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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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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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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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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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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여름방학이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

보충수업이라는 명목으로 학교에 나와야 했으니까.

방송부 1학년들은 점심방송과 전반적인 방송부 업무를 인수인계 받기 시작했다.

다음 학기부터 1학년들이 점심방송을 책임진다.

때문에 방학기간 동안 열심히 준비하고 실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3학년 아나운서 파트장 하재근이 오랜만에 방송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배들의 아나운싱을 봐주기 위해서다.


“아나운서 파트부터 한명씩 스튜디오에 들어가.”


선뜻 나서는 이가 없다.


“철웅이부터 들어가.”


이철웅이 마지못해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상은이하고 지호는 돌아가면서 믹서 조정해.”


박상은이 먼저 믹서콘솔에 자리를 잡았다.


“철규만 남고, 나머지는 옆 교실로 가서 모니터링 해.”


평상시 방송부 안에서 존재감이 없던 하재근이다.

헌데 유도장에서 보이던 모습을 방송실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꿀꺽.


마이크 앞에 앉아 있는 이철웅이 마른침을 삼켰다.

틈틈이 점심방송을 연습했다.

아나운싱에 대해 기본교육도 받았다.

막상 자신의 목소리가 전교에 울려 퍼질 것을 상상하니,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끼이익.


류지호가 조용히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


“철웅아~ 마이크 끄고 호흡 크게 몇 번 해봐. 대본 읽기 전에 마이크 테스팅 잊지 말고.”

“알겠어. 고마워.”


류지호가 말을 걸어주니 벌렁거리던 가슴이 조금 안정이 되는 것 같다.

이철웅이 스튜디오 부스 밖을 향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준비됐다는 신호다.

그리고 1학년들의 점심방송 실전 점검이 시작됐다.


“누가 대본에 다나까 쓰라고 했어? 뉴스리포터야? 국어책 읽어?”


이철웅은 대본과 딱딱한 어조를 지적받았다.


“우물거리지마, 발음을 정확하게 하란 말이야. 목소리도 좋은 놈이 왜 그래?”


최원석은 부정확한 발음과 발성을 지적 받았다.


“누가 모범생 아니랄까봐 규범적인 리딩을 하냐? 지금 뉴스 읽어? 천천히 또박또박 주어진 대본을 읽는 건 앵커가 하는 아나운싱이야. 넌 감정도 없냐? 냉정하고 침착하게 대본을 읽었잖아.”


김석민은 뉴스 앵커처럼 대본을 읽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장황하게 멘트 치지 마. 그리고 톤은 또 왜 그렇게 높이 잡아. 복식호흡이 안 되도 좋으니까 최대한 소리를 배에서 끌어 올리려고 훈련을 해야 할 거 아냐! 호흡이 부족하니까 숨도 차오르고 안정적으로 내뿜어 주지를 못하니까 막힌 소리가 나오지.”


지적을 당한 1학년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 마지막이다. 지호.”


류지호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어~~머~~니~~, 하~~ 마~~”


류지호는 복식호흡을 하듯이 발성을 가다듬었다.

전문적인 발성을 훈련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차분하고 분위기 있는 목소리로 변해가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호흡을 하고 있는 류지호다.

그 덕분인지 평소 목소리에도 부드러운 울림이 전해졌다.

아나운서 발성과 스피치 발성 그리고 연기 발성에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 복식호흡이다.

그런 기본에 아나운서는 마이크를 사용하기 때문에 퍼지는 소리보다는 한 곳에 모이는 소리가 좋은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소위 ‘목욕탕 소리‘라고 하는 연극식 발성은 무대에서 넓은 객석의 구석까지 소리를 전달하기 위한 좋은 발성법이다.

PT용 스피치는 복식호흡에 기반을 두고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말하듯이 하는 발성이 좋다.

영화 발성은 연극식 발성에서 힘을 빼고, 말하듯 대사를 치는 것이 좋다.

또한 영화 발성은 감정의 전달이 매우 중요하다.

때문에 아나운서의 목소리처럼 명확하게 귀에 꽂히지 않더라도 때로는 배우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만 된다면 소리의 울림이나 전달력 측면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다.

반면에 라디오 방송에서의 효율적인 목소리는 낭비 없이 꽂히는 목소리다.

아나운서나 라디오 DJ의 목소리는 마이크를 타야 하기 때문에 퍼지는 것보다 모아지는 것이 소리 전달에 더욱 효율적이다.

류지호는 연기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웬만한 건 안다.

비록 삼류감독이었지만, 25년 넘게 영화밥을 먹었던 몸이다.

기본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하나 둘!”


류지호가 부스 밖을 향해 준비되었다는 사인을 보냈다.


[오늘처럼 화창, 그 자체인 날이 있으면 비 오고 흐린 날, 또 더 심할 땐 천둥 번개 치는 날도 있잖아요. 하물며 날씨도 이렇게 변화가 있는데 우리 삶은 더 그렇겠죠. 안녕하세요. 신포고등학교 교육방송국 SPBS 점심방송 월요클래식 류지호입니다.]


대본은 2학년 선배가 1학기 점심 방송에서 읽었던 것을 사용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을 한번 살펴보세요. 언제나 행복한 분도 또 언제나 불행한 분도 있을 거예요. 힘든 때가 있으며 기쁠 때가 있을 테구요. 기쁨이 있다면 고난과 역경도 있겠죠. 힘들고 괴로울 때 도와달라고 말하는 거 참 어렵잖아요? 근데 말하지 않아도 다가와주는 사람, 진짜 고맙잖아요. 여러분에게 그런 사람은 누구일까요? 8월 11일 첫 곡 드보르작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입니다.]


류지호의 멘트가 끝나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지호는 합격!”


2학년 선배들도 엄지를 추켜세웠다.


“오버 할 거 없어. 지호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톤의 목소리를 가진 것이 장점이긴 하지만, 나머지 놈들이 워낙 기본기가 개판이라 상대적으로 잘해 보이는 거야.”


하재근이 냉정하게 현실을 진단했다.


“아무리 우리 방송부 아나운서가 전통적으로 별로라고 해도 기본은 되어야 하지 않겠냐? 어디 가서 쪽 팔지 않으려면 분발해.”


1학년들이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푹 숙였다.


“난 독서실 가야 하니까, 이만 간다. 나머지는 2학년들 몫이다.”

“수고하셨습니다!”


한수호가 풀 죽은 표정을 짓고 있는 1학년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기죽을 거 없어. 2학기 동안 점심방송 하다보면 다 늘게 되어있다.”

“우리도 너희들처럼 처음에는 형들한테 엄청 깨졌어.”

“우리는 기술파트가 좀 센 거로 위안 삼아야지 별 수 있나. 안 그래?”


2학년들이 저마다 후배들을 위로했다.


“자, 그럼 각자 요일하고 방송을 나눠보자. 월요일 클래식, 화요일 가요, 수요일 신청곡, 목요일 팝, 금요일 건전가요 이중에 한명씩 골라.”


류지호가 재빨리 손을 들고 나섰다.


“저는 월요일 클래식 맡겠습니다.”


월요일 클래식이 제일 신경 쓸 것도 없고, 편했다.

클래식 대곡들로 몇 개의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오프닝과 클로징 멘트만 매일 애드리브로 대충 때우기만 하면 한 학기는 거저먹을 수 있다.

매일매일 방송 대본을 쓴다고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필요도 없고, 선곡 때문에 교사들과 트러블을 일으킬 일도 없다.

김석민이 류지호를 은근히 째려보며 나섰다.


“저도 클래식을 원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류지호가 먼저 치고 나갔다.


“저는 엔지니어 파트입니다. 아나운서인 석민이 보다 업무가 많습니다. 같은 엔지니어인 상은이만 동의해 준다면 제가 월요일 클래식을 담당을 하고 싶습니다.”


한수호가 박상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는 아무 요일이나 상관없습니다.”


빡빡한 방송부 생활에서 점심방송까지 골머리를 싸매고 싶지 않은 것이 류지호의 솔직한 심정이다.

엔지니어로서 해야 할 업무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다만 공부를 등한시 하면서 방송부 활동에만 전념할 생각이 없었다.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이던 1학년들의 점심방송이 정해졌다.

이철웅이 화요일 가요, 박상은이 수요일 신청곡, 최원석이 목요일 팝송, 김석민이 금요일 건전가요를 맡았다.

가장 신경을 많이 써야하는 신청곡은 책임감이 강한 박상은이 자원했다.

방송실을 떠나기 전 한수호가 한 마디 했다.


“여름방학 끝나고 축제 있는 건 다들 알거야. 우리는 당연히 방송제를 준비해야겠지?”

“옛!”

“올해 우리가 하는 것 보고 잘 배워둬. 내년엔 너희가 주인공이니까.”


2학년들이 방송실을 빠져나가자, 1학년들만 남았다.


“석민아, 이리로 와봐.”


류지호가 김석민을 방송실에서 가장 큰 캐비닛으로 데리고 갔다.

캐비닛을 활짝 열어젖히자, 수많은 LP판과 카세트테이프, VHS 테이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류지호가 가요라고 적혀있는 칸의 LP를 손가락으로 훑다가 판 하나를 꺼냈다.


“여기 한국 가수 앨범에는 건전가요가 한 곡씩 들어있어. 근데 자세히 보면 그 노래가 다 그 노래야.”


류지호가 LP의 뒷면을 김석민에게 보여줬다.


“산마을, 어허야 둥기둥기, 오빠 생각, 서로 믿는 우리 마음. 또 뭐가 있냐하면 너와 나, 진짜 사나이가 있네? 이건 군가야.”


음악에 대해 관심도 없고, 음반을 사본 적도 없는 사람은 건전가요가 어디에 어떻게 들어있는지 왜 들어있는지 모르고 넘어간다.

건전가요라고 해서 온 국민이 다 아는 ‘아 대한민국’이나 ‘아름다운 강산’ 같은 전설적인 창작곡만을 떠올리는데, 실제로 군가를 넣기도 했었고, 동요나 가곡도 넣었다.


“석민이 너도 클래식처럼 하면 돼. 너는 카세트테이프에 건전가요만 따로 녹음해 놔. 딱 점심방송에 음악 내보는 곡수만큼. 그런 테이프를 2개 만들어 놓으면 4달 동안 그 두 개를 앞면과 뒷면 순서만 바꿔서 틀면 아무도 못 알아차릴 거야.”


김석민은 류지호의 말이 일면 그럴 듯하게 들렸다.

한 사람이 일주일에 하루, 한 달에 네 번, 한 학기에 열여섯 번의 점심방송을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열여섯 번의 방송대본과 선곡 리스트가 있어야 할 것 같지만, 클래식이나 건전가요나 실제로 트는 노래나 음악이 거기서 거기다.

클래식은 베토벤만 주구장창 틀어도 음악 선생이 아닌 이상 구별해내기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건전가요 또한 같은 요령을 피울 수 있다.


“그럼 멘트는?‘

“노래 가사 있잖아. 그게 멘트야. 가사 그대로 읽으면 그게 멘트지 뭐겠어. 공익성, 애국, 정권 찬양 그러라고 건전가요 만든 건데. 너도 오프닝하고 클로징만 그때그때 애드립 쳐.”

“아하~ 그것도 몇 개만 미리 만들어서 돌려쓰면 되는구나.”

“너하고 나는 그냥 구색 맞추기야. 진짜 방송은 재들이 하는 거지.”


류지호가 김석민의 뒤로 늘어서 있는 동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칫 형평성을 들어 반발할까봐 다른 친구들을 교묘하게 띄워주는 류지호였다.


“그리고 마이크 타는 목소리도 철웅이하고 원석이가 더 맑고, 귀에 잘 들려. 가끔 철웅이하고 원석이 방송대본 쓸 때 조금만 도와줘. 네 일 아니라고 모른척하지 말고.”

“그럼. 그 정도야 뭐가 어렵다고.”

“상은아 괜찮지?”

“으......응?”

“석민이 성적 떨어지면 방송부는 다 그날로......”


류지호가 장난스럽게 목에 손가락을 대고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나는 석민이한테 쉽고 편한 걸 양보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는 각자 잘할 수 있는 걸 선택한 거야. 다들 동의하지?”


박상은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이제 나한테 삐진 건 모두 해결된 거다?”


류지호가 웃으며 김석민에게 물었다.


“내가 언제 삐졌어? 나 그렇게 속 좁은 놈 아니야.‘


김석민이 대범한 척 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각자 가방을 챙겨 방송실을 나서려는데, 최원석이 입을 열었다.


“요번 일요일에 시간 다 비워놔.”


모두의 시선이 최원석에게 향했다.


“진명여고 방송부 애들하고 미팅 잡았어.”

“오오올!”


이철웅이 가장 먼저 환호성을 터트렸다.

김석민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난 안 돼. 토요일에는 독서실 가야돼.”

“그날 하루는 제껴도 되잖아!”

“안 가. 미팅 안 해. 시간 없어.”


김석민이 성질을 부리며 안 나가겠다고 버텼다.


“석민아~ 방송부끼리 미팅인데 네가 빠지면 어떻게 하냐.”


이철웅이 애원하듯 말해보지만, 김석민은 요지부동이다.


“내가 특별히 석민이 일주일 간 매점 쏜다.”


박상은이 슬그머니 한 다리를 걸쳤다.


“방송부장으로 석민이는 한 달간 방송실 청소 열외.”


매점은 김석민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반면에 방송실 청소 예외는 솔깃했다.


“아씨, 이 의리 없는 놈들... 나만 나쁜 놈 만들어.”


김석민이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이철웅과 박상은이 눈빛을 교환하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이것 참....”


류지호는 이 시기에 방송부 친구들과 미팅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보충수업이 끝나면 방송실도 들리지 않고 사인방과 어울려 신포동이나 주안으로 놀러 다니기 바빴었다.

방송제를 준비하는 시간에만 얼굴을 비췄기 때문에 방송부 친구들이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알지 못했다.


“신소연도 나와?”

“당연히 나오지. 걔도 방송부인데.”


진명여고 방송반 신소연.

류지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여학생의 이름.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였다고 잘라 말하기는 민망했다.

다만 매주 중앙도서관에서 만나 자리도 잡아주고, 점심도 함께 먹으면서 늦은 시간까지 옆에 붙어 공부를 했다.

당사자들이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상관없이 친구들은 둘 사귀는 사이라고 여겼었다.

달라지기 전의 류지호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 탓인지 어딘지 애매한 관계로 지내다가 학력고사가 가까워지면서 신소연과 흐지부지 소원해졌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미팅이라......’


청소년에게는 마법의 단어다.

단어만으로 설레게 하는 묘한 마력이 숨어있는 것 같다.


‘주책이야 주책.’


자신은 매일매일 과거와 만나고 또 그 과거를 바꾸어가고 있다.

얼마 후, 또 하나의 과거와 만날 예정이다.

아마 설렘은 그 탓이리라.


❉ ❉ ❉


진명여고 방송부와 미팅 날이 찾아왔다.

류지호는 체크무늬 반팔 난방과 가장 상태가 좋은 청바지를 골라 입었다.

여전히 마른 체형이지만, 해골 뼈다귀 같았던 가는 팔다리에 살이 조금 붙었다.

적당한 영양 섭취와 운동으로 인해 평균적인 고등학생 체구를 보이기 시작했다.

남름 차려입고 도착한 곳은 동인천 블란서 제과점.

별제과, 크라운베이커리, 블란서제과점은 DJ박스까지 갖춘 고등학생 미팅의 성지다.


“왔구나! 어서 와~”

“왜 이리 늦게 와?”

“네가 꼴찌야.”


친구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류지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고는 안쪽에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일주일 간 매점 쏘는 것 잊으면 안 돼.”


뚱한 표정의 김석민이 이철웅에게 말했다.


“그래 알았어. 흐흐흐”


이철웅은 연신 웃음을 흘렸다.


딸랑!


김윤주가 진명여고 방송부원들을 데리고 제과점 안으로 들어왔다.

김윤주는 진명여고 방송부 차장이다.

여담으로 대부분의 중고교 방송부는 2학년은 부장 1학년은 차장이라 불렀다.

신포고 방송부는 스스로 방송국이라 칭하며 국장이란 직책을 고수하고 있다.

전통으로 포장한 일종의 허세다.


“......”


류지호는 테이블로 다가오는 진명여고 방송부 여학생들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이상하네. 다들 이쁘고 몸매 착한데 왜 어린 애들로 보이지?“

“그럼 애지 어른이겠냐?”


류지호가 소곤거리는 이철웅을 돌아봤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힌 이철웅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렇게 좋냐?”


헤벌쭉.

이철웅이 대답 대신 웃었다.

진명여고 여학생들이 신포고 방송부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 소연이.....?’


화장기 없고, 티 없이 맑은 맨얼굴.

단발머리, 총기가 느껴지는 눈동자.

기억 속 신소연의 얼굴 그대로다.


“.....!”


신소연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신포고 방송부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자신을 보며 웃기까지 한다.

신소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혹시 우리 아는 사이에요?”


류지호는 추억 속의 인연을 불쑥 만날 때면 실수를 하곤 한다. 현재는 인연이 있을 턱이 없다.

마치 나는 너를 알고 있다는 듯 빤히 쳐다봤으니, 의아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국민학교 동창하고 똑같이 생겨서....”


되도 않은 거짓말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믿을 리가 없다.

다행이랄까.

주최자인 최원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시선을 모았다.


“제 소개부터 먼저 할게요.”


자신과 신소연이 어떻게 친해졌는지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았다.

분명 외모나 성격 때문은 아니다.

아마도 2학년 때 방송제에서 활약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 우리 SPBS부터 소개를 할게요.”


신포고 방송부들이 먼저 자기소개를 하고, 이어 진명여고 방송부가 한명씩 자기 이름과 방송 파트를 소개했다.


“취미가 뭐에요?”

“공부요.”

“그럼 특기도 공부에요?”

“어떻게 아셨어요?”


김석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원래 개그여야 하는 상황.

김석민이 하니까 다큐가 되는 것 같다.


“석민이가 우리 학교 1학년 톱이에요.”


진명여고 방송부들의 시선이 김석민에게 모아졌다.

김석민은 당연하다는 듯 표정하나 바꾸지 않았다.


“저는 운동이요.”


이철웅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이철웅의 시선은 신소연의 옆에 도도하게 앉아있는 여자애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예뻐도 너무 예뻤다.

이철웅은 그녀에게 완전히 홀린 상태다.

정신 줄을 놓아버리려는 자신과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다.


“영화 보는 걸 좋아합니다.”


류지호의 낮지만 또렷한 음성이 이철웅의 귀로 파고들었다.

그제야 이철웅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확실히 여고는 남고하고 다른 데가 많구나.”


서로 방송부라는 공통분야가 있다.

그래서인지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류지호는 대화에서 빠져 묵묵히 빵과 음료수만 먹었다.

귀는 활짝 열어놓고.


“거기 그쪽. 까만 애 말고.”


신소연의 옆에 앉아있던 예쁘장한 여학생이 말을 걸었다.

이름은 공다연.

도도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여학생.

류지호가 기억하기로 싸가지 없는 캐릭터다.

공다연은 고2때 여의도에 위치한 대형 연기학원에 다녔고, 나중에는 연예인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현재도 웬만한 또래 연예인은 공다연에게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독보적인 외모였다.


“어떤 영화 좋아해?”


대뜸 반말이다.

반말에는 반말로.


“공포영화 빼고 다 좋아하는 편이야.”

“겁이 많구나?”

“공포영화는 시즌을 타는 장르라서. 특정 계절에 먹히는 장르는 범용성보다 너무 매니악 하잖아. 클리셰 우려먹는 것도 흥미를 떨어뜨리고.”


류지호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학생은 영화 좋아해?”

“학생? 호호호, 아 웃겨.”


그녀의 큰 웃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공다연은 언제 웃었냐는 듯 도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난 헤이우드 앨런 영화를 좋아해.”


공다연 입장에서는 잘난 척하기 좋은 감독이다.

그런데 상대가 좋지 못했다.


“Don't knock masturbation. It's sex with someone you love.(자위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입니다).“


다시 한 번 시선이 류지호와 공다연에게 쏟아졌다.


“<애니>에서 헤이우드가 한 대사야.”


류지호의 대답에 공다연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아! <애니>! 너는 그 감독 영화 뭐, 뭐 봤는데?”

“유명한 작품은 거의 다 봤을걸. 아마도.....”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본 것이기에 류지호는 말끝을 흐렸다.


“어땠어?”

“뭐, 재미있게 본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류지호가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공다연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쁜 모양이다.

그걸로 만족한다는 눈치다.


작가의말

참고로 헤이우드는 우디 앨런, <애니>는 영화 ‘애니홀’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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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

  • 작성자
    Lv.99 요리선생
    작성일
    21.12.27 18:40
    No. 1

    미투 건으로 아마존하고 거액을 청구하며 한판 한다는 뉴스가 마지막 소식인 것 같던데?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네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2.01.06 19:15
    No. 2

    잘 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1 pm****
    작성일
    22.01.14 08:21
    No. 3

    즐독 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허전함
    작성일
    22.01.14 22:28
    No. 4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8 cooooool
    작성일
    22.03.03 00:09
    No. 5

    80년대 한국 고딩이 우디앨런 알기가 쉽지않긴하죠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87 형산운송
    작성일
    22.05.17 03:06
    No. 6

    잘 읽고갑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8 nott
    작성일
    24.07.02 03:00
    No. 7

    회귀를 주제로 이전삶에서는 스스로가 낙오자라고 인식하고 회귀 후에는 아무리 극초반부이기에 이후 원활한 전개를 위해 조금은 느린 전개를 유지하는것까지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막상 읽다보면 고구마를 억지로 꾸역꾸역 먹고난 것처럼 답답함만 남네요. 모처럼 괸찮은 작품이겠지 생각했는데 작품 처음 시작할 때부터 함께 한게 아니라면 저처럼 800회가 넘게 연재된 시점에서 시작하는 사람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 경우에는 그냥 진입장벽이 높게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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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충성을 다 하겠슴다! (2) +8 22.01.24 9,513 195 21쪽
63 충성을 다 하겠슴다! (1) +10 22.01.22 9,856 214 20쪽
62 Whiplash...! (2) +7 22.01.21 9,469 202 21쪽
61 Whiplash...! (1) +9 22.01.21 9,697 208 27쪽
60 말할 수 없는 비밀. +12 22.01.20 9,691 217 21쪽
59 이런 날도 오는구나... (3) +3 22.01.20 9,614 206 21쪽
58 이런 날도 오는구나... (2) +4 22.01.19 9,721 201 26쪽
57 이런 날도 오는구나... (1) +4 22.01.19 10,026 203 21쪽
56 Begin again. (4) +5 22.01.18 9,702 214 20쪽
55 Begin again. (3) +7 22.01.18 9,582 216 24쪽
54 Begin again. (2) +8 22.01.17 9,742 211 21쪽
53 Begin again. (1) +11 22.01.17 10,285 200 24쪽
52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6) +14 22.01.16 9,808 211 19쪽
51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5) +8 22.01.15 9,516 194 19쪽
50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4) +15 22.01.15 9,544 186 20쪽
49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3) +16 22.01.14 9,605 192 22쪽
48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2) +12 22.01.14 9,569 196 21쪽
47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1) +6 22.01.13 9,839 194 21쪽
46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3) +7 22.01.13 9,970 204 22쪽
45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2) +20 22.01.12 10,179 204 24쪽
44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1) +14 22.01.12 10,828 211 24쪽
43 Carpe diem... (4) +12 22.01.11 10,448 215 19쪽
42 Carpe diem... (3) +14 22.01.11 10,390 228 18쪽
41 Carpe diem... (2) +12 22.01.10 10,534 236 20쪽
40 Carpe diem... (1) +12 22.01.10 10,908 224 20쪽
39 얘는 혼자 어디 딴 세상이라도 살다 왔나? +8 22.01.09 10,975 239 20쪽
38 연풍(戀風). +12 22.01.08 11,004 231 17쪽
37 영화밥 먹고 살 팔자... (6) +7 22.01.08 10,805 224 22쪽
36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530 234 22쪽
35 영화밥 먹고 살 팔자... (4) +7 22.01.07 10,594 213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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