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독대(自我獨對): 자아와 마주하다
임금이 승하하고 사흘이 지났다.
이단은 엊그제 이후 처소에 틀어박혀 명상에 빠져 있었다. 흑결주 마달은 조바심이 나는지 방 앞을 서성거렸으나, 도방에게 가로막혀 접근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결주, 저도 연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도 들이지 말라 강조하셨습니다.”
“설마, 나도 그 ‘아무도’에 포함되는 것이야?”
“네. 첫 번째로 결주를 얘기하셨습니다.”
“허어, 참!”
마달은 나날이 달라지는 이단의 능력에 경외감을 넘어 두려움마저 갖게 됐다. 워낙 내향적인 면모가 강해 수하들에게도 본심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지만, 최근의 급격한 변화에 대해 일언반구 얘기가 없으니······
‘점점 이 세계와 멀어지시는 느낌은 내 기우(杞憂)인가?’
두 사람이 밖에서 걱정하는 사이, 이단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며칠 곡기(穀氣)를 끊어 수척해 보였지만 눈빛은 더 형형(炯炯)했다.
이단의 앞에는 흑룡이 다된 분신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틀간 두 자아(自我)간에 끝없는 대화가 되풀이됐다.
-너의 진정한 정체는 뭐지?
=네가 만든 분신이잖아. 탁기(濁氣)에 역심(逆心)을 버무려서 꾸역꾸역 빚은 또 하나의 너!!
-과연 내가 만든 것이 맞나? 흑선(黑仙)이 심은 게 아니고?
=흐흐. 흑선을 본 적이라도 있나? 이야기 속의 존재일 뿐이야.
-그 허상을 좇아 우리 가문이 수백 년을 이리 살아왔다는 거냐.
=너는 지금도 허상을 좇고 있잖아. 흑룡이라는 허상 말이야.
-그건···
흑룡의 모습이 화령(花靈)으로 변했다.
=이봐, 이제 와서 흔들릴 거야?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고작이라니. 한때는 내 마음을 모두 준 여인이었어.
=마음이 이리 여리니, 아직도 미적거리고 있는 거잖아. 궐의 결계를 깬 날 모든 걸 뒤엎어 버릴 수 있지 않았나?
-모두에게 당당히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자객처럼 숨어서 일을 꾸미는 건 내키지 않았으니까.
=개소리 같은 허세야. 상처 입은 자존감을 보상받으려는, 애들 투정 같은 거지.
-무슨 소리! 고작 내 마음 보상받으려고 모두가 이 고생을 하고 있다고?
=쯧쯧! 흑룡이 된 줄 우쭐해서 설치다가 수연이랑 눈이 맞으니 꼬랑지 말아버린 주제에··· 수하들에게 부끄럽지도 않나?
-수하들은···
분신이 다시 모습을 바꿨다. 이번엔 이단 본인의 모습이다.
=답 없는 고민만 하고 있을래? 계속 이러면 너나 수하들이나 더 힘들어진다구. 자, 이제 편히 눈을 붙이고 몸을 추슬러야지.
-아무 고민 없이 편히 쉬던 시절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해.
=그래, 아버님도 그런 너를 항상 걱정하셨어. 이제 그만 쉬어도 돼.
-나약하게 순응하며 숨만 쉬면서 살아도 되는 걸까?
=마음만 편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아.
-차라리 그럴 수만 있다면···
갑자기 눈앞에 목멱대왕이 나타났다. 목멱신사에서 감응하며 봤던 그 모습이었다.
=역심을 품은 게 언제부터였지?
-아마도, 수연이가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후부터?
=그럼 언제부터 이무기의 모습이 확실히 나타났지?
-그건··· 아버님이 떠난 이후지.
=역시, 잘 설계되었군.
-설계라니?
=암종의 교육을 철저히 받은 너를 흔든 두 번의 큰 계기 말이다.
-그럼 그 일들을 모두··· 누군가 계획한 거라고?
=추측이지만 흑선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흑선이 왜?
=조선을 버린 거겠지. 과거에 고려를 버렸듯.
-그게 사실이라면··· 대체 무엇을, 누구를 위한 대계(大計)인거지?
이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분신에게 명령했다.
-이제, 들어가!
목멱대왕의 형상을 하고 있던 분신이 이단의 정수리로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이단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마달과 도방이 병상에서 일어난 자식을 본 듯 반겼다.
“주군! 드디어 긴 명상에서 깨어나신 겁니까?”
“네. 답이 없는 곳에서 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급히 처리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네, 주군 말씀하세요. 무엇입니까?”
“밥 좀 주십시오. 뱃속이 허하군요.”
이단이 빙긋 웃었다. 마달과 도방은 어리둥절해 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젊은 주군에게 이런 농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답이 나올 때까지 이들과 끝까지 가보도록 하자.’
충직한 두 수하를 보면서 이단이 먹은 생각이었다.
*****
사흘간 입에서 곡기를 뗀 사람은 궐 안에도 있었다. 통상 국장례(國葬禮)에 따라 왕세자 이하 왕자들은 사흘간 금식을 해야 했으니, 세제 연잉군의 얼굴은 사뭇 초췌해져 있었다.
이제 금식을 풀고 미음을 조금 뜨고 나서 상을 물린 연잉군의 옆에 변내관과 박광이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붙어 있다.
“저하, 기운이 좀 도시옵니까?”
“한결 낫군. 특별한 징후는 없었는가?”
즉위식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으니, 역모의 도당이 움직일 만도 한데 미동조차 없으니 박광은 오히려 신경이 쓰였다.
“네, 저하. 그래도 즉위식이 끝날 때까진 안심할 수 없으니 예의 주시하겠습니다.”
연잉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이 자네만 있어도 난 든든하네. 근데, 그 이무기를 부리는 자와 직접 상대한 적이 있었다면서?”
연잉군은 이단이라는 자의 진정한 실체가 궁금했다. 박광에게 들은 바로는 확실히 왕실의 핏줄은 흐르는 것 같았지만, 이무기라는 괴물을 몸 안에 가두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저하, 아뢰옵기 부끄럽사오나 제 짧은 인생에 첫 번째 패배를 안겨준 자이옵니다.”
박광은 쌍선봉에서 이단과 맞부딪혔던 상황을 소상히 설명했다. 연잉군은 흥미롭게 때로는 놀란 표정으로 끝까지 들어주었다. 특히 이무기가 사람의 말을 내뱉은 것이며, 지독한 탁기(濁氣)에 당해 사경을 헤맸다는 부분에선 눈빛을 반짝 빛냈다.
탁기에 관한 얘기를 듣자 연잉군과 변내관의 머릿속엔 이단이 건네준 탁기환이 떠올랐다. 연잉군으로선 두고두고 후회했던 선택이었고, 그로인해 변내관에 대한 신뢰에도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자를 연결해 준 게 변일이었으니까.
형님의 죽음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고, 천출이라는 것과 더불어 또 하나의 역린(逆鱗)을 갖게 됐다. 물론 그 모든 걸 유일하게 알고 있는 변내관은 그 역린을 건드릴 자가 아니었으나···
연잉군과 눈이 마주친 변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잠깐이지만, 원망과 살기가 담긴 눈빛에 겁을 먹은 것이다. 연잉군이 표정을 펴며 박광에게 물었다.
“호되게 당했다면서, 다시 마주친다면 막을 수 있겠느냐?”
박광은 이를 꽉 물었다. 지는 건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그것도 같은 상대에게 두 번씩이나 진다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따지고 본다면, 지난번은 제대로 된 승부도 아니었다. 미리내를 보호해야 했기에 어이없이 당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몸 안에는, 백호의 기운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박광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지난번처럼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옵니다. 저하.”
연잉군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궐에 들여온 동료들이 자네 생명을 구한 은인이었다고? 제대로 인사도 못했구먼. 볼 수 있겠는가?”
공대와 조생원이 갑작스런 호출에 동궁의 침전으로 들었다.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 하며 절을 마치자 연잉군이 치사를 했다.
“그래, 광이에게 그대들 얘기는 충분히 들었다네. 내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 이리 불렀으니 편히들 앉게나.”
검소한 다과상이 차려지고 환단계원의 노고를 치하하는 가운데, 연잉군은 공대의 영기(靈氣) 추적술과 조생원의 오행 봉인술에 큰 호기심을 보이며 감탄을 연발했다.
“아, 조생원이라고 했는가? 자네가 오행 주역에 통달했다는 얘길 들었네만, 어디 한번 내 운세 좀 봐주겠는가?”
“네? 저, 저하의 운세를요?”
조생원은 순간 잔뜩 긴장했다. 임금이 될 분의 운명을 본다는 건 자칫 위험한 일일 수 있었으니까.
“겁낼 필요 없네. 허심탄회하게 들어보고 싶다네.”
연잉군의 말에 조금 안심이 됐는지, 황공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생년월시를 묻고 산통을 꺼내들었다. 잠시 눈을 감고 주문을 외던 조생원이 산가지 몇 개를 뽑아들고 들여다보았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누군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적막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저하, 저하께오선 힘 있는 왕이 되시겠사옵니다. 탕탕평평(蕩蕩平平)하게 치우침 없이 균형을 잡으시어 선정을 펴실 것이옵니다. 그리고···”
“그리고?”
“아, 아주 오랫동안 용상에 머무르실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저하.”
“어허,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해주는구먼. 어찌됐든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지는군.”
조생원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있어서였다.
‘오래는 사시겠으나, 아들과 손자의 명까지 빼앗으시겠군요. 쯧쯧···’
*****
“그자가 동궁전에 복귀했단 말인가요?”
“네, 방금 전 궐 까마귀의 보고였습니다.”
이단은 실소를 흘렸다. 역시 박광 그자와는 또 마주칠 운명이었다. 이틀간의 명상을 깨고 마달에게 그간의 상황을 보고받는 자리였다.
‘그 친구, 생명력 하나는 대단하구나.’
내심 반갑기도 했다. 그동안 박광의 소식이 잡히지 않아 묘한 상실감도 느끼던 차였다. 반면, 고민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번엔 어찌 해야 하나. 진짜 목숨을 거두어줘야 할까?’
박광의 순박한 웃음이 떠오르고 뒤이어 미리내의 천진난만한 눈빛이 아른거렸다. 박광이 도성에 와있다면, 미리내라는 처자도 어쩌면 근처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환단계··· 다른 자들은 보이지 않던가요?”
“아, 환단계원으로 추측되는 두 사람이 더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여인인가요?”
이단은 순간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아차 싶었다.
“······? 아닙니다. 둘 다 사내들인데 술사 계열로 보였답니다.”
“······ 그렇군요. 세 사람으로 어찌 막아볼 심산은 아니겠죠?”
“허허! 뭘 어쩌겠습니까? 우리의 계획을 알지 못하는 한 대비는 불가능합니다.”
“네. 태백산 쪽 동향은 살피고 있나요?”
“오늘 아침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기에 감시 인력을 모두 명류장으로 복귀시켰습니다. 이제 우리도 집중을 해야 하니까요. 주군께서는 여전히 신경 쓰이십니까?”
명류장으로 옮겨온 이후 모든 게 순조로운 게 오히려 신경 쓰이긴 했다.
“아니오. 결주의 계획 안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마음이 편안하외다.”
이단은 닥쳐올 그날에 마저 고민하리라 마음먹었다.
그 시각, 마루한과 환단계원 몇 명은 김일경의 집에서 나와 궐로 향하던 집사 양씨를 잡아 그의 품에서 기름먹인 쪽지를 찾아냈다.
김일경의 집을 며칠간 감시하면서, 일개 집사가 궐 출입이 잦은 게 수상해 확인해 본 것인데 나름 소득이 있었다.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마루한은 다시 그의 품안에 집어넣고 궐로 향했다. 우림위장 이중원을 만나 기별을 전하면, 제자 박광에게 전해질 것이다.
담벼락에 기대 앉아 침을 흘리고 있는 양씨는, 환단계 넋재비가 걸어놓은 생혼탈(生魂奪)에서 깨어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Comment ' 0