껏 입에 욱여넣었다.

볼이 빵빵하게 튀어나온 류아라가 활짝 웃었다.

겨우 돈가스가 뭐라고 저리 행복해 하는지.

류민상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류지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빠가 고집 피워서 많이 섭섭해?”


파커 가족의 호의를 계속해서 거절했던 것에 대한 걸 묻는 것이다.

류민상 입장에서야 인격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남들이 봤을 때 쓸데없는 선비질이자 복을 제 발로 걷어찬 꼴이다.


“아빠가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진다고 말 한 거 기억하지?”


류지호가 식사를 멈추고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보상금을 받아 챙기는 것이 정말 현실적으로 가장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해?”


류지호는 아버지의 결정을 담대하게 받아들이려고 했다.

열심히 살다보면 금전적인 이득도 따라올 것이라 믿었으니까.

남들이 모르는 비밀도 있었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가난한 삶에 대한 스스로의 자격지심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돈 앞에서 겸양의 미덕?

세상을 지배하는 힘은 권력, 재력, 폭력이다.

결코 겸양의 미덕으로 얻어 낼 수 없는 힘이다.

고매한 인격자 혹은 선비들이 그것들 중 하나라도 얻었다는 이야기를 류지호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전의 그 비루했던 삶의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해 기꺼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정보를 이용하기로 했고 또 돈을 왕창 벌자고 다짐한 바가 있다.

아버지의 가르침 그리고 가치관을 존중한다.

다만 따를 생각은 별로 없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돈이란 누구에게는 생존이고, 누구에게는 미래인 법. 네게 돈이란 무엇이지?”

“이이는, 밥 먹다가 체하겠어요. 오늘 같이 좋은 날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내의 타박에 류민상이 껄껄 웃었다.


“아라 엄마, 우리 똑똑한 장남이 내가 무얼 말하는지 이미 알아버린 모양이야.”


류지호는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돈가스를 썰었다.


돈.


이 단어에 대한 뚜렷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어려웠다.

돈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돈은 사람의 삶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고 그리고 돈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너무도 무지했던 것 같다.

평소 막연하게 돈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는 생각뿐.

그 이상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고민을 피했을지도 모르고.


‘돈... money... 많으면 좋고, 없으면 죽을 수도 있는 것...’


가치체계 꼭대기에 돈이 올라앉은 지 이미 오래다.

돈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지배자로 바뀌었다.


[Money is a great servant but a bad master.]

(돈은 훌륭한 종이지만 최악의 주인이기도 하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남긴 말이다.

돈은 충실한 종이 되어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하지만 때로는 주인이 되어 고통을 선사한다.

돈을 만들어낸 것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돈은 자신의 창조자인 인간에게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주는 모순적인 존재다.

삶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돈을 버는 것이 삶을 위한 것인가.

원하는 돈을 얻게 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아버지가 툭 내뱉은 한 마디.


돈!


그 별 것 아닌 질문에 류지호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돈이 인생의 희로애락을 좌우하는 권세가 되었다.

사람들은 마치 돈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와 성공을 원한다.

성공이 곧 부를 쌓은 것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마치 금기처럼 되어있다.

돈이란 것은 악한 것이고 인간의 영혼을 좀먹는 것처럼 묘사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와 성공에 대한 욕망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억누르는 법을 배운다.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닌데.

말을 하지 않으면 생각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하고 돈과 성공만을 추구하니 그에 대한 가치관 정립이 될 리가 없다.

그래서 부자는 모두 나쁘다는 인식이 생긴다.

스스로 부자가 되어도 왠지 떳떳하지 못한 것 같다.

류민상은 그저 ‘내 것이 아닌 돈에 욕심 부리지 말자‘ 라는 걸 가르치고 싶었을 뿐.

그런데 류지호는 뜻밖의 고민과 마주하게 됐다.

두 번째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부와 성공에 대한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공부 좀 할 게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류지호는 가족들에게 방해하지 말아 줄 것을 당부했다.

방에 틀어박혀서 돈에 대하여 그리고 행복과 성공에 대하여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항상 돈에 쪼들려서 불행하다고 느꼈는데,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고 살지 못해 불행했던 건 아닐까?’


당연한 얘기지만, 직장을 가진 사람들은 실업자들보다 더 행복하다.

여가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주 60시간 뼈 빠지게 일하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

돈과 행복 사이의 관계는 겉보기와 다를 수 있다.

노벨상을 수상한 어떤 경제학자는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더 행복하다는 개념은 허구라고 주장했다.

소득이 높을수록 삶에 더 만족한다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돈으로 인해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더 많아 지니까.

그러나 개인의 행복도가 가진 돈에 비례해 높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 그럴까?

행복이란 손에 닿을락말락한 위치에 매달려 있는 잘 익은 사과와 같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손을 뻗으면 따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딸 수 없는 사과.

소득이 올라가면 그 만큼 기대가 높아진다.

좀 더 윤택해지고 싶고, 좀 더 행복해지고 싶어지는 것이다.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 많은 것을 가지길 욕망한다.

아버지가 던진 돈에 대한 물음이 행복이란 화두까지 확장했다.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해.‘


그런 만큼 지금의 행복이 깨지면 커다란 상실감과 아픔이 덮쳐 올 것이다.

돈의 수단성과 목적성.

성급한 고민 아닐까.

겨우 과거로 돌아온 지 반년이 지났을 뿐인데?

아무 생각 없이 살게 되면 남들이 짜놓은 세상에서 장기말 가운데 하나로 기능할 뿐.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뚜렷한 주관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

행운도 준비된 자에게 오는 법.

스펙이든, 건강이든, 정신적이든 준비가 되어야만 더 크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최소기준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근육이나 공부 같은 분야는 일정 이상을 꾸준히 해야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즉 일정 기준 이하에선 아무리 노력해도 반응이 안 보이지만, 그 기준 이상부터 눈에 띄는 결과를 볼 수 있다는 거다.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포기하면 어떤 성장도 없다.

세상은 운이 좋아 뭔가를 쉽게 얻었더라도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한다.

예외가 없다.

그런데 세상의 법칙을 벗어난 경우가 아예 없진 않다.

류지호의 존재가 바로 그 예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순리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왜 그땐 그 이치를 몰랐을까 후회해봐야 소용없다.

순리를 함부로 거스르지 않는 전략이 중요하다.

등가교환이니 비가역성이니 1만 시간의 법칙이니 같은 이론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류지호는 무언가를 얻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걸 내놔야 한다는 이치를 모르지 않았다.


‘게임의 룰을 모르는데, 잘하는 선수는 없는 법이지!’


류지호가 앞으로 얻게 될 복이나 소중한 것, 그 모두를 세상에 내놓을 순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다만 재물의 일정 부분을 세상에 내놓을 순 있다.

아까워 할 필요 없다.


‘과거로 돌아오게 해준 것에 대한 세금을 분납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돼.....’


❉ ❉ ❉


온가족이 강화도 외가를 방문하기 위해 인천종합터미널에서 강화행 직행버스를 탔다.

과거로 돌아온 후 류지호가 처음으로 인천을 벗어났다.


끼익.


직행버스가 강화대교에 들어서자 잠시 정차했다.

해병대 2사단 소속 군인들이 버스 안으로 올라와 검문검색을 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화대교는 1970년에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서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까지 연결하는 연륙교였다.

왕복 2차로였기에 이맘때부터 차가 엄청 밀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다리가 개통된 것도 같은데... 가물가물하네.’


기존 대교 옆에 새로운 다리가 개통되는 것은 10여 년 후.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다.

건설회사를 운영할 것도 아니고.

직행버스가 강화터미널에 도착했다.

류지호 가족은 강화군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양도면(良道面)으로 향했다.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풍경이 펼쳐졌다.

류지호는 양손에 선물꾸러미를 든 채 넓게 펼쳐진 논 사이의 고랑길을 따라 걸었다.

웬만한 산골마을에도 자가용을 타고 이동하는 시대를 경험한 류지호다.

내심 투덜거릴 만도 했지만, 맑은 공기와 흙냄새를 맡으면 걷는 길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10가구가 모여 촌락을 이루는 마을이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마중을 나와 계셨다.


“할머니~”


류아라가 외할머니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렸다.

외할아버지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류순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류지호의 등을 토닥토닥 어루만졌다.

류지호는 과거로 돌아와 처음 부모님을 만날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장인어른.”

“류서방, 오느라 고생했어.”


류지호의 외가는 한국전쟁이 터지고 월남한 피난민이다.

교동도로 내려왔던 외할아버지는 곧 전쟁이 끝이 날 줄 알고 강화도에 머물렀다가 휴전이 되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슬하에 2남4녀가 있으셨는데, 어머니 심영숙은 넷째 딸로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둘 있었다.

넷째 딸인 심영숙까지는 공부를 시키지 못했지만, 다섯째와 막내만큼은 대학교육을 시켰다.

외가 식구들도 류지호의 가족 못지않게 두셋의 자녀를 두고 있어 한 번 모일 때마다 엄청난 대가족의 면모를 보였다.


왁자지껄.


오랜만에 외가 식구들이 모두 모인 탓인지 다들 할 말도 많고 근심도 많았다.

정치에 민감한 대학생 사촌들과 막내 외삼촌이 대통령 선거를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통령 직선제로 국민이 직접 투표로 뽑는다는데 누가 될 것 같아?”

“민주인사가 뽑혀야죠. 이번에는 무조건 민주정부가 들어서야 되요.“


류지호는 외사촌들 사이에서 다소 애매한 연령대였다.

대학생 사촌들과 어울리기도 그렇고 국민학생 동생들과 어울리기도 애매했다.


“교통사고 났다고 하더니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이모가 물었다.

류지호 대신 심영숙이 얼른 말을 받았다.


“언니, 말도 마. 큰애가 철이 들어서는 아주 어른처럼 군다니까. 우리 지호가 글쎄...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신문을 얼마나 꼼꼼하게 읽는지 모르는 게 없어.”


심영숙이 자랑스럽게 떠벌였다.


“미국 잡지도 사다가 읽고, 미국사람하고 대화도 해.”


외사촌 누나가 끼어들었다.


“지호가 영어로 대화를 한단 말이야. 이모?”

“그것뿐인 줄 아니? 우리 지호가 글쎄 한국신문 돌리지 않니, 그 신문을 한부씩 받아서 매일매일 읽는다지 뭐니? 또 그거 뭐지 미국 잡지? 유명한 거?”

“타임?”

“그래. 타임. 또 뭐라더라 이코노미스트인지 무슨 스트리트도 읽어.”


류지호가 어머니의 설레발에 딴청을 피우자, 류순호가 대신 대답했다.


“월스트리트 저널.”

“맞아. 그것도 자기가 번 돈으로 사서 읽어.”

“이코노미스트를 읽어? 경제 용어가 많을 텐데?“


대학에 다니는 큰외삼촌의 아들 심형섭이 물었다.


“영어공부하려고 보는 거라 전문적인 용어는 나도 잘 몰라.”


류지호가 겸양을 떨었다.


“야, 그래도 기특하네.”

“신포고 요즘 서울대 몇 명이나 보내?”

“작년에 마흔 명인가 마흔 셋인가 합격했다고 들었어.“

“썩어도 준치라고, 아무리 뺑뺑이로 바뀌어도 명문은 명문이네.”

“이러다가 우리 집안에 서울대 학생 나오는 거 아냐?“


류지호의 외가는 특이했다.

보통 집안에서 누군가 잘나가거나 하면 질투도 하고, 떡고물을 얻어먹을까 살살거리기 마련인데 외가 식구들은 그런 것이 없다.

아주 정직한 사람들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기에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선량하고 따뜻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없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류지호가 다시 한 번 겸양을 떨었다.

어머니가 너무 설레발을 치는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럼에도 류지호로서는 별달리 제지하지 않았다.

또래보다 특별한 구석이 많은 아이라는 인식을 심어놓으려는 것이다.

특히 가족과 친척들은 어릴 때부터 류지호를 보아왔기 때문에 갑자기 뭔가 일을 도모하는 모습을 보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저 놈은 고등학교 때부터 싹수가 있었어.’


이런 밑밥을 미리 주변에 깔아 둘 필요가 있다.

한창 성장기이면서 어떤 계기로 각성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 같은 인식을 심어두는 것이 중요했다.


“영어회화는 따로 학원에 다닐 리는 없겠고... 어떻게 하고 있냐?”

“AFKN도 듣고, 방송부 형들이 듣던 영어테이프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듣는 정도.”

“그렇게 해서 미국인하고 대화가 가능해?”

“통역이 있어. 난 인사말이나 하는 수준이야.”


심영숙이 뿌듯한 얼굴로 류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철이 들어서는 숫제 어른이야 어른.”


심영숙이 꽤나 과장된 일화들을 자랑스레 떠벌렸지만, 류지호에 대한 외가 식구들의 시선이 달라진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 할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할 말?”

“건강검진이요.”


전에 외할아버지를 인천의 큰 병원으로 데려가 건강검진을 받도록 하자고 부모님을 설득했었다.


“엄마아빠, 어디 불편하신데 없어?”


심영숙이 두 노인을 향해 물었다.


“노인네가 병 안 달고 사는 거 봤냐? 그러려니 하는 거지.”


외할아버지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대로 흐지부지 될 것 같아 류지호가 나섰다.


“할머니, 할아버지. 건강검진 한번 받아보세요.”

“다 산 노인네들이 비싼 돈 들여서 무슨 건강검진이야. 이 할미는 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 호들갑 떨지 마.”

“연세가 있으시잖아요. 할아버지는 술도 많이 드시고.”

“아이고, 우리 지호가 다 커서 할아비 할미 건강도 챙기고, 참 대견하네.”

“오래 오래 사셔서 손주며느리도 보시고, 증손자 낳은 것도 보셔야죠.”

“에구, 그런 말 말어. 노망났다고 사람들한테 욕이나 들어먹지. 건강검진은 젊은 네들이나 받아.”


외할아버지 내외는 괜한 걱정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다.

류지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누가 그런 말을 해요. 그냥 오래 사시는 것보다 건강하게 사셔야죠. 외삼촌하고 손자들 불효자 만드실 거예요?”

“우리 지호가 장손보다 났다.”


어른들이 껄껄 웃었다.


“할아버지, 식사는 잘하세요? 음식 넘기시는데 힘들거나 하지는 않으시고요?”

“늙으면 다 그래. 나이 먹으면 다 그런 거야. 이 동네 노인네들은 다 그러려니 한다. 공연히 수선 떨 거 없어.”

“별 거 아닌 것으로 넘기다가 나중에 큰 병 되요. 할아버지 할머니 손주가 부탁드려요. 검진 한 번만 받아보세요. 제 부탁 들어주시면 두 분이 원하시는 건 뭐든 할게요.”


류지호가 간절함을 담아 설득했다.

그제야 두 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손주가 왜 이러누?”

“지호 애미야, 어디 점쟁이한테 뭐라도 안 좋은 소리라도 들은 게냐?”

“엄마, 그렇게 하셔. 손주가 원하는데.....”

“장인어른, 이번 기회에 식구 전부 건강검진 한 번 받아보시죠.”

“두 분이 건강하셔야 자식들도 걱정을 덜죠.”


류지호는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암은 발견이 1년씩 빨라지면 생존확률이 20~30%이상 올라간다.

류지호는 항암제 때문에 고생하시다가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또 다시 보는 것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사위들까지 나서서 권유하자, 하는 수 없이 병원 예약을 허락했다.


“지호 저 놈, 일찍 철이 들어서는 장손을 욕먹게 만드네.”

“호호호. 숫기 없던 말라깽이 꼬마가 이제 제법 사내 태가 나는 것 같지 않아?”

“옛날에는 지호 나이에 장가들었어.”


어른들이 류지호를 칭찬했다.


“지호 서울대 가면, 미팅은 내가 책임진다.”

“나는!”

“오빤 재수해서 서울대 가고 나서 말해.”

“뭐? 나더러 입시공부를 또 다시 하라고? 난 못해. 죽어도 안 해!”


외가 식구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식구가 워낙 많다보니 젊은층 일부는 마당 평상에 이불을 깔고 누울 수밖에 없었다.

류지호는 사촌형들과 마당 평상에 모기장을 치고 잠을 청했다.


‘이때는 참 이렇게 비박(bivouac)을 했었지....’


밤하늘 가득 별이 수놓은 듯 하얗게 반짝이고 있다.

여름밤의 쏟아지는 별들을 이불 삼아 류지호는 꿀잠에 빠져들었다.


❉ ❉ ❉


류지호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인천으로 나와 건강검진을 받았다.

외할아버지는 위암 1기 판정을 받았다.

한국인들의 죽음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암이다.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는다.

큰외삼촌 내외는 몹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위암 초기 단계입니다.”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얼마나 사실 수 있는 건가요?”


암 환자의 보호자로서는 의사로부터 암 판정을 받으면 무조건 죽을 것으로 안다.

당연히 얼마나 살 수 있는 가부터 물을 수밖에.


“위 점막에 5mm 정도 크기의 종양이 보입니다. 수술로 제거하면 생존율은 90% 이상이에요.”


초기에 발견하면 생존율이 꽤 높은 질병이 암이다.


“암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생명에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닙니다.”

“아, 그러면 돌아가시는 건 아닙니까?”

“수술을 하실 건지 약물치료를 하실 건지는 보호자 분들이 상의해서 결정해 주십시오. 제 소견으로는 수술이 좋을 겁니다. 약물치료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데다가 치료비 측면에서 훨씬 많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위암은 대장암과 더불어 국내 암 발생률 1위를 다툴 정도로 흔하다.

한국인이 워낙 많이 발병하기 때문인지 해가 갈수록 한국의료계의 위암 치료 기술이 발전한다.

10년이 흐르게 되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게 된다.


"정말 네 말 듣기를 잘했다. 장모님도 혈관이 막혀서 풍이 올 뻔했다는데....“


안도하는 아버지를 보며 류지호 역시 가슴을 쓸어내렸다.


“연세가 드시면 혈압이 높아지는데 미리 혈압 약을 챙겨 드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어요. 아버지도 정기적으로 혈압 체크해보세요.”

“장인어른이 암이라고 하니. 아빠도 겁이 좀 나는구나. 네 엄마하고 보약 한재 지어먹어야겠다.”

“보약도 지어 드시고, 정기적으로 종합검진도 받고요.”


저마다 암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야기 한 토막씩을 꺼내며 부자가 집으로 돌아왔다.

외할아버지는 서울의 대형 대학병원으로 옮겨 다시 정밀검진을 받았다.


“열어봐야 알겠지만 다행히 크기도 작고, 전이도 이루어지지 않아 수술할 경우 결과가 긍정적일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담당교수가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위를 다 들어내나요, 아니면 일부만 자르나요.”

“열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수술 목적은 암을 제거하는 것이다.

환자는 수술을 받더라도 위를 가급적 많이 보존하고 싶어 한다.

의료진도 마찬가지로 환자의 위를 최대한 적게 절제하는 게 원칙이다.


“그럼, 환자 컨디션 보고 수술 날짜 잡죠.”

“잘 좀 부탁드려요.”


외가 어른들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가며 담당교수에게 인사했다.


“당분간 마누라쟁이 잔소리 듣지 않겠네.”


외할아버지는 오히려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외할머니가 간병을 한다는 소리를 하자, 입을 다무셨다.


“호호호. 두 분만 오붓하게 계시면 좋지 뭘 튕기고 그래요?”


외가 식구들은 그런 노인들의 모습을 보며 겉으로나마 웃으며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유도했다.

수술을 받아야할 외할아버지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작은 노력이다.

곧 수술 날짜가 잡혔다.

다행히 암이 전이되지 않아 암 부위만 제거함으로 무사히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연세 때문에 마취에서 문제가 생길까 외가 식구들이 걱정했지만, 중환자실로 내려온 후 얼마 안 있어 깨어나서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외가식구들은 수술을 집도한 담당교수에게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위를 조금 잘라낸 바람에 앞으로 고생은 하겠지만, 술담배도 끊고 공기 좋고 물 좋은 강화도에서 유유자적 산다면 몇 년은 더 사실 수 있을 것이다.


‘오래오래 사세요. 제가 효도할 수 있게요.’


류지호의 후회 중에 하나가 사라졌다.

한 사람의 운명이 바뀌게 되는 일이다.

그로인해 외가식구들이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류지호로서도 전혀 나쁠 것이 없다.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류지호는 영화 일을 한다는 이유로 가족을 등한시 했었다.

아니다.

가족의 굴레가 너무 무거워 도망쳤던 것일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짊어져야 했던 장남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나중에는 홀어머니를 부양해야하는 책임감.

영화감독이라는 허물만 번듯하고 지지리도 이기적인 직업세계로 달아났던 걸지도 모른다.

류지호로서는 그 진실을 외면하거나 부인할 수 없었다.

병실과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외가 식구들.

그리고 부모님과 동생들.


[때론 부끄럽고 힘들지만, 우리는 가족입니다!]


영화 <그레이프를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의 홍보카피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길버트의 성장과 가족 모두의 성장을 다룬 따뜻한 가족영화다.

정상적이지 않고 괴상한 가족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집안의 가장인 장남의 삶은 고달프다.

벗어날 수 없는 그 무게를 견디기란 어렵다.

하지만 길버트는 그 모든 현실과 처지를 인정함으로써 좋은 사람이 된다.

류지호는 밝은 표정의 가족들을 바라보며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겼다.


작가의말

영화제목을 그대로 쓰는 부분은 고려해보겠습니다. 영화제목은 저작권이 없다고 하니 소설 노래제목처럼 그대로 쓰는 방향으로 하는 것이 나을 것도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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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4

  • 작성자
    Lv.83 다솜광수
    작성일
    21.12.30 18:16
    No. 1

    참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극기
    작성일
    21.12.30 22:25
    No. 2
  • 작성자
    Lv.99 yd*****
    작성일
    21.12.30 22:39
    No. 3

    가족 중요하죠 정말..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62 세레스틴
    작성일
    22.01.02 00:55
    No. 4

    20페이지. 외할아버지는 위암 1기 판정을 받다. → 받았다.
    건강검진의 중요성이랄까.. 주변에 실제 사례가 있다보니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더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4 트뤼포
    작성일
    22.01.02 11:53
    No. 5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2.01.06 20:08
    No. 6

    잘 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5 제로갓
    작성일
    22.01.16 00:24
    No. 7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7 sangom
    작성일
    22.01.16 20:13
    No. 8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7 형산운송
    작성일
    22.05.17 04:24
    No. 9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중요성은 말해 뭐하겠습니까. 다만 돈이 목적인 삶 보다는 돈의 안정성 위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게 더 중요하겠지요. 주인공과 가족, 주변인들의 시원하고 재미난 삶을 기대해 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3 wntlaos1..
    작성일
    23.02.22 10:12
    No. 10

    돈 많을수록 좋습니다
    대부분의 불행을 돈으로 해결가능하죠
    불행이 왔을때 돈이 없어 해결못한다면 참...
    주인공 자체도 돈이 없어서 전생에 죽었잖아요
    돈이 행복을 가져다 주진않겠지만 돈으로 행복할수
    있는 방법을 찾을수 있으니까요
    돈이 없다면 그 기회조차 갖기 힘든게 지금 현실이니..
    결론만 말하자면 현재사회에서 돈은 무조건 중요합니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 개소리라고
    말하고 싶네요

    찬성: 6 | 반대: 1

  • 작성자
    Lv.75 이티우
    작성일
    23.07.08 07:07
    No. 11

    도박 중독자한테 돈주는것도 아니고 말도안되는소리를.. 쉽게? 아들 죽었어도 쉽게 얻은돈이란소리가 나올까요?
    거기다 하고싶은일 실컷하다 돈없어서 얼어죽은 주인공이 저소리듣고 고민하는게 더 웃김
    당장 외할아버지 위암으로 수술들어가면 수술비랑 항암치려는 공짜임?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77 오딧세이
    작성일
    24.01.19 22:18
    No. 12

    꼰대질 그 이상 그이하도 아님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79 귀욤둥이
    작성일
    24.04.15 22:52
    No. 13

    그냥 돈없어서 못하고 후회나 하자 시부랄
    답답해서 짜증나네 주인공말고 아빠는 뭐이리 고지식해 그럼 나중에 성공하는것도 좋게
    아 시 그냥 봐야지 화만난다 더 씨부려서 나만 스트레스받는다 아오 시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17 Dsound
    작성일
    24.07.17 06:52
    No. 14

    그냥 길버트 그레이프라고 해도 될텐데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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